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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인천공항 내 모 활주로.
막 착륙한 날렵한 동체의 자가용 비행기 아래에 검은색 리무진 몇 대가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리무진에서 내린 일단의 사람들은 두 줄로 길게 줄지어 선 채 벌써 30분이 넘도록 오매불망 비행기만 바라보고 있다.
‘이거 참, 그만 나오실 때가 됐는데…….’
무리의 맨 앞에 선 민식은 직접 사서 들고 온 화려한 꽃다발을 어색한 시선으로 훑은 다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45분. 비행기가 도착한 지 자그마치 45분이 지나도록 오늘의 주인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10시 45분. 설마, 벌써 주무시고 계신 건 아닐 텐데…….’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평소 그분의 취침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다. 시차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그분은 여전히 이곳 현재의 시각에 맞추어 무언가 일을 하고 계시리라. 원래 습관이 그랬다. 어느 곳에 있든 상관없이, 아무리 피곤해도 5시 정각에 눈을 떠서 자정 무렵에 잠드는 건 10살이 되기도 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죽 이어지고 있는 그분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렇다면 이불 속이거나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 식사 시간은 7시이니 식당에 있을 시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뭘 하고 있느라 여태 나오지 않고 계시는 거지?
애타는 그의 시선이 다시 비행기 동체와 연결된 계단을 지나 단단히 닫힌 문으로 향했다. 저 문은 왜 아직도 열리지 않고 있는 걸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까? 민식의 눈에 다시 진한 근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꼭 데리고 오너라.
아침부터 출발 직전까지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던 ‘어르신’의 당부가 빠르게 뇌리를 스쳐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모셔야 한다. 그분이 내리는 명령의 이행을 위해 존재하는 자신들이었으므로.
“이번에야말로!”
각오를 담은 시선이 비행기의 문을 지나 이번엔 창 쪽을 집요하게 훑어대기 시작했다. 안쪽에서 몰래 밖을 살피던 몇몇 그림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비행기 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넓고 쾌적한 실내. 그는 한 손에 전화기를 든 채 푹신한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180이 훌쩍 넘어가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단단한 체구가 비행기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누런 달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짙은 눈썹과 날카롭고 시원한 눈매, 드높은 콧날, 단단한 턱 선과 남자다운 선을 자랑하는 두툼한 목이며 벌어진 어깨만큼이나 드넓은 가슴팍 위로 자르르 빛이 흘렀다.
흔히들 말하는, 고귀한 상을 타고난 귀족적인 외모였다. 존재감 또한 사뭇 대단해 그저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그는 이미 주변을 압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자마자 이미 황태자로 불리기 시작해 지금은 황제가 되기 위해 돌아왔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당당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선 이미 용상에 앉은 임금을 걷어차고도 남을 정도의 고귀한 위엄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물론 듬직한 그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바리톤의 낮고 강직한 목소리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근사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내뱉고 있는 말까지도 근사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 멍청한 자식들이 지금 장난하나? 감히 누구더러 오라 가라야?”
―아니, 그래도 15년 만인데…….
“닥쳐! 어울리지 않게 나라 밥 처먹더니 미친 거냐? 그 더러운 낯짝들 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관심 끄라고 해. 한번만 더 그딴 걸 용건이랍시고 사람 보냈다가는 너부터 모가지를 꺾어놓을 테니 그리 알아.”
얼음가루가 풀풀 풍기는 말을 끝으로 그 남자, 석준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귀국인 만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돌아온 길인데 땅에 발도 채 딛기 전에 웬 싸가지 쌈 싸먹을 인간들이 나타나 그의 발치에서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알고 보낸 거야?’
서늘하게 굳은 석준의 얼굴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활주로에 주욱 늘어선 검은 차와 수행원들의 모습이 칼처럼 날아와 눈에 박히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멋대가리는 없어서 무슨 조폭들처럼 까만 양복을 나란히 맞춰 입고 선 그들 무리를 보자 본능처럼 살인 충동이 치솟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쓰레기 매립장으로 보내서 직접 삽질을 해 푹 파묻어 버리고 싶은 놈들. 저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이었다.
물론, 저들을 보낸 사람들도 매한가지인 건 당연하다.
