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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19화
고정 관념 비틀기 (1)
급히 파견 팀을 꾸려 파라마스타의 수도, 파라알에 도착했을 땐 이미 풍비박산이 된 후였다.
“이게 뭐야.”
다람쥐와 벌이 섞인 것 같은 모습의 제작 팀장, 까나리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노랑과 검정 줄무늬가 있는 손으로 바닥의 흙을 매만졌다.
힘들게 지어놓은 광장이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수도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건 뭐지?”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투명한 연둣빛의 작은 보석을 주워 들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보석들이 주변 일대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파라알이 있던 자리 전체에 다 떨어져 있나 본데?”
“카나르비, 여기.”
“킁, 고맙습니다. 그거 오닉스라는 건데, 마르디노 님은 처음 보셨나 보군요.”
깰룩이에게 손수건을 받은 까나리가 까만색 겹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오닉스?”
“마나 폭주 현상이 일어난 곳에서만 생기는 이상한 돌입니다, 깰룩.”
“그런 게 있었다고?”
신기하다. 꽤 아름다운 보석 같은데.
“전부터 궁금했지만, 이건 대체 왜 생기는 걸까요?”
퍼롱이가 내 옆에서 고개를 디밀고 오닉스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몰라, 그냥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깰룩.”
“모른다고? 야, 아란탈인 너희들이 모르면 누가 아냐? 가져가서 연구라도 해보든가.”
그러자 깰룩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연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끝났습니다, 깰룩. 별 소득은 없었지만요. 뭘 해도 아무 반응도 없고 변화도 없어요. 그냥 엄청 단단해서 파괴하거나 변화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밖에는.”
“그럼 아이템 같은 거로라도 써. 양도 많겠다, 부서지지도 않겠다, 딱이네. 그건 됐고, 유저들은 지금 다 어디 있냐?”
“모두 저승에 모아두고 방어전 이벤트 보상 수여식과 특별 퀘스트 진행 중입니다.”
“뭐 주고 있어?”
“추가 던전 개막식에서 주려고 했던 보상들 위주로 주고, 참여한 유저 전원에게 랜덤 코스튬 박스 지급했습니다.”
“영구?”
깰룩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나고 부활하려는 유저들은 알리마스타, 카라마스타, 튜라마스타 세 왕국 중 하나 선택하게 해서 그리로 이동하게 해. 방어에 실패해서 파라마스타는 멸망했고, 재건할 때까지 사람이 살 수 없는 험지가 되는 걸로 스토리 짜 넣자.”
“알겠습니다, 깰룩.”
“플레이어 네트워크에도 파라마스타 방어전 실패로 인해 마황군이 파라알을 점령했다고 띄우고, 새로 퀘스트 따내서 다시 탈환하기 전까지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해놔. 망명 퀘스트 만들고, 개발 팀한테는 망명 성공한 파라마스타 유저들이 타 왕국도 제한 없이 다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두라고 해. 망명 실패해서 떠돌이가 된 유저 스토리도 따로 만들 테니까 추가하고.”
까나리는 아직도 하늘에서 불길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흉흉한 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마나를 운용해 보았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마법은 먹통이네.”
“아무래도 마나 차단 현상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마나 차단?”
“보통 마나가 폭주하여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관측되는 이상 현상입니다. 근방의 마나가 모두… 동결된다고 해야 하나, 사라진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마법을 전혀 쓸 수 없게 되고, 마나 폭주 때문에 일어난 재앙을 막는 것 자체가 힘든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깰룩.”
“엥?”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마나가 폭주했는데 왜 차단 현상이 일어나는 거냐?”
“그, 그건 저희도 잘…….”
“말 그대로 마나가 폭주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퍼롱이가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로 전개되는 일들이요. ‘세상의 질병과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약물이 오히려 세상을 파멸로 이끌 엄청난 부작용을 가진 약이었다’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말하는 거야?”
“아이러니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 말은 마나 폭주의 부작용이 오히려 마나의 결핍을 불러온 게 아니냐는…….”
“그래, 그런 일들을 지구에서는 아이러니하다고 해.”
“그, 그렇군요. 뭐 하여튼 그런 게 아닐까요?”
나는 미간을 모은 채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나의 폭주가 오히려 마나의 차단을 일으킨다?
단순히 그런 부작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다고? 너무 비약된 거 아닌가?
폭주, 결핍, 부작용.
부작용 때문이라 하지만, 폭주라는 건 결핍과 전혀 다른 게 아닌가.
‘잠깐만, 차단이라고?’
“마나는 지구에서 쓰는 전기라든가 그런 것보다 훨씬 효율도 좋고 활용성이 무궁무진해.”
다시금 떠오른 말이었다.
‘그래! 전기! 만약 마나를 전기라고 생각한다면?’
재빨리 쪼그리고 앉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땅바닥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깰룩?”
“잠깐만 기다려 봐.”
“무슨 표 같은데요.”
아즈칸이 바닥에 그려진 표를 보기 위해 거대한 머리를 땅바닥 가까이 숙였다.
“이 모든 일을 해결할 마법의 수식이다.”
