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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황제의 천막은 어두웠다.
“사랑하는 회이르, 내 귀여운 아우야. 내 뒤를 따라다니며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던 모습을 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각 부족에서 아냇감을 뽑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 큰일을 치르니 응당 내가 가서 축하해 주었어야 할 테지만 변방의 일이 바빠 그러지 못했다. 사람을 보내서나마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낮에는 천막 지붕을 열고 문도 열어 두어 시원하게 했을 테지만 지금은 저녁이 가깝다. 대신 시종은 천막 중앙에 화로를 가져다 두었다. 황제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이들은 그의 얼굴에 비친 불빛이 기괴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 네가 그렇게 많은 여인을 맞아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지 모르겠구나. 너도 알다시피 서쪽에 사는 이들이 우리가 만든 제국을 시기해 벼르고 있다. 아버님께서 너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신 것은 사치하여 물자를 낭비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 형이 부탁했던 군마는 보내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군소 부족의 여인까지 맞이해 지참금을 치르고 생활을 돌보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
황제의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천막에 앉은 남자들은 무심하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사자(使者)는 계속해서 읊었다.
“우리 전통에 따라 아버님의 마지막 유산을 막내인 네가 물려받는 것이야 당연한 일인 줄로 우리는 알았지.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른 것을 구실로 철없이 행동하여 아버님께서 남기신 것을 낭비하는 일이 있다면 안 될 것이다. 이 제국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구조를 하고 있구나. 형을 아우의 아래에 두어 일하게 하다니.”
사자는 입을 다물었다.
황제, 회이르는 잠시 기다리다 툭 던졌다.
“계속해 봐.”
“끝입니다.”
사자는 담담히 말했다. 선대 황제, 그러니까 회이르와 툭투르 만호장의 부친이 살아 있었을 때부터 이 사자는 만호장을 위해 일했다. 그러므로 만호장들의 동생이자 현 황제인 회이르의 성정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아마 상당히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왔을 것이다.
“알 만하군.”
회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중 하나가 핏대를 세웠다.
“이 무슨 방자한! 폐하를 사가의 아우 부르듯 하는 것도 모자라, 제국의 위엄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핏대를 세운 대신은 말하자면 현재 제국 최고의 실세 중 하나였다. 다른 대신들도 침착하게 하나둘씩 동의했다.
“폐하, 만호장을 벌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국의 위상이 유지됩니다.”
“이제는 전과 같은 부족 연합이 아닙니다. 하나의 국가가 서려면 신상필벌이 명확해야 할 것입니다.”
“툭투르 형님이야 늘 그랬지. 떠나면서도 제국이 뭐 하는 건지 모르고 갔으니까, 이제 와서 불평하는 거지.”
그러나 대신들의 반응과 다르게 회이르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사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회이르는 시종에게 턱짓했다.
“저 녀석에게 코담배를 좀 줘라.”
“폐하!”
힘이 강한 대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회이르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내버려 둬. 그 자존심에 나한테 이런 사자까지 보낸 건 부탁이니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는 뜻이야. 상황이 안 좋은 모양이니, 내가 안 건드려도 알아서 고생하시겠지.”
사자의 미간이 약간 좁아졌다. 그 역시 도움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리라. 시종은 작은 병을 가져와 사자의 손등에 코담배를 묻혀 주었다. 사자는 인상을 쓰며 코담배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회이르는 잊고 있었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저 녀석 말의 꼬리를 잘라서 쫓아내.”
“예.”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위를 찾으러 갔다. 사자는 얌전히 나갔다. 회이르는 그 뒷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형님의 곁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놈이 있으니 좀 자중하면 좋을 텐데.”
힘이 센 대신은 물고 늘어졌다.
“폐하, 사자를 그냥 보내시다니요! 마땅히 목을 잘라 그 수급을 말꼬리에 매달아 보내야 합니다!”
