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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 밤에 누가 돌아다니는 걸까. 밤에 주변을 돌아보는 경비 당번 같은 거라면 좋겠지만, 어쩌면 시내가 말했던 적일지도 몰랐다. 후궁을 담으로 둘러서까지 막아야 하는. 어차피 어두워 이쪽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나란게렐은 차갑게 굳어 잠시 멈추어 섰다. 사방의 구분이 가지 않으니.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저 발굽에 밟힐지도 모른다. 저쪽도 이쪽이 보이지 않을 테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황금으로 된 말이 튀어나왔다.
튀어나왔다는 것은 아마도 그쯤해서 시야에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나란게렐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입을 벌렸다. 꿈에서 나온 것일까, 그 말은 그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아 온 말 중에 가장 아름답고 훌륭했다. 가늘고 우아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다리에 매끈한 허리. 담금질한 것처럼 번쩍거리는 금빛 털과 찰랑이는 갈기…….
너무 아름다운 말이라 현실에서 보고 있다고 믿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그 말에 안장이 얹혀 있고 등 위에는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젊은 남자였다. 그 남자는 나란게렐과 아리용사나의 앞에 매끄럽게 멈추어 서서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뭐냐? 초원의 유령이냐?”
“아니에요.”
유령이냐고 묻는 걸 봐서 저 남자도 유령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란게렐은 조금 안심하고 대답했다.
“저기 황궁에서 왔어요.”
“황궁에서?”
남자는 말에 탄 채로 의심스럽게 되물었다. 나란게렐은 그 어조에 발끈했다.
“그래요. 당신은 누군데 이 시간에 나와 있어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 황궁의 여자라면 이 시간에 나오지 못할 텐데. 혼자 있나?”
남자는 더 의심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목소리에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이쪽의 질문엔 대답을 안 하고 더 캐묻고 있잖아? 그러나 나란게렐은 상대가 황궁의 사정을 잘 아는 것 같자 문득 풀이 죽어서 일단 대답했다.
“……오늘 책봉을 받은 후궁인데, 주변을 구경하러 아까 나왔다가 늦었어요.”
“그런데 말에서 내려 한가하게 걷고 있었단 말이야? 간도 크군.”
후궁이라는 것은 믿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즉각 비난하자 나란게렐은 다시 발끈했다. 아무튼 정체 모를 낯선 사람이니 이것은 숨기려고 했지만.
“말이 다리를 다쳐서 하는 수 없었어요.”
“그래?”
남자는 경계하는 기색 없이 말에서 훌쩍 내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이 달빛에 비쳐 나란게렐은 처음으로 이 낯선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자는 스물이 조금 넘은 듯한 잘생긴 사람이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의 선은 어른스럽게 굵으면서 조화로웠다. 묶은 머리 위로 쓴 모자는 털에서 윤이 나고 꼭대기가 붉어 값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입은 옷의 모양이나 자수를 보아서도 신분이 무척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나란게렐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이쪽이 부끄러워졌다. 나란게렐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모자를 펴서 머리에 대충 얹었다.
남자의 선명한 눈에 웃음기가 찼다.
“망가진 모자인 것 같은데.”
“얘가 밟았어요.”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를 가리켰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에서 금방에라도 떨어질 것 같아.”
“찌그러졌으니까 그렇죠. 남의 여자의 머리를 뚫어지게 보는 게 아니에요.”
“방금까지는 모자를 벗고도 잘 다녔잖아.”
끊어진 줄에서 겨우 버티던 구슬이 몇 알 떨어져 초원에 굴렀다. 나란게렐은 그것을 줍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꼿꼿하게 서서 말했다.
“신랑한테 미안하니까 그렇죠.”
“그래?”
남자는 또 웃었다.
“오늘 책봉을 받은 후궁이라면, 황제의 얼굴도 못 봤을 텐데.”
“그래도 신랑은 신랑이니까.”
