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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이은준 대리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으십니까?”
“아니.”
사실과 다르게 부정한 재준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층수를 알려 주는 화면을 바라보며 재준은 미간에 금을 그었다.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눈길 한 번 피하지 않고 대답하던 그녀의 눈망울이 너무 맑아 화가 났었다. 누르고 싶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싶었다. 절대 자신에게 비굴해지지 않는 태도 때문에 더 눌러 버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건 왜 물어봐?”
재준은 떠오르는 잡념을 지우며 싸늘한 얼굴로 양 비서에게 물었다.
“아, 그것이…… 그 직원 전화번호만 따로 물으셔서…….”
“…….”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는 그녀를 본 순간 자신이 착각했을 것이라 여겼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랬다. 눈이 마주쳤을 땐 그녀가 원래 별다른 표정이 없던 아이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가까이서 본, 그때처럼 사원증을 보고 알게 된 그녀의 이름 이은준. 묻어 버렸던 이름이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오후 스케줄은 어떻게 되지?”
“점심은 본가에서 드시고 저녁은 스톤블링 주얼리 입점을 계약한 백화점 사장과 식사 자리가 있습니다.”
“본가라…….”
재준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앞으로 9시간이나 더 흘러야 10시였다. 눈에 띄지도 않던 여자아이 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하던 그 순간부터 자신은 짜증과 화가 났었다. 타인을 제대로 보지 않던 은준의 시선이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 ■ □
“이은준?”
은준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멍한 시선을 돌렸다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승우의 표정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승우야.”
“왜 이렇게 멍해?”
“멍하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승우의 시선을 슬쩍 피한 은준은 자신의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회의실에서 재준과의 조우만으로도 충분히 먹먹한 심정이었다. 외면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는 그때와 같이 묵직함을 안겨 주었다.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가장 비참했던 순간을 함께한 사람, 서재준. 그날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겼었다.
“왜. 백화점 입점이 어려워?”
새롭게 론칭하는 브랜드의 입점을 백화점부터 시작해 일반 점포로 확대할 생각으로 추진한 프로젝트였다. 선강기업이라는 이름 하나로 백화점은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고 얼마 전 입점 계약서를 주고받았다.
“아니. 입점 계약은 이미 체결했어.”
“그런데?”
눈썹을 일그러트리는 승우의 개구진 표정에 은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넌 일은 안 하고 여기는 왜 왔어?”
“내가 왜 왔겠냐?”
“왜 왔는데?”
은준은 챙기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팔짱을 꼈다. 마케팅부에서 근무하는 승우는 회사 연수원에서 알게 된 사이로 스물여덟 살인 자신과 동갑이었다. 그래서 잘 통하고 더 빨리 친해진 듯했다.
“너 보고 싶어서.”
“눈물 난다.”
은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입술 끝을 밀어 올리며 승우를 쳐다봤다.
“어? 승우 왔어? 오늘도 넌 지극정성이다?”
마케팅부면서 지원사업부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승우를 잡은 건 희경이었다. 둘이 전생에 무슨 앙숙이라도 되는 양 만났다 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저녁에 밥 같이 먹을래? 내가 좋은 곳 알아 놨거든.”
희경을 싹 무시한 승우가 은준의 책상 파티션에 기대며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희경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 승우! 이 누님을 위해 맛집을 검색해 둔 거야?”
“야, 야. 넌 좀 빠져!”
희경이 팔을 잡고 늘어지자 승우가 떨어지라며 핀잔을 주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녁에 보자. 7시.”
“……응.”
“오케이!”
은준을 향해 환하게 웃던 승우가 희경에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넌 좀 빠져!’ 하고 또 버럭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 끼어도 불만 없지?”
승우가 지원사업부를 나가자 희경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둘만 있으면 스캔들 나.”
남녀가 붙어 있으면 따라오는 말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승우를 좋아하는 여직원들이 많아 알게 모르게 은준이 구설수에 오르고는 했다. 희경은 그것을 염려해 지적하고 나오는 것이다.
“알아. 그래서 네가 같이 가 주는 것도 알고.”
“역시, 가르친 보람이 있군.”
희경이 우쭐거리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로 돌아가자 은준은 얼굴에 띠었던 미소를 싹 지웠다. 당장 오늘 저녁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놓여 있었다. 외면, 무시로 일관하기에는 얽힌 일들이 많았다.
