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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양 비서가 커피 가져올 거고, 황선휘 스캔들 터져도 론칭 모델 바꾸는 일 없어.”
“네?”
은준은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은 애인이 아니지만 예전에 애인이었던 우정으로 밀고 나가겠다는 것인가.
“아까 애인 아니라고 했는데 왜 굳이 황선휘를 모델로 고집하는 건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재준의 입가에 냉소가 머무는 것을 본 은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것인지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농염한 빛을 띠며 자신을 발가벗기는 것 같았다.
어깨를 살짝 넘은 머리카락을 눈으로 더듬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듯이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눈길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모르는 척 눈을 돌리고 싶은데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치맛단으로 움직인 눈길이 종아리를 훑고 발목을 가만히 움켜잡는 것 같아 은준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힘주어 붙였다. 움직이지 않고,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자신을 농락하는 듯한 재준 때문에 숨결이 불규칙하게 변했다. 은준은 그것 때문에 은근 부아가 치밀었다.
“그만…….”
“커피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양 비서가 나타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은준은 그만 쳐다보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잠시 흔들렸던 이성을 찾고 나자 은준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치 그와 진한 정사를 벌인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고 있어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시원한 망고 빙수도 있습니다.”
양 비서가 내민 커피를 마시기 위해 그가 시선을 움직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집요하게 달라붙어 자신을 해부라도 하는 듯 그는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에 지고 싶지 않았던 은준은 그를 마주 노려봤다.
“네 시선을 붙잡아 두는 것이 제일 어려웠는데…….”
픽 웃던 그가 언제 그렇게 쳐다봤느냐는 듯 시선을 돌리며 혼잣말을 하자 은준은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커피를 신경질적으로 마신 은준은 입술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을 가늘죽하게 뜬 그의 시선이 다시 닿아 있었지만 모르는 척 외면했다.
“이 집 꼬기 정말 마시따!”
희경이 엄지를 세워 보이곤 고기를 오물오물 씹자 승우가 눈을 흘기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쟤는 왜 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따라온 거야?”
볼멘소리를 하는 승우를 향해 겸연쩍게 웃어 준 은준은 맛도 못 느끼면서 고기를 씹었다. 맛있지? 하고 묻는 승우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저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했다.
8시 20분.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도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가는 것도 아닌데 초조함이 들었다. 그래서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우리 와인도 한잔할까? 와인은 내가 쏠게.”
“아냐, 내가 사 줄게.”
승우가 저지했지만 은준은 고개를 저으며 와인은 자신이 사겠다고 말했다.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른 은준은 최고급 와인을 주문했다.
“음! 쌉싸름하며 달콤하다.”
희경이 주문한 와인을 마시다 최상이라며 또 엄지를 세웠지만 은준은 와인의 향이나 맛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술기운을 빌어 초조함을 없애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초조함이 가라앉기는커녕 정신이 더 또렷해지기만 했다.
‘사장님이 갑자기 걷고 싶다고 하셔서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혹시 약속을 하고 만난 것이 아니냐는 양 비서의 말에 은준은 아니라고 손사래까지 쳤었다. 우연히 만나 그와 어영부영 1시간을 같이 있었고 뜻하지 않게 명동의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그가 멈춰 무엇인가를 바라보면 은준은 기다렸다. 반대로 은준이 이것저것 메모를 하면서 더디게 걸으면 재준이 그 속도를 맞췄었다.
“컨디션이 안 좋아?”
승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희경이 심각한 얼굴로 물어 왔다. 희경의 눈에는 자신의 심란한 상태가 보였던 것일까.
“그렇게 보여?”
“어. 딴생각 중인 것이 보여. 승우가 눈치를 챌 정돈데?”
“그, 그래?”