이 남자는 정말로 궁의 사정을 잘 아나 보다. 어쩌면 황족이거나 높은 대신일지도 몰랐다. 나란게렐은 모자를 매만졌다. 남자는 나란게렐의 발목 쪽을 보고 이번에는 인상을 썼다.
“다쳤나?”
“좀 접질린 것 같아요.”
“그 꼴로 황궁까지 걸어가려고 했던 말이야? 다친 말을 데리고? 간이 큰 정도가 아닌데.”
“그럼 어떡해요.”
“이 부근에는 황제의 후궁을 건드릴 정도로 간이 큰 도적은 없지만, 밤이 되면 짐승은 나오지. 날 못 만났으면 내일 아침엔 부음을 들을 뻔했군.”
아마도 그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란게렐은 그 남자의 고압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몸을 숙여 아리용사나의 발목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아리용사나가 불평하며 움직이려고 하자 나란게렐은 얼른 고삐를 잡고 진정시켰다.
“쉬이, 가만히 있어.”
몸을 숙인 남자의 등은 넓고 강해 보였다. 아마도 정력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저 정도 나이의 남자라면 결혼도 했을 것인데. 아, 그러고 보니 저 남자는 정말로 이 시간에 왜 나온 걸까.
어느 다리가 다친 것인지 알아보던 남자는 곧 몸을 일으켜 세우고 진단했다.
“염증이 생겼어. 다친 채로 오랫동안 걸었겠지. 참을성 있고 좋은 말이군.”
“어머나.”
그렇다면 아마도 여행길에 다쳤다는 말이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의 눈을 보고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몰랐구나.”
“얼른 데려가서 치료하면 괜찮을 거야.”
“네. ……고마워요.”
나란게렐도 말에 대해 모르는 편은 아닌데, 이 남자는 정말로 전문가인 모양이었다. 나란게렐은 잠시 후 궁금해져 물었다.
“당신은 마의예요?”
남자는 나란게렐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는 자신감이 있어 매력적이었는데, 그녀는 그 얼굴을 보고 괜히 심란해져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남자와 결혼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많이 웃는 것은 좋은 것이니까.
“마의처럼 보여?”
……아니다. 그녀는 괜한 수수께끼에는 취미가 없었다. 나란게렐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어요. 당신은 누구예요?”
“몰라도 돼.”
남자는 웃는 얼굴 그대로 말하고 황금 말을 가리켰다. 그가 그녀를 놀리며 재미있어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녀는 발끈했지만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얼른 후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타.”
결혼 첫날에 외간 남자와 말을 타는 것은 좋지 않은 일임에 분명했지만, 지금은 부득이한 상황인 것 같았다. 나란게렐은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대의 말도 저기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자.”
남자는 황금 말에 훌쩍 올라탔다. 자세히 보니 그 말에는 수가 놓아진 훌륭한 주머니와 금빛 장식이 달린 안장, 그리고 멋지게 세공된 재갈이 있었다. 고삐도 값비싼 물건인 것 같았다.
황금 말의 키가 컸기 때문에 나란게렐이 말에 타는 데에는 약간 노력이 필요했다. 그녀가 발목의 통증과 피로 때문에 분투하자 남자는 곧 그녀의 허리를 잡아 올렸다. 외간 남자에게 그렇게 허리를 잡힌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라 그녀는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말을 못 타나?”
뻣뻣해진 허리가 옷 너머로 느껴진 듯 그는 우습다는 투로 말했다.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를 가리키며 턱을 내밀었다.
“저 애랑 같이 자랐어요.”
“그래? 그러면 내가 무섭나?”
“무서운 건 아니에요. 놀랐어요.”
남자는 뭐가 우스운지 이번에는 껄껄 웃었다.
“무서워하는 게 좋아. 아무도 없는 곳에 외간 남자와 둘이 있는 거라고.”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찔러 버릴 거예요.”
“단검도 가지고 있나?”
“유목민에겐 당연한 거죠.”