그는 왜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며 그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것일까. 자신의 기억과는 다르게 그가 기억하고 있는 밤은 어떤 것일까.
자신이 기억하는 그날은 추웠고 굉장히 아팠던 날이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끝내 버리고 싶을 만큼 벼랑으로 내몰린 느낌으로 그 밤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었다.
“하아.”
은준은 두 손을 깍지 껴서 이마 위에 지붕을 만들었다. 뚫어질 듯이 내려다본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우리 은준이는 씩씩해서 좋아.’
여자보다 더 하얀 얼굴, 마른 몸을 보고 있으면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은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아까 만지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잡념이 떠오를 때는 일이 최고다. 시간은 흘러가게 두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상념에 들어오지 못하게 일을 하며 시간을 없애는 것이다. 그렇게 몰입해서 살았다. 돌아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앞만 보고 걸었다.
‘쟤는 스스로가 왕따야?’
말을 섞지 않았더니 다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이은준……. 하아, 꼴통 하나가 전학을 왔네.’
왜 그랬던 것이냐고, 무슨 이유로 그랬던 것이냐고 물어봐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견디는 것만이 버티는 것이었다. 이곳만 벗어난다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버틴 1년. 엄마를 등지고 떠나오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은준은 들고 있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 ■ □
“재준아, 이것 먹어 봐. 네가 좋아하던 베이컨말이야.”
한국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마주한 첫 반상에 베이컨말이가 놓여 있었다. 재준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너 급식 반찬으로 베이컨말이 해 달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잖아. 안 그래, 강 비서?”
재준이 젓가락을 대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자 혜란이 강 비서에게 동의를 구했다.
“네, 사모님. 도련님이 여러 번 베이컨말이를 해 달라고 하셔서 급식 메뉴로 들어갔었습니다.”
재준은 자신의 밥그릇에 베이컨말이를 올려 주는 어머니를 말끄러미 바라보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들이 좋아한 반찬은 돼지고기가 아니라 소고기로 만든 장조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신이 베이컨말이를 급식으로 요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직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텐데 오자마자 출근이라니, 너희 아버지도 참 무심하시지. 게다가 하나뿐인 아들이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출장이 다 뭐라니?”
재준은 식사를 빨리 끝내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가 출장을 핑계로 여자를 데리고 휴양지로 간 것을 알면 어머니는 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일 것이 뻔했다.
어렸을 땐 늘 밖으로만 나도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향해 날을 세우는 어머니가 왜 헤어지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부부는 원래 저렇게 사는 것인가, 라고 생각할 무렵 철이 들면서 돈 때문에 두 분이 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아버지 쪽은 이유가 돈이었다. 원하는 만큼 집을 수 있는 돈을 포기할 인간은 없는 것이다.
“어머니하고 오붓하게 먹으니 좋은데, 어머니는 싫으세요?”
“으응? 아, 아니.”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던 혜란이 이내 환한 미소를 짓자 재준은 시선을 내렸다. 이런 가식적인 말 한마디에 반응하는 어머니가 불쌍했다. 아이처럼 그저 좋다고 웃는 어머니가 측은했다. 아버지는 지금 모델을 옆에 끼고 괌으로 놀러 갔다고 말해 주고 싶어 입술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첫째로 어머니의 평안을 위해서였고, 둘째로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추진하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
“네.”
“론칭쇼를 호텔에서 한다던데…… 네 취임식도 같은 날…….”
“취임식 같은 거 안 합니다.”
“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어머니를 보다 재준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론칭쇼에 매진하고 싶은데 이은준 때문에 이미 마음이 흐트러졌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브랜드 론칭이지만 지금은 은준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만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론칭쇼에 어머니도 참석하실 거죠? 그날 어머니만큼 우아한 분은 없을 겁니다.”
“어머, 그, 그렇게 생각하니?”
“네.”
재준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꼬리를 접어 보였다. 어머니를 구슬려서 난처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에는 이미 도가 튼 재준이었다.
“오후 일정이 있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않고?”
다급하게 따라 일어서는 혜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재준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너무 빨리 가서 아쉽다는 둥, 또 언제 같이 밥을 먹자는 둥 미련을 남기는 혜란을 향해 재준은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참, 예쁜 드레스 고르세요.”
“으응.”
수줍은 아이처럼 볼을 붉히는 혜란을 뒤에 남겨 두고 현관문을 여는 재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본가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해서 아버지도 계실 줄 알았는데 역시나 자신의 착각이었다. 아들보다 자신의 생활이 먼저인 아버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본인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가장이었다.