내 대답에 깰룩이와 퍼롱이, 그리고 까나리와 아즈칸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까나리, 광장 다시 복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냐? 기획안 내가 바로 줄 수 있는데, 파라알 전체가 던전인 것처럼 바꿀 거거든?”
“음, 마법은 아직 못 쓰는 거죠? 그럼 직접 노가다를 뛰어야 하니까, 최대 인력만 투입해 주신다면 사흘 정도 걸릴 겁니다.”
“오케이. 깰룩아, 비번 들어간 애들이랑 휴가 나간 애들 복귀시켜서 싹 다 여기다 투입하라고 해라. 나중에 일당 두 배로 쳐서 준다고 그래.”
“알겠습니다, 깰룩.”
“그럼 다시 돌아가 볼까.”
배불뚝이랑 할 얘기도 남았고.
“이사회의 강력한 반발로 징계 위원회는 취소되었네.”
배불뚝이가 짧은 손으로 불룩 나온 배를 통통 튕기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의 혐의가 벗겨진 건 아니야. 이걸 보게.”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떤 이미지가 허공에 나타났다.
대강당에서 몬스터 노조원들을 향해 강연을 열고 있는 배불뚝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배불뚝이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날 몰래 찍은 또 다른 영상이 함께 띄워져 있었다.
“저거 나 아니야. 난 저때 광장에서 이벤트 열고 있었다고.”
“그야 우리도 알고 있다네. 하지만 자네는 별의별 기상천외한 마법도 창조하지 않는가. 우리 몰래 자네가 복제 마법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게 날 몰아가려고 해?
“그게 말처럼 쉽겠냐? 설령 그렇다 해도 증거가 없잖아. 보통 이럴 땐 다른 녀석이 나로 변신했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니냐고. 변신 마법이야 호르핌 빼곤 못하는 놈도 없을 텐데, 그럼 모든 아란탈과 카킹들이 다 용의자잖아. 왜 나만 갖고 그래? 거참, 머리도 안 돌아가는 놈들일세. 누명을 씌우려면 좀 그럴듯한 핑계로 갖다 붙여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배불뚝이는 반박도 못하고 침묵했다.
“아, 그래. 만에 하나 그게 내가 일으킨 일이 맞다 쳐. 그럼 내가 왜 그걸 다시 개고생하면서 내 손으로 해결하겠냐?”
“자네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처맞고 싶냐? 내가 뭐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데?”
그때, 가만히 있던 깰룩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솔직히 말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마르디노 님께서 하신 일 맞잖습니까, 깰룩.”
“뭐?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제가 다 봤다구요, 깰룩.”
“너 드디어 미쳤냐? 너 지금 저 새끼한테 조종당하고 있는 거지?”
“아닙니다, 깰룩. 전 본 대로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더 이상 마르디노 님께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깰룩.”
“허.”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배신감에 입을 벌린 채 깰룩이를 바라보고 있자, 말문이 막혀 어버버하고 있던 배불뚝이는 깰룩이에게 흡족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자네도 더 이상 발뺌은 못할 테지. 앞으로는 직원들을 선동하는 짓 따위는 하지 말게나. 반란은 오더코르트에서도 어마어마한 중죄네. 카킹들이 예민하게 구는 것도 괜히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부탁하네.”
“그러니까 내가 안 했다고!”
“말이 안 통하는군. 그럼 수고하게.”
배불뚝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하.”
우주를 폭발시켜 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죄, 죄송합니다, 깰룩.”
깰룩이가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긴 뭘 죄송해. 잘했어, 새끼.”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흰 털이 복슬복슬한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저는 아직도 왜 마르디노 님이 자신의 잘못으로 덮어씌우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깰룩.”
“그게 지금 걔네들이 원하는 그림이라서 그래.”
“하지만 카킹들이 왜…….”
“그걸 내가 아냐? 근데 너도 아까 봤잖아. 갑자기 쳐들어와서 나 몰아가는 거. 때마침 마나 폭주다 뭐다 하면서 파견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징계 위원회 끌려갔을걸. 뭐, 그만큼 내가 카킹 새끼들한테 밉보였다는 거 아니겠냐.”
“그렇군요, 깰룩…….”
깰룩이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걸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카킹들이 그들의 계획대로 나를 물 먹였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두 번째, 깰룩이가 배불뚝이의 수하로서 더욱 신임을 얻게 된다는 것.
‘대체 그 망할 놈들이 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배불뚝이와 카킹들을 상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파라마스타의 수도 파라알은 정확히 3일 후 재건축되었다. 마황군이 완전히 점령하여 도시 전체가 던전이 되었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솔직히 좀 의왼데? 시험 삼아 써보라고 한 거였는데 말이야. 생각한 것보다 시나리오가 더 잘 뽑혔네.”
“하하, 칭찬이시죠?”
퍼롱이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응, 그걸로 퀘스트 만들어도 될 것 같아. 바로 시작해.”
시나리오를 다시 건네받은 퍼롱이는 좋아죽을 것처럼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파라마스타 왕국 소속 플레이어들은 파라알을 점거하고 있는 마황군을 물리치고, 수도를 탈환하라는 퀘스트를 진행했다. 타 소속 왕국의 플레이어들에게는 그것을 도우라는 협력 퀘스트가 주어졌다.