그것은 습관처럼 가져와서 다행이었다. 남자는 그 말에 이번엔 즐거운 듯 웃었다. 그 목소리는 순전하고 천진했고, 나란게렐은 남자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일단 믿기로 했다. 물론 전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분명히 높은 신분의 사람인 것 같고, 황제의 후궁이라는 신분도 이미 이쪽에선 밝혔고, 이 상황에선 어쩔 수도 없고…….
“가자, 알티.”
남자는 나란게렐이 자기 뒤에 제대로 앉자 말에게 속삭였다. 황금 말은 부드럽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란게렐은 남자의 등에서 나오는 따뜻한 체온에 훨씬 숨쉬기 쉬워진 것을 느꼈다. 얼릴 것처럼 불던 초원의 바람도 불이 있다면 버틸 수 있다. 아리용사나도 천천히 알티를 따라 걸었다. 나란게렐은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아리용사나가 제대로 걷는지 확인했다. 아마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아까도 비틀거렸을 아리용사나는 이제 정말로 참을 수 없는 듯 절뚝거리며 걸었다.
가슴이 아파졌다. 나란게렐은 이제 여러 상념이 들어 우울하게 황궁 쪽을 보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자 남자는 앞에서 가볍게 물었다.
“그대는 이름이 뭐지?”
“나란게렐이에요.”
나란게렐은 툭 던졌다. 기분이 가라앉아 목소리도 밝게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놀리듯 평가했다.
“달빛이라는 뜻의 나란게렐인가? 성질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이름이군.”
“당신이 내 성질을 어떻게 알아요? 오늘 처음 봤는데.”
“딱 보면 알지. 말도 주인을 닮았어.”
“어떻게 알았어요?”
가족이 하던 말은 그렇다 쳐도, 처음 본 남자한테까지 이런 말을 듣다니. 나란게렐은 정말로 놀라 물었다. 남자는 킥킥 웃었다.
“보면 알아. 얼굴에 써 있거든.”
“그렇게 티가 나요?”
“그래. 그리고 요즘의 잘 자란 아가씨들은 그대처럼 또박또박 말대꾸하지 않아.”
“그거 어디 기준이에요? 말대꾸를 할 만하니까 하지요.”
“그래. 유목민은 그래야지.”
……나쁜 뜻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나란게렐은 그만 혼란스러워져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갑자기 약간 쌀쌀맞게 물었다.
“혼례식 날의 신부는 나돌아 다니지 않는 게 우리 부족의 전통인데, 그대의 부족은 그렇지 않은 건가?”
“우리도 그래요.”
이건 비난하는 게 맞는 것 같고. 그녀는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남자는 그녀의 나빠진 기분을 배려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혹시 도망가려던 건 아니겠지?”
이번엔 아무리 이 남자의 말에 타고 있다고 해도 화를 내도 될 것 같았다. 나란게렐은 톡 쏘아붙였다.
“아니거든요?”
“그래?”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까까지의 장난기나 웃음기는 찾아볼 수도 없이 사라졌다. 남자는 그녀를 떠보듯 말했다.
“먼 곳까지 와서 가족들은 보지 못하고, 첫날밤에 남편의 얼굴도 보지 못했으니 실망할 수도 있지. 마침 말도 있고 하니 화가 나서 나가려고 했을 수도…….”
“아니라니까요.”
나란게렐은 성질이 나서 남자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 말에 남자는 다시 조금 따뜻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정말 그냥 구경을 하러 나온 건가?”
“그래요. 이제부터 살 곳이라니까 아리용사나에게도 구경을 시켜 주고 싶었어요.”
“그랬는데 다친 거군.”
“……그래요.”
나란게렐은 이즈음 다시 한번 아리용사나를 돌아보았다. 아리용사나는 다행히도 여전히 잘 걸어오고 있었다.
엉덩이 아래서 알티의 엉덩이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나란게렐은 궁금해져 물었다.