은준은 비어 있는 승우의 자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승우, 희경과 같이 있으면서도 제 머릿속은 재준 선배로 가득이었다.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 낮에 너무 더웠거든.”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재준 선배를 맞닥트리니 몸의 온도가 절로 올라갔다. 본의 아니게 마주 앉아 마시게 된 것이 아이스커피였지만 한번 열이 난 몸의 온도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직설적으로 자신을 안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묘하게 울렁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다 보니 기력을 다 소진한 것은 사실이었다.
“바래다줄게.”
“아냐. 열이 올라서 좀 걷고 싶어서 그래.”
희경을 택시에 태워 보낸 승우가 바래다준다며 대리 기사를 부른 자신의 차에 타라고 했지만 은준은 고개를 저었다. 술을 마셔 그런지 몰라도 속은 아리고 머리는 멍했다.
“지하철로 몇 정거장만 가면 돼. 그리고 넌 반대 방향이니 여기서 헤어지자.”
은준은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이며 승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지못한 얼굴로 서 있던 승우가 실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조심해서 들어가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걱정 마. 나 이래 보여도 어설프지 않거든.”
“자만하지 말고.”
승우가 나무라듯 핀잔을 주자 은준은 소리 내어 웃었다. 어딘지 강단 있게 보인다는 말을 첫인상으로 자주 듣는 편이었다. 하지만 좀 가깝게 지내고 나면 보기보다 여리다는 말을 곧잘 듣고는 했다.
“나 진짜 어설프지 않은데…….”
막 출발하는 승우의 차를 보며 혼자 중얼거린 은준은 정처 없이 걸었다.
‘꺄아악! 꺄악!’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여학생들 사이로 덩치 큰 남학생이 정강이를 제대로 맞고 넘어져 있었다. 어디를 잘못 때린 것인지, 잘못 휘두른 것인지 몰라도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났다. 하지만 그 정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살의를 가지고 누군가를 향해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본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냥 말로 분풀이할 뿐이었는데 이번은 달랐다. 죽을 각오로 때렸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선생님의 손에 잡혀 끌려가면서 넘어져 있는 녀석을 계속 노려보며 패악을 부렸다. 저렇게 나약한 녀석 때문에 누군가가 겁에 질려 떨었다는 것과 녀석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가 자신을 옭아맨다는 사실에 분노했었다.
“하아…… 기억은 왜 이렇게 선명해지기만 할까.”
은준은 열이 오른 뺨을 식힐 겸 계속 정처 없이 걸었다. 화려한 도시 야경을 위가 아닌 아래서 쳐다보고 있으니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디를 디디고 서 있어야 할지 모른 채 서 있던 자신의 손을 잡아 준 건 다름 아닌 재준 선배였다. 건물의 많은 창을 밝히는 한 개의 불빛처럼 자신은 소모품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아!”
건물의 불빛을 바라보며 걷던 은준은 익숙한 제니스 호텔의 형체에 멈칫했다. 왜 발길이 이곳으로 향했던 것일까. 무의식 속에서 계속 그의 말을 이행하려 했던 것일까.
“……미쳤나 봐.”
은준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가 뒷걸음을 쳤다. 그는 지금 저곳에 있을까. 그 생각을 하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생각을 털어 버리려 은준은 방향을 휙 틀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러다 익숙한 병원 간판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끝난 거야.”
혼잣말을 한 은준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남들과 같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제니스 호텔 맞은편에 있는 종합병원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저곳이 원래 저렇게 빛이 밝았던 곳이었나. 저곳이 제니스 호텔과 이렇게 가까웠었나.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은준아, 이거 너 가져.’
자신은 그토록 가지고 싶은 것을 말 한마디만 하면 하늘에서 뚝딱하고 떨어지는 사람이 은형이었다.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탓에 그의 요구는 항상 들어주어야만 하는 당연한 것이었다. 반면 자신은 연년생이었지만 양보를 해야 했고, 동생이었지만 누나처럼 굴어야 했다.
□ ■ □
출근 시간이라 아침부터 엘리베이터 앞은 사람들로 붐볐다. 밤새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한 은준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다. 빈속이었지만 멍한 정신을 깨워야 했다.
