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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호두는 손바닥에 놓은 무화과를 덥석 삼켰다. 물론 수현의 손에 흥건한 침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현은 견주의 허락도 없이 무화과를 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한 손에 쥔 줄을 당기며 무화과는 상관도 없는지 당황한 얼굴로 수현을 바라봤다.
그러다 수현의 손바닥에 묻은 침을 보고 더 놀라며 갖고 있던 비닐봉지에서 구겨진 휴지 뭉치를 건넸다. 휴지 뭉치는 신문지랑 같이 엉켜 있었다. 딱 봐도 호두의 배변을 치우기 위해서 둘둘 말아 나온 휴지였다. 선뜻 손이 안 가 남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이내 수현의 망설임을 헤아리고 더 붉어진 얼굴을 했다.
수현은 두리번거리다 몸을 돌려 한쪽에 마련된 수돗가로 갔다. 수돗가까지 따라온 남자는 수발이라도 들 태세로 수도꼭지를 틀어 주었다. 수현이 손을 다 씻었다 싶으니 직접 물을 잠근다. 너무 정중한 자세에 도리어 민망해진 수현은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저희 호두를 아세요? 이놈이 여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반기지는 않는데.”
“병원에서 종종 봐서 그럴 거예요.”
“네, 그랬군요. 어쩐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하룻밤 호두를 데리고 있기도 했다고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무화과가 맛이 있었는지 호두는 쩝쩝거렸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수현이 그 침묵을 깨고 먼저 가라는 손짓을 했다.
호두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멈칫거렸다. 남자가 리드줄을 세게 당기며 절대 놓지 않겠다는 표시를 했다. 총총총 호두의 발걸음이 먼저 앞질렀다.
수현은 가볍게 팔을 들어 몸을 쭉쭉 펴고 제자리걸음을 몇 번 했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앞서 걷던 호두와 그를 지나치면서 어색한 눈웃음을 보냈다. 곧장 속도를 높였다.
뛰는 발걸음은 벅차고 숨이 가빠졌다. 그럼에도 기분은 상쾌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생각과 주변 상황으로 가볍게 뛰는 걸음에만 그쳤던 운동이 오늘은 날을 만났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힘차게 뛰었다. 곧바로 속도가 몸에 붙었다.
빠르게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곁눈으로 보는 풍경은 금방금방 바뀌었다. 수현의 집에서 가게까지 두어 개 정도의 작은 동(洞)을 지나자 점점 아침이 밝아 왔다. 어릴 때 잠깐 다녔던 초등학교다. 그때 은정과 자주 갔던 문구점을 찾아보다 뒤에서 뭔가 달려오는 소리에 속도를 줄였다.
뒤를 바라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한참 뒤쪽에서 와야 할 호두가 힘차게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바로 뒤에는 얼굴에 시뻘게진 남자가 호두의 속도를 못 따라와 질질 끌려오다시피 하며 리드줄을 목숨처럼 쥐고 있었다.
수현은 황당한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호두는 그녀의 곁으로 와 멈췄다. 수현은 지난봄 이 지역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서 상위권의 순위로 완주를 했다. 그러니 달리기를 생활화하지 않은 일반인들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몇 번의 마라톤 완주와 히말라야 트레킹도 했던 만큼 다른 운동은 몰라도 오래 꾸준히 하는 것엔 자신 있었다. 그런 수현이 오늘은 제대로 달려 보자 싶어 속도를 냈다. 그걸 따라왔으니 저 견주는 아마 폐가 터질 지경일 거다.
“괜찮으세요?”
수현은 남자를 쳐다보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걱정을 했다. 남자는 피가 몰린 얼굴에 열을 내리느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괜, 괜……찮을 거 같습니까?”
죽을 거 같은 표정을 짓는 남자와 반대로 수현은 자꾸만 우습기만 해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그 곁에 호두는 이런 상황은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다시 만난 수현이 그저 반가워 앞발로 매달리기 바빴다.
몇 번 등을 쓸어 주고, 눈을 마주하니 호두도 진정이 되어 몸을 숙인 수현의 얼굴을 혀로 쓸었다. 가쁜 숨결을 연신 쏟아 내는 남자가 그런 호두를 질겁하며 떼어 냈다.
