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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당신 말 말이에요, 황금으로 빚은 거예요?”
“뭐?”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초원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었다. 그 목소리가 다시 기분 좋은 것으로 변해 그녀는 어쩐지 안심했다. 이런 초원에서 만난 사람이 갑자기 기분이 변했다며 그녀를 놓고 간다면 매우 속상할 것이다.
“그렇잖아요. 이름도 황금이라는 뜻의 알티고. 이렇게 번쩍이는 말은 본 적이 없어요.”
“이 녀석은 먼 땅에서 온 귀한 종이야. 황금으로 빚은 말이 이 녀석만큼 움직인다면 벌써 백 마리도 더 빚었겠지.”
“와아.”
나란게렐은 감탄했다.
“당신은 정말 부자인가 봐요.”
“황금이라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있지.”
남자는 그다지 잘난 체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정말로 황금의 유무에 가치를 두지 않을 만큼 부자인 모양이었다. 황궁에는 대단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나란게렐은 다시 감탄했다.
“달리기도 빨라요?”
“나? 아니면 알티?”
“누가 당신한테 관심이 있대요. 알티 말이에요.”
“지금 그대를 황궁까지 데려가는 게 누구인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남자는 이번에도 명백히 나란게렐을 놀리고 있었지만, 여차하면 이 추운 초원에서 괜히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는 얼른 숙였다. 될 수 있다면 얼른 따뜻한 천막에 들어가 화로 옆에서 차라도 마시고 싶다.
“아, 미안해요. 당신이 빠른지도 궁금해요.”
“빤히 보이는 거짓말도 할 줄 아는군.”
“안 돼요?”
“빤히 보이니 용서해 주지.”
어쩌라는 거야. 나란게렐은 자신의 얼굴이 남자에게 보이지 않을 것을 틈타 속으로 비죽거렸다. 남자는 혼자 즐거워하더니 말했다.
“놀랄 만큼 빠르고 힘도 세고, 지구력도 강하지. 세상에 다시없을 명마야.”
“대단하네요.”
말은 좋다. 나란게렐은 어쩐지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퍼뜩 떠올라 뒤를 보며 말했다.
“미안해, 아리용사나. 너를 욕한 건 아니야. 너도 좋은 말이야.”
남자는 그 말이 우스운지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란게렐은 남자에게 틈을 주지 않고 재촉했다. 남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가 그리고야?”
“당신은 빨라요? 묻게 했잖아요.”
“아. 나도 빠르지.”
“그래요?”
이번엔 저쪽을 놀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나란게렐은 후후 웃었다.
어느새 불빛이 가까워졌다. 점점 더 추워져 나란게렐은 몸을 조금 떨었다. 그나마 사람과 가까이 있으니 이 정도지, 혼자였으면 끔찍했을 것이다. 이 남자의 말에는 활도 있으니 짐승이 다가와도 소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고.
잠시 조용하던 남자는 평이한 목소리로 물었다.
“책봉례는 어땠지? 잘 마쳤나?”
“네. 황제 폐하는 끝까지 못 뵈었지만, 황태후 마마와 황후 마마는 뵈었어요.”
“그래?”
“네.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렇겠지.”
“그거 알아요? 이번에 절 포함해서 후궁이 백 명이 넘어요.”
“그래. 모든 부족에서 여자를 보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백 명이 넘는 아내를 가진 남자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황제 폐하는…….”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하고 중얼거릴까 했던 나란게렐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기 신랑에 대해 첫날부터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약간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나?”
“아녜요.”
정말로, 그 단어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아직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에 대해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란게렐은 조금 더 단어를 고른 뒤 가만히 속삭였다.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어요. 아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남자는 다시 웃는 소리를 낮게 냈다. 그러나 그 울림은 그의 등에서는 전달되지 않았고, 나란게렐은 그가 입으로만 웃는 소리를 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몰라요. 어떤 분인지 못 들었어요.”
“그런가?”
“아, 오늘 태후 마마께서 황제 폐하는 성정이 불같다고 하셨어요.”
“그래?”
“……아, 그러면 이렇게 나온 걸 아시면 혼이 날까요?”
“황제에게 혼이 날 것은 없지만, 태후 마마나 황후에게는 혼이 날지도 모르지. 그대가 안 들키게 조심해서 들어가야지.”
“……당신은 엄청나게 높은 사람이에요?”
듣다 듣다 못 넘어가겠어서 나란게렐은 의심스럽게 물었다. 남자는 의뭉스럽게 되물었다.
“왜?”