“오랜만에 어머니와의 식사라 즐거우셨죠?”
“오후 일정 모두 취소해.”
차에 오른 재준은 양 비서의 질문에 귀찮은 음색으로 말했다. 아버지도 일을 뒷전에 두고 딴짓을 하고 있으니 자신도 하루쯤 개길 생각이었다. 게다가 입국하고 시차 적응도 못 하고 바로 출근한 길이라 피곤하기도 했다.
“네?”
양 비서가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고 뒤돌아봤지만 재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 ■ □
― 시장 조사를 또 하다니, 체력이 남아돌아?
“응.”
자꾸 잡념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은준은 시장 조사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 나고 다들 어딘가로 바쁘게 가는데 자신만 정처 없이 걷는 것 같았다.
― 밖에 덥지 않아? 5월이라도 낮 기온은 여름 만만치 않던데.
“더워. 그래서 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시원한 아이스커피 마시는 중이야.”
― 치이, 땡땡이치는 중이구만.
“아, 들켰다.”
휴대폰 너머 희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은준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늘 안과 밖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며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갈 때 뭐 사 갈까?”
― 아니, 승우하고 저녁 먹는데 속을 비워 놔야지.
은준은 희경의 말에 피식 웃으며 나중에 보자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아, 발바닥이 다 아프네. 계획에 없던 시장 조사 핑계를 댔다고 벌받았나?”
은준은 구두를 벗어 발가락에만 살짝 걸치고는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었다. 발끝에 걸려 깔딱거리는 구두가 리듬감 있게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꽤 선선해서 기분이 좋았다.
“모델 황선휘…… 괌으로 촬영? 얘 진짜 괌으로 촬영 간 거 맞아?”
콧노래를 부르며 휴대폰으로 뉴스를 읽던 은준은 미간을 모으다 입을 비죽 내밀었다. 브랜드 론칭 첫 모델로 발탁되었는데 스캔들이 터지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를 통해 물어봐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어! 이건 뭐야?”
혼잣말을 하며 연예 뉴스를 계속 클릭하던 은준은 화들짝 놀랐다. ‘황선휘와 같이 있는 그는 누구인가’라는 타이틀에 저도 모르게 건침을 삼켰다.
‘그 모델이 회장님 아들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더라.’
뇌리를 스치는 희경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던 은준은 앞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보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거지?”
재준이 자신을 내려다보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준은 살짝 벌어진 입술을 뻐끔거리다 이내 다물어 버렸다. 자신을 훑는 그의 눈길이 사나우면서 집요해 심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재준 선배는 이렇게 눈빛으로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의 기억 속의 그는 이렇지 않았었다.
“그게…… 시장 조사를…….”
자신이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어 은준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시장 조사? 이런 곳에 앉아 시장 조사를 하는 건가?”
비꼬는 말에 속이 살짝 찔린 은준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욱하는 마음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재준의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애인이 지금 다른 남자와 괌에 가 있는데, 알았어요?”
들이민 휴대폰을 말끄러미 보던 재준의 눈길이 다시 자신에게 닿자 은준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잡아먹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차가워 기가 죽었다.
“누가 내 애인이라고?”
긴 다리를 겹쳐 올리고 턱을 괴는 그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날렵했다. 더불어 되묻는 질문은 더없이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었다.
“예? 그게…….”
그에게 불쑥 들이밀었던 휴대폰을 다시 거둬들인 은준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애인 사이가 아니라는 건가? 그럼 희경이 전해 준 소문은 그저 소문이고, 황선휘와 같이 있는 남자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남자거나 신원을 밝힐 수 없는 남자라는 것인가.
“애인…… 아니에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언짢은 빛이 비쳤다. 하긴, 애인의 기사를 저렇게 남의 이야기를 듣듯이 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면 황선휘와 같이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스캔들을 막아야 했다. 브랜드 론칭을 하기도 전에 먹칠을 할 수는 없었다. 당장 모델을 바꾸든지 황선휘에게 연락을 넣어 자초지종을 묻고 귀국을 서둘러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처리할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처음부터 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은준은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양해를 구했다. 자신을 빤히 보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앉아.”
“…….”
가방을 챙겨 들며 엉거주춤 일어서던 은준은 미간을 모았다. 학생 때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누구를 향해 명령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은준 대리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으십니까?”