“마르디노 님, 방금 전 파라알이 무사히 탈환되었습니다, 깰룩.”
“응, 안 그래도 모니터링하고 있었어.”
어마어마한 수의 플레이어들이 파라알로 몰려들자, 마나 폭주와 차단 현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예상대로였다.
“그럼 신규 던전은 어떻게 할까요?”
“이제 곧 정기 점검이니까, 그때 전면 오픈해. 네 왕국 전부.”
“알겠습니다, 깰룩. 그런데 마르디노 님, 배 안 고프십니까? 빵 좀 드릴까요?”
깰룩이가 개구리 모양의 빵을 건넸다.
“빵으로 맞고 싶다고?”
“죄, 죄송합니다, 깰룩.”
험악한 표정을 본 깰룩이는 들고 있던 빵을 제 입 속에 넣고 씹지도 못한 채 꿀꺽 삼켰다. 나는 클베 때 맘이시리네 때문에 목 막혀 죽을 뻔한 이후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후…….”
그러고 보니 파라알 복구하고 새 퀘스트 짜고 테스트까지 하느라고 종일 먹은 게 커피밖에 없다.
“일이나 해라.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랬어.”
내 눈치를 보며 손이 안 보이도록 글을 쓰던 퍼롱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하고 있어라.”
혀를 차며 포탈을 탔다.
배불뚝이 이름 대고 매점이나 털어와야지.
일주일 후.
신규 던전이 다시 오픈되었다. 파라마스타 왕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 왕국에도 모두 신규 던전이 설치되었다.
전과 비교하여 바뀐 점이 있다고 한다면, 원래는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 던전이었지만, 몰래 수정을 거쳐 마황군이 떼거지로 등장하는 던전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개편되었다는 것과…….
“이게 말이 되냐?”
깰룩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깰룩.”
“그치?”
기가 막힌 표정으로 메인 디스플레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파라마스타 동시 접속자 수: 3,144,312]
“다른 왕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깰룩. 평균적으로 백만 명 정도가 증가했습니다.”
[총 동시 접속자 수: 12,520,181]
“어떻게 플레이어가 더 늘 수 있지?”
“정말 아이러니하네요.”
퍼롱이가 말했다.
“아마도 그 맘이시리네라는 유저가 올린 파라마스타 방어전 이벤트 영상이 지구 쪽에서 큰 인기를 끈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깰룩.”
확실히 아즈칸과 내가 보여준 것만으로도 트레일러 영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돈을 때려 부은 할리우드 재난 영화도 그 정도로 스펙터클하지는 않을 거다.
“뭐, 그래. 어느 쪽이든 좋아, 좋다고.”
이대로만 간다면 마나 폭주가 무사히 가라앉고, 이 망할 행성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슬슬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깰룩.”
“그래. 퍼롱이는 면접 보는 날이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배불뚝이한테 따로 말해뒀으니까 너는 그냥 가서 숨만 쉬고 와도 붙을 거야. 면접장만 잘 찾아가면 말이지.”
퍼롱이가 멋쩍게 웃었다.
“깰룩이, 넌 어디 간다고?”
“레이자냐한테요. 가족들이 회사에 면담을 신청했거든요, 깰룩.”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아직 병원에 있었지.
마지막 병문안 때 본 레이자냐의 모습은 정말 딱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세상의 모든 불쌍한 사람들이 몰려와도 레이자냐한텐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가족 분들한테 말씀 좀 잘 드려라. 나도 틈틈이 병문안 갈 테니까. 그럼 갔다 올게. 이러다 늦겠다.”
“다녀오십시오, 깰룩.”
“이따가 봬요.”
“F―Paramasta로 이동.”
[아노 방가르 마르디노 님, 승인되었습니다. 3초 후 이동됩니다.]
눈을 뜬 곳은 미리 이동 장소로 설정해 놓은 파라알 광장의 시계탑 내부였다. 재빨리 시계탑 내부의 문을 열고 슬쩍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은 유저들로 인산인해였다. 지구인으로 변신해서, 혹은 외계인 모습 그대로 NPC로 움직이고 있는 오더코르트인들도 보였다.
신규 던전에 몬스터들이 추가로 배치됨에 따라, 파라알 광장에 상점과 여러 기관도 증설했다. 예전에 실수로 내뱉은 스크롤 상점도 잊지 않고 만들어두었다. 각 던전의 이용도를 높이기 위한 퀘스트들 또한 추가되었다.
“어어! 저기 안방마 님이다!”
“우와, 진짜다!”
“사람 잘못 봤어요!”
서둘러 얼굴을 가리며 동문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방어전 이벤트 이후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저기로 도망간다!”
“마 님 잡아라!”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나를 뒤쫓아 동문으로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랭커들을 위한 개인 정보 설정과 코스튬 기능을 더 추가해야겠어.’
득달같이 달려드는 유저들을 피해 동쪽의 파쿠르 던전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던전으로 향하는 포탈은 모두 세 개가 있었다. 솔로 플레이, 친구 플레이, 일대일 랜덤 매치 플레이 던전으로 통하는 포탈이었다.