“뭐 하러. 서쪽 녀석들과 싸울 병력을 줄일 이유가 없잖아.”
“사가에서 절친하셨던 줄은 알고 있으나, 제국의 위엄은…….”
“지금 저 녀석을 어떻게 하고 말고 하는 걸로 제국의 위엄이 달라지진 않아. 제국의 위엄은 내가 보일 테니 기다려.”
아까부터 구석에서 가만히 있던 대신이 있었다. 그 대신은 힘이 센 대신이 말을 고르느라 잠시 입을 다물자 조용히 물었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응, 기다려.”
회이르는 대화를 가볍게 잘랐다. 힘이 센 대신을 비롯해 몇몇 대신은 말을 잃은 듯 황망히 황제를 쳐다보았다.
다른 대신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만호장의 전언은 방자하기 그지없사오나, 후궁에 대한 지적은 새겨들을 부분이 있는 줄로 아룁니다. 제국의 황제께 알탄사르날 님 한 분밖에 황후가 안 계신 것도 체면이 깎이는 일이오나, 비빈이 너무 많아 식량과 물을 지급하는 것에 차질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보다, 신 앞에 남자는 맞아들인 여자를 모두 동등하게 사랑해야 하니 새로 맞아들이신 비마마들께도 신경을 더 쓰셔야 함이 옳지 않겠사옵니까.”
“도르갈 족 출신의 비께는 소홀히 대하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르갈 족이 아니면 어디서 저 많은 곡물을 사 오겠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의 절반은 선대 황제 때부터 부족의 중요한 일을 결정짓던 사람들이고, 절반은 혼인 등으로 인해 높은 자리에 온 사람들이다. 서로 이익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참견이 심하다. 몇 명의 젊은 시종은 황제가 화를 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해했다.
과연 잠시 후 황제는 인상을 썼다.
“내 후궁의 일은 알아서 할 테고, 생각도 있으니 신경 쓰지 마. 할 말이 끝났으면 나가.”
‘새로운 부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때문에 상심했을 황후에게도 꼭 성의를 보이라’고 할 참이었던 힘이 센 대신, 알탄사르날의 아버지는 알아서 위기를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기 사위의 성정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대신들이 조용히 천막을 빠져나가자 회이르는 시종을 불렀다.
“테무르, 알티를 데려와. 답답하니 좀 돌아보고 와야겠어.”
수도 울란의 앞에는 산과 강이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나무가 많은 산이 여럿, 그리고 이 정도면 이 부근에서 오랫동안 지내도 괜찮겠다 싶은 맑은 강이 땅을 부드럽게 흘렀다. 올 때도 보았지만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평평한 지대에는 후궁의 것과 비슷한 높이의 돌 벽이 커다란 정사각형을 만들었다. 그 안에는 황궁의 것과 달리 평범한 천막이 들어차 있었고 연기도 많이 올랐다. 장인들과 병사들이 사는 곳이라는 모양이었다.
산 너머로 고운 주홍색의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맑은 바람이 흘러 나란게렐은 정신없이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여행을 오래 했지만 이렇게 찬찬히 풍광을 감상하지는 못했다. 아리용사나도 늘 있던 곳처럼 부드럽게 초원을 달렸다.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는 말에서 떨어졌다.
푸흥, 하고 아리용사나가 조금은 고통스럽게 들리는 비명을 지르고 몹시 몸부림친 다음이었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자세로 떨어져 충격이 크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란 나란게렐은 땅에서 일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다가 인상을 썼다. 널브러진 발목이 매우 아팠다.
머리가 허전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다음 일이었다. 그러나 머리칼이 드러난 것보다 급한 일은 아리용사나의 용태라, 나란게렐은 얼른 아리용사나의 모습을 살폈다.
“왜 그래, 아리용사나?”
