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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자박거리는 조약돌을 밟으며 정박해두었던 보트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던 준세는 움직이는 그림자에 고개를 틀었다. 방파제 위쪽에 누군가가 걸터 앉아있었다. 자세히 보니 좀 전에 가게에서 부딪혔던 여자다.
“…….”
이름이 도원이라고 했던가. 준세는 방파제에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여자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젊은 여자가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가 준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게 뭐야. 걱정해줘 봤자 괜히 무시나 당할 텐데.
지금 제가 신경을 써야 할 건 며칠째 한 줄도 쓰지 못하는 글이지 저 여자가 아니었다.
지난 장마에 물이 샌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낡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도원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눈이 퉁퉁 부은 모양이다. 손을 들어 눈두덩을 어루만지며 도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상할 때는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취하니까 또 화가 나고 화가 나니까 석주가 생각나고 또……. 자책하던 도원은 순간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어떤 기억 하나에 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황급히 집어 들었다.
통화목록을 확인한 도원은 깊은 절망감에 빠져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아. 미쳤어. 미쳤어…….”
통화목록엔 새벽 2시부터 미친 듯이 석주에게 전화를 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게다가 더 환장할 것 같은 건 그렇게 전화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주가 전화 한 통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람을 피운 건 그 놈인데 결국 제가 매달린 꼴이었다. 아니 대체 왜! 왜!
머리를 쥐어뜯을 듯 움켜쥐고 신음하던 도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아니 자신이야 술김에 따지려고 그랬다지만 이 자식은 왜 전화를 안 받는 건데? 그냥 못 이기는 척 받아서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해줘도 되는 거 아닌가. 저 때문에 내가 이렇게 속상해하고 있으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젠 남자로서의 배신감을 넘어 인간적인 배신감이 더 커졌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지만 이렇게 나오는데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잠시 망설이던 도원은 숨을 고르고는 어젯밤 수십 번이나 걸었던 전화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미련을 두고 살 수도 없다. 네가 그렇게 비겁하게 나오겠다면 나도 똑같이 비겁하게 굴어서라도 정리를 하는 수밖에.
신호가 가지만 여전히 녀석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계속 기계음이 들려오자 도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전화를 끊고 잠시 숨을 고른 도원은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래. 그만하자. 나도 너 붙잡을 마음 없으니까 내 투자금이나 정리해서 이번 주 안으로 보내. 안 그러면 폐업신고 해버릴 테니까.」
생각 같아선 예고도 없이 폐업신고를 해버리고 싶었지만 그간의 정을 생각해 최소한의 아량을 배푼 거였다. 물론 석주는 최소한의 배려조차 소화할 능력도 없을 테지만.
메시지를 보내놓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하고 버티더니 투자금 이야기에 어지간히 급하기는 급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재깍 연락을 한 걸 보면.
도원은 몇 번이나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하며 배신감을 곱씹은 다음 통화버튼을 눌렀다.
―야. 차도원! 비겁하게 이러기야?
대뜸 소리부터 지르는 석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뭔가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생각은 안 해? 내가 괜찮은지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니지, 네 걱정 따윈 필요도 없으니까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냐?”
―그래. 나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까 전화를 못했던 거야. 난들 네가 걱정되지 안 됐겠어?
참 말은 잘한다. 할 말이 없어 전화를 못해? 석주의 변명을 듣고 있는 도원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변명 들으려고 너한테 연락한 거 아냐. 문자 봤지? 이번 주까지 정리해줘.”
―말도 안 돼! 잠깐 틀어졌다고 어떻게 일을 정리해? 도원아. 일단 만나자. 만나서 내가 다 설명할게.
석주의 목소리가 다급해질수록 도원은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쁜 것도 모자라 참 비겁한 놈이다. 이 상황에조차 제 이득을 챙기려는 비겁하디비겁한 놈. 다른 여자와 엉겨 붙어 헐떡거리는 걸 들켜놓고도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는 거지. 이런 놈을 그동안 내가 만났다 이거지. 계속해서 들려오는 석주의 변명을 들어주던 도원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김석주. 분명히 말하는데 이번 주까지야.”
―도원아. 차도원.