어차피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같은 곳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지위의 고하가 무슨 대수랴. 연락 한 번 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저렇게 사람을 보내온 그 ‘노물(老物)’을 떠올리자 저절로 미간에 힘줄이 서는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비행기를 도로 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비서인 장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시해. 한 기사는 아직 멀었나?”
“근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좋아. 그럼 곧바로 가는 것으로 하지.”
“어르신께서 노여워하실 텐데요.”
“내가 신경 쓰는 것 봤나?”
“죄송합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인생의 지표인 사람이다, 그는. 무언가를 두려워해 본 적도, 싫어하는 것을 곁에 두어 본 적도 없는 위대한 인간 승리의 산증인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사장님, 한 기사가 도착했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중 하나가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소식을 가져왔다. 그는 당장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체구가 천천히 일어서는 모습은 흡사 산이 일어서는 것처럼 거대함의 포스마저 풍기고 있었다.
“가지.”
그가 움직이자 내내 눈치만 살피고 있던 수행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사분란하게 길을 만들고 곧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덜컹!
내내 꽉 닫혀 있던 비행기의 문이 마침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경호원들이 먼저 뛰어나가 주위를 살핀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비행기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제법 서늘한 밤공기가 설인(雪人)이 불어낸 입김처럼 후욱 밀려들었다.
15년. 자그마치 15년 만에 맡아 보는 조국의 공기였다.
석준은 감회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차고 칼칼한 공기가 빠르게 폐를 점령하고 있었다.
“쿨룩. 이 동네도 공기가 많이 오염됐군.”
매캐한 공기를 잔뜩 들이마신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할걸. 너무 기분을 냈나 보다.
“도련님!”
기다리고 있던 민식이 화려한 꽃다발을 앞세우고 후다닥 달려오고 있었다. 유난히 반가움이 넘실대는 얼굴, 듬직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방정맞은 발걸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충실한 노인네의 개. 경호원들을 헤치고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와 서서는 넙죽 엎드리며 꽃다발을 내미는 그를 향해 문득 석준이 말했다.
“미친놈.”
“도, 도련님…….”
“청혼이라도 하러 왔냐? 어디다 대고 그딴 걸 디밀어. 노인네가 시키던?”
“아, 아니 그게…….”
민망하지만 직접 꽃집에 들러 사 왔다. 어쩐지 꽃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게…… 아닌가? 민식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그걸 본 석준이 이번엔 혀까지 차면서 다시 말했다.
“쯧쯧, 누가 노총각 아니랄까 봐. 꼴같잖은 짓은 집어치워.”
손을 내밀어 당황으로 물드는 민식의 얼굴을 옆으로 홱 치운 다음 그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만치에서, 막 내려앉은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 도련님, 어르신께서…….”
“알 바 아니라고 전해!”
세월 좀 지났다고 은근슬쩍 다리를 뻗는 짓은 용납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노인네가 알게 만들었으니 이젠 그도 자신이 잃은 것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흥, 어림없는 수작. 분명히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했어. 한 말 또 해야 하나? 벽에 똥칠을 해 봐. 내가 가나.”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날이 아니면 다시 볼 생각이 없었다.
그건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변하지 않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런 결심을 증명하듯 석준은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헬기에 올랐다. 그리고 곧 민식의 무리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헬기와 함께 휑하니 그곳을 벗어났다.
타다다다다다.
요란한 소음을 내는 헬기에 앉아 그는 빠르게 스쳐 가는 도시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변화가 빠른 나라답게 15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풍경들이 어둠을 배경으로 속속 눈앞을 스쳐 가고 있었다.
공항, 도로, 도시, 건물,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사람? 그래, 사람!
이젠 낯설기까지 한 풍경들을 눈으로 훑다 무언가를 떠올린 그가 문득 흐릿한 미소를 하나 베어 물었다. 권태로움과 짜증으로 가득했던 눈에 섬광처럼 유쾌한 빛이 하나 스치고 있었다. 그래, 사람이 있었지.
그를 돌아오게 만든 사람. 주저앉지 않게 만든 사람. 고독의 늪을 향해 스스로 침몰하지 않게 만들어 준 사람.
‘너,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드디어 서방님께서 돌아오셨다, 은하경!’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프롤로그
인천공항 내 모 활주로.
