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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외딴 섬
서울에 큰 빌딩이 2개나 있는 남자가 섬을 사들였다고 소문이 난 건 몇 해 전부터였다. 연안부두에서 정기선을 타고 한참을 들어와 또다시 낚싯배나 작은 보트로 이동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섬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장비와 자재들을 실은 바지선이 수시로 들락거리는가 싶더니 뭔가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초반엔 여행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펜션을 짓느니 어쩌느니 의견이 분분하더니 결론은 그저 별장을 겸한 개인주택 하나를 짓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해서 섬엔 근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멋있는 집이 지어졌다.
그 집에 보름 전쯤부터 불이 켜졌다. 누군가가 이사를 들어왔다는데 좀처럼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하루 종일 뭘 하는지 집에만 콕 처박혀있는 이웃을 두고 동네에선 말이 많았다. 그 집에 대해 알려진 거라고는 주인이라는 남자가 갓 서른이나 되었을 법한 젊은 사람이라는 것 뿐. 조용한 섬마을은 매일 그 집 이야기로 술렁이고 있었다.
도원이 심란한 얼굴을 하고 연락도 없이 집에 온 날도 그랬다. 집을 비운 아버지를 기다리다 집 앞 구멍가게에 갔을 때에도 동네 아낙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외딴 섬에서 지내고 있는 남자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언뜻 본 사람이 그러는데 인물이 훤하다더라. 그런 남자가 저런 섬에 왜 들어가 있는 것일까. 혹 이상한 범죄자는 아닐까. 어디가 아파서 요양이라도 온 것일까. 여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 남자의 이야기였다.
도원이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들어오는 사람 괜히 무안해지게 만드는 그런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다.
“도원이 왔니?”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가게 아줌마가 일어서며 알은체를 하자 도원은 애써 웃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응. 어쩐 일이야. 벌써 휴가야?”
“뭐 그냥 겸사겸사요. 혹시 저희 아버지 보셨어요?”
“차 씨? 글쎄다. 오늘은 못 봤는데. 낚싯배라도 탄 거 아냐?”
건성으로 대답하는 주인 여자의 말을 들으며 물건이라고는 몇 가지 되지 않는 좁은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도원은 5개들이 라면 1봉지와 스팸 2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망설이다 캔 맥주 2개를 슬쩍 집어 계산을 치렀다. 누구네 집 딸이 대낮부터 술을 먹더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자중해야 하는데 그것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이런 게 다 신경이 쓰일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다른 곳에 가는 건데 그랬나. 가게를 나서는데 등 뒤가 여러 시선으로 따갑다.
집으로 돌아온 도원은 가스레인지에 라면 끓일 물을 올리고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커다란 냉장고는 썰렁했다. 지난번에 다니러 왔을 때 만들어놓은 반찬은 그새 다 드신 모양이다. 아무리 정신이 없더라도 장은 좀 봐 오는 건데 그랬나. 도원은 슬쩍 표정을 찡그리며 김치를 꺼내었다. 너무 익어버려 뚜껑만 살짝 열었을 뿐인데 쉰내가 풀풀 풍겼다. 아무래도 새로 김치를 담가야 할 것 같았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도원은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을 삼키자 싸한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숨도 쉬지 않고 한 캔을 단번에 비워내자 머리가 찡했다.
“그 망할 자식하고 처음부터 시작을 하는 게 아니었어.”
눈물이 날 만큼 신 김치를 씹으며 도원은 중얼거렸다.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이곳에 내려온 참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일을 걱정하고 있는 제가 스스로 한심할 지경이었다. 더 이상 석주랑 일을 함께 한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 이참에 전부 정리를 해야겠다. 김석주랑 관련된 건 하나도 남김없이 그만둬야지. 그러자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쇼핑몰을 정리해야겠지. 아무리 손실이 크더라도 이런 더러운 기분으로 그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진즉에 그만뒀어야 했다. 도원은 생각에 잠긴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3년째 애인이자 동업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김석주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벌써 몇 달 전쯤부터였다.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고 향수를 바꿨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이상하더니 두어 달 전쯤부터는 잠자리조차 요구하지 않았었다. 딱히 그와의 잠자리가 즐거웠다거나 기다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점점 멀리하는 그의 태도에 이상한 촉이 왔다. 그래서였다. 예고도 없이 석주의 오피스텔에 찾아간 것은.