솔플 포탈을 향해 뛰어가던 순간, 누군가가 모퉁이에서 내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비, 비켜요!”
크게 소리쳤지만, 몰려오는 유저들을 보고 당황한 그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으악!”
결국 그 유저와 제대로 부딪힌 나는 바닥을 나뒹굴며 포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이고.”
[파쿠르 던전(1:1 랜덤 매치)에 입장하셨습니다.]
[1:1 랜덤 매치 플레이로 타 왕국의 헌터들과도 자유롭게 대결하실 수 있습니다.]
[상대 플레이어를 매치 중입니다.]
[매치 완료.]
[‘안방마’ 님, 파쿠르 던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엉덩이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어느새 낯선 공간에 와 있었다.
두 명 정도의 플레이어가 나란히 설 수 있는 좁고 매우 긴 통로였다. 바닥에는 앞을 가리키는 커다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앞뒤에 푸른 마나로 된 투명한 벽이 있고, 앞쪽 벽 너머로 낭떠러지와 발판들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게 보였다.
[‘Phill’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자, 옆 라인에 또 다른 플레이어가 나타났다.
“응?”
“음? 뭐야, 또 너야?”
방어전 이벤트 때 만난 필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라뇨. 전부터 거슬렸는데 우리가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합니까?”
“아니.”
“…….”
[결승점에 먼저 도달하는 플레이어가 승리합니다. 3회 사망 시 자동으로 패배하며 스테이지가 종료됩니다.]
[파쿠르 던전에서는 공격 스킬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10초 후, 플레이가 시작됩니다.]
[후방 게이트를 개방합니다.]
뒤쪽에 있던 마나 벽이 흐물거리며 한가운데로 뭉쳐지더니, 포탈이 되었다. 빛 속에서 몬스터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게이트를 통해 마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탈출하십시오.]
“쏘 시오라랄라!(다 잡아 먹어버리자!)”
수많은 몬스터 무리가 좁은 통로를 가득 메운 채, 벽이며 천장이며 할 것 없이 찰싹 달라붙어 이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
연출은 제법 잘된 것 같다.
[파쿠르를 시작합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푸른 마나 벽이 사라졌다.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튀어 나가자, 필이 바로 뒤에 붙어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오십쇼.”
“입이 발보다 빠르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역시 관종.”
첫 번째 구덩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으쌰!”
망설임 없이 몸을 띄우고, 공중에서 몸을 굽혔다 펴면서 한 바퀴 돌았다. 시야 한구석에 보이는 게이지가 조금 차올랐다.
유저들은 이곳에서 사망할 경우 두 번이나 안전한 곳에서 부활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내게 있어 게임이 아니라 현실. 여기서 떨어진다든가, 몬스터에게 제대로 한 대 맞든가, 튀어나오는 함정에 걸리는 즉시 사망이다. 게임 캐릭터가 아니니 부활 따윈 할 수 없었다.
즉, 조금도 실수해서는 안 된다.
슬쩍 보니 필은 양쪽으로 세워진 벽을 번갈아 박차면서 구덩이를 건너고 있었다.
‘제법인데?’
하지만 앞서고 있는 건 나였다.
세 번째 구덩이가 나왔을 때는, 건너편에 착지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낭떠러지 위로 나선을 그리며 발판들이 둥둥 떠 있었다. 그대로 위로 솟구쳐 정확하게 발판을 밟으며 위쪽으로 올라갔다.
“조질리아, 노슬리리테!(이런, 놓쳤다!)”
몬스터들이 안타깝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필도 지체 없이 뛰어올라 발판을 밟았다.
그때, 빨간불과 함께 경고음이 수차례 들려왔다.
[경고! 비오리우스 무리가 출몰했습니다. 낭떠러지에서 벗어나십시오.]
“끼리리야이리로!(이제 우리 차례구나!)”
어두컴컴한 낭떠러지 밑에서 비룡이 녀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아래에서 쏜살같이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비룡이 무리가 보였다.
앞으로 발판 두 개만 더 건너뛰면, 파워 부스터나 슈퍼 점프 중 한 개를 쓸 수 있다. 내겐 아무 의미도 없지만.
머리 위에 보이는 발판으로 점프하려는 순간, 왼쪽 벽에서 구멍이 열리더니 수리검이 휙, 하고 날아들었다.
“흐잇차!”
공중에서 가볍게 몸을 틀어 수리검을 빗겨냈다. 그러자 게이지가 가득 차며 스페셜 스킬이 활성화되었다.
“크크큭, 느려도 너무 느린 거 아닙니까?”
한껏 우쭐대며 아직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필을 도발했다.
“닥쳐, 관종.”
그 순간, 필이 나를 앞질렀다.
“엥?!”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높이 차가 얼만데.
벌써 저만치 위쪽으로 멀어진 필의 뒷모습을 쫓았다.
“미친.”
필은 비오리우스 한 마리의 주둥이에 이마에 두르고 있던 띠로 재갈을 물려, 그 위에 올라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고정 관념 비틀기 (1)
급히 파견 팀을 꾸려 파라마스타의 수도, 파라알에 도착했을 땐 이미 풍비박산이 된 후였다.