다행히 아리용사나는 금세 얌전해졌지만 아까의 모습을 보면 문제가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동물은 자신의 문제를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숨긴다.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가 툭탁거리며 발굽으로 땅을 두드렸을 때 그 다리가 약간 부은 것을 발견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리용사나는 오래된 친구였다. 그리고 이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이 시간에 천천히 걷다가는 금세 야행성 동물들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빨리 나오느라 활도 가져오지 않았다.
모자가 어디 있나 하고 둘러보니 아리용사나의 뒷발에 짓밟힌 구슬 줄이 보였다. 정말로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나란게렐은 참지 않았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결혼식 첫날의 저녁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말을 들을걸. 생각 없이 움직이지 말걸.
일단 말을 타고 가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훌쩍거리고 있다 보니 등 뒤에서부터 초원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지기 직전의 이글거리는 태양이었다. 집이었다면 지금쯤 양들을 우리에 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구름처럼 고운 주홍색으로 물든 양털이…….
어린 남동생을 생각하니 또 속이 상했다. 올해 태어난 새끼 양들은 정말로 귀여웠다. 동생이 아기 양에게 엄마 몰래 이름을 붙이고 귀여워했는데. 작년에도 그러다가 양을 팔 때 울었으면서도 배울 줄 몰랐다.
집에 가고 싶어.
시집온 첫날에 이러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나란게렐은 괜히 더 서운해하며 아리용사나의 뒷다리 아래서 모자를 꺼냈다. 엄마뿐 아니라 고모와 이모들까지 열심히 수를 놓아 준 모자가 엉망이었고 구슬 줄도 여럿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리용사나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언제 다쳤어? 미리 알지 못해서 미안해.”
모자를 손에 잡고 입을 비죽 내미니 울음 쪽은 그쳤다. 나란게렐은 그새 잠긴 목소리로 아리용사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고삐를 잡고 황궁 쪽을 가리켰다. 아리용사나는 사람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주인이 원한 대로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길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나란게렐은 찾아오기 시작한 초원의 추위에 몸을 떨었다. 정말로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갈 생각이었으므로 두꺼운 겉옷은 가져오지 않았다. 물론 초원에서 밤을 보내기 위한 다른 어떤 종류의 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금세 살갗에 센 바람이 치며 오싹해졌다. 초원이 불타듯 달아올랐다. 불꽃같은 그 모습에 나란게렐은 비참한 기분으로 계속 걸었다. 황궁은 시야에 있었지만 무척 멀었다. 밤에는 문이 닫힌다고 했는데, 두드리면 열어 줄까? 설마 바깥에서 재우지야 않겠지만, 누군가에게 혼날 것이다. 어쩌면 오늘 본 태후가 직접 혼을 내거나 혹은 소박을 맞힐 수도 있었다. 소박을 맞아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러면 친정의 체면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얼마 후 해는 깨끗이 졌다.
침침한 어둠이 사방을 메웠다. 황궁과 도시에서 불빛이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그 거리는 한층 멀어 보였다. 그녀는 추위에 몸을 떨며 아리용사나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괜찮아. 조금만 더 힘내.”
무섭다거나, 하고 싶은 말은 여러 가지 있었지만.
환경이 너무 이상해 아리용사나도 놀라고 있을 것이다. 말의 냄새는 초원의 짐승들에게는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마도 자기 자신을 지킬 능력도 없었지만, 아리용사나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기 위해 나란게렐은 낮게 속삭였다. 아리용사나는 말없이 충실하게 걸음을 옮겼다.
금세 사방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늘의 별은 집에서 보는 것과 같아 더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어느 초원을 가도 하늘은 같다. 그러나 이곳은 어쩐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저 별을 보고 이대로 집에나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손에 쥔 모자가 점점 더 애처롭게 느껴졌다. 나란게렐은 천천히 걸으며 뺨을 닦아 냈다. 캄캄하니 조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넘어질 것이다. 발이 아파 잠시 후에는 깨금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말발굽 소리가 다가왔다.
황제의 천막은 어두웠다.