바람난 주제에 녀석은 출입문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는 대담함을 보였다. 덕분에 현장을 제대로 잡았지만 말이다.
누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서로에게 몰두할 만큼 두 사람은 미쳐있었다. 맹세코 석주의 그런 모습은 지난 3년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3년을 사귀면서 섹스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신체 건강한 성인남녀였으니까. 하지만 자신도 석주도 서로가 첫 상대였던 탓에 그저 정상위가 전부인 줄만 알고 살던 사람들이었었다. 딱히 뭔가를 연구할 만큼 섹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포르노에서나 볼 법한 자세로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던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마치 두 마리의 짐승이 얽혀 헐떡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뒤집혀 그 짐승 같은 것들에게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고 나온 게 바로 오늘 새벽이었다. 정신없이 이름을 불러대는 석주를 버려두고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이다. 아마 지금쯤 석주는 미친 듯이 자신을 찾아다니며 후회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애까지 놔두고 이혼한 여자에게 빠져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생각에 잠긴 사이 물이 끓었고 도원은 분이 풀리지 않는 얼굴로 라면을 끓여 늦은 점심을 때웠다. 믿었던 남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이 와중에도 허기를 느끼고 꾸역꾸역 먹을 것을 밀어 넣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비참했지만 그것들의 비참한 최후를 두 눈으로 보려면 먹고 살아남아야지.
“망할 자식…….”
김석주에게 미련이 남은 건 분명 아닌데 괜히 슬퍼져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라면은 반도 먹지 못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저녁 무렵이 되었는데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다. 해가 길어진 덕에 아직 어둡지는 않았지만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도원은 아버지가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뽑고 냉장고를 뒤적여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었다. 새로 지은 밥이 뜸이 들기를 기다리던 도원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대체 하루 종일 어디를 가신 걸까. 입고 입던 앞치마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두고 도원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었다. 아버지와 통화를 하기 위해, 종일 꺼두었던 휴대폰을 켜며 도원은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와버렸으니 석주는 당황했을 테고 또 미친 듯이 후회를 하고 있을 거라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목록을 확인한 순간 도원은 그야말로 똥 씹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걸려온 전화와 문자의 대부분은 거래처이거나 광고메시지들뿐. 석주에게서 온 건 달랑 한 통의 전화뿐이었다. 그것도 제가 뛰쳐나온 직후에 걸려온 거였다. 기가 막혔다.
“하아.”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미친놈을 보라지. 어떻게 미안하다는 한마디, 잘못했다는 한마디가 없어?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최소한 사과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무릎 꿇고 빌지는 못하더라도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그게 3년이나 연인으로 지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냐?
부서뜨릴 듯 휴대폰을 꽉 쥐고 있던 도원은 순간 울컥했다. 제 딴엔 그래도 위한다고 위했는데 결국 돌아온 건 배신이라니. 명목상으로는 공동투자로 쇼핑몰을 운영했지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던 석주를 배려해 거의 제 돈을 몰아넣았다. 그것뿐인가. 번번이 손을 내미는 석주네 식구들을 위해 빚을 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도움을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쳤다고 했지만 너무 여리기만 했던 석주를 어쩐지 제가 책임져야 할 것 같은 그런 보호본능이랄까. 아무튼 그런 감정으로 누나처럼 엄마처럼 챙겼었는데 이 자식은 바람피운 주제에 연락도 없다니.
분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결국 제멋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원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훔쳐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망할 자식. 개자식. 똥물에 튀겨 죽일 자식.”
차도원, 울 것 없어. 미안하다고 매달리지조차 않는 그런 녀석 때문에 아까운 눈물을 흘릴 필요 없다. 차라리 잘됐지 뭐. 결혼까지 해서 애까지 낳고 난 다음에 알았으면 어쩔 거야. 그래 차라리 잘된 거야. 좋은 경험했다 치자.