“아까부터 황제 폐하도 황후 마마도 편하게 부르고 있잖아요.”
“그대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뭔가 놀리려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궁금해졌다. 나란게렐은 남자를 다그쳤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왜 이 밤에 나와 있었어요? 밤에 혼자 나온 걸 보니 도망치려던 건가요?”
행장이나 하는 행동을 보아 그럴 리는 없었지만, 아까 받았던 억울한 의심에 대한 보복으로 그녀는 그렇게 물었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도 산책을 나온 길이었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요?”
“그래서 그대를 찾을 수 있었으니 그대의 입장에서는 감사해야겠지.”
할 말이 없다.
후궁의 불빛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담벼락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자 발목이 급히 시큰거렸다. 별일 없이 도착한 것 같다.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잘 와 주어서 다행이었다. 마의가 오늘은 깨어 있지 않겠지. 내일 아침 일찍 부르도록 시내에게 부탁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후궁에 있을지도 모르고.
곳곳에서 횃불이 오르는 후궁은 밤에 보니 더 거대해 보였다. 나란게렐은 모자가 줄곧 삐뚤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쳐 썼다.
알티가 커다랗고 굳게 닫힌 나무 대문에 다가가자 엄정한 얼굴의 병사들이 창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티와 그 위에 탄 사람을 보자 얼른 창을 치우고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폐하!”
언동으로 아예 짐작을 못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밝혀지니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나란게렐은 앞에 앉은 남자, 황제의 등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황제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일어나게 했다.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문을 열어라.”
“예!”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있게 되었다. 황제의 내방을 알리기 위해서인지 병사 하나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자는 듯 후궁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황제는 뒤의 나란게렐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대의 처소는 어디지?”
“저기, 안쪽이요.”
갑자기 남자의 눈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남자가 오늘 종일 못 만났던 남편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얼굴이 붉어졌다. 나란게렐은 얼굴을 조금 숙이고 아까보다 우물거리며 자기가 기억하는 대로의 방향을 가리켰다. 황제는 짓궂게 웃었다.
“아까까지와 태도가 다른데.”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모습부터 보았다면 얌전한 아가씨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탄로 났다. 나란게렐은 어떻게 말해야 할 줄 몰라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의외로 불쾌하지 않은 듯 빙긋빙긋 웃기만 했다.
알티는 얌전히 후궁의 길을 따라가 나란게렐의 처소까지 갔다. 천막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시내는 황금빛 말에 탄 두 사람을 보자 얼른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황제는 시내에게 명령하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란게렐을 그대로 번쩍 들어 안았다.
“어머나!”
나란게렐은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질렀다. 황제는 시내에게 빠르게 지시하며 천막으로 걸어갔다.
“의원을 불러오고 뜨거운 물과 모포도 가져와라. 빈이 발목을 다쳤다.”
시내는 기겁해서 어딘가로 달려갔다.
황제는 천막의 문을 열었다. 천막 안은 시내가 준비해 두고 있었던 듯 따뜻한 화로가 피워져 잘 타고 있었고 잠자리도 깔려 있었다. 화로 쪽에 놓인 고기와 음료는 아까는 없던 물건이었다. 황제는 나란게렐을 들고 가 잠자리 위에 내려놓았다. 그 팔의 감촉에 나란게렐은 있는 대로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시내는 금세 의원을 데려왔다. 의원을 이렇게 금방 찾아올 수 있다는 것에 나란게렐은 놀라워했고 황제는 화로 옆에 앉아 있다가 의원에게 명령했다.
“빈이 발목을 접질린 듯하다 하니 살펴라. 그리고 밖의 말도 발목을 다쳤으니 보고, 필요하다면 마의도 부르도록.”
“예, 폐하.”
의원은 공손히 대답했다. 혹시 이대로 황제가 함께 있어 주는 걸까 하고 눈치를 살피는 나란게렐에게 황제는 일어서며 또 웃어 보였다.
“겨우 만난 내 아내와 계속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 밤은 선약이 있어서.”
가는 모양이다. 다른 수많은 비빈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역시 섭섭해 나란게렐은 저도 모르게 앵돌아진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그걸 보고 전혀 나쁜 사람 같지 않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대신들이 거품을 물거든. 금방 다시 만날 거야. 그때까지 몸조리 잘 하고 있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생각하던 나란게렐은 그때 의원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그만 인상만 있는 대로 쓰고 말았다. 황제는 껄껄 웃더니 천막을 나가 문을 닫았다.
“당신 말 말이에요, 황금으로 빚은 거예요?”