“사랑하는 회이르, 내 귀여운 아우야. 내 뒤를 따라다니며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던 모습을 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각 부족에서 아냇감을 뽑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 큰일을 치르니 응당 내가 가서 축하해 주었어야 할 테지만 변방의 일이 바빠 그러지 못했다. 사람을 보내서나마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낮에는 천막 지붕을 열고 문도 열어 두어 시원하게 했을 테지만 지금은 저녁이 가깝다. 대신 시종은 천막 중앙에 화로를 가져다 두었다. 황제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이들은 그의 얼굴에 비친 불빛이 기괴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 네가 그렇게 많은 여인을 맞아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지 모르겠구나. 너도 알다시피 서쪽에 사는 이들이 우리가 만든 제국을 시기해 벼르고 있다. 아버님께서 너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신 것은 사치하여 물자를 낭비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 형이 부탁했던 군마는 보내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군소 부족의 여인까지 맞이해 지참금을 치르고 생활을 돌보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
황제의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천막에 앉은 남자들은 무심하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사자(使者)는 계속해서 읊었다.
“우리 전통에 따라 아버님의 마지막 유산을 막내인 네가 물려받는 것이야 당연한 일인 줄로 우리는 알았지.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른 것을 구실로 철없이 행동하여 아버님께서 남기신 것을 낭비하는 일이 있다면 안 될 것이다. 이 제국이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구조를 하고 있구나. 형을 아우의 아래에 두어 일하게 하다니.”
사자는 입을 다물었다.
황제, 회이르는 잠시 기다리다 툭 던졌다.
“계속해 봐.”
“끝입니다.”
사자는 담담히 말했다. 선대 황제, 그러니까 회이르와 툭투르 만호장의 부친이 살아 있었을 때부터 이 사자는 만호장을 위해 일했다. 그러므로 만호장들의 동생이자 현 황제인 회이르의 성정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아마 상당히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왔을 것이다.
“알 만하군.”
회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중 하나가 핏대를 세웠다.
“이 무슨 방자한! 폐하를 사가의 아우 부르듯 하는 것도 모자라, 제국의 위엄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핏대를 세운 대신은 말하자면 현재 제국 최고의 실세 중 하나였다. 다른 대신들도 침착하게 하나둘씩 동의했다.
“폐하, 만호장을 벌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국의 위상이 유지됩니다.”
“이제는 전과 같은 부족 연합이 아닙니다. 하나의 국가가 서려면 신상필벌이 명확해야 할 것입니다.”
“툭투르 형님이야 늘 그랬지. 떠나면서도 제국이 뭐 하는 건지 모르고 갔으니까, 이제 와서 불평하는 거지.”
그러나 대신들의 반응과 다르게 회이르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사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회이르는 시종에게 턱짓했다.
“저 녀석에게 코담배를 좀 줘라.”
“폐하!”
힘이 강한 대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회이르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내버려 둬. 그 자존심에 나한테 이런 사자까지 보낸 건 부탁이니 좀 도와주면 안 되겠냐는 뜻이야. 상황이 안 좋은 모양이니, 내가 안 건드려도 알아서 고생하시겠지.”
사자의 미간이 약간 좁아졌다. 그 역시 도움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리라. 시종은 작은 병을 가져와 사자의 손등에 코담배를 묻혀 주었다. 사자는 인상을 쓰며 코담배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회이르는 잊고 있었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저 녀석 말의 꼬리를 잘라서 쫓아내.”
“예.”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위를 찾으러 갔다. 사자는 얌전히 나갔다. 회이르는 그 뒷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형님의 곁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놈이 있으니 좀 자중하면 좋을 텐데.”
힘이 센 대신은 물고 늘어졌다.
“폐하, 사자를 그냥 보내시다니요! 마땅히 목을 잘라 그 수급을 말꼬리에 매달아 보내야 합니다!”