“아니.”
사실과 다르게 부정한 재준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층수를 알려 주는 화면을 바라보며 재준은 미간에 금을 그었다.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눈길 한 번 피하지 않고 대답하던 그녀의 눈망울이 너무 맑아 화가 났었다. 누르고 싶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싶었다. 절대 자신에게 비굴해지지 않는 태도 때문에 더 눌러 버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건 왜 물어봐?”
재준은 떠오르는 잡념을 지우며 싸늘한 얼굴로 양 비서에게 물었다.
“아, 그것이…… 그 직원 전화번호만 따로 물으셔서…….”
“…….”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는 그녀를 본 순간 자신이 착각했을 것이라 여겼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랬다. 눈이 마주쳤을 땐 그녀가 원래 별다른 표정이 없던 아이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가까이서 본, 그때처럼 사원증을 보고 알게 된 그녀의 이름 이은준. 묻어 버렸던 이름이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오후 스케줄은 어떻게 되지?”
“점심은 본가에서 드시고 저녁은 스톤블링 주얼리 입점을 계약한 백화점 사장과 식사 자리가 있습니다.”
“본가라…….”
재준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앞으로 9시간이나 더 흘러야 10시였다. 눈에 띄지도 않던 여자아이 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하던 그 순간부터 자신은 짜증과 화가 났었다. 타인을 제대로 보지 않던 은준의 시선이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 ■ □
“이은준?”
은준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멍한 시선을 돌렸다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승우의 표정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승우야.”
“왜 이렇게 멍해?”
“멍하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는 승우의 시선을 슬쩍 피한 은준은 자신의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회의실에서 재준과의 조우만으로도 충분히 먹먹한 심정이었다. 외면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는 그때와 같이 묵직함을 안겨 주었다.
가장 찬란했던 순간과 가장 비참했던 순간을 함께한 사람, 서재준. 그날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겼었다.
“왜. 백화점 입점이 어려워?”
새롭게 론칭하는 브랜드의 입점을 백화점부터 시작해 일반 점포로 확대할 생각으로 추진한 프로젝트였다. 선강기업이라는 이름 하나로 백화점은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고 얼마 전 입점 계약서를 주고받았다.
“아니. 입점 계약은 이미 체결했어.”
“그런데?”
눈썹을 일그러트리는 승우의 개구진 표정에 은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넌 일은 안 하고 여기는 왜 왔어?”
“내가 왜 왔겠냐?”
“왜 왔는데?”
은준은 챙기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팔짱을 꼈다. 마케팅부에서 근무하는 승우는 회사 연수원에서 알게 된 사이로 스물여덟 살인 자신과 동갑이었다. 그래서 잘 통하고 더 빨리 친해진 듯했다.
“너 보고 싶어서.”
“눈물 난다.”
은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쪽 입술 끝을 밀어 올리며 승우를 쳐다봤다.
“어? 승우 왔어? 오늘도 넌 지극정성이다?”
마케팅부면서 지원사업부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승우를 잡은 건 희경이었다. 둘이 전생에 무슨 앙숙이라도 되는 양 만났다 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저녁에 밥 같이 먹을래? 내가 좋은 곳 알아 놨거든.”
희경을 싹 무시한 승우가 은준의 책상 파티션에 기대며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희경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 승우! 이 누님을 위해 맛집을 검색해 둔 거야?”
“야, 야. 넌 좀 빠져!”
희경이 팔을 잡고 늘어지자 승우가 떨어지라며 핀잔을 주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녁에 보자. 7시.”
“……응.”
“오케이!”
은준을 향해 환하게 웃던 승우가 희경에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넌 좀 빠져!’ 하고 또 버럭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 끼어도 불만 없지?”
승우가 지원사업부를 나가자 희경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둘만 있으면 스캔들 나.”
남녀가 붙어 있으면 따라오는 말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승우를 좋아하는 여직원들이 많아 알게 모르게 은준이 구설수에 오르고는 했다. 희경은 그것을 염려해 지적하고 나오는 것이다.
“알아. 그래서 네가 같이 가 주는 것도 알고.”
“역시, 가르친 보람이 있군.”
희경이 우쭐거리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로 돌아가자 은준은 얼굴에 띠었던 미소를 싹 지웠다. 당장 오늘 저녁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놓여 있었다. 외면, 무시로 일관하기에는 얽힌 일들이 많았다.