애써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감정을 추스른 도원은 눈물을 닦고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신호가 가고 언제 들어도 반가운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셨는데 이렇게 안 들어오시는 거예요?”
―목소리 예쁜 아가씨는 누구요?
“차도원. 차승재 씨 하나뿐인 딸인데요.”
―아아. 우리 예쁜 딸이구나.
“저 말고 또 숨겨놓은 딸이 있어요? 왜 목소리도 못 알아듣고 그래요.”
―욘석아. 못 알아먹긴. 우리 딸 목소리 한 번이라도 더 들으려고 그러는 거지.
“안 들어오세요? 아버지 좋아하는 찌개 끓여놨는데.”
―찌개? 뭐야. 딸, 집에 온 거야?
“그럼 집이지 설마 서울까지 찌개 드시러 오라고 할까 봐서요?”
―바빠서 휴가도 못 낼 거라더니 웬일이야?
“그냥 아버지 보고 싶어서.”
―아, 이거 어쩌냐. 아빠는 지금 부산인데.
“부산? 거긴 왜요?”
―너도 알지? 황 씨라고 아빠 친구. 그 친구가 이번에 부산에서 큰 마트를 차렸는데 당분간 와서 좀 도와달라고 하길래 어제 내려왔다. 겸사겸사 남쪽 여행도 좀 하고. 올 거면 미리 연락을 하지 그랬어.
도원은 낭패의 표정으로 잔뜩 끓여놓은 찌개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버지가 집에 계실 줄 알고 있었는데 빈집이라니.
“그래서 언제 오실 건데요.”
―한동안 못 올라갈 테니까 갈 때 문단속 잘하고. 먼 걸음 했을 텐데 얼굴 못 봐서 아쉽구나.
제가 잠깐 다니러 온 줄 아는 아버지의 말에 도원은 그저 알았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1. 외딴 섬
서울에 큰 빌딩이 2개나 있는 남자가 섬을 사들였다고 소문이 난 건 몇 해 전부터였다. 연안부두에서 정기선을 타고 한참을 들어와 또다시 낚싯배나 작은 보트로 이동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섬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장비와 자재들을 실은 바지선이 수시로 들락거리는가 싶더니 뭔가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초반엔 여행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펜션을 짓느니 어쩌느니 의견이 분분하더니 결론은 그저 별장을 겸한 개인주택 하나를 짓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렇게 해서 섬엔 근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멋있는 집이 지어졌다.
그 집에 보름 전쯤부터 불이 켜졌다. 누군가가 이사를 들어왔다는데 좀처럼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하루 종일 뭘 하는지 집에만 콕 처박혀있는 이웃을 두고 동네에선 말이 많았다. 그 집에 대해 알려진 거라고는 주인이라는 남자가 갓 서른이나 되었을 법한 젊은 사람이라는 것 뿐. 조용한 섬마을은 매일 그 집 이야기로 술렁이고 있었다.
도원이 심란한 얼굴을 하고 연락도 없이 집에 온 날도 그랬다. 집을 비운 아버지를 기다리다 집 앞 구멍가게에 갔을 때에도 동네 아낙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외딴 섬에서 지내고 있는 남자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언뜻 본 사람이 그러는데 인물이 훤하다더라. 그런 남자가 저런 섬에 왜 들어가 있는 것일까. 혹 이상한 범죄자는 아닐까. 어디가 아파서 요양이라도 온 것일까. 여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 남자의 이야기였다.
도원이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들어오는 사람 괜히 무안해지게 만드는 그런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다.
“도원이 왔니?”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가게 아줌마가 일어서며 알은체를 하자 도원은 애써 웃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응. 어쩐 일이야. 벌써 휴가야?”
“뭐 그냥 겸사겸사요. 혹시 저희 아버지 보셨어요?”
“차 씨? 글쎄다. 오늘은 못 봤는데. 낚싯배라도 탄 거 아냐?”
