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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날마다 혼자 앉아 한숨을 푹푹 쉬고 있기에 ‘야야, 어데 좋은 동리라도 놀러 가니라.’ 했더니 ‘움직이기도 싫고 먹기도 싫어. 그냥 죽을 때까지 잠만 잤으면 좋겠어.’ 그라지 않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말에 삼 형제는 입을 꾹 다물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하경이에게 절친하다고 할 만한 친구라고는 오직 배꼽 친구인 희수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쉽게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든 건지 그녀는 좀처럼 새로운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친구뿐만 아니라, 그 예쁘장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만나 그럴듯한 연애를 하지도 못했고 모임이나 파티 따위에 참석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래서 외출 자체도 그리 길지 않은 편인 데다 그나마도 가는 곳이 빤했다.

“휴우, 어짜갔네. 인제라도 좋은 사람 찾아 시집이라도 보내놓아야 사람답게 살아 보지 않갔네?”

“오마니 생각이 그러시다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걱정 마세요, 오마니. 제가 하경이랑 이야기를 좀 해 볼게요.”

“기럴래?”

“예, 오마니. 그러니 걱정 고만 하시고 진지 마저 드세요. 여기, 이 굴비 좀 자셔 보세요. 아주 싱싱한 놈으로 가져와서 맛이 제법 괜찮아요.”

가시를 바른 뽀얀 생선살을 밥 위에 얹어 주며 하중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마니와 여동생이라면 그저 깜빡 죽는 그인 만큼 이번에도 자청해서 총대를 메고 말았다. 안 그래도, 그 역시도 요즘 하경이가 뜸한 것 같아 한번 불러서 밥을 먹여야지 생각하고 있었으니 딱히 귀찮을 것도 없는 일이었다.

“쳇, 이 동네에서 우리 집 사정 모르는 집구석 하나 없는데 어디로 시집을 보낸다고…….”

“조용히 입 닫아, 인마. 그 주둥이에 생선가시나 처넣어 주기 전에.”

아직도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궁시렁거리는 하준을 향해 하서가 당장 눈을 부라렸다. 저 철딱서니 없는 깡패 새끼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거다.

어머니야 노파심이라고 쳐도 큰형님이 나선 이상은 정말로 일이 된다는 사실을 왜 아직도 모르는 걸까. 게다가 입만 열면 꼭 매를 버는 소리만 지껄이니 듣고 있으면 머리 나쁜 놈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은 어떻게 해서든 멀쩡한 놈 골라 선이라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결혼이야 어렵겠지만 선을 보이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그 역시도 하경이가 걱정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희수랑 만날 붙어 다니다가 덜렁 혼자 남았으니 사는 게 재미없을 테지. 쇼핑도 하루 이틀이고, 여행도 그때뿐일 테고, 일을 하자니 그놈의 성질머리가 걸린다. 게다가 그 몸 약한 것이 개미 눈곱만 한 돈을 번답시고 일을 하는 꼴은 그들 삼 형제로서도 절대로 못 볼 일이었다. 내내 붙잡고 살던 그림이라도 다시 시작한다면 모를까.

아무튼지간에, 그것까지 쳐서 이것저것 다 빼고 나면 결국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지간히 지루하고 심심할 법한 생활만 남는 것이다.

“제가 적당한 놈들 좀 찾아볼게요.”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하서는 하중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선봐서 결혼을 하라는 건 아니고 그냥…… 연애라도 하면 좀 나아지겠지 싶어서요.”

“말을 들을까?”

“그 성질에 고분고분하게 따르진 않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이라도 꺼내 보세요. 정 싫다면 하는 수 없고. 아, 백화점에 신상품 들어왔으니까 쇼핑이나 하러 나오라고 하세요. 같이 점심 먹고 한 바퀴 도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래. 얘기는 해보마.”

하중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늘 냉랭한 얼굴이기는 해도 하서는 누구보다 속이 깊은 아우다. 그 독살스런 말버릇도 오마니나 하경이 앞에서는 양처럼 순해진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굳이 제가 나서서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하는 건 다름 아닌 그를 배려해서일 것이다. 나이 든 형님 머리 안 아프게 골치 아픈 일은 제가 먼저 떠맡는 거다.

테 없는 안경 너머에서 반짝이는, 근심 어린 눈빛을 읽은 하중은 다 이해한다는 듯, 혹은 기특한 녀석이라고 말하듯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다음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곤 회랑을 지나 후원 별당, 하경의 방문 앞에 섰다.

녀석은 아직 잠들어 있을 터였다. 저혈압이라 아침에 약한 녀석이다 보니 일찍 일어나는 일도 힘겨워하는 편이었다. 뭣 모르고 깨우면 난데없는 불벼락을 맞기 십상이다. 그런 사정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하중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보았다.