“뭐 하러. 서쪽 녀석들과 싸울 병력을 줄일 이유가 없잖아.”
“사가에서 절친하셨던 줄은 알고 있으나, 제국의 위엄은…….”
“지금 저 녀석을 어떻게 하고 말고 하는 걸로 제국의 위엄이 달라지진 않아. 제국의 위엄은 내가 보일 테니 기다려.”
아까부터 구석에서 가만히 있던 대신이 있었다. 그 대신은 힘이 센 대신이 말을 고르느라 잠시 입을 다물자 조용히 물었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응, 기다려.”
회이르는 대화를 가볍게 잘랐다. 힘이 센 대신을 비롯해 몇몇 대신은 말을 잃은 듯 황망히 황제를 쳐다보았다.
다른 대신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만호장의 전언은 방자하기 그지없사오나, 후궁에 대한 지적은 새겨들을 부분이 있는 줄로 아룁니다. 제국의 황제께 알탄사르날 님 한 분밖에 황후가 안 계신 것도 체면이 깎이는 일이오나, 비빈이 너무 많아 식량과 물을 지급하는 것에 차질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보다, 신 앞에 남자는 맞아들인 여자를 모두 동등하게 사랑해야 하니 새로 맞아들이신 비마마들께도 신경을 더 쓰셔야 함이 옳지 않겠사옵니까.”
“도르갈 족 출신의 비께는 소홀히 대하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르갈 족이 아니면 어디서 저 많은 곡물을 사 오겠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의 절반은 선대 황제 때부터 부족의 중요한 일을 결정짓던 사람들이고, 절반은 혼인 등으로 인해 높은 자리에 온 사람들이다. 서로 이익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참견이 심하다. 몇 명의 젊은 시종은 황제가 화를 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해했다.
과연 잠시 후 황제는 인상을 썼다.
“내 후궁의 일은 알아서 할 테고, 생각도 있으니 신경 쓰지 마. 할 말이 끝났으면 나가.”
‘새로운 부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때문에 상심했을 황후에게도 꼭 성의를 보이라’고 할 참이었던 힘이 센 대신, 알탄사르날의 아버지는 알아서 위기를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기 사위의 성정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대신들이 조용히 천막을 빠져나가자 회이르는 시종을 불렀다.
“테무르, 알티를 데려와. 답답하니 좀 돌아보고 와야겠어.”
수도 울란의 앞에는 산과 강이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나무가 많은 산이 여럿, 그리고 이 정도면 이 부근에서 오랫동안 지내도 괜찮겠다 싶은 맑은 강이 땅을 부드럽게 흘렀다. 올 때도 보았지만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평평한 지대에는 후궁의 것과 비슷한 높이의 돌 벽이 커다란 정사각형을 만들었다. 그 안에는 황궁의 것과 달리 평범한 천막이 들어차 있었고 연기도 많이 올랐다. 장인들과 병사들이 사는 곳이라는 모양이었다.
산 너머로 고운 주홍색의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맑은 바람이 흘러 나란게렐은 정신없이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여행을 오래 했지만 이렇게 찬찬히 풍광을 감상하지는 못했다. 아리용사나도 늘 있던 곳처럼 부드럽게 초원을 달렸다.
이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는 말에서 떨어졌다.
푸흥, 하고 아리용사나가 조금은 고통스럽게 들리는 비명을 지르고 몹시 몸부림친 다음이었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자세로 떨어져 충격이 크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란 나란게렐은 땅에서 일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다가 인상을 썼다. 널브러진 발목이 매우 아팠다.
머리가 허전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다음 일이었다. 그러나 머리칼이 드러난 것보다 급한 일은 아리용사나의 용태라, 나란게렐은 얼른 아리용사나의 모습을 살폈다.
“왜 그래, 아리용사나?”