이 밤에 누가 돌아다니는 걸까. 밤에 주변을 돌아보는 경비 당번 같은 거라면 좋겠지만, 어쩌면 시내가 말했던 적일지도 몰랐다. 후궁을 담으로 둘러서까지 막아야 하는. 어차피 어두워 이쪽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을 테지만, 나란게렐은 차갑게 굳어 잠시 멈추어 섰다. 사방의 구분이 가지 않으니.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저 발굽에 밟힐지도 모른다. 저쪽도 이쪽이 보이지 않을 테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황금으로 된 말이 튀어나왔다.
튀어나왔다는 것은 아마도 그쯤해서 시야에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나란게렐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입을 벌렸다. 꿈에서 나온 것일까, 그 말은 그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아 온 말 중에 가장 아름답고 훌륭했다. 가늘고 우아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다리에 매끈한 허리. 담금질한 것처럼 번쩍거리는 금빛 털과 찰랑이는 갈기…….
너무 아름다운 말이라 현실에서 보고 있다고 믿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그 말에 안장이 얹혀 있고 등 위에는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젊은 남자였다. 그 남자는 나란게렐과 아리용사나의 앞에 매끄럽게 멈추어 서서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뭐냐? 초원의 유령이냐?”
“아니에요.”
유령이냐고 묻는 걸 봐서 저 남자도 유령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란게렐은 조금 안심하고 대답했다.
“저기 황궁에서 왔어요.”
“황궁에서?”
남자는 말에 탄 채로 의심스럽게 되물었다. 나란게렐은 그 어조에 발끈했다.
“그래요. 당신은 누군데 이 시간에 나와 있어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 황궁의 여자라면 이 시간에 나오지 못할 텐데. 혼자 있나?”
남자는 더 의심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목소리에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이쪽의 질문엔 대답을 안 하고 더 캐묻고 있잖아? 그러나 나란게렐은 상대가 황궁의 사정을 잘 아는 것 같자 문득 풀이 죽어서 일단 대답했다.
“……오늘 책봉을 받은 후궁인데, 주변을 구경하러 아까 나왔다가 늦었어요.”
“그런데 말에서 내려 한가하게 걷고 있었단 말이야? 간도 크군.”
후궁이라는 것은 믿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즉각 비난하자 나란게렐은 다시 발끈했다. 아무튼 정체 모를 낯선 사람이니 이것은 숨기려고 했지만.
“말이 다리를 다쳐서 하는 수 없었어요.”
“그래?”
남자는 경계하는 기색 없이 말에서 훌쩍 내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이 달빛에 비쳐 나란게렐은 처음으로 이 낯선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자는 스물이 조금 넘은 듯한 잘생긴 사람이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의 선은 어른스럽게 굵으면서 조화로웠다. 묶은 머리 위로 쓴 모자는 털에서 윤이 나고 꼭대기가 붉어 값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입은 옷의 모양이나 자수를 보아서도 신분이 무척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나란게렐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이쪽이 부끄러워졌다. 나란게렐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모자를 펴서 머리에 대충 얹었다.
남자의 선명한 눈에 웃음기가 찼다.
“망가진 모자인 것 같은데.”
“얘가 밟았어요.”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를 가리켰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에서 금방에라도 떨어질 것 같아.”
“찌그러졌으니까 그렇죠. 남의 여자의 머리를 뚫어지게 보는 게 아니에요.”
“방금까지는 모자를 벗고도 잘 다녔잖아.”
끊어진 줄에서 겨우 버티던 구슬이 몇 알 떨어져 초원에 굴렀다. 나란게렐은 그것을 줍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꼿꼿하게 서서 말했다.
“신랑한테 미안하니까 그렇죠.”
“그래?”
남자는 또 웃었다.
“오늘 책봉을 받은 후궁이라면, 황제의 얼굴도 못 봤을 텐데.”
“그래도 신랑은 신랑이니까.”