“왔다.”
누군가가 작게 외친 소리에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사람들은 모래사장으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움직였다. 그 무리에 끼지 못한 은준은 옆으로 물러서서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감았다 떴다.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는 순간 옆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은준은 휴대폰을 꺼내 어제 봤던 기사 이후 새로 뜬 후속 기사를 터치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히려 들쑤셔서 시끄럽게 안 만들었으면 해.’
그의 말에 최 부장한테 보고도 못 한 은준은 벙어리 가슴앓이를 하듯이 혼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자 비좁던 엘리베이터 안의 공간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은준은 엘리베이터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는 미간을 모으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몇 층 가십니까?”
“아, 12층 부탁합…….”
고개를 들던 은준은 예의상 짓던 미소를 싹 거두었다.
“네, 12층 눌렀습니다.”
미소 짓고 있는 양 비서 옆에 선 그는 싸늘한 얼굴이었다. 어제의 약속 이행을 추궁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양 비서.”
“네, 사장님.”
양 비서를 부르면서도 자신에게 박힌 눈길 한 번 돌리지 않는 그였다.
“어?”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커피가 재준의 손에 의해 양 비서한테로 옮겨 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12층에서는 양 비서가 내려.”
“네?”
멀건 표정을 짓는 양 비서에게 은준은 내리지 말라는 눈빛으로 애원을 했지만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그는 군소리 없이 내려 버렸다.
왜 오늘따라 이 엘리베이터만 한산한 것이냐고 은준은 울부짖고 싶었다. 아니, 왜 하필 아침부터 재준을 만나게 된 것이냐고 하늘을 원망하고 싶었다.
둘만 남게 된 공간인데도 공기는 하나도 없는 듯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적막감이 들었다.
“내가 만만해 보여?”
은준은 건침을 꿀꺽 삼키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낮고 음산하게 울리는 재준의 후두음은 위협적이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절대 잡아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준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간격을 벌려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움직였는데 그가 같이 움직이는 바람에 소용이 없었다.
“도망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않나?”
엄밀히 말하면 도망이 아니었다.
“도망……간 적 없어요.”
“그럼?”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있는 재준을 올려다본 은준은 아랫입술을 이로 감쳐물었다. 한 번은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했는데도 그는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오래전 했던 약속은 퇴색되었다. 그러니 이제 와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깨진 약속이잖아요.”
은준은 미련 두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지만 그 말이 오히려 그를 화나게 한 것 같았다. 짙어지는 그의 눈빛이 자신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다.
“도망가지 말라고 했어.”
낮게 울리는 재준의 목소리에 은준은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가까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그의 손이 불쑥 들어와 머리카락을 헤치고 목을 그러쥐었다.
땡.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은준은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준이 긴 팔을 뻗어 엘리베이터 운행 정지 버튼을 눌러 버렸다.
“뭐 하는…….”
“이은준. 이제는 이용할 가치가 없으니 재미가 없으신가?”
망연한 표정을 지었던 은준은 비아냥대는 그를 보며 미간을 모았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를 이용하기 위해, 그의 힘을 빌리기 위해 접근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덤덤하게 챙겨 주는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흣.”
뺨에 닿은 그의 숨결에 흠칫 놀란 은준은 불안한 눈빛으로 재준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눈에서 코, 인중을 따라 내려가는 것을 느낀 은준은 입술을 감쳐물며 힘을 꼭 주었다. 다시 마주친 재준의 눈빛은 더할 수 없이 짙은 욕망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네 혀는 내 거야.”
“미쳤, 읍.”