“호두, 산타 할아버지가 봤으면 루돌프를 돌려보내고 너를 그 자리에 넣었겠어. 누나 따라 뛰어온 거야?”
기특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수현은 한참을 호두를 반갑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곁에서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리드줄을 꽉 잡고 허리를 숙이며 진정하려 애를 썼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던 수현은 리드줄을 대신 받아 들었다. 가방을 뒤져 생수병을 그에게 건넸다. 입을 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물을 마시는 남자를 바라보며 수현은 잡고 있던 리드줄을 놓고 발로 밟았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마시는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눈치가 빨랐다. 수현의 손바닥에 물을 부어 준다. 몸을 숙이자 호두는 수현의 손바닥에 담긴 물을 홀짝였다. 간질간질 손바닥으로 호두의 혀가 느껴졌다. 작은 생수병 하나로 호두와 남자가 그렇게 나눠 마셨다.
“거기서 여기까지 호두한테 매달려 뛰어오셨어요?”
“아, 네. 아니, 이놈이 그렇게 교육이 안 된 놈이 아닌데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멈추라고 해도 자꾸 따라가서. 미안합니다. 저기 죄송한데 어디까지 가시는 줄은 모르겠지만 뛰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정상적으로 걸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평범, 정상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수현은 자꾸 웃음만 나와 억지로 숨을 삼켰다. 남자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숨이 가빠 몇 번이나 말을 멈추고 다시 이어 갔다.
뛰지 말고 걸어가 달라 청을 하는 목소리는 아주 애원조다. 헉헉 밭은 숨소리가 가라앉지 못했다. 방금 전 이 남자를 끌고 냅다 달린 호두도 웃기고, 시뻘게진 얼굴로 이야기하는 이 남자도 웃겼다. 상대가 너무 힘들어하니 이런 상황에 혼자만 웃기 미안해져 입술이 벌어지는 걸 억지로 다물었다.
이 남자의 동물병원까지가 같이 가야 할 코스다. 이렇게 가다가는 그도 호두도 힘들겠지? 수현은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저는 저 아래로 내려갈게요. 먼저 출발하세요.”
그때까지 바닥에 밟고 있던 리드줄을 수현은 툭툭 털어 남자에게 건넸다. 이제 제대로 말귀를 알아들은 호두는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재촉했다.
사랑동물병원.
미용실 투명 창 너머로 시츄 한 마리가 미용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수현은 이른 새벽 소동을 곱씹으며 근처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수현의 단정한 흰색 셔츠가 밝아 보였다.
몸을 자꾸 배배 꼬며 협조를 안 하는 시츄를 보며 은정의 타이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상상이 되었다. 동갑내기 이종사촌 김은정이다. 제 인생에서 은정을 빼고 이야기를 한다면 과연 얼마만큼의 이야기가 남을까?
학교는 달라도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서로의 곁에서 보냈다. 잠깐 수현이 인생의 무게로 인해 버거워할 때 그때도 말없이 묵묵히 그녀를 지켜봐 주었다.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구나 했지만 다시금 수현은 이렇게 은정의 곁으로 오게 되었다.
살짝 고개가 숙여진 은정의 눈은 아래로 내려갔다. 예쁘게 마스카라가 칠해진 속눈썹이 그림자처럼 하늘하늘거렸다.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서 눈은 더 돋보였다. 섬세하게 표현된 속눈썹, 단정하게 다듬어진 눈썹과 전문가 저리 가라 할 만큼 은은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된 눈 화장은 볼 때마다 감탄하게 했다.
항상 아름답게 가꾸기 좋아하는 은정이다. 화장을 매일 꼼꼼하게 하는 것이 귀찮지 않냐고 수현이 묻기도 했었다. 은정은 “이 나이에 성질 더러워 시집 못 갔다는 소리는 들을망정, 못생겨서 시집 못 갔다는 소리는 들으면 안 돼.” 그랬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박차고 본가로 내려오기까지 은정도 곡절이 많았다. 화장도 잘하고 늘 꼼지락거리며 바쁘게 살았던 재주가 많은 은정이었다. 여기에서 애견 미용을 한 지도 몇 년이 되었다. 작정하고 들면 오늘 식당을 오픈하는 수현보다 음식도 바느질도 말 하나 거들 거 없이 잘할 게 분명했다.