막 착륙한 날렵한 동체의 자가용 비행기 아래에 검은색 리무진 몇 대가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리무진에서 내린 일단의 사람들은 두 줄로 길게 줄지어 선 채 벌써 30분이 넘도록 오매불망 비행기만 바라보고 있다.
‘이거 참, 그만 나오실 때가 됐는데…….’
무리의 맨 앞에 선 민식은 직접 사서 들고 온 화려한 꽃다발을 어색한 시선으로 훑은 다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45분. 비행기가 도착한 지 자그마치 45분이 지나도록 오늘의 주인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10시 45분. 설마, 벌써 주무시고 계신 건 아닐 텐데…….’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평소 그분의 취침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다. 시차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그분은 여전히 이곳 현재의 시각에 맞추어 무언가 일을 하고 계시리라. 원래 습관이 그랬다. 어느 곳에 있든 상관없이, 아무리 피곤해도 5시 정각에 눈을 떠서 자정 무렵에 잠드는 건 10살이 되기도 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죽 이어지고 있는 그분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렇다면 이불 속이거나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 식사 시간은 7시이니 식당에 있을 시간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뭘 하고 있느라 여태 나오지 않고 계시는 거지?
애타는 그의 시선이 다시 비행기 동체와 연결된 계단을 지나 단단히 닫힌 문으로 향했다. 저 문은 왜 아직도 열리지 않고 있는 걸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까? 민식의 눈에 다시 진한 근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꼭 데리고 오너라.
아침부터 출발 직전까지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던 ‘어르신’의 당부가 빠르게 뇌리를 스쳐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모셔야 한다. 그분이 내리는 명령의 이행을 위해 존재하는 자신들이었으므로.
“이번에야말로!”
각오를 담은 시선이 비행기의 문을 지나 이번엔 창 쪽을 집요하게 훑어대기 시작했다. 안쪽에서 몰래 밖을 살피던 몇몇 그림자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비행기 안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넓고 쾌적한 실내. 그는 한 손에 전화기를 든 채 푹신한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180이 훌쩍 넘어가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진 단단한 체구가 비행기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누런 달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짙은 눈썹과 날카롭고 시원한 눈매, 드높은 콧날, 단단한 턱 선과 남자다운 선을 자랑하는 두툼한 목이며 벌어진 어깨만큼이나 드넓은 가슴팍 위로 자르르 빛이 흘렀다.
흔히들 말하는, 고귀한 상을 타고난 귀족적인 외모였다. 존재감 또한 사뭇 대단해 그저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그는 이미 주변을 압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자마자 이미 황태자로 불리기 시작해 지금은 황제가 되기 위해 돌아왔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당당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선 이미 용상에 앉은 임금을 걷어차고도 남을 정도의 고귀한 위엄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물론 듬직한 그 체구에서 흘러나오는 바리톤의 낮고 강직한 목소리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근사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내뱉고 있는 말까지도 근사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 멍청한 자식들이 지금 장난하나? 감히 누구더러 오라 가라야?”
―아니, 그래도 15년 만인데…….
“닥쳐! 어울리지 않게 나라 밥 처먹더니 미친 거냐? 그 더러운 낯짝들 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관심 끄라고 해. 한번만 더 그딴 걸 용건이랍시고 사람 보냈다가는 너부터 모가지를 꺾어놓을 테니 그리 알아.”
얼음가루가 풀풀 풍기는 말을 끝으로 그 남자, 석준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귀국인 만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돌아온 길인데 땅에 발도 채 딛기 전에 웬 싸가지 쌈 싸먹을 인간들이 나타나 그의 발치에서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알고 보낸 거야?’
서늘하게 굳은 석준의 얼굴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활주로에 주욱 늘어선 검은 차와 수행원들의 모습이 칼처럼 날아와 눈에 박히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멋대가리는 없어서 무슨 조폭들처럼 까만 양복을 나란히 맞춰 입고 선 그들 무리를 보자 본능처럼 살인 충동이 치솟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쓰레기 매립장으로 보내서 직접 삽질을 해 푹 파묻어 버리고 싶은 놈들. 저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이었다.
물론, 저들을 보낸 사람들도 매한가지인 건 당연하다.