“뭐?”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초원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었다. 그 목소리가 다시 기분 좋은 것으로 변해 그녀는 어쩐지 안심했다. 이런 초원에서 만난 사람이 갑자기 기분이 변했다며 그녀를 놓고 간다면 매우 속상할 것이다.
“그렇잖아요. 이름도 황금이라는 뜻의 알티고. 이렇게 번쩍이는 말은 본 적이 없어요.”
“이 녀석은 먼 땅에서 온 귀한 종이야. 황금으로 빚은 말이 이 녀석만큼 움직인다면 벌써 백 마리도 더 빚었겠지.”
“와아.”
나란게렐은 감탄했다.
“당신은 정말 부자인가 봐요.”
“황금이라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있지.”
남자는 그다지 잘난 체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정말로 황금의 유무에 가치를 두지 않을 만큼 부자인 모양이었다. 황궁에는 대단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나란게렐은 다시 감탄했다.
“달리기도 빨라요?”
“나? 아니면 알티?”
“누가 당신한테 관심이 있대요. 알티 말이에요.”
“지금 그대를 황궁까지 데려가는 게 누구인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남자는 이번에도 명백히 나란게렐을 놀리고 있었지만, 여차하면 이 추운 초원에서 괜히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는 얼른 숙였다. 될 수 있다면 얼른 따뜻한 천막에 들어가 화로 옆에서 차라도 마시고 싶다.
“아, 미안해요. 당신이 빠른지도 궁금해요.”
“빤히 보이는 거짓말도 할 줄 아는군.”
“안 돼요?”
“빤히 보이니 용서해 주지.”
어쩌라는 거야. 나란게렐은 자신의 얼굴이 남자에게 보이지 않을 것을 틈타 속으로 비죽거렸다. 남자는 혼자 즐거워하더니 말했다.
“놀랄 만큼 빠르고 힘도 세고, 지구력도 강하지. 세상에 다시없을 명마야.”
“대단하네요.”
말은 좋다. 나란게렐은 어쩐지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퍼뜩 떠올라 뒤를 보며 말했다.
“미안해, 아리용사나. 너를 욕한 건 아니야. 너도 좋은 말이야.”
남자는 그 말이 우스운지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란게렐은 남자에게 틈을 주지 않고 재촉했다. 남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가 그리고야?”
“당신은 빨라요? 묻게 했잖아요.”
“아. 나도 빠르지.”
“그래요?”
이번엔 저쪽을 놀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나란게렐은 후후 웃었다.
어느새 불빛이 가까워졌다. 점점 더 추워져 나란게렐은 몸을 조금 떨었다. 그나마 사람과 가까이 있으니 이 정도지, 혼자였으면 끔찍했을 것이다. 이 남자의 말에는 활도 있으니 짐승이 다가와도 소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고.
잠시 조용하던 남자는 평이한 목소리로 물었다.
“책봉례는 어땠지? 잘 마쳤나?”
“네. 황제 폐하는 끝까지 못 뵈었지만, 황태후 마마와 황후 마마는 뵈었어요.”
“그래?”
“네.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렇겠지.”
“그거 알아요? 이번에 절 포함해서 후궁이 백 명이 넘어요.”
“그래. 모든 부족에서 여자를 보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백 명이 넘는 아내를 가진 남자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황제 폐하는…….”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하고 중얼거릴까 했던 나란게렐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기 신랑에 대해 첫날부터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약간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나?”
“아녜요.”
정말로, 그 단어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아직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에 대해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란게렐은 조금 더 단어를 고른 뒤 가만히 속삭였다.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어요. 아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남자는 다시 웃는 소리를 낮게 냈다. 그러나 그 울림은 그의 등에서는 전달되지 않았고, 나란게렐은 그가 입으로만 웃는 소리를 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몰라요. 어떤 분인지 못 들었어요.”
“그런가?”
“아, 오늘 태후 마마께서 황제 폐하는 성정이 불같다고 하셨어요.”
“그래?”
“……아, 그러면 이렇게 나온 걸 아시면 혼이 날까요?”
“황제에게 혼이 날 것은 없지만, 태후 마마나 황후에게는 혼이 날지도 모르지. 그대가 안 들키게 조심해서 들어가야지.”
“……당신은 엄청나게 높은 사람이에요?”
듣다 듣다 못 넘어가겠어서 나란게렐은 의심스럽게 물었다. 남자는 의뭉스럽게 되물었다.
“왜?”
“아까부터 황제 폐하도 황후 마마도 편하게 부르고 있잖아요.”