언제나 부지런한 이모네 가족들은 물 마시러 갈 때도 결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가는 길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라도 줍고, 흐트러진 집 안을 정리하고 왔다. 이모도 은정도 은정의 오빠도 이모부도 매사가 부지런하고 손끝이 야무졌다.
하지만 그런 동생네를 바라보는 수현의 엄마는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굶어 죽는다고 했다며 이모를 안쓰럽게 쳐다보곤 했다. 그 말이 맞기라도 하는지 그렇게 부지런한 은정의 가족에겐 위태위태한 불운이 몇 해에 한 번씩 나타나 엄마의 걱정에 짐을 더 얹었다.
한참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 보며 넋을 놓고 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은정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괜찮다며 수현은 몸을 돌려 신호등이 없는 2차선 횡단보도를 건넜다. 가게 문에 열쇠를 꽂아 돌려 문을 열었다. 경비 시스템을 설치해야 하나 이렇게 문만 잠그고 다녀도 되나 싶은 고민을 했다.
가게 안은 단출했다. 테이블 몇 개. 오픈형 주방은 휑하다 싶을 만큼 단순했다. 조리대와 개수대가 있고, 업소용치고는 그리 크지 않은 냉장고가 한 대 있다. 한구석에 카운터로 보이는 작은 테이블이 전부였다.
벽에는 특이하게도 붓글씨로 적힌 메뉴가 있다. 돈가스덮밥, 닭고기덮밥, 장날 메뉴 이렇게 세 가지뿐이다. 몸이 좋지 않아 오랜 시간 고생하신 이모부가 무언가 해 주고 싶다며 수현에게 써 주신 글씨였다.
건강하셨을 때 멋진 붓글씨를 뽐내셨던 이모부셨다. 그런 이모부가 건강을 잃고 힘든 시기를 지나왔다. 물리치료를 열심히 하며 이제는 많이 나아지셨다. 이 글씨를 쓰기 위해 더 많은 연습과 운동을 하셨을 걸 짐작하니 저절로 눈가가 시큰해 왔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동물병원을 바라보았다. 미용을 마쳤는지 은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현은 오픈이라는 푯말을 출입문에 내걸었다. 짙은 푸른색 린넨 앞치마를 허리에 질끈 묶었다.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오늘은 ‘보리언덕아래’의 첫 오픈일이다.
첫 오픈일, 말만 근사했다. 텅 빈 가게에 수현은 혼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개미 한 마리도 없을 줄은 몰랐다.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지도 않았고, 미리 오픈일 어쩌고 하며 알리지 않았다. 밖에서 기웃거리는 몇 사람은 텅 빈 식당을 보고 그냥 가 버렸다.
수현은 그 사람들이 가게를 또 기웃거릴 때 용기를 내서 “들어오세요.” 했다. 하지만 수현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들은 민망해하며 빠른 걸음으로 가 버렸다.
“어서…… 어, 이모!”
문에 달린 종이 울려 손님인가 싶어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들었더니 이모다. 이모는 머리에 시루를 이고 가게로 들어왔다. 수현이 손 빠르게 시루를 받았다.
“어, 어, 어, 이모 이거 엄청 무거워.”
수현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갸우뚱하자 이모는 그녀의 손에서 가뿐하게 시루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힘을 주느라 얼굴이 벌게진 수현과 반대로 이모는 숨을 한 번 고를 뿐 멀쩡했다.
“내가 뭐 해 줄 게 있나? 개업식도 안 한다고 하고 내 마음이 서운해서 떡 좀 해 왔어.”
수현이 덮인 무명천을 벗겨 내자 팥시루떡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이모, 세상에, 이걸 직접 한 거야?”
“응. 떡집에서 한 것보다 나을 거다.”
“이걸 이고 어떻게 왔어? 은정이는 지금 병원에 있는데.”