어차피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같은 곳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지위의 고하가 무슨 대수랴. 연락 한 번 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저렇게 사람을 보내온 그 ‘노물(老物)’을 떠올리자 저절로 미간에 힘줄이 서는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비행기를 도로 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비서인 장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시해. 한 기사는 아직 멀었나?”
“근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좋아. 그럼 곧바로 가는 것으로 하지.”
“어르신께서 노여워하실 텐데요.”
“내가 신경 쓰는 것 봤나?”
“죄송합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인생의 지표인 사람이다, 그는. 무언가를 두려워해 본 적도, 싫어하는 것을 곁에 두어 본 적도 없는 위대한 인간 승리의 산증인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사장님, 한 기사가 도착했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중 하나가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소식을 가져왔다. 그는 당장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체구가 천천히 일어서는 모습은 흡사 산이 일어서는 것처럼 거대함의 포스마저 풍기고 있었다.
“가지.”
그가 움직이자 내내 눈치만 살피고 있던 수행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사분란하게 길을 만들고 곧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덜컹!
내내 꽉 닫혀 있던 비행기의 문이 마침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경호원들이 먼저 뛰어나가 주위를 살핀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비행기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제법 서늘한 밤공기가 설인(雪人)이 불어낸 입김처럼 후욱 밀려들었다.
15년. 자그마치 15년 만에 맡아 보는 조국의 공기였다.
석준은 감회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차고 칼칼한 공기가 빠르게 폐를 점령하고 있었다.
“쿨룩. 이 동네도 공기가 많이 오염됐군.”
매캐한 공기를 잔뜩 들이마신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할걸. 너무 기분을 냈나 보다.
“도련님!”
기다리고 있던 민식이 화려한 꽃다발을 앞세우고 후다닥 달려오고 있었다. 유난히 반가움이 넘실대는 얼굴, 듬직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방정맞은 발걸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충실한 노인네의 개. 경호원들을 헤치고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와 서서는 넙죽 엎드리며 꽃다발을 내미는 그를 향해 문득 석준이 말했다.
“미친놈.”
“도, 도련님…….”
“청혼이라도 하러 왔냐? 어디다 대고 그딴 걸 디밀어. 노인네가 시키던?”
“아, 아니 그게…….”
민망하지만 직접 꽃집에 들러 사 왔다. 어쩐지 꽃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게…… 아닌가? 민식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그걸 본 석준이 이번엔 혀까지 차면서 다시 말했다.
“쯧쯧, 누가 노총각 아니랄까 봐. 꼴같잖은 짓은 집어치워.”
손을 내밀어 당황으로 물드는 민식의 얼굴을 옆으로 홱 치운 다음 그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만치에서, 막 내려앉은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 도련님, 어르신께서…….”
“알 바 아니라고 전해!”
세월 좀 지났다고 은근슬쩍 다리를 뻗는 짓은 용납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노인네가 알게 만들었으니 이젠 그도 자신이 잃은 것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흥, 어림없는 수작. 분명히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했어. 한 말 또 해야 하나? 벽에 똥칠을 해 봐. 내가 가나.”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날이 아니면 다시 볼 생각이 없었다.
그건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변하지 않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런 결심을 증명하듯 석준은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헬기에 올랐다. 그리고 곧 민식의 무리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헬기와 함께 휑하니 그곳을 벗어났다.
타다다다다다.
요란한 소음을 내는 헬기에 앉아 그는 빠르게 스쳐 가는 도시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변화가 빠른 나라답게 15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풍경들이 어둠을 배경으로 속속 눈앞을 스쳐 가고 있었다.
공항, 도로, 도시, 건물,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사람? 그래, 사람!
이젠 낯설기까지 한 풍경들을 눈으로 훑다 무언가를 떠올린 그가 문득 흐릿한 미소를 하나 베어 물었다. 권태로움과 짜증으로 가득했던 눈에 섬광처럼 유쾌한 빛이 하나 스치고 있었다. 그래, 사람이 있었지.
그를 돌아오게 만든 사람. 주저앉지 않게 만든 사람. 고독의 늪을 향해 스스로 침몰하지 않게 만들어 준 사람.
‘너,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드디어 서방님께서 돌아오셨다, 은하경!’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