“난 분명히 경고했다. 네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내가 하게 될 텐데 그땐 아주 지저분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도원아,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참. 지난번에 너희 집에서 급하다고 가져간 돈도 채워놓는 게 좋을 거야. 횡령으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뭐? 이 씨발. 너 미쳤어? 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석주의 발광을 휴대폰을 멀찌감치 땐 채 들어주었다. 이별은 자고로 처절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미련 따위가 남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너에 대한 미련 같은 건 눈곱만큼도 남지 않겠지. 나한테 욕을 하고 발악을 하던 그 모습만 기억할 테니까. 더불어 딴 년하고 헐떡이던 그 모습까지.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년.
귀를 후비는 욕설에 도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동안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3년 간 베푼 인정은 다 어디로 가고 이런 욕을 먹을 정도로 내가 잘못했던 것일까.
“경고하는데 욕하지 마.”
―…….
“왜 바람 피운 건데?”
어차피 용서를 해줄 마음 같은 건 없었지만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지난 3년을 석주에게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다른 여자를 만났는지.
―몰라서 물어?
“……어. 모르니까 묻지.”
석주는 모른다는 대답이 우스운지 미친놈처럼 키득거렸다.
―너 딴 놈이랑 자본 적 없지?
석주의 대답에 도원은 부릅뜨고 있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걸 말이라고 해? 난 적어도 너처럼 양다리를 걸치는 그런 더러운 짓은 안 해.”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겠지. 너, 진짜 재미없어. 다리만 벌리고 누워있는다고 해서 섹스를 하는 건 아니지.
“…….”
―내가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다른 놈 만나기 전에 병원이라도 좀 가봐라. 불감증 치료라도 좀 받아보던가.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내가 유명한 의사라도 소개해줘?
“나쁜 새끼.”
―그래. 차라리 그렇게 욕을 하고 발악을 해. 그래야 더 인간적이지. 안 그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네 걱정이나 해. 고작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해결할 수나 있겠어?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려봐야 소용없다는 거나 알아둬.”
석주의 뜻밖의 공격에 대수롭지 않은듯한 반응을 보이며 전화를 끊었지만 도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괜히 물었다. 잔뜩 구석으로 몰린 녀석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는데.
“내가…… 불감증이라고?”
도원은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만족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건 피차일반인데 왜 자신이 불감증이란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럼 달아오르지도 않는데 그 여자처럼 온갖 교성을 내며 허리라도 흔들었어야 했어?
병원이나 가보라던 석주의 말에 받은 충격이 꽤 컸는지 정신을 차렸을 땐 점심때가 훌쩍 지나있었다.
유통기한이 이틀 지난 빵을 구워 커피와 함께 아침을 때우고 점심은 통조림을 따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그나마도 속이 느끼해 절반만 먹고 남긴 준세의 머릿속엔 적어도 저녁엔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지경이었다.
수북하게 꽁초가 쌓인 재떨이를 휴지통에 비우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커피 잔들을 개수대에 가져다 놓은 다음 준세는 욕실로 들어갔다.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정신이 맑지 않았다.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욕조에 미리 받아두었던 물에 들어가 앉았다. 그가 들어가자 욕실 바닥으로 물이 넘쳐흐른다. 지그시 욕조에 기대어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탁 트인 유리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준세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섬에 집을 설계하고 지은 건 오랜 친구로 지내온 녀석이었다.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완성된 집은 꽤 흡족했다. 그가 전부터 원하던 것들을 잘 알고 있던 녀석이라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준세의 머릿속을 옮겨놓은 듯 집을 지었다. 바다를 향해 사방으로 난 넓은 통유리창과 높은 천장의 거실. 2층으로 통하는 아치형의 철제계단은 심플하면서도 멋졌다. 게다가 욕실에서 바다를 볼 수 있게 만들어놓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피로뿐만 아니라 갑갑한 마음을 풀기에도 제격이다.
몸에 힘을 풀어 턱까지 물에 담근 채 준세는 생각에 잠겼다. 슬럼프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뭔가가 꼬인 채 풀리지 않고 있다. 이러다 영영 끝나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아예 글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있어야 할까. 계약해둔 것들을 전부 해지해달라고 할까. 그러면 출판사 사람들은 또 눈에 불을 켜고 잡아먹으려 들겠지.