이 남자는 정말로 궁의 사정을 잘 아나 보다. 어쩌면 황족이거나 높은 대신일지도 몰랐다. 나란게렐은 모자를 매만졌다. 남자는 나란게렐의 발목 쪽을 보고 이번에는 인상을 썼다.
“다쳤나?”
“좀 접질린 것 같아요.”
“그 꼴로 황궁까지 걸어가려고 했던 말이야? 다친 말을 데리고? 간이 큰 정도가 아닌데.”
“그럼 어떡해요.”
“이 부근에는 황제의 후궁을 건드릴 정도로 간이 큰 도적은 없지만, 밤이 되면 짐승은 나오지. 날 못 만났으면 내일 아침엔 부음을 들을 뻔했군.”
아마도 그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란게렐은 그 남자의 고압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몸을 숙여 아리용사나의 발목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아리용사나가 불평하며 움직이려고 하자 나란게렐은 얼른 고삐를 잡고 진정시켰다.
“쉬이, 가만히 있어.”
몸을 숙인 남자의 등은 넓고 강해 보였다. 아마도 정력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저 정도 나이의 남자라면 결혼도 했을 것인데. 아, 그러고 보니 저 남자는 정말로 이 시간에 왜 나온 걸까.
어느 다리가 다친 것인지 알아보던 남자는 곧 몸을 일으켜 세우고 진단했다.
“염증이 생겼어. 다친 채로 오랫동안 걸었겠지. 참을성 있고 좋은 말이군.”
“어머나.”
그렇다면 아마도 여행길에 다쳤다는 말이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의 눈을 보고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몰랐구나.”
“얼른 데려가서 치료하면 괜찮을 거야.”
“네. ……고마워요.”
나란게렐도 말에 대해 모르는 편은 아닌데, 이 남자는 정말로 전문가인 모양이었다. 나란게렐은 잠시 후 궁금해져 물었다.
“당신은 마의예요?”
남자는 나란게렐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는 자신감이 있어 매력적이었는데, 그녀는 그 얼굴을 보고 괜히 심란해져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남자와 결혼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많이 웃는 것은 좋은 것이니까.
“마의처럼 보여?”
……아니다. 그녀는 괜한 수수께끼에는 취미가 없었다. 나란게렐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어요. 당신은 누구예요?”
“몰라도 돼.”
남자는 웃는 얼굴 그대로 말하고 황금 말을 가리켰다. 그가 그녀를 놀리며 재미있어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녀는 발끈했지만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얼른 후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타.”
결혼 첫날에 외간 남자와 말을 타는 것은 좋지 않은 일임에 분명했지만, 지금은 부득이한 상황인 것 같았다. 나란게렐은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대의 말도 저기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자.”
남자는 황금 말에 훌쩍 올라탔다. 자세히 보니 그 말에는 수가 놓아진 훌륭한 주머니와 금빛 장식이 달린 안장, 그리고 멋지게 세공된 재갈이 있었다. 고삐도 값비싼 물건인 것 같았다.
황금 말의 키가 컸기 때문에 나란게렐이 말에 타는 데에는 약간 노력이 필요했다. 그녀가 발목의 통증과 피로 때문에 분투하자 남자는 곧 그녀의 허리를 잡아 올렸다. 외간 남자에게 그렇게 허리를 잡힌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라 그녀는 깜짝 놀라고 당황했다.
“말을 못 타나?”
뻣뻣해진 허리가 옷 너머로 느껴진 듯 그는 우습다는 투로 말했다.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를 가리키며 턱을 내밀었다.
“저 애랑 같이 자랐어요.”
“그래? 그러면 내가 무섭나?”
“무서운 건 아니에요. 놀랐어요.”
남자는 뭐가 우스운지 이번에는 껄껄 웃었다.
“무서워하는 게 좋아. 아무도 없는 곳에 외간 남자와 둘이 있는 거라고.”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찔러 버릴 거예요.”
“단검도 가지고 있나?”