“태윤이 차 타고 요 앞까지 왔지. 고속도로 타야 한다고 저기 앞에서 내렸어.”
“어, 오빠 내려왔어? 그럼 가게 왔다 가지 그냥 간 거야?”
“저도 바쁘니, 못 보고 간다고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더라. 자, 이거 받아라. 태윤이가 얼마 못 넣었다 하더만. 가게 필요한 거나 사래.”
이모는 옷 안쪽에서 주섬주섬 봉투를 꺼내 수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뭘, 이런 걸. 오빠도 여유 없을 텐데.”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그렇지. 너한테 이 정도는 해야지. 나중에 전화나 한번 해 줘. 태윤이가 축하 인사 먼저 해야 하는데 너희 집에도 그렇고 미안해서 말을 못 꺼내나 봐.”
김이 올라오는 떡을 이고 온 이모에게 미안한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이 섞였다. 수현은 칼과 접시를 챙겨 왔다. 자르려고 덤비는데 이모가 손을 저으며 가만있어 보라 했다.
“개업식은 안 해도 고사는 지내야제.”
가게 안을 살펴보던 이모는 언제 챙겨 왔는지 굵은 소금을 어디선가 꺼내 구석구석 뿌렸다. 방향을 가늠해 보고 가게 정문을 향해 보자기를 펼쳐 놓고 시루를 얹었다.
수현에게 절을 하라 했다. 얼떨결에 절을 했다. 뭐라도 빌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 수현은 김이 오르는 떡에 침만 꿀꺽 넘겼다.
“이모 이제 떡 먹어도 돼?”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간다.
“주변에도 나눠야지. 썰어 주마. 접시 챙겨 와.”
수현은 이제는 먹나 싶었다 다시 움직여 접시를 챙겨 왔다. 굵은 손마디의 이모는 커다란 식칼로 뜨겁지도 않은지 떡을 숭덩숭덩 잘라 냈다.
“네 엄마는 아직도 몰라?”
호두는 손바닥에 놓은 무화과를 덥석 삼켰다. 물론 수현의 손에 흥건한 침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현은 견주의 허락도 없이 무화과를 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한 손에 쥔 줄을 당기며 무화과는 상관도 없는지 당황한 얼굴로 수현을 바라봤다.
그러다 수현의 손바닥에 묻은 침을 보고 더 놀라며 갖고 있던 비닐봉지에서 구겨진 휴지 뭉치를 건넸다. 휴지 뭉치는 신문지랑 같이 엉켜 있었다. 딱 봐도 호두의 배변을 치우기 위해서 둘둘 말아 나온 휴지였다. 선뜻 손이 안 가 남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이내 수현의 망설임을 헤아리고 더 붉어진 얼굴을 했다.
수현은 두리번거리다 몸을 돌려 한쪽에 마련된 수돗가로 갔다. 수돗가까지 따라온 남자는 수발이라도 들 태세로 수도꼭지를 틀어 주었다. 수현이 손을 다 씻었다 싶으니 직접 물을 잠근다. 너무 정중한 자세에 도리어 민망해진 수현은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저희 호두를 아세요? 이놈이 여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반기지는 않는데.”
“병원에서 종종 봐서 그럴 거예요.”
“네, 그랬군요. 어쩐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하룻밤 호두를 데리고 있기도 했다고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무화과가 맛이 있었는지 호두는 쩝쩝거렸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수현이 그 침묵을 깨고 먼저 가라는 손짓을 했다.
호두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멈칫거렸다. 남자가 리드줄을 세게 당기며 절대 놓지 않겠다는 표시를 했다. 총총총 호두의 발걸음이 먼저 앞질렀다.
수현은 가볍게 팔을 들어 몸을 쭉쭉 펴고 제자리걸음을 몇 번 했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앞서 걷던 호두와 그를 지나치면서 어색한 눈웃음을 보냈다. 곧장 속도를 높였다.
뛰는 발걸음은 벅차고 숨이 가빠졌다. 그럼에도 기분은 상쾌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생각과 주변 상황으로 가볍게 뛰는 걸음에만 그쳤던 운동이 오늘은 날을 만났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힘차게 뛰었다. 곧바로 속도가 몸에 붙었다.