얼마 전 새 단장을 끝낸 건물이라 모든 것이 깔끔했다. 게다가 겉은 한옥이지만 내부는 여느 아파트 못지않게 꾸며 척 보기에도 퍽 고급스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건물의 거의 대부분을 국산 소나무로 세운 덕분에 보다 고풍스러운 맛도 느낄 수 있고 깔끔한 아파트 식 구조는 생활을 더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지를 바른 창으로 은은하게 스며드는 햇볕을 받으며 묵직하게 자리 잡은 몇몇 가구를 지나 하중은 넓은 방 한복판에 놓인 커다란 침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무슨 악취미인지 이 한옥 집에 하경은 커다란 빅토리아풍 사주식 침대를 들여놓았다. 뭐, 제가 좋다면야 이보다 더한 것도 구해다 주겠지만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방주인이 워낙 특별한 가구나 물건들을 좋아해서 그런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스탠드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만든 값싼 물건도 없다. 그와 형제들은 하나뿐인 어린 누이를 위해 뭐든 최고를 가져다 바쳤으니까.

그것으로도 모자라 뭐 더 필요한 건 없나 싶은 마음에 넓은 방 안을 휘 둘러보다 하중은 발끝을 들고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눈처럼 하얀 비단 이불 속에서 하경이 안대까지 하고 잠들어 있었다.

침대 한복판에 웅크리고 누운 작은 몸이 문득 아릿하다. 베게 위에 길게 늘어져 있는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와 덮고 있는 비단 이불만큼이나 하얗고 작은 얼굴,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고울까 싶은 자그마한 분홍빛 입술을 훑다가 그는 또 안색을 흐리고 말았다.

“휴우.”

가뜩이나 콩알만 한 놈이 거대한 침대 속에 푹 파묻혀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한숨이 툭 터져 나왔다. 오마니 닮아 사이즈 심플하고 인형처럼 오목조목 예쁜 모습이지만 워낙 상처가 많은 녀석이다 보니 이런 순간에조차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아무래도 오마니 욕심이시지 싶은데…….”

침대 끄트머리에 주저앉으며 하중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켜켜이 쌓인 한숨만 자꾸 내쉬었다.

“시집이라. 그래도 찾아보면 어쩌다 좋은 놈이 있을지도 모르지. 이런저런 사정 다 이해해 주고, 남들이 뭐라 수군거리든 평생 감싸 주고 지켜줄 수 있는 강한 놈이 있다면…… 그러면 내가 엎드려서라도 기꺼이 모셔다 우리 하경이 신랑 삼아 줄 텐데…….”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던 손을 지나 손목 즈음으로 향하는 그의 손이 문득 멈칫거린다. 몇 번이나 성형수술을 했는데도 다 감추어지지 않은 붉은 줄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저절로 입이 악 다물려졌다.

“으음……. 누구야?”

“으, 응? 깨, 깼니?”

하경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지는 걸 본 하중은 화들짝 놀라 손을 놓고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큰오라버니?”

수면용 안대를 벗은 하경이 잠이 잔뜩 물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출근하기 전에 그냥 슬쩍 보고 가려고 했는데 괜히 깨우기나 하고……. 미안하구나.”

“으음. 어지러워.”

“그, 그래? 어어, 그럼 일어나지 말고 더 자라. 응?”

“후우, 그냥 일어날래. 물이나 한잔 주세요.”

힘 하나 없는 목소리에 하중은 저절로 긴장하며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물병을 냉큼 집어 들었다. 혹시 또 어디 아픈 건 아닌가 벌써부터 걱정이 몰려왔다. 그래서 부랴부랴 물을 한잔 따라 건네고 나서도 그녀의 안색을 살피느라 그는 쉽게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으응. 괜찮아요. 그냥 기운이 좀 없는 것뿐이야. 아침이니까.”

“그래, 그럼 다행이고. 아, 둘째가 백화점에 신상품 들어왔으니 놀러오라고 하더라.”

하경이 내미는 물 잔을 도로 받아 들며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점심 먹고 같이 한 바퀴 돌자는데, 어떠냐?”

“싫어요. 귀찮아.”

“쇼핑 좋아하면서 왜? 그럼 오라버니랑 같이 갈래?”

“싫어. 그냥 집에 있을래. 다 귀찮아.”

“갑자기 왜 귀찮은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니.”

“그럼 왜?”

주섬주섬 일어나 앉는 모습이 어찌나 기운 없고 우울해 보이는지 하중은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아무래도 오마니 말씀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게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중은 더 망설일 것도 없이 다시 주저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기 말이다, 좋은 사람이 있는데 한번 만나 보지 않을래?”

“응? 무슨 소리예요? 선?”

“선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소개팅 같은 거지. 집안이나 그런 건 잘 모르고 그냥 사람이 워낙 좋아서 놓치기가 아깝지 뭐냐. 한번 만나 볼 테냐?”

“글쎄, 난 별로…….”

“아아, 지금 대답하지 말고 잘 생각해 보고 나서 얘기하자. 응? 진짜 괜찮은 사람이거든. 아주 착하고 성실해. 그러니까 우리 진지하게 생각을 좀 해 보자. 응? 알았지? 꼭이다.”

단단히 당부해 놓고 하중은 누가 붙잡을세라 서둘러 방을 나가 버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하경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선이라고?”