그는 왜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며 그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것일까. 자신의 기억과는 다르게 그가 기억하고 있는 밤은 어떤 것일까.
자신이 기억하는 그날은 추웠고 굉장히 아팠던 날이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끝내 버리고 싶을 만큼 벼랑으로 내몰린 느낌으로 그 밤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었다.
“하아.”
은준은 두 손을 깍지 껴서 이마 위에 지붕을 만들었다. 뚫어질 듯이 내려다본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우리 은준이는 씩씩해서 좋아.’
여자보다 더 하얀 얼굴, 마른 몸을 보고 있으면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은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아까 만지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잡념이 떠오를 때는 일이 최고다. 시간은 흘러가게 두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상념에 들어오지 못하게 일을 하며 시간을 없애는 것이다. 그렇게 몰입해서 살았다. 돌아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앞만 보고 걸었다.
‘쟤는 스스로가 왕따야?’
말을 섞지 않았더니 다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이은준……. 하아, 꼴통 하나가 전학을 왔네.’
왜 그랬던 것이냐고, 무슨 이유로 그랬던 것이냐고 물어봐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견디는 것만이 버티는 것이었다. 이곳만 벗어난다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버틴 1년. 엄마를 등지고 떠나오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은준은 들고 있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고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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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준아, 이것 먹어 봐. 네가 좋아하던 베이컨말이야.”
한국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마주한 첫 반상에 베이컨말이가 놓여 있었다. 재준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너 급식 반찬으로 베이컨말이 해 달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잖아. 안 그래, 강 비서?”
재준이 젓가락을 대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자 혜란이 강 비서에게 동의를 구했다.
“네, 사모님. 도련님이 여러 번 베이컨말이를 해 달라고 하셔서 급식 메뉴로 들어갔었습니다.”
재준은 자신의 밥그릇에 베이컨말이를 올려 주는 어머니를 말끄러미 바라보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들이 좋아한 반찬은 돼지고기가 아니라 소고기로 만든 장조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신이 베이컨말이를 급식으로 요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직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텐데 오자마자 출근이라니, 너희 아버지도 참 무심하시지. 게다가 하나뿐인 아들이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출장이 다 뭐라니?”
재준은 식사를 빨리 끝내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가 출장을 핑계로 여자를 데리고 휴양지로 간 것을 알면 어머니는 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일 것이 뻔했다.
어렸을 땐 늘 밖으로만 나도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향해 날을 세우는 어머니가 왜 헤어지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부부는 원래 저렇게 사는 것인가, 라고 생각할 무렵 철이 들면서 돈 때문에 두 분이 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아버지 쪽은 이유가 돈이었다. 원하는 만큼 집을 수 있는 돈을 포기할 인간은 없는 것이다.
“어머니하고 오붓하게 먹으니 좋은데, 어머니는 싫으세요?”
“으응? 아, 아니.”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던 혜란이 이내 환한 미소를 짓자 재준은 시선을 내렸다. 이런 가식적인 말 한마디에 반응하는 어머니가 불쌍했다. 아이처럼 그저 좋다고 웃는 어머니가 측은했다. 아버지는 지금 모델을 옆에 끼고 괌으로 놀러 갔다고 말해 주고 싶어 입술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첫째로 어머니의 평안을 위해서였고, 둘째로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추진하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
“네.”
“론칭쇼를 호텔에서 한다던데…… 네 취임식도 같은 날…….”
“취임식 같은 거 안 합니다.”
“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어머니를 보다 재준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론칭쇼에 매진하고 싶은데 이은준 때문에 이미 마음이 흐트러졌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브랜드 론칭이지만 지금은 은준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만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론칭쇼에 어머니도 참석하실 거죠? 그날 어머니만큼 우아한 분은 없을 겁니다.”
“어머, 그, 그렇게 생각하니?”
“네.”
재준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꼬리를 접어 보였다. 어머니를 구슬려서 난처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에는 이미 도가 튼 재준이었다.
“오후 일정이 있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않고?”
다급하게 따라 일어서는 혜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재준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너무 빨리 가서 아쉽다는 둥, 또 언제 같이 밥을 먹자는 둥 미련을 남기는 혜란을 향해 재준은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참, 예쁜 드레스 고르세요.”
“으응.”
수줍은 아이처럼 볼을 붉히는 혜란을 뒤에 남겨 두고 현관문을 여는 재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본가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해서 아버지도 계실 줄 알았는데 역시나 자신의 착각이었다. 아들보다 자신의 생활이 먼저인 아버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본인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가장이었다.