미쳤냐고,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이러느냐고 말하려던 은준은 대담하게 들어온 재준의 혀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2화 드러난 소유욕
맞닿은 입술 중 하나는 분명 자신의 것이 맞는데 제 뜻과 상관없이 그에게 유린당하며 깨물려 핥아지고 있었다. 목을 끌어당긴 손과 허리를 끌어안은 재준의 팔은 자신을 옭아맨 사슬처럼 점점 조여 왔다. 그 바람에 입술이 뭉개지듯이 눌렸고 입안은 멋대로 침범한 그의 혀에 샅샅이 빨리고 있었다.
은준은 입술을 거칠게 범하고 있는 재준의 가슴을 밀어 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벌을 받고 있는 듯 거칠게 탐하는 재준의 입술에, 치아에 깨물려 아픔이 동반된 키스였다.
“하지…… 하아, 마. 하, 하아…….”
겨우 입술을 떼고 반항이라는 것을 해 보았지만 재준의 품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재준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것을 본 은준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들릴 듯 말 듯 말한 재준의 목소리을 듣자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자신의 첫 키스는 재준과 함께였었다. 그와의 첫 입맞춤은 부드럽고 감미로웠으며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에 정신이 아득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은준은 그의 가슴을 밀어 내고 뒷걸음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코너에 몰아넣는 꼴이 되고 말았다.
쿵.
재준이 엘리베이터 벽을 짚으며 몸을 기울이자 은준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움이 일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재준의 시선이 뺨에 닿자 열이 올랐다.
시선을 돌리던 은준은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누군가가 지금 상황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비켜…… 흣.”
재준이 검지로 턱을 들어 올리자 은준은 숨을 참았다. 완전 갇힌 꼴이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선배…….”
“입 다물어.”
거침없는 어투로 말한 재준이 엄지로 턱을 누르자 은준은 아픔에 입술을 벌렸다. 카메라가 있으니 그만하라는 말을 하려던 은준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이 세 치 혀로 가지고 노는 것을 알면서도 난 기꺼이 응했어.”
은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재준을 나무라듯 바라봤다. 처음엔 몰랐어도 나중에는 그 상황을 다 알지 않았느냐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재준의 입가에는 냉소만 흐를 뿐이었다.
“양 비서가 커피 가져올 거고, 황선휘 스캔들 터져도 론칭 모델 바꾸는 일 없어.”
“네?”
은준은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은 애인이 아니지만 예전에 애인이었던 우정으로 밀고 나가겠다는 것인가.
“아까 애인 아니라고 했는데 왜 굳이 황선휘를 모델로 고집하는 건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재준의 입가에 냉소가 머무는 것을 본 은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것인지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농염한 빛을 띠며 자신을 발가벗기는 것 같았다.
어깨를 살짝 넘은 머리카락을 눈으로 더듬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듯이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눈길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모르는 척 눈을 돌리고 싶은데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치맛단으로 움직인 눈길이 종아리를 훑고 발목을 가만히 움켜잡는 것 같아 은준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힘주어 붙였다. 움직이지 않고,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자신을 농락하는 듯한 재준 때문에 숨결이 불규칙하게 변했다. 은준은 그것 때문에 은근 부아가 치밀었다.
“그만…….”
“커피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양 비서가 나타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은준은 그만 쳐다보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잠시 흔들렸던 이성을 찾고 나자 은준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치 그와 진한 정사를 벌인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고 있어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시원한 망고 빙수도 있습니다.”
양 비서가 내민 커피를 마시기 위해 그가 시선을 움직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집요하게 달라붙어 자신을 해부라도 하는 듯 그는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에 지고 싶지 않았던 은준은 그를 마주 노려봤다.
“네 시선을 붙잡아 두는 것이 제일 어려웠는데…….”
픽 웃던 그가 언제 그렇게 쳐다봤느냐는 듯 시선을 돌리며 혼잣말을 하자 은준은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커피를 신경질적으로 마신 은준은 입술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을 가늘죽하게 뜬 그의 시선이 다시 닿아 있었지만 모르는 척 외면했다.
“이 집 꼬기 정말 마시따!”
희경이 엄지를 세워 보이곤 고기를 오물오물 씹자 승우가 눈을 흘기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쟤는 왜 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따라온 거야?”