빠르게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곁눈으로 보는 풍경은 금방금방 바뀌었다. 수현의 집에서 가게까지 두어 개 정도의 작은 동(洞)을 지나자 점점 아침이 밝아 왔다. 어릴 때 잠깐 다녔던 초등학교다. 그때 은정과 자주 갔던 문구점을 찾아보다 뒤에서 뭔가 달려오는 소리에 속도를 줄였다.
뒤를 바라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한참 뒤쪽에서 와야 할 호두가 힘차게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바로 뒤에는 얼굴에 시뻘게진 남자가 호두의 속도를 못 따라와 질질 끌려오다시피 하며 리드줄을 목숨처럼 쥐고 있었다.
수현은 황당한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호두는 그녀의 곁으로 와 멈췄다. 수현은 지난봄 이 지역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서 상위권의 순위로 완주를 했다. 그러니 달리기를 생활화하지 않은 일반인들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몇 번의 마라톤 완주와 히말라야 트레킹도 했던 만큼 다른 운동은 몰라도 오래 꾸준히 하는 것엔 자신 있었다. 그런 수현이 오늘은 제대로 달려 보자 싶어 속도를 냈다. 그걸 따라왔으니 저 견주는 아마 폐가 터질 지경일 거다.
“괜찮으세요?”
수현은 남자를 쳐다보며 진심 어린 눈빛으로 걱정을 했다. 남자는 피가 몰린 얼굴에 열을 내리느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괜, 괜……찮을 거 같습니까?”
죽을 거 같은 표정을 짓는 남자와 반대로 수현은 자꾸만 우습기만 해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그 곁에 호두는 이런 상황은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다시 만난 수현이 그저 반가워 앞발로 매달리기 바빴다.
몇 번 등을 쓸어 주고, 눈을 마주하니 호두도 진정이 되어 몸을 숙인 수현의 얼굴을 혀로 쓸었다. 가쁜 숨결을 연신 쏟아 내는 남자가 그런 호두를 질겁하며 떼어 냈다.
“호두, 산타 할아버지가 봤으면 루돌프를 돌려보내고 너를 그 자리에 넣었겠어. 누나 따라 뛰어온 거야?”
기특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수현은 한참을 호두를 반갑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곁에서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리드줄을 꽉 잡고 허리를 숙이며 진정하려 애를 썼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던 수현은 리드줄을 대신 받아 들었다. 가방을 뒤져 생수병을 그에게 건넸다. 입을 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물을 마시는 남자를 바라보며 수현은 잡고 있던 리드줄을 놓고 발로 밟았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마시는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눈치가 빨랐다. 수현의 손바닥에 물을 부어 준다. 몸을 숙이자 호두는 수현의 손바닥에 담긴 물을 홀짝였다. 간질간질 손바닥으로 호두의 혀가 느껴졌다. 작은 생수병 하나로 호두와 남자가 그렇게 나눠 마셨다.
“거기서 여기까지 호두한테 매달려 뛰어오셨어요?”
“아, 네. 아니, 이놈이 그렇게 교육이 안 된 놈이 아닌데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멈추라고 해도 자꾸 따라가서. 미안합니다. 저기 죄송한데 어디까지 가시는 줄은 모르겠지만 뛰지 말고 그냥 평범하게 정상적으로 걸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평범, 정상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수현은 자꾸 웃음만 나와 억지로 숨을 삼켰다. 남자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숨이 가빠 몇 번이나 말을 멈추고 다시 이어 갔다.
뛰지 말고 걸어가 달라 청을 하는 목소리는 아주 애원조다. 헉헉 밭은 숨소리가 가라앉지 못했다. 방금 전 이 남자를 끌고 냅다 달린 호두도 웃기고, 시뻘게진 얼굴로 이야기하는 이 남자도 웃겼다. 상대가 너무 힘들어하니 이런 상황에 혼자만 웃기 미안해져 입술이 벌어지는 걸 억지로 다물었다.