“이게 뭐야.”
다람쥐와 벌이 섞인 것 같은 모습의 제작 팀장, 까나리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노랑과 검정 줄무늬가 있는 손으로 바닥의 흙을 매만졌다.
힘들게 지어놓은 광장이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수도 전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건 뭐지?”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투명한 연둣빛의 작은 보석을 주워 들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보석들이 주변 일대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파라알이 있던 자리 전체에 다 떨어져 있나 본데?”
“카나르비, 여기.”
“킁, 고맙습니다. 그거 오닉스라는 건데, 마르디노 님은 처음 보셨나 보군요.”
깰룩이에게 손수건을 받은 까나리가 까만색 겹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오닉스?”
“마나 폭주 현상이 일어난 곳에서만 생기는 이상한 돌입니다, 깰룩.”
“그런 게 있었다고?”
신기하다. 꽤 아름다운 보석 같은데.
“전부터 궁금했지만, 이건 대체 왜 생기는 걸까요?”
퍼롱이가 내 옆에서 고개를 디밀고 오닉스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몰라, 그냥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깰룩.”
“모른다고? 야, 아란탈인 너희들이 모르면 누가 아냐? 가져가서 연구라도 해보든가.”
그러자 깰룩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연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끝났습니다, 깰룩. 별 소득은 없었지만요. 뭘 해도 아무 반응도 없고 변화도 없어요. 그냥 엄청 단단해서 파괴하거나 변화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밖에는.”
“그럼 아이템 같은 거로라도 써. 양도 많겠다, 부서지지도 않겠다, 딱이네. 그건 됐고, 유저들은 지금 다 어디 있냐?”
“모두 저승에 모아두고 방어전 이벤트 보상 수여식과 특별 퀘스트 진행 중입니다.”
“뭐 주고 있어?”
“추가 던전 개막식에서 주려고 했던 보상들 위주로 주고, 참여한 유저 전원에게 랜덤 코스튬 박스 지급했습니다.”
“영구?”
깰룩이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나고 부활하려는 유저들은 알리마스타, 카라마스타, 튜라마스타 세 왕국 중 하나 선택하게 해서 그리로 이동하게 해. 방어에 실패해서 파라마스타는 멸망했고, 재건할 때까지 사람이 살 수 없는 험지가 되는 걸로 스토리 짜 넣자.”
“알겠습니다, 깰룩.”
“플레이어 네트워크에도 파라마스타 방어전 실패로 인해 마황군이 파라알을 점령했다고 띄우고, 새로 퀘스트 따내서 다시 탈환하기 전까지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해놔. 망명 퀘스트 만들고, 개발 팀한테는 망명 성공한 파라마스타 유저들이 타 왕국도 제한 없이 다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두라고 해. 망명 실패해서 떠돌이가 된 유저 스토리도 따로 만들 테니까 추가하고.”
까나리는 아직도 하늘에서 불길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흉흉한 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마나를 운용해 보았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마법은 먹통이네.”
“아무래도 마나 차단 현상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마나 차단?”
“보통 마나가 폭주하여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관측되는 이상 현상입니다. 근방의 마나가 모두… 동결된다고 해야 하나, 사라진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마법을 전혀 쓸 수 없게 되고, 마나 폭주 때문에 일어난 재앙을 막는 것 자체가 힘든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깰룩.”
“엥?”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마나가 폭주했는데 왜 차단 현상이 일어나는 거냐?”
“그, 그건 저희도 잘…….”
“말 그대로 마나가 폭주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퍼롱이가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로 전개되는 일들이요. ‘세상의 질병과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약물이 오히려 세상을 파멸로 이끌 엄청난 부작용을 가진 약이었다’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말하는 거야?”
“아이러니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 말은 마나 폭주의 부작용이 오히려 마나의 결핍을 불러온 게 아니냐는…….”
“그래, 그런 일들을 지구에서는 아이러니하다고 해.”
“그, 그렇군요. 뭐 하여튼 그런 게 아닐까요?”
나는 미간을 모은 채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나의 폭주가 오히려 마나의 차단을 일으킨다?
단순히 그런 부작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다고? 너무 비약된 거 아닌가?
폭주, 결핍, 부작용.
부작용 때문이라 하지만, 폭주라는 건 결핍과 전혀 다른 게 아닌가.
‘잠깐만, 차단이라고?’
“마나는 지구에서 쓰는 전기라든가 그런 것보다 훨씬 효율도 좋고 활용성이 무궁무진해.”
다시금 떠오른 말이었다.
‘그래! 전기! 만약 마나를 전기라고 생각한다면?’
재빨리 쪼그리고 앉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땅바닥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깰룩?”
“잠깐만 기다려 봐.”
“무슨 표 같은데요.”
아즈칸이 바닥에 그려진 표를 보기 위해 거대한 머리를 땅바닥 가까이 숙였다.
“이 모든 일을 해결할 마법의 수식이다.”