건성으로 대답하는 주인 여자의 말을 들으며 물건이라고는 몇 가지 되지 않는 좁은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도원은 5개들이 라면 1봉지와 스팸 2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망설이다 캔 맥주 2개를 슬쩍 집어 계산을 치렀다. 누구네 집 딸이 대낮부터 술을 먹더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자중해야 하는데 그것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이런 게 다 신경이 쓰일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다른 곳에 가는 건데 그랬나. 가게를 나서는데 등 뒤가 여러 시선으로 따갑다.
집으로 돌아온 도원은 가스레인지에 라면 끓일 물을 올리고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커다란 냉장고는 썰렁했다. 지난번에 다니러 왔을 때 만들어놓은 반찬은 그새 다 드신 모양이다. 아무리 정신이 없더라도 장은 좀 봐 오는 건데 그랬나. 도원은 슬쩍 표정을 찡그리며 김치를 꺼내었다. 너무 익어버려 뚜껑만 살짝 열었을 뿐인데 쉰내가 풀풀 풍겼다. 아무래도 새로 김치를 담가야 할 것 같았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도원은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을 삼키자 싸한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숨도 쉬지 않고 한 캔을 단번에 비워내자 머리가 찡했다.
“그 망할 자식하고 처음부터 시작을 하는 게 아니었어.”
눈물이 날 만큼 신 김치를 씹으며 도원은 중얼거렸다.
출근도 하지 않은 채 이곳에 내려온 참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일을 걱정하고 있는 제가 스스로 한심할 지경이었다. 더 이상 석주랑 일을 함께 한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 이참에 전부 정리를 해야겠다. 김석주랑 관련된 건 하나도 남김없이 그만둬야지. 그러자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쇼핑몰을 정리해야겠지. 아무리 손실이 크더라도 이런 더러운 기분으로 그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진즉에 그만뒀어야 했다. 도원은 생각에 잠긴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3년째 애인이자 동업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김석주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벌써 몇 달 전쯤부터였다. 부쩍 외모에 신경을 쓰고 향수를 바꿨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이상하더니 두어 달 전쯤부터는 잠자리조차 요구하지 않았었다. 딱히 그와의 잠자리가 즐거웠다거나 기다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점점 멀리하는 그의 태도에 이상한 촉이 왔다. 그래서였다. 예고도 없이 석주의 오피스텔에 찾아간 것은.
바람난 주제에 녀석은 출입문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는 대담함을 보였다. 덕분에 현장을 제대로 잡았지만 말이다.
누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서로에게 몰두할 만큼 두 사람은 미쳐있었다. 맹세코 석주의 그런 모습은 지난 3년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3년을 사귀면서 섹스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신체 건강한 성인남녀였으니까. 하지만 자신도 석주도 서로가 첫 상대였던 탓에 그저 정상위가 전부인 줄만 알고 살던 사람들이었었다. 딱히 뭔가를 연구할 만큼 섹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포르노에서나 볼 법한 자세로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던 장면은 충격 그 자체였다. 마치 두 마리의 짐승이 얽혀 헐떡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뒤집혀 그 짐승 같은 것들에게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고 나온 게 바로 오늘 새벽이었다. 정신없이 이름을 불러대는 석주를 버려두고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이다. 아마 지금쯤 석주는 미친 듯이 자신을 찾아다니며 후회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애까지 놔두고 이혼한 여자에게 빠져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생각에 잠긴 사이 물이 끓었고 도원은 분이 풀리지 않는 얼굴로 라면을 끓여 늦은 점심을 때웠다. 믿었던 남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이 와중에도 허기를 느끼고 꾸역꾸역 먹을 것을 밀어 넣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비참했지만 그것들의 비참한 최후를 두 눈으로 보려면 먹고 살아남아야지.
“망할 자식…….”
김석주에게 미련이 남은 건 분명 아닌데 괜히 슬퍼져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라면은 반도 먹지 못하였다.