다행히 아리용사나는 금세 얌전해졌지만 아까의 모습을 보면 문제가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동물은 자신의 문제를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숨긴다.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가 툭탁거리며 발굽으로 땅을 두드렸을 때 그 다리가 약간 부은 것을 발견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리용사나는 오래된 친구였다. 그리고 이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이 시간에 천천히 걷다가는 금세 야행성 동물들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빨리 나오느라 활도 가져오지 않았다.
모자가 어디 있나 하고 둘러보니 아리용사나의 뒷발에 짓밟힌 구슬 줄이 보였다. 정말로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나란게렐은 참지 않았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결혼식 첫날의 저녁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엄마의 말을 들을걸. 생각 없이 움직이지 말걸.
일단 말을 타고 가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훌쩍거리고 있다 보니 등 뒤에서부터 초원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지기 직전의 이글거리는 태양이었다. 집이었다면 지금쯤 양들을 우리에 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구름처럼 고운 주홍색으로 물든 양털이…….
어린 남동생을 생각하니 또 속이 상했다. 올해 태어난 새끼 양들은 정말로 귀여웠다. 동생이 아기 양에게 엄마 몰래 이름을 붙이고 귀여워했는데. 작년에도 그러다가 양을 팔 때 울었으면서도 배울 줄 몰랐다.
집에 가고 싶어.
시집온 첫날에 이러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나란게렐은 괜히 더 서운해하며 아리용사나의 뒷다리 아래서 모자를 꺼냈다. 엄마뿐 아니라 고모와 이모들까지 열심히 수를 놓아 준 모자가 엉망이었고 구슬 줄도 여럿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리용사나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언제 다쳤어? 미리 알지 못해서 미안해.”
모자를 손에 잡고 입을 비죽 내미니 울음 쪽은 그쳤다. 나란게렐은 그새 잠긴 목소리로 아리용사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고삐를 잡고 황궁 쪽을 가리켰다. 아리용사나는 사람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주인이 원한 대로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길은 점점 어두워지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나란게렐은 찾아오기 시작한 초원의 추위에 몸을 떨었다. 정말로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갈 생각이었으므로 두꺼운 겉옷은 가져오지 않았다. 물론 초원에서 밤을 보내기 위한 다른 어떤 종류의 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금세 살갗에 센 바람이 치며 오싹해졌다. 초원이 불타듯 달아올랐다. 불꽃같은 그 모습에 나란게렐은 비참한 기분으로 계속 걸었다. 황궁은 시야에 있었지만 무척 멀었다. 밤에는 문이 닫힌다고 했는데, 두드리면 열어 줄까? 설마 바깥에서 재우지야 않겠지만, 누군가에게 혼날 것이다. 어쩌면 오늘 본 태후가 직접 혼을 내거나 혹은 소박을 맞힐 수도 있었다. 소박을 맞아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러면 친정의 체면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얼마 후 해는 깨끗이 졌다.
침침한 어둠이 사방을 메웠다. 황궁과 도시에서 불빛이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그 거리는 한층 멀어 보였다. 그녀는 추위에 몸을 떨며 아리용사나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괜찮아. 조금만 더 힘내.”
무섭다거나, 하고 싶은 말은 여러 가지 있었지만.
환경이 너무 이상해 아리용사나도 놀라고 있을 것이다. 말의 냄새는 초원의 짐승들에게는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마도 자기 자신을 지킬 능력도 없었지만, 아리용사나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기 위해 나란게렐은 낮게 속삭였다. 아리용사나는 말없이 충실하게 걸음을 옮겼다.
금세 사방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늘의 별은 집에서 보는 것과 같아 더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어느 초원을 가도 하늘은 같다. 그러나 이곳은 어쩐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저 별을 보고 이대로 집에나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손에 쥔 모자가 점점 더 애처롭게 느껴졌다. 나란게렐은 천천히 걸으며 뺨을 닦아 냈다. 캄캄하니 조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넘어질 것이다. 발이 아파 잠시 후에는 깨금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말발굽 소리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