내 대답에 깰룩이와 퍼롱이, 그리고 까나리와 아즈칸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까나리, 광장 다시 복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냐? 기획안 내가 바로 줄 수 있는데, 파라알 전체가 던전인 것처럼 바꿀 거거든?”
“음, 마법은 아직 못 쓰는 거죠? 그럼 직접 노가다를 뛰어야 하니까, 최대 인력만 투입해 주신다면 사흘 정도 걸릴 겁니다.”
“오케이. 깰룩아, 비번 들어간 애들이랑 휴가 나간 애들 복귀시켜서 싹 다 여기다 투입하라고 해라. 나중에 일당 두 배로 쳐서 준다고 그래.”
“알겠습니다, 깰룩.”
“그럼 다시 돌아가 볼까.”
배불뚝이랑 할 얘기도 남았고.
“이사회의 강력한 반발로 징계 위원회는 취소되었네.”
배불뚝이가 짧은 손으로 불룩 나온 배를 통통 튕기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의 혐의가 벗겨진 건 아니야. 이걸 보게.”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떤 이미지가 허공에 나타났다.
대강당에서 몬스터 노조원들을 향해 강연을 열고 있는 배불뚝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배불뚝이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날 몰래 찍은 또 다른 영상이 함께 띄워져 있었다.
“저거 나 아니야. 난 저때 광장에서 이벤트 열고 있었다고.”
“그야 우리도 알고 있다네. 하지만 자네는 별의별 기상천외한 마법도 창조하지 않는가. 우리 몰래 자네가 복제 마법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게 날 몰아가려고 해?
“그게 말처럼 쉽겠냐? 설령 그렇다 해도 증거가 없잖아. 보통 이럴 땐 다른 녀석이 나로 변신했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니냐고. 변신 마법이야 호르핌 빼곤 못하는 놈도 없을 텐데, 그럼 모든 아란탈과 카킹들이 다 용의자잖아. 왜 나만 갖고 그래? 거참, 머리도 안 돌아가는 놈들일세. 누명을 씌우려면 좀 그럴듯한 핑계로 갖다 붙여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배불뚝이는 반박도 못하고 침묵했다.
“아, 그래. 만에 하나 그게 내가 일으킨 일이 맞다 쳐. 그럼 내가 왜 그걸 다시 개고생하면서 내 손으로 해결하겠냐?”
“자네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처맞고 싶냐? 내가 뭐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데?”
그때, 가만히 있던 깰룩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솔직히 말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마르디노 님께서 하신 일 맞잖습니까, 깰룩.”
“뭐?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제가 다 봤다구요, 깰룩.”
“너 드디어 미쳤냐? 너 지금 저 새끼한테 조종당하고 있는 거지?”
“아닙니다, 깰룩. 전 본 대로 말씀드리는 것뿐이에요. 더 이상 마르디노 님께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깰룩.”
“허.”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배신감에 입을 벌린 채 깰룩이를 바라보고 있자, 말문이 막혀 어버버하고 있던 배불뚝이는 깰룩이에게 흡족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자네도 더 이상 발뺌은 못할 테지. 앞으로는 직원들을 선동하는 짓 따위는 하지 말게나. 반란은 오더코르트에서도 어마어마한 중죄네. 카킹들이 예민하게 구는 것도 괜히 그러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부탁하네.”
“그러니까 내가 안 했다고!”
“말이 안 통하는군. 그럼 수고하게.”
배불뚝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하.”
우주를 폭발시켜 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죄, 죄송합니다, 깰룩.”
깰룩이가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긴 뭘 죄송해. 잘했어, 새끼.”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흰 털이 복슬복슬한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저는 아직도 왜 마르디노 님이 자신의 잘못으로 덮어씌우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깰룩.”
“그게 지금 걔네들이 원하는 그림이라서 그래.”
“하지만 카킹들이 왜…….”
“그걸 내가 아냐? 근데 너도 아까 봤잖아. 갑자기 쳐들어와서 나 몰아가는 거. 때마침 마나 폭주다 뭐다 하면서 파견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징계 위원회 끌려갔을걸. 뭐, 그만큼 내가 카킹 새끼들한테 밉보였다는 거 아니겠냐.”
“그렇군요, 깰룩…….”
깰룩이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걸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카킹들이 그들의 계획대로 나를 물 먹였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두 번째, 깰룩이가 배불뚝이의 수하로서 더욱 신임을 얻게 된다는 것.
‘대체 그 망할 놈들이 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배불뚝이와 카킹들을 상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파라마스타의 수도 파라알은 정확히 3일 후 재건축되었다. 마황군이 완전히 점령하여 도시 전체가 던전이 되었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솔직히 좀 의왼데? 시험 삼아 써보라고 한 거였는데 말이야. 생각한 것보다 시나리오가 더 잘 뽑혔네.”
“하하, 칭찬이시죠?”
퍼롱이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응, 그걸로 퀘스트 만들어도 될 것 같아. 바로 시작해.”
시나리오를 다시 건네받은 퍼롱이는 좋아죽을 것처럼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파라마스타 왕국 소속 플레이어들은 파라알을 점거하고 있는 마황군을 물리치고, 수도를 탈환하라는 퀘스트를 진행했다. 타 소속 왕국의 플레이어들에게는 그것을 도우라는 협력 퀘스트가 주어졌다.