볼멘소리를 하는 승우를 향해 겸연쩍게 웃어 준 은준은 맛도 못 느끼면서 고기를 씹었다. 맛있지? 하고 묻는 승우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저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했다.
8시 20분.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도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가는 것도 아닌데 초조함이 들었다. 그래서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우리 와인도 한잔할까? 와인은 내가 쏠게.”
“아냐, 내가 사 줄게.”
승우가 저지했지만 은준은 고개를 저으며 와인은 자신이 사겠다고 말했다.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른 은준은 최고급 와인을 주문했다.
“음! 쌉싸름하며 달콤하다.”
희경이 주문한 와인을 마시다 최상이라며 또 엄지를 세웠지만 은준은 와인의 향이나 맛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술기운을 빌어 초조함을 없애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초조함이 가라앉기는커녕 정신이 더 또렷해지기만 했다.
‘사장님이 갑자기 걷고 싶다고 하셔서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혹시 약속을 하고 만난 것이 아니냐는 양 비서의 말에 은준은 아니라고 손사래까지 쳤었다. 우연히 만나 그와 어영부영 1시간을 같이 있었고 뜻하지 않게 명동의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그가 멈춰 무엇인가를 바라보면 은준은 기다렸다. 반대로 은준이 이것저것 메모를 하면서 더디게 걸으면 재준이 그 속도를 맞췄었다.
“컨디션이 안 좋아?”
승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희경이 심각한 얼굴로 물어 왔다. 희경의 눈에는 자신의 심란한 상태가 보였던 것일까.
“그렇게 보여?”
“어. 딴생각 중인 것이 보여. 승우가 눈치를 챌 정돈데?”
“그, 그래?”
은준은 비어 있는 승우의 자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승우, 희경과 같이 있으면서도 제 머릿속은 재준 선배로 가득이었다.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 낮에 너무 더웠거든.”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재준 선배를 맞닥트리니 몸의 온도가 절로 올라갔다. 본의 아니게 마주 앉아 마시게 된 것이 아이스커피였지만 한번 열이 난 몸의 온도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직설적으로 자신을 안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묘하게 울렁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다 보니 기력을 다 소진한 것은 사실이었다.
“바래다줄게.”
“아냐. 열이 올라서 좀 걷고 싶어서 그래.”
희경을 택시에 태워 보낸 승우가 바래다준다며 대리 기사를 부른 자신의 차에 타라고 했지만 은준은 고개를 저었다. 술을 마셔 그런지 몰라도 속은 아리고 머리는 멍했다.
“지하철로 몇 정거장만 가면 돼. 그리고 넌 반대 방향이니 여기서 헤어지자.”
은준은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이며 승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지못한 얼굴로 서 있던 승우가 실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조심해서 들어가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걱정 마. 나 이래 보여도 어설프지 않거든.”
“자만하지 말고.”
승우가 나무라듯 핀잔을 주자 은준은 소리 내어 웃었다. 어딘지 강단 있게 보인다는 말을 첫인상으로 자주 듣는 편이었다. 하지만 좀 가깝게 지내고 나면 보기보다 여리다는 말을 곧잘 듣고는 했다.
“나 진짜 어설프지 않은데…….”
막 출발하는 승우의 차를 보며 혼자 중얼거린 은준은 정처 없이 걸었다.
‘꺄아악! 꺄악!’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여학생들 사이로 덩치 큰 남학생이 정강이를 제대로 맞고 넘어져 있었다. 어디를 잘못 때린 것인지, 잘못 휘두른 것인지 몰라도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났다. 하지만 그 정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살의를 가지고 누군가를 향해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본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냥 말로 분풀이할 뿐이었는데 이번은 달랐다. 죽을 각오로 때렸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선생님의 손에 잡혀 끌려가면서 넘어져 있는 녀석을 계속 노려보며 패악을 부렸다. 저렇게 나약한 녀석 때문에 누군가가 겁에 질려 떨었다는 것과 녀석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가 자신을 옭아맨다는 사실에 분노했었다.