이 남자의 동물병원까지가 같이 가야 할 코스다. 이렇게 가다가는 그도 호두도 힘들겠지? 수현은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저는 저 아래로 내려갈게요. 먼저 출발하세요.”
그때까지 바닥에 밟고 있던 리드줄을 수현은 툭툭 털어 남자에게 건넸다. 이제 제대로 말귀를 알아들은 호두는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재촉했다.
사랑동물병원.
미용실 투명 창 너머로 시츄 한 마리가 미용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수현은 이른 새벽 소동을 곱씹으며 근처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수현의 단정한 흰색 셔츠가 밝아 보였다.
몸을 자꾸 배배 꼬며 협조를 안 하는 시츄를 보며 은정의 타이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상상이 되었다. 동갑내기 이종사촌 김은정이다. 제 인생에서 은정을 빼고 이야기를 한다면 과연 얼마만큼의 이야기가 남을까?
학교는 달라도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서로의 곁에서 보냈다. 잠깐 수현이 인생의 무게로 인해 버거워할 때 그때도 말없이 묵묵히 그녀를 지켜봐 주었다.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구나 했지만 다시금 수현은 이렇게 은정의 곁으로 오게 되었다.
살짝 고개가 숙여진 은정의 눈은 아래로 내려갔다. 예쁘게 마스카라가 칠해진 속눈썹이 그림자처럼 하늘하늘거렸다.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서 눈은 더 돋보였다. 섬세하게 표현된 속눈썹, 단정하게 다듬어진 눈썹과 전문가 저리 가라 할 만큼 은은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된 눈 화장은 볼 때마다 감탄하게 했다.
항상 아름답게 가꾸기 좋아하는 은정이다. 화장을 매일 꼼꼼하게 하는 것이 귀찮지 않냐고 수현이 묻기도 했었다. 은정은 “이 나이에 성질 더러워 시집 못 갔다는 소리는 들을망정, 못생겨서 시집 못 갔다는 소리는 들으면 안 돼.” 그랬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박차고 본가로 내려오기까지 은정도 곡절이 많았다. 화장도 잘하고 늘 꼼지락거리며 바쁘게 살았던 재주가 많은 은정이었다. 여기에서 애견 미용을 한 지도 몇 년이 되었다. 작정하고 들면 오늘 식당을 오픈하는 수현보다 음식도 바느질도 말 하나 거들 거 없이 잘할 게 분명했다.
언제나 부지런한 이모네 가족들은 물 마시러 갈 때도 결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가는 길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라도 줍고, 흐트러진 집 안을 정리하고 왔다. 이모도 은정도 은정의 오빠도 이모부도 매사가 부지런하고 손끝이 야무졌다.
하지만 그런 동생네를 바라보는 수현의 엄마는 열두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굶어 죽는다고 했다며 이모를 안쓰럽게 쳐다보곤 했다. 그 말이 맞기라도 하는지 그렇게 부지런한 은정의 가족에겐 위태위태한 불운이 몇 해에 한 번씩 나타나 엄마의 걱정에 짐을 더 얹었다.
한참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 보며 넋을 놓고 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은정이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괜찮다며 수현은 몸을 돌려 신호등이 없는 2차선 횡단보도를 건넜다. 가게 문에 열쇠를 꽂아 돌려 문을 열었다. 경비 시스템을 설치해야 하나 이렇게 문만 잠그고 다녀도 되나 싶은 고민을 했다.
가게 안은 단출했다. 테이블 몇 개. 오픈형 주방은 휑하다 싶을 만큼 단순했다. 조리대와 개수대가 있고, 업소용치고는 그리 크지 않은 냉장고가 한 대 있다. 한구석에 카운터로 보이는 작은 테이블이 전부였다.
벽에는 특이하게도 붓글씨로 적힌 메뉴가 있다. 돈가스덮밥, 닭고기덮밥, 장날 메뉴 이렇게 세 가지뿐이다. 몸이 좋지 않아 오랜 시간 고생하신 이모부가 무언가 해 주고 싶다며 수현에게 써 주신 글씨였다.