“마르디노 님, 방금 전 파라알이 무사히 탈환되었습니다, 깰룩.”
“응, 안 그래도 모니터링하고 있었어.”
어마어마한 수의 플레이어들이 파라알로 몰려들자, 마나 폭주와 차단 현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예상대로였다.
“그럼 신규 던전은 어떻게 할까요?”
“이제 곧 정기 점검이니까, 그때 전면 오픈해. 네 왕국 전부.”
“알겠습니다, 깰룩. 그런데 마르디노 님, 배 안 고프십니까? 빵 좀 드릴까요?”
깰룩이가 개구리 모양의 빵을 건넸다.
“빵으로 맞고 싶다고?”
“죄, 죄송합니다, 깰룩.”
험악한 표정을 본 깰룩이는 들고 있던 빵을 제 입 속에 넣고 씹지도 못한 채 꿀꺽 삼켰다. 나는 클베 때 맘이시리네 때문에 목 막혀 죽을 뻔한 이후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후…….”
그러고 보니 파라알 복구하고 새 퀘스트 짜고 테스트까지 하느라고 종일 먹은 게 커피밖에 없다.
“일이나 해라.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랬어.”
내 눈치를 보며 손이 안 보이도록 글을 쓰던 퍼롱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하고 있어라.”
혀를 차며 포탈을 탔다.
배불뚝이 이름 대고 매점이나 털어와야지.
일주일 후.
신규 던전이 다시 오픈되었다. 파라마스타 왕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 왕국에도 모두 신규 던전이 설치되었다.
전과 비교하여 바뀐 점이 있다고 한다면, 원래는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 던전이었지만, 몰래 수정을 거쳐 마황군이 떼거지로 등장하는 던전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개편되었다는 것과…….
“이게 말이 되냐?”
깰룩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깰룩.”
“그치?”
기가 막힌 표정으로 메인 디스플레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파라마스타 동시 접속자 수: 3,144,312]
“다른 왕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깰룩. 평균적으로 백만 명 정도가 증가했습니다.”
[총 동시 접속자 수: 12,520,181]
“어떻게 플레이어가 더 늘 수 있지?”
“정말 아이러니하네요.”
퍼롱이가 말했다.
“아마도 그 맘이시리네라는 유저가 올린 파라마스타 방어전 이벤트 영상이 지구 쪽에서 큰 인기를 끈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깰룩.”
확실히 아즈칸과 내가 보여준 것만으로도 트레일러 영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돈을 때려 부은 할리우드 재난 영화도 그 정도로 스펙터클하지는 않을 거다.
“뭐, 그래. 어느 쪽이든 좋아, 좋다고.”
이대로만 간다면 마나 폭주가 무사히 가라앉고, 이 망할 행성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슬슬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깰룩.”
“그래. 퍼롱이는 면접 보는 날이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배불뚝이한테 따로 말해뒀으니까 너는 그냥 가서 숨만 쉬고 와도 붙을 거야. 면접장만 잘 찾아가면 말이지.”
퍼롱이가 멋쩍게 웃었다.
“깰룩이, 넌 어디 간다고?”
“레이자냐한테요. 가족들이 회사에 면담을 신청했거든요, 깰룩.”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아직 병원에 있었지.
마지막 병문안 때 본 레이자냐의 모습은 정말 딱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세상의 모든 불쌍한 사람들이 몰려와도 레이자냐한텐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가족 분들한테 말씀 좀 잘 드려라. 나도 틈틈이 병문안 갈 테니까. 그럼 갔다 올게. 이러다 늦겠다.”
“다녀오십시오, 깰룩.”
“이따가 봬요.”
“F―Paramasta로 이동.”
[아노 방가르 마르디노 님, 승인되었습니다. 3초 후 이동됩니다.]
눈을 뜬 곳은 미리 이동 장소로 설정해 놓은 파라알 광장의 시계탑 내부였다. 재빨리 시계탑 내부의 문을 열고 슬쩍 광장으로 나갔다.
광장은 유저들로 인산인해였다. 지구인으로 변신해서, 혹은 외계인 모습 그대로 NPC로 움직이고 있는 오더코르트인들도 보였다.
신규 던전에 몬스터들이 추가로 배치됨에 따라, 파라알 광장에 상점과 여러 기관도 증설했다. 예전에 실수로 내뱉은 스크롤 상점도 잊지 않고 만들어두었다. 각 던전의 이용도를 높이기 위한 퀘스트들 또한 추가되었다.
“어어! 저기 안방마 님이다!”
“우와, 진짜다!”
“사람 잘못 봤어요!”
서둘러 얼굴을 가리며 동문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방어전 이벤트 이후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저기로 도망간다!”
“마 님 잡아라!”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나를 뒤쫓아 동문으로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랭커들을 위한 개인 정보 설정과 코스튬 기능을 더 추가해야겠어.’