“유목민에겐 당연한 거죠.”
그것은 습관처럼 가져와서 다행이었다. 남자는 그 말에 이번엔 즐거운 듯 웃었다. 그 목소리는 순전하고 천진했고, 나란게렐은 남자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일단 믿기로 했다. 물론 전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분명히 높은 신분의 사람인 것 같고, 황제의 후궁이라는 신분도 이미 이쪽에선 밝혔고, 이 상황에선 어쩔 수도 없고…….
“가자, 알티.”
남자는 나란게렐이 자기 뒤에 제대로 앉자 말에게 속삭였다. 황금 말은 부드럽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란게렐은 남자의 등에서 나오는 따뜻한 체온에 훨씬 숨쉬기 쉬워진 것을 느꼈다. 얼릴 것처럼 불던 초원의 바람도 불이 있다면 버틸 수 있다. 아리용사나도 천천히 알티를 따라 걸었다. 나란게렐은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아리용사나가 제대로 걷는지 확인했다. 아마도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아까도 비틀거렸을 아리용사나는 이제 정말로 참을 수 없는 듯 절뚝거리며 걸었다.
가슴이 아파졌다. 나란게렐은 이제 여러 상념이 들어 우울하게 황궁 쪽을 보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자 남자는 앞에서 가볍게 물었다.
“그대는 이름이 뭐지?”
“나란게렐이에요.”
나란게렐은 툭 던졌다. 기분이 가라앉아 목소리도 밝게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놀리듯 평가했다.
“달빛이라는 뜻의 나란게렐인가? 성질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이름이군.”
“당신이 내 성질을 어떻게 알아요? 오늘 처음 봤는데.”
“딱 보면 알지. 말도 주인을 닮았어.”
“어떻게 알았어요?”
가족이 하던 말은 그렇다 쳐도, 처음 본 남자한테까지 이런 말을 듣다니. 나란게렐은 정말로 놀라 물었다. 남자는 킥킥 웃었다.
“보면 알아. 얼굴에 써 있거든.”
“그렇게 티가 나요?”
“그래. 그리고 요즘의 잘 자란 아가씨들은 그대처럼 또박또박 말대꾸하지 않아.”
“그거 어디 기준이에요? 말대꾸를 할 만하니까 하지요.”
“그래. 유목민은 그래야지.”
……나쁜 뜻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나란게렐은 그만 혼란스러워져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갑자기 약간 쌀쌀맞게 물었다.
“혼례식 날의 신부는 나돌아 다니지 않는 게 우리 부족의 전통인데, 그대의 부족은 그렇지 않은 건가?”
“우리도 그래요.”
이건 비난하는 게 맞는 것 같고. 그녀는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남자는 그녀의 나빠진 기분을 배려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혹시 도망가려던 건 아니겠지?”
이번엔 아무리 이 남자의 말에 타고 있다고 해도 화를 내도 될 것 같았다. 나란게렐은 톡 쏘아붙였다.
“아니거든요?”
“그래?”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까까지의 장난기나 웃음기는 찾아볼 수도 없이 사라졌다. 남자는 그녀를 떠보듯 말했다.
“먼 곳까지 와서 가족들은 보지 못하고, 첫날밤에 남편의 얼굴도 보지 못했으니 실망할 수도 있지. 마침 말도 있고 하니 화가 나서 나가려고 했을 수도…….”
“아니라니까요.”
나란게렐은 성질이 나서 남자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 말에 남자는 다시 조금 따뜻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정말 그냥 구경을 하러 나온 건가?”
“그래요. 이제부터 살 곳이라니까 아리용사나에게도 구경을 시켜 주고 싶었어요.”
“그랬는데 다친 거군.”
“……그래요.”
나란게렐은 이즈음 다시 한번 아리용사나를 돌아보았다. 아리용사나는 다행히도 여전히 잘 걸어오고 있었다.
엉덩이 아래서 알티의 엉덩이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나란게렐은 궁금해져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