해결책이 없는 고민에 답답해진 그는 물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누웠다. 숨을 참으며 눈을 뜨자 수면 위로 욕실 천장이 일렁였다. 이대로 입을 벌리면 죽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준세는 범인이 물속에서 살인을 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목에 손이 감긴 채 버둥거리는 피해자를 죽일 때 그는 웃고 있었을까. 아니면 죄책감에 괴로워했을까.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준세는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욕조에서 벌떡 일어서며 숨을 몰아쉬었다. 젖은 근육질의 몸이 들썩이는 숨소리를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머리가 찡했다.
자박거리는 조약돌을 밟으며 정박해두었던 보트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던 준세는 움직이는 그림자에 고개를 틀었다. 방파제 위쪽에 누군가가 걸터 앉아있었다. 자세히 보니 좀 전에 가게에서 부딪혔던 여자다.
“…….”
이름이 도원이라고 했던가. 준세는 방파제에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여자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젊은 여자가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가 준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게 뭐야. 걱정해줘 봤자 괜히 무시나 당할 텐데.
지금 제가 신경을 써야 할 건 며칠째 한 줄도 쓰지 못하는 글이지 저 여자가 아니었다.
지난 장마에 물이 샌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낡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도원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눈이 퉁퉁 부은 모양이다. 손을 들어 눈두덩을 어루만지며 도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상할 때는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취하니까 또 화가 나고 화가 나니까 석주가 생각나고 또……. 자책하던 도원은 순간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어떤 기억 하나에 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황급히 집어 들었다.
통화목록을 확인한 도원은 깊은 절망감에 빠져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아. 미쳤어. 미쳤어…….”
통화목록엔 새벽 2시부터 미친 듯이 석주에게 전화를 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게다가 더 환장할 것 같은 건 그렇게 전화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주가 전화 한 통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람을 피운 건 그 놈인데 결국 제가 매달린 꼴이었다. 아니 대체 왜! 왜!
머리를 쥐어뜯을 듯 움켜쥐고 신음하던 도원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아니 자신이야 술김에 따지려고 그랬다지만 이 자식은 왜 전화를 안 받는 건데? 그냥 못 이기는 척 받아서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해줘도 되는 거 아닌가. 저 때문에 내가 이렇게 속상해하고 있으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젠 남자로서의 배신감을 넘어 인간적인 배신감이 더 커졌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지만 이렇게 나오는데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잠시 망설이던 도원은 숨을 고르고는 어젯밤 수십 번이나 걸었던 전화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미련을 두고 살 수도 없다. 네가 그렇게 비겁하게 나오겠다면 나도 똑같이 비겁하게 굴어서라도 정리를 하는 수밖에.
신호가 가지만 여전히 녀석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계속 기계음이 들려오자 도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전화를 끊고 잠시 숨을 고른 도원은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래. 그만하자. 나도 너 붙잡을 마음 없으니까 내 투자금이나 정리해서 이번 주 안으로 보내. 안 그러면 폐업신고 해버릴 테니까.」
생각 같아선 예고도 없이 폐업신고를 해버리고 싶었지만 그간의 정을 생각해 최소한의 아량을 배푼 거였다. 물론 석주는 최소한의 배려조차 소화할 능력도 없을 테지만.
메시지를 보내놓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하고 버티더니 투자금 이야기에 어지간히 급하기는 급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재깍 연락을 한 걸 보면.
도원은 몇 번이나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하며 배신감을 곱씹은 다음 통화버튼을 눌렀다.
―야. 차도원! 비겁하게 이러기야?
대뜸 소리부터 지르는 석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뭔가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생각은 안 해? 내가 괜찮은지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니지, 네 걱정 따윈 필요도 없으니까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냐?”
―그래. 나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까 전화를 못했던 거야. 난들 네가 걱정되지 안 됐겠어?
참 말은 잘한다. 할 말이 없어 전화를 못해? 석주의 변명을 듣고 있는 도원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변명 들으려고 너한테 연락한 거 아냐. 문자 봤지? 이번 주까지 정리해줘.”
―말도 안 돼! 잠깐 틀어졌다고 어떻게 일을 정리해? 도원아. 일단 만나자. 만나서 내가 다 설명할게.