“그대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뭔가 놀리려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궁금해졌다. 나란게렐은 남자를 다그쳤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왜 이 밤에 나와 있었어요? 밤에 혼자 나온 걸 보니 도망치려던 건가요?”
행장이나 하는 행동을 보아 그럴 리는 없었지만, 아까 받았던 억울한 의심에 대한 보복으로 그녀는 그렇게 물었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도 산책을 나온 길이었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요?”
“그래서 그대를 찾을 수 있었으니 그대의 입장에서는 감사해야겠지.”
할 말이 없다.
후궁의 불빛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담벼락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자 발목이 급히 시큰거렸다. 별일 없이 도착한 것 같다. 나란게렐은 아리용사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잘 와 주어서 다행이었다. 마의가 오늘은 깨어 있지 않겠지. 내일 아침 일찍 부르도록 시내에게 부탁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후궁에 있을지도 모르고.
곳곳에서 횃불이 오르는 후궁은 밤에 보니 더 거대해 보였다. 나란게렐은 모자가 줄곧 삐뚤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쳐 썼다.
알티가 커다랗고 굳게 닫힌 나무 대문에 다가가자 엄정한 얼굴의 병사들이 창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티와 그 위에 탄 사람을 보자 얼른 창을 치우고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폐하!”
언동으로 아예 짐작을 못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밝혀지니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나란게렐은 앞에 앉은 남자, 황제의 등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황제는 손을 들어 병사들을 일어나게 했다.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문을 열어라.”
“예!”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있게 되었다. 황제의 내방을 알리기 위해서인지 병사 하나가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자는 듯 후궁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황제는 뒤의 나란게렐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대의 처소는 어디지?”
“저기, 안쪽이요.”
갑자기 남자의 눈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남자가 오늘 종일 못 만났던 남편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얼굴이 붉어졌다. 나란게렐은 얼굴을 조금 숙이고 아까보다 우물거리며 자기가 기억하는 대로의 방향을 가리켰다. 황제는 짓궂게 웃었다.
“아까까지와 태도가 다른데.”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모습부터 보았다면 얌전한 아가씨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탄로 났다. 나란게렐은 어떻게 말해야 할 줄 몰라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의외로 불쾌하지 않은 듯 빙긋빙긋 웃기만 했다.
알티는 얌전히 후궁의 길을 따라가 나란게렐의 처소까지 갔다. 천막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시내는 황금빛 말에 탄 두 사람을 보자 얼른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라.”
황제는 시내에게 명령하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란게렐을 그대로 번쩍 들어 안았다.
“어머나!”
나란게렐은 깜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질렀다. 황제는 시내에게 빠르게 지시하며 천막으로 걸어갔다.
“의원을 불러오고 뜨거운 물과 모포도 가져와라. 빈이 발목을 다쳤다.”
시내는 기겁해서 어딘가로 달려갔다.
황제는 천막의 문을 열었다. 천막 안은 시내가 준비해 두고 있었던 듯 따뜻한 화로가 피워져 잘 타고 있었고 잠자리도 깔려 있었다. 화로 쪽에 놓인 고기와 음료는 아까는 없던 물건이었다. 황제는 나란게렐을 들고 가 잠자리 위에 내려놓았다. 그 팔의 감촉에 나란게렐은 있는 대로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시내는 금세 의원을 데려왔다. 의원을 이렇게 금방 찾아올 수 있다는 것에 나란게렐은 놀라워했고 황제는 화로 옆에 앉아 있다가 의원에게 명령했다.
“빈이 발목을 접질린 듯하다 하니 살펴라. 그리고 밖의 말도 발목을 다쳤으니 보고, 필요하다면 마의도 부르도록.”
“예, 폐하.”
의원은 공손히 대답했다. 혹시 이대로 황제가 함께 있어 주는 걸까 하고 눈치를 살피는 나란게렐에게 황제는 일어서며 또 웃어 보였다.
“겨우 만난 내 아내와 계속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 밤은 선약이 있어서.”
가는 모양이다. 다른 수많은 비빈도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역시 섭섭해 나란게렐은 저도 모르게 앵돌아진 표정을 지었다. 황제는 그걸 보고 전혀 나쁜 사람 같지 않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대신들이 거품을 물거든. 금방 다시 만날 거야. 그때까지 몸조리 잘 하고 있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생각하던 나란게렐은 그때 의원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그만 인상만 있는 대로 쓰고 말았다. 황제는 껄껄 웃더니 천막을 나가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