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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통화를 마치고 도원은 멍한 표정으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혼자 먹을 줄 알았더라면 몇 시간 동안 지지고 볶고 애를 쓰지도 않았을 텐데……. 모처럼 만에 아버지와 식사라 솜씨를 부렸던 것이 이렇게 쓸모없는 일이 돼버렸다.

하는 수 없이 밥 한 공기를 떠 식탁에 앉았다. 넓은 식탁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밥을 먹으려니 어쩐지 좀 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혼자 먹는 밥에 익숙해있었다. 그게 너무 싫었었다. 솔직히 남자로서의 매력은 젬병이었던 석주에게 끌렸던 것은 그런 고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챙겨주던 석주의 다정함에 끌렸던 거였다. 외로운 것이 싫어서 일찍 시집을 가 자식들 많이 낳고 사는 게 꿈이었는데 이젠 다 틀려버렸다. 결혼은커녕 이 나이에 헤어져버렸으니 언제 다시 연애를 하고 시들어진 꿈을 피울까. 아니, 누가 저를 좋다고 한들 믿어지기나 할까. 평생을 제게 잘할 것 같았던 석주에게 이렇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이 불신의 후유증은 오래갈 텐데.

한 숟갈 가득 밥을 떠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었다. 목이 메어 켁켁거리다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툭툭툭. 연이은 주먹질에도 불구하고 목구멍을 틀어막은 그것은 내려가질 않는다. 그 사이 볼을 타고 굵은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목이 메어 눈물이 나는 것인지 서러워서 눈물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평평 울고 싶어졌다. 한바탕 울고 나면 전부 괜찮아질까. 지난 3년의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질까. 도원은 숟가락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아예 통곡하듯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쁜 자식. 확 고자나 되어버려라!”

눈물범벅이 된 채로 도원은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저주를 퍼부었다.



너무 깊어 파랗다 못해 검푸른 색을 띠는 바다가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작은 섬은 밤이 되면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밝게 빛나는 달이 구름 사이로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도시의 달은 반짝이는 주변의 불빛에 가려 전혀 빛나지 않는데 이곳의 달은 주변의 어둠 때문인지 유독 밝아 보였다.

독섬이라 불리는 외딴 섬의 유일한 집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끄적거리던 펜을 툭 던지듯 내려놓으며 준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오늘도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글은 보름 전부터 답보상태였다.

멍하니 빈 백지를 응시하던 준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책상 끄트머리에 놓아두었던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젠장.”

욕설이 절로 나왔다. 담배는 한 개비가 전부였다. 수북하니 쌓여있는 꽁초들. 일이 풀리지 않는 탓에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이 피워댔다. 이 생활이 길어지면 생명은 몇 년쯤 단축되고도 남겠다는 생각을 하며 준세는 마지막 남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창가로 향하였다.

보름. 말이 보름이지 혼자서 지내는 시간은 끔찍 그 자체였다. 휴대폰은 가끔 연락을 위해 켤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꺼둔 상태였고 컴퓨터도 연결을 하지 않아 무용지물인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마치 귀양살이와도 같았다.

물론 이 생활을 원한 건 전적으로 자신이었다.

점점 길어지는 슬럼프를 끝내기엔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집에서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이곳에 내려오면 조금 나을까 싶었는데 오후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지만 머릿속에 엉클어져 있는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은 결국 하지 못하였다.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며 준세는 미간을 구겼다. 까칠하게 수염이 자란 턱은 좀 야윈 듯 선이 날카롭다.

며칠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예상을 깨고 이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뭐라도 좀 먹어야 할 텐데 보름 전 가득 채웠던 냉장고는 이미 텅 비어있었고 남은 건 통조림뿐이다. 신선함과는 거리가 먼 깡통들뿐. 이러다 슬럼프를 탈출하기 전에 영양실조에 걸려 죽을지도 모르겠다.

창밖 너머 500m쯤 떨어진 다른 섬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겐 유일한 이웃인 셈이다. 동네에 켜진 몇 개의 가로등과 인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까만 풍경 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저곳이라도 다녀와야 할까. 준세는 이마를 찡그렸다.

오늘도 종일 먹은 거라곤 깡통에 들어있는 것들뿐. 신선한 음식이 필요하다. 아무래도 먹을 걸 좀 구입해야겠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여긴 외딴 섬이지 않은가.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이런 곳까지 얼굴을 알아봐 줄 정도로 유명인사는 아니니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준세는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주방 식탁에 올려두었던 보트 키와 지갑을 찾아 들었다. 워낙 작은 섬마을이라 편의점은 없을 테니 너무 늦지 않게 가봐야 했다. 아직 영업하는 식당이라도 있다면 간만에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집 앞 선착장으로 간 그는 능숙하게 보트에 올라타고는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마을이 있는 방향을 향해 보트를 몰았다. 잔잔한 밤바다를 가르며 물살이 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트는 마을 부둣가에 정박했다.