득달같이 달려드는 유저들을 피해 동쪽의 파쿠르 던전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던전으로 향하는 포탈은 모두 세 개가 있었다. 솔로 플레이, 친구 플레이, 일대일 랜덤 매치 플레이 던전으로 통하는 포탈이었다.
솔플 포탈을 향해 뛰어가던 순간, 누군가가 모퉁이에서 내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비, 비켜요!”
크게 소리쳤지만, 몰려오는 유저들을 보고 당황한 그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으악!”
결국 그 유저와 제대로 부딪힌 나는 바닥을 나뒹굴며 포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이고.”
[파쿠르 던전(1:1 랜덤 매치)에 입장하셨습니다.]
[1:1 랜덤 매치 플레이로 타 왕국의 헌터들과도 자유롭게 대결하실 수 있습니다.]
[상대 플레이어를 매치 중입니다.]
[매치 완료.]
[‘안방마’ 님, 파쿠르 던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엉덩이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어느새 낯선 공간에 와 있었다.
두 명 정도의 플레이어가 나란히 설 수 있는 좁고 매우 긴 통로였다. 바닥에는 앞을 가리키는 커다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앞뒤에 푸른 마나로 된 투명한 벽이 있고, 앞쪽 벽 너머로 낭떠러지와 발판들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게 보였다.
[‘Phill’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자, 옆 라인에 또 다른 플레이어가 나타났다.
“응?”
“음? 뭐야, 또 너야?”
방어전 이벤트 때 만난 필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라뇨. 전부터 거슬렸는데 우리가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합니까?”
“아니.”
“…….”
[결승점에 먼저 도달하는 플레이어가 승리합니다. 3회 사망 시 자동으로 패배하며 스테이지가 종료됩니다.]
[파쿠르 던전에서는 공격 스킬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10초 후, 플레이가 시작됩니다.]
[후방 게이트를 개방합니다.]
뒤쪽에 있던 마나 벽이 흐물거리며 한가운데로 뭉쳐지더니, 포탈이 되었다. 빛 속에서 몬스터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게이트를 통해 마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탈출하십시오.]
“쏘 시오라랄라!(다 잡아 먹어버리자!)”
수많은 몬스터 무리가 좁은 통로를 가득 메운 채, 벽이며 천장이며 할 것 없이 찰싹 달라붙어 이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
연출은 제법 잘된 것 같다.
[파쿠르를 시작합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푸른 마나 벽이 사라졌다.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튀어 나가자, 필이 바로 뒤에 붙어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오십쇼.”
“입이 발보다 빠르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역시 관종.”
첫 번째 구덩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으쌰!”
망설임 없이 몸을 띄우고, 공중에서 몸을 굽혔다 펴면서 한 바퀴 돌았다. 시야 한구석에 보이는 게이지가 조금 차올랐다.
유저들은 이곳에서 사망할 경우 두 번이나 안전한 곳에서 부활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내게 있어 게임이 아니라 현실. 여기서 떨어진다든가, 몬스터에게 제대로 한 대 맞든가, 튀어나오는 함정에 걸리는 즉시 사망이다. 게임 캐릭터가 아니니 부활 따윈 할 수 없었다.
즉, 조금도 실수해서는 안 된다.
슬쩍 보니 필은 양쪽으로 세워진 벽을 번갈아 박차면서 구덩이를 건너고 있었다.
‘제법인데?’
하지만 앞서고 있는 건 나였다.
세 번째 구덩이가 나왔을 때는, 건너편에 착지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낭떠러지 위로 나선을 그리며 발판들이 둥둥 떠 있었다. 그대로 위로 솟구쳐 정확하게 발판을 밟으며 위쪽으로 올라갔다.
“조질리아, 노슬리리테!(이런, 놓쳤다!)”
몬스터들이 안타깝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필도 지체 없이 뛰어올라 발판을 밟았다.
그때, 빨간불과 함께 경고음이 수차례 들려왔다.
[경고! 비오리우스 무리가 출몰했습니다. 낭떠러지에서 벗어나십시오.]
“끼리리야이리로!(이제 우리 차례구나!)”
어두컴컴한 낭떠러지 밑에서 비룡이 녀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아래에서 쏜살같이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비룡이 무리가 보였다.
앞으로 발판 두 개만 더 건너뛰면, 파워 부스터나 슈퍼 점프 중 한 개를 쓸 수 있다. 내겐 아무 의미도 없지만.
머리 위에 보이는 발판으로 점프하려는 순간, 왼쪽 벽에서 구멍이 열리더니 수리검이 휙, 하고 날아들었다.
“흐잇차!”
공중에서 가볍게 몸을 틀어 수리검을 빗겨냈다. 그러자 게이지가 가득 차며 스페셜 스킬이 활성화되었다.
“크크큭, 느려도 너무 느린 거 아닙니까?”
한껏 우쭐대며 아직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필을 도발했다.
“닥쳐, 관종.”
그 순간, 필이 나를 앞질렀다.
“엥?!”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높이 차가 얼만데.
벌써 저만치 위쪽으로 멀어진 필의 뒷모습을 쫓았다.
“미친.”
필은 비오리우스 한 마리의 주둥이에 이마에 두르고 있던 띠로 재갈을 물려, 그 위에 올라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