아니, 이게 웬 아닌 밤중에 홍두께 같은 소리지?

지난밤에 제사 한번 떠들썩하게 지내더니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갑자기 선을 보라는 소리만 하고 사라지다니, 이것이 웬 자다가 봉창 뚫는 소리랴.

“나 시집보내는 꿈이라도 꿨나?”

큰오라버니의 갑작스러운 이상행동에 대해 하경은 멀뚱히 앉아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앗, 설마 레이몬드랑 붙어 다니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 그 녀석이랑 뭔가 야릇한 감정이라도 나누고 있는 줄 알고?

“정말 그런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새 좀 많이 붙어 다니긴 한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이제 간신히 입덧이 그친 희수가 요즘 미친 듯이 먹어 대는 바람에 레이몬드와 함께 이것저것 사 나르느라 정신이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밤엔 남편인 이안이 시중을 든다지만 그가 일하는 낮엔 그의 집사인 레이몬드와 친구인 그녀의 희생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인 것을. 그마저도 레이몬드가 회사 일을 할 때면 하경이 혼자 희수를 건사해야 했다. 덕분에 요구하는 걸 사다 먹이느라 지쳐서 기운도 없고 하루 종일 음식 냄새를 맡으니 자연스럽게 식욕까지 줄었다.

“그게 친구가 아니라 웬수지, 웬수.”

영국인인 이안과 결혼한 희수는 벌써 임신 6개월째를 맞고 있었다. 초기에 제법 입덧을 해서 여러 사람 걱정하게 만들더니 막 6개월로 접어든 지금은 그야말로 짐승처럼 먹어 대는 것으로 모두를 경악 속에 빠지게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뱃속에 애가 아니라 괴물이 들어 있는 게 틀림없는 것 같아. 대체 뭐가 나오려고 그렇게 먹어 대는 거지?”

한창 클 때도 그렇게 먹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리 2인분을 먹어야 한다지만 그 큰 양푼에 한가득 밥을 비벼서 혼자 다 먹어치우다니, 생각할수록 끔찍했다. 거기다 어쩐 일인지 그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은 딱 끊고 요즘엔 오로지 고기만 찾고 있었다.

갑자기 육식동물로 각성을 한 건지 잘 먹지도 않던 고기를 종류별로 구워서 먹는 건 물론이고 어제는 시뻘건 육회까지 찾아서 그녀의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순대를 먹을 때도 간이나 염통 같은 것을 더 찾는 걸 보면 확실히 뱃속에 든 것의 정체가 의심스러운 일이다. 설마 외계인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으음, 설마 육식동물을 키우고 있는 건가? 그나저나 오늘은 또 뭘 사다 나르라고 주문할지 궁금하네.”

멍하니 중얼거리며 하경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바로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이 울었다. 희수다.

“그래, 너 호랑이 맞다. 기집애, 하여튼 나 일어난 건 귀신같이 알아채지? 앙큼한 것 같으니라고.”

빠바바밤∼ 하고 울려 퍼지는, 장엄하기까지 운명 고향곡이 마치 밥 달라는 소리처럼 들리는 걸 보면 이것이 또 배가 고파서 전화질을 한 게다. 하긴, 뒷배가 든든한 그 기집애 말고 간도 크게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왜?”

전화기를 열자마자 왈칵 소리쳤다.

“또 뭐가 먹고 싶은 거야? 육회? 삼겹살? 아니면 간 요리?”

―어우야아, 내가 돼지니?

“응. 너 돼지 맞아. 솔직히 말해. 이번엔 또 뭐야? 순대? 푸아그라? 아니면 고래 고기라도 땡겨?”

―아니이. ……만두. 네가 만든 고기만두 먹고 싶어. 흑, 안 먹으면 죽을 거 같아.

아, 현기증. 갑자기 맥이 팍 빠지고 있었다. 사다 나르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직접 제조까지 해서 바쳐야 하나 보다. 분명히 그놈의 만두가 먹고 싶어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테지. 그러고 보니 먹고 싶은 거 제대로 못 먹으면 애가 짝눈이 된다던데. 근데, 아무리 먹고 싶어도 그렇지 아침부터 철철 울 것까지는 없잖아, 이 계집애야?

울컥 화를 내려던 마음이 우는 소리 한마디에 어느새 슬그머니 가라앉고 있었다. 확실히 은하경이는 최희수에게 약하다. 갓난쟁이 시절부터 함께 자란 탓인지 꼭 이란성 쌍둥이, 피붙이처럼 여겨지는 것이 어떻게 해도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는 거다. 아, 그놈의 대인 관계가 심플하지만 않았어도!

“아, 아침부터 왜 울고 지랄이야? 해 주면 되잖아, 해 주면! 그 까이꺼 얼마든지 해 주께.”

―헤에, 정말?

“해 준다니까. 기다려, 금방 갈게.”

―엉. 빨리 와아.

언제 울었냐는 듯 금방 날아갈 듯한 목소리로 헤헤 웃는 소리를 들으며 하경은 결국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