“하아…… 기억은 왜 이렇게 선명해지기만 할까.”
은준은 열이 오른 뺨을 식힐 겸 계속 정처 없이 걸었다. 화려한 도시 야경을 위가 아닌 아래서 쳐다보고 있으니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디를 디디고 서 있어야 할지 모른 채 서 있던 자신의 손을 잡아 준 건 다름 아닌 재준 선배였다. 건물의 많은 창을 밝히는 한 개의 불빛처럼 자신은 소모품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아!”
건물의 불빛을 바라보며 걷던 은준은 익숙한 제니스 호텔의 형체에 멈칫했다. 왜 발길이 이곳으로 향했던 것일까. 무의식 속에서 계속 그의 말을 이행하려 했던 것일까.
“……미쳤나 봐.”
은준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가 뒷걸음을 쳤다. 그는 지금 저곳에 있을까. 그 생각을 하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생각을 털어 버리려 은준은 방향을 휙 틀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러다 익숙한 병원 간판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끝난 거야.”
혼잣말을 한 은준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남들과 같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제니스 호텔 맞은편에 있는 종합병원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저곳이 원래 저렇게 빛이 밝았던 곳이었나. 저곳이 제니스 호텔과 이렇게 가까웠었나.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은준아, 이거 너 가져.’
자신은 그토록 가지고 싶은 것을 말 한마디만 하면 하늘에서 뚝딱하고 떨어지는 사람이 은형이었다. 병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탓에 그의 요구는 항상 들어주어야만 하는 당연한 것이었다. 반면 자신은 연년생이었지만 양보를 해야 했고, 동생이었지만 누나처럼 굴어야 했다.
□ ■ □
출근 시간이라 아침부터 엘리베이터 앞은 사람들로 붐볐다. 밤새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한 은준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다. 빈속이었지만 멍한 정신을 깨워야 했다.
“왔다.”
누군가가 작게 외친 소리에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사람들은 모래사장으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움직였다. 그 무리에 끼지 못한 은준은 옆으로 물러서서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감았다 떴다.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는 순간 옆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은준은 휴대폰을 꺼내 어제 봤던 기사 이후 새로 뜬 후속 기사를 터치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히려 들쑤셔서 시끄럽게 안 만들었으면 해.’
그의 말에 최 부장한테 보고도 못 한 은준은 벙어리 가슴앓이를 하듯이 혼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자 비좁던 엘리베이터 안의 공간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은준은 엘리베이터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는 미간을 모으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몇 층 가십니까?”
“아, 12층 부탁합…….”
고개를 들던 은준은 예의상 짓던 미소를 싹 거두었다.
“네, 12층 눌렀습니다.”
미소 짓고 있는 양 비서 옆에 선 그는 싸늘한 얼굴이었다. 어제의 약속 이행을 추궁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양 비서.”
“네, 사장님.”
양 비서를 부르면서도 자신에게 박힌 눈길 한 번 돌리지 않는 그였다.
“어?”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커피가 재준의 손에 의해 양 비서한테로 옮겨 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12층에서는 양 비서가 내려.”
“네?”
멀건 표정을 짓는 양 비서에게 은준은 내리지 말라는 눈빛으로 애원을 했지만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그는 군소리 없이 내려 버렸다.
왜 오늘따라 이 엘리베이터만 한산한 것이냐고 은준은 울부짖고 싶었다. 아니, 왜 하필 아침부터 재준을 만나게 된 것이냐고 하늘을 원망하고 싶었다.
둘만 남게 된 공간인데도 공기는 하나도 없는 듯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적막감이 들었다.
“내가 만만해 보여?”
은준은 건침을 꿀꺽 삼키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낮고 음산하게 울리는 재준의 후두음은 위협적이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절대 잡아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은준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간격을 벌려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움직였는데 그가 같이 움직이는 바람에 소용이 없었다.