시간이 흐르고 저녁 무렵이 되었는데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다. 해가 길어진 덕에 아직 어둡지는 않았지만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도원은 아버지가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뽑고 냉장고를 뒤적여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었다. 새로 지은 밥이 뜸이 들기를 기다리던 도원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대체 하루 종일 어디를 가신 걸까. 입고 입던 앞치마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두고 도원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었다. 아버지와 통화를 하기 위해, 종일 꺼두었던 휴대폰을 켜며 도원은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와버렸으니 석주는 당황했을 테고 또 미친 듯이 후회를 하고 있을 거라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목록을 확인한 순간 도원은 그야말로 똥 씹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걸려온 전화와 문자의 대부분은 거래처이거나 광고메시지들뿐. 석주에게서 온 건 달랑 한 통의 전화뿐이었다. 그것도 제가 뛰쳐나온 직후에 걸려온 거였다. 기가 막혔다.
“하아.”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미친놈을 보라지. 어떻게 미안하다는 한마디, 잘못했다는 한마디가 없어?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최소한 사과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무릎 꿇고 빌지는 못하더라도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그게 3년이나 연인으로 지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냐?
부서뜨릴 듯 휴대폰을 꽉 쥐고 있던 도원은 순간 울컥했다. 제 딴엔 그래도 위한다고 위했는데 결국 돌아온 건 배신이라니. 명목상으로는 공동투자로 쇼핑몰을 운영했지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던 석주를 배려해 거의 제 돈을 몰아넣았다. 그것뿐인가. 번번이 손을 내미는 석주네 식구들을 위해 빚을 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도움을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쳤다고 했지만 너무 여리기만 했던 석주를 어쩐지 제가 책임져야 할 것 같은 그런 보호본능이랄까. 아무튼 그런 감정으로 누나처럼 엄마처럼 챙겼었는데 이 자식은 바람피운 주제에 연락도 없다니.
분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결국 제멋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원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훔쳐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망할 자식. 개자식. 똥물에 튀겨 죽일 자식.”
차도원, 울 것 없어. 미안하다고 매달리지조차 않는 그런 녀석 때문에 아까운 눈물을 흘릴 필요 없다. 차라리 잘됐지 뭐. 결혼까지 해서 애까지 낳고 난 다음에 알았으면 어쩔 거야. 그래 차라리 잘된 거야. 좋은 경험했다 치자.
애써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감정을 추스른 도원은 눈물을 닦고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신호가 가고 언제 들어도 반가운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셨는데 이렇게 안 들어오시는 거예요?”
―목소리 예쁜 아가씨는 누구요?
“차도원. 차승재 씨 하나뿐인 딸인데요.”
―아아. 우리 예쁜 딸이구나.
“저 말고 또 숨겨놓은 딸이 있어요? 왜 목소리도 못 알아듣고 그래요.”
―욘석아. 못 알아먹긴. 우리 딸 목소리 한 번이라도 더 들으려고 그러는 거지.
“안 들어오세요? 아버지 좋아하는 찌개 끓여놨는데.”
―찌개? 뭐야. 딸, 집에 온 거야?
“그럼 집이지 설마 서울까지 찌개 드시러 오라고 할까 봐서요?”
―바빠서 휴가도 못 낼 거라더니 웬일이야?
“그냥 아버지 보고 싶어서.”
―아, 이거 어쩌냐. 아빠는 지금 부산인데.
“부산? 거긴 왜요?”
―너도 알지? 황 씨라고 아빠 친구. 그 친구가 이번에 부산에서 큰 마트를 차렸는데 당분간 와서 좀 도와달라고 하길래 어제 내려왔다. 겸사겸사 남쪽 여행도 좀 하고. 올 거면 미리 연락을 하지 그랬어.
도원은 낭패의 표정으로 잔뜩 끓여놓은 찌개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버지가 집에 계실 줄 알고 있었는데 빈집이라니.
“그래서 언제 오실 건데요.”
―한동안 못 올라갈 테니까 갈 때 문단속 잘하고. 먼 걸음 했을 텐데 얼굴 못 봐서 아쉽구나.
제가 잠깐 다니러 온 줄 아는 아버지의 말에 도원은 그저 알았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