고작해야 수십여 가구 남짓인 작은 섬은 그래도 어지간한 편의시설들을 갖춰놓고 있었다. 주로 어업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관광객들이 꽤 드나들어 작은 가게 몇 개와 식당이 부두 근처에 집중적으로 몰려있었다. 보트에서 내려 배를 잘 묶어두고 준세는 잠시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 마을 중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당 간판이 달린 집들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다. 겨우 9시가 넘었을 뿐인데 벌써 장사를 끝낸 것일까. 처음 이곳에 들어오던 날 도시와는 생활패턴이 확연히 다르다고 알려주던 동네 이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렇지 9시는 좀 심하지 않은가. 준세는 슬쩍 인상을 찡그리고는 골목을 따라 좀 더 올라가보았다.

지은 지 꽤 오래되었을 법한 집들은 하나같이 담이 얕다. 담벼락을 따라 누구의 솜씨인지는 몰라도 제법 실력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골목 어귀마다 묻어나는 어촌의 한적함을 만끽하며 준세는 천천히 골목을 올라갔다.

얼마쯤 더 올라갔을까. 「대동상회」라는 불이 켜진 허름한 간판을 발견한 준세는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막 가게에서 나오던 한 여자와 부딪혔다. 준세는 본능적으로 여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붙들었다. 다행히 여자는 넘어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놓친 봉지 안에서 캔 맥주 몇 개가 굴러 나왔다. 손에 잡힌 여자의 팔을 놓으며 준세가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한숨을 푹 내쉰 여자가 주저앉아 물건을 줍기 시작했고, 준세는 그런 여자를 도우며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저도 못 본 거니까.”

물건을 봉지에 주워 담고 일어서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젊은 여자였다. 꽤 예쁘장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젊은 여자. 평소의 그였다면 가벼운 묵례 정도로 넘어갔을 텐데 사람이 그리웠던 탓일까. 정확히 보름 만에 처음 만난 사람이 이렇게 예쁘장한 젊은 여자라는 것이 괜히 반갑고 살짝 설레기까지 했다. 몇 마디라도 나눠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저도 별수 없는 수컷이니까.

“문은 계속 막고 서 계실 건가요?”

준세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여자는 쌀쌀맞게 물었다. 사람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게 보름 만이어서였을까? 쌀쌀한 말투조차 왠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여자는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준세는 이렇게 끝내기는 아쉬워 여자가 들고 있는 봉지를 가리켰다.

“내가 실수한 거니까 다른 물건으로 바꿔드릴게요.”

미안한 듯 말을 건네는 준세에게 여자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슬쩍 그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뭐야…….”

괜히 무안해진 준세는 점점 멀어져가는 여자를 가늘어진 눈길로 응시하다 돌아섰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언제부터인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도원이랑 아는 사이에요?”

도원? 방금 그 여자 이름인가. 준세는 도원이란 이름을 곱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담배 한 보루만 주세요.”

주인이 담배를 꺼내는 사이 준세는 가게 안에 있던 물건을 이것저것 골라 계산대에 올렸다. 물건들이라고 해봐야 라면이나 공산품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유제품들과 어묵 같은 것들뿐이다. 냉장고에서 시들어가고 있던 과일 몇 개를 발견한 준세는 망설이다 그것도 계산대에 올렸다.

“혹시 채소는 없습니까?”

“채소? 뭐 상추 같은 거 말이우?”

“뭐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이런 데서 누가 그런 걸 파나. 다들 농사지어서 먹지. 정 사려거든 내일 배 들어오는 시간 맞춰서 부두로 나가봐요. 농사지은 것들을 들고 팔러들 나오니까.”

“아, 네.”

검은 봉지에 주섬주섬 물건을 담던 여자가 그를 힐끗거렸다.

“저…… 혹시 저 건너편 섬에 살아요?”

“네.”

“아, 맞구나. 근데 총각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여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준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워낙 작은 동네라 말이 나기가 쉬우니까 조심하라던 이장의 경고가 떠올랐다. 서울에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관심이 없는데 건너편 섬에 사는 사람까지 신경을 쓰는 이곳 사람들이 준세는 어쩐지 신기했다.

“그냥 좀 쉬고 있어요.”

준세의 대답에 여자는 실망스러운 표정이다. 사지 멀쩡한 젊은 남자가 할 짓이 없어 백수 놀음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글을 쓴다고 하면 뭐를 쓰냐, 이름은 뭐냐, 돈을 잘 버냐 등등 수만 가지의 질문이 뒤따를 것을 알기에 그냥 백수로 취급되는 편이 훨씬 편했다.

가게를 나온 준세는 마을을 더 돌아볼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곧장 부두로 향하였다. 먹을 것을 구하려면 내일 다시 오는 편이 낫겠다. 낚시를 해서 물고기를 구할 게 아니라면 조업을 나갔던 배를 기다려 횟감도 좀 구하고 말이다. 싱싱한 횟감을 구해 모처럼 소주나 한잔할까? 생각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