“도망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않나?”
엄밀히 말하면 도망이 아니었다.
“도망……간 적 없어요.”
“그럼?”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있는 재준을 올려다본 은준은 아랫입술을 이로 감쳐물었다. 한 번은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했는데도 그는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오래전 했던 약속은 퇴색되었다. 그러니 이제 와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깨진 약속이잖아요.”
은준은 미련 두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지만 그 말이 오히려 그를 화나게 한 것 같았다. 짙어지는 그의 눈빛이 자신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다.
“도망가지 말라고 했어.”
낮게 울리는 재준의 목소리에 은준은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가까이 서 있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그의 손이 불쑥 들어와 머리카락을 헤치고 목을 그러쥐었다.
땡.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은준은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준이 긴 팔을 뻗어 엘리베이터 운행 정지 버튼을 눌러 버렸다.
“뭐 하는…….”
“이은준. 이제는 이용할 가치가 없으니 재미가 없으신가?”
망연한 표정을 지었던 은준은 비아냥대는 그를 보며 미간을 모았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그를 이용하기 위해, 그의 힘을 빌리기 위해 접근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덤덤하게 챙겨 주는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흣.”
뺨에 닿은 그의 숨결에 흠칫 놀란 은준은 불안한 눈빛으로 재준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눈에서 코, 인중을 따라 내려가는 것을 느낀 은준은 입술을 감쳐물며 힘을 꼭 주었다. 다시 마주친 재준의 눈빛은 더할 수 없이 짙은 욕망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지금부터 네 혀는 내 거야.”
“미쳤, 읍.”
미쳤냐고,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이러느냐고 말하려던 은준은 대담하게 들어온 재준의 혀에 눌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2화 드러난 소유욕
맞닿은 입술 중 하나는 분명 자신의 것이 맞는데 제 뜻과 상관없이 그에게 유린당하며 깨물려 핥아지고 있었다. 목을 끌어당긴 손과 허리를 끌어안은 재준의 팔은 자신을 옭아맨 사슬처럼 점점 조여 왔다. 그 바람에 입술이 뭉개지듯이 눌렸고 입안은 멋대로 침범한 그의 혀에 샅샅이 빨리고 있었다.
은준은 입술을 거칠게 범하고 있는 재준의 가슴을 밀어 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벌을 받고 있는 듯 거칠게 탐하는 재준의 입술에, 치아에 깨물려 아픔이 동반된 키스였다.
“하지…… 하아, 마. 하, 하아…….”
겨우 입술을 떼고 반항이라는 것을 해 보았지만 재준의 품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재준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것을 본 은준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들릴 듯 말 듯 말한 재준의 목소리을 듣자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자신의 첫 키스는 재준과 함께였었다. 그와의 첫 입맞춤은 부드럽고 감미로웠으며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에 정신이 아득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은준은 그의 가슴을 밀어 내고 뒷걸음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코너에 몰아넣는 꼴이 되고 말았다.
쿵.
재준이 엘리베이터 벽을 짚으며 몸을 기울이자 은준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움이 일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재준의 시선이 뺨에 닿자 열이 올랐다.
시선을 돌리던 은준은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카메라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누군가가 지금 상황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비켜…… 흣.”
재준이 검지로 턱을 들어 올리자 은준은 숨을 참았다. 완전 갇힌 꼴이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선배…….”
“입 다물어.”
거침없는 어투로 말한 재준이 엄지로 턱을 누르자 은준은 아픔에 입술을 벌렸다. 카메라가 있으니 그만하라는 말을 하려던 은준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이 세 치 혀로 가지고 노는 것을 알면서도 난 기꺼이 응했어.”
은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재준을 나무라듯 바라봤다. 처음엔 몰랐어도 나중에는 그 상황을 다 알지 않았느냐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재준의 입가에는 냉소만 흐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