“오랜만에 어머니와의 식사라 즐거우셨죠?”
“오후 일정 모두 취소해.”
차에 오른 재준은 양 비서의 질문에 귀찮은 음색으로 말했다. 아버지도 일을 뒷전에 두고 딴짓을 하고 있으니 자신도 하루쯤 개길 생각이었다. 게다가 입국하고 시차 적응도 못 하고 바로 출근한 길이라 피곤하기도 했다.
“네?”
양 비서가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고 뒤돌아봤지만 재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 ■ □
― 시장 조사를 또 하다니, 체력이 남아돌아?
“응.”
자꾸 잡념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은준은 시장 조사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 나고 다들 어딘가로 바쁘게 가는데 자신만 정처 없이 걷는 것 같았다.
― 밖에 덥지 않아? 5월이라도 낮 기온은 여름 만만치 않던데.
“더워. 그래서 카페 야외 테라스에서 시원한 아이스커피 마시는 중이야.”
― 치이, 땡땡이치는 중이구만.
“아, 들켰다.”
휴대폰 너머 희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은준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늘 안과 밖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며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갈 때 뭐 사 갈까?”
― 아니, 승우하고 저녁 먹는데 속을 비워 놔야지.
은준은 희경의 말에 피식 웃으며 나중에 보자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아, 발바닥이 다 아프네. 계획에 없던 시장 조사 핑계를 댔다고 벌받았나?”
은준은 구두를 벗어 발가락에만 살짝 걸치고는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었다. 발끝에 걸려 깔딱거리는 구두가 리듬감 있게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꽤 선선해서 기분이 좋았다.
“모델 황선휘…… 괌으로 촬영? 얘 진짜 괌으로 촬영 간 거 맞아?”
콧노래를 부르며 휴대폰으로 뉴스를 읽던 은준은 미간을 모으다 입을 비죽 내밀었다. 브랜드 론칭 첫 모델로 발탁되었는데 스캔들이 터지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를 통해 물어봐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어! 이건 뭐야?”
혼잣말을 하며 연예 뉴스를 계속 클릭하던 은준은 화들짝 놀랐다. ‘황선휘와 같이 있는 그는 누구인가’라는 타이틀에 저도 모르게 건침을 삼켰다.
‘그 모델이 회장님 아들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더라.’
뇌리를 스치는 희경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던 은준은 앞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보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거지?”
재준이 자신을 내려다보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준은 살짝 벌어진 입술을 뻐끔거리다 이내 다물어 버렸다. 자신을 훑는 그의 눈길이 사나우면서 집요해 심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재준 선배는 이렇게 눈빛으로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의 기억 속의 그는 이렇지 않았었다.
“그게…… 시장 조사를…….”
자신이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어 은준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시장 조사? 이런 곳에 앉아 시장 조사를 하는 건가?”
비꼬는 말에 속이 살짝 찔린 은준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욱하는 마음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재준의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애인이 지금 다른 남자와 괌에 가 있는데, 알았어요?”
들이민 휴대폰을 말끄러미 보던 재준의 눈길이 다시 자신에게 닿자 은준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잡아먹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차가워 기가 죽었다.
“누가 내 애인이라고?”
긴 다리를 겹쳐 올리고 턱을 괴는 그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날렵했다. 더불어 되묻는 질문은 더없이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었다.
“예? 그게…….”
그에게 불쑥 들이밀었던 휴대폰을 다시 거둬들인 은준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애인 사이가 아니라는 건가? 그럼 희경이 전해 준 소문은 그저 소문이고, 황선휘와 같이 있는 남자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남자거나 신원을 밝힐 수 없는 남자라는 것인가.
“애인…… 아니에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언짢은 빛이 비쳤다. 하긴, 애인의 기사를 저렇게 남의 이야기를 듣듯이 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면 황선휘와 같이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스캔들을 막아야 했다. 브랜드 론칭을 하기도 전에 먹칠을 할 수는 없었다. 당장 모델을 바꾸든지 황선휘에게 연락을 넣어 자초지종을 묻고 귀국을 서둘러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처리할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처음부터 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은준은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양해를 구했다. 자신을 빤히 보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앉아.”
“…….”
가방을 챙겨 들며 엉거주춤 일어서던 은준은 미간을 모았다. 학생 때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누구를 향해 명령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