건강하셨을 때 멋진 붓글씨를 뽐내셨던 이모부셨다. 그런 이모부가 건강을 잃고 힘든 시기를 지나왔다. 물리치료를 열심히 하며 이제는 많이 나아지셨다. 이 글씨를 쓰기 위해 더 많은 연습과 운동을 하셨을 걸 짐작하니 저절로 눈가가 시큰해 왔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동물병원을 바라보았다. 미용을 마쳤는지 은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현은 오픈이라는 푯말을 출입문에 내걸었다. 짙은 푸른색 린넨 앞치마를 허리에 질끈 묶었다. 가게 문을 활짝 열었다.
오늘은 ‘보리언덕아래’의 첫 오픈일이다.
첫 오픈일, 말만 근사했다. 텅 빈 가게에 수현은 혼자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개미 한 마리도 없을 줄은 몰랐다.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지도 않았고, 미리 오픈일 어쩌고 하며 알리지 않았다. 밖에서 기웃거리는 몇 사람은 텅 빈 식당을 보고 그냥 가 버렸다.
수현은 그 사람들이 가게를 또 기웃거릴 때 용기를 내서 “들어오세요.” 했다. 하지만 수현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들은 민망해하며 빠른 걸음으로 가 버렸다.
“어서…… 어, 이모!”
문에 달린 종이 울려 손님인가 싶어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들었더니 이모다. 이모는 머리에 시루를 이고 가게로 들어왔다. 수현이 손 빠르게 시루를 받았다.
“어, 어, 어, 이모 이거 엄청 무거워.”
수현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갸우뚱하자 이모는 그녀의 손에서 가뿐하게 시루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힘을 주느라 얼굴이 벌게진 수현과 반대로 이모는 숨을 한 번 고를 뿐 멀쩡했다.
“내가 뭐 해 줄 게 있나? 개업식도 안 한다고 하고 내 마음이 서운해서 떡 좀 해 왔어.”
수현이 덮인 무명천을 벗겨 내자 팥시루떡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이모, 세상에, 이걸 직접 한 거야?”
“응. 떡집에서 한 것보다 나을 거다.”
“이걸 이고 어떻게 왔어? 은정이는 지금 병원에 있는데.”
“태윤이 차 타고 요 앞까지 왔지. 고속도로 타야 한다고 저기 앞에서 내렸어.”
“어, 오빠 내려왔어? 그럼 가게 왔다 가지 그냥 간 거야?”
“저도 바쁘니, 못 보고 간다고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더라. 자, 이거 받아라. 태윤이가 얼마 못 넣었다 하더만. 가게 필요한 거나 사래.”
이모는 옷 안쪽에서 주섬주섬 봉투를 꺼내 수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뭘, 이런 걸. 오빠도 여유 없을 텐데.”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그렇지. 너한테 이 정도는 해야지. 나중에 전화나 한번 해 줘. 태윤이가 축하 인사 먼저 해야 하는데 너희 집에도 그렇고 미안해서 말을 못 꺼내나 봐.”
김이 올라오는 떡을 이고 온 이모에게 미안한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이 섞였다. 수현은 칼과 접시를 챙겨 왔다. 자르려고 덤비는데 이모가 손을 저으며 가만있어 보라 했다.
“개업식은 안 해도 고사는 지내야제.”
가게 안을 살펴보던 이모는 언제 챙겨 왔는지 굵은 소금을 어디선가 꺼내 구석구석 뿌렸다. 방향을 가늠해 보고 가게 정문을 향해 보자기를 펼쳐 놓고 시루를 얹었다.
수현에게 절을 하라 했다. 얼떨결에 절을 했다. 뭐라도 빌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 수현은 김이 오르는 떡에 침만 꿀꺽 넘겼다.
“이모 이제 떡 먹어도 돼?”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간다.
“주변에도 나눠야지. 썰어 주마. 접시 챙겨 와.”
수현은 이제는 먹나 싶었다 다시 움직여 접시를 챙겨 왔다. 굵은 손마디의 이모는 커다란 식칼로 뜨겁지도 않은지 떡을 숭덩숭덩 잘라 냈다.
“네 엄마는 아직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