석주의 목소리가 다급해질수록 도원은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쁜 것도 모자라 참 비겁한 놈이다. 이 상황에조차 제 이득을 챙기려는 비겁하디비겁한 놈. 다른 여자와 엉겨 붙어 헐떡거리는 걸 들켜놓고도 아직 할 말이 남아있다는 거지. 이런 놈을 그동안 내가 만났다 이거지. 계속해서 들려오는 석주의 변명을 들어주던 도원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김석주. 분명히 말하는데 이번 주까지야.”
―도원아. 차도원.
“난 분명히 경고했다. 네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내가 하게 될 텐데 그땐 아주 지저분한 꼴을 보게 될 거야.”
―도원아,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참. 지난번에 너희 집에서 급하다고 가져간 돈도 채워놓는 게 좋을 거야. 횡령으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뭐? 이 씨발. 너 미쳤어? 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석주의 발광을 휴대폰을 멀찌감치 땐 채 들어주었다. 이별은 자고로 처절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미련 따위가 남지 않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너에 대한 미련 같은 건 눈곱만큼도 남지 않겠지. 나한테 욕을 하고 발악을 하던 그 모습만 기억할 테니까. 더불어 딴 년하고 헐떡이던 그 모습까지.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년.
귀를 후비는 욕설에 도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동안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3년 간 베푼 인정은 다 어디로 가고 이런 욕을 먹을 정도로 내가 잘못했던 것일까.
“경고하는데 욕하지 마.”
―…….
“왜 바람 피운 건데?”
어차피 용서를 해줄 마음 같은 건 없었지만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지난 3년을 석주에게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다른 여자를 만났는지.
―몰라서 물어?
“……어. 모르니까 묻지.”
석주는 모른다는 대답이 우스운지 미친놈처럼 키득거렸다.
―너 딴 놈이랑 자본 적 없지?
석주의 대답에 도원은 부릅뜨고 있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걸 말이라고 해? 난 적어도 너처럼 양다리를 걸치는 그런 더러운 짓은 안 해.”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겠지. 너, 진짜 재미없어. 다리만 벌리고 누워있는다고 해서 섹스를 하는 건 아니지.
“…….”
―내가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다른 놈 만나기 전에 병원이라도 좀 가봐라. 불감증 치료라도 좀 받아보던가.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내가 유명한 의사라도 소개해줘?
“나쁜 새끼.”
―그래. 차라리 그렇게 욕을 하고 발악을 해. 그래야 더 인간적이지. 안 그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네 걱정이나 해. 고작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해결할 수나 있겠어?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려봐야 소용없다는 거나 알아둬.”
석주의 뜻밖의 공격에 대수롭지 않은듯한 반응을 보이며 전화를 끊었지만 도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괜히 물었다. 잔뜩 구석으로 몰린 녀석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는데.
“내가…… 불감증이라고?”
도원은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만족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건 피차일반인데 왜 자신이 불감증이란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럼 달아오르지도 않는데 그 여자처럼 온갖 교성을 내며 허리라도 흔들었어야 했어?
병원이나 가보라던 석주의 말에 받은 충격이 꽤 컸는지 정신을 차렸을 땐 점심때가 훌쩍 지나있었다.
유통기한이 이틀 지난 빵을 구워 커피와 함께 아침을 때우고 점심은 통조림을 따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그나마도 속이 느끼해 절반만 먹고 남긴 준세의 머릿속엔 적어도 저녁엔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지경이었다.
수북하게 꽁초가 쌓인 재떨이를 휴지통에 비우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커피 잔들을 개수대에 가져다 놓은 다음 준세는 욕실로 들어갔다.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정신이 맑지 않았다.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욕조에 미리 받아두었던 물에 들어가 앉았다. 그가 들어가자 욕실 바닥으로 물이 넘쳐흐른다. 지그시 욕조에 기대어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탁 트인 유리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준세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섬에 집을 설계하고 지은 건 오랜 친구로 지내온 녀석이었다.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완성된 집은 꽤 흡족했다. 그가 전부터 원하던 것들을 잘 알고 있던 녀석이라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준세의 머릿속을 옮겨놓은 듯 집을 지었다. 바다를 향해 사방으로 난 넓은 통유리창과 높은 천장의 거실. 2층으로 통하는 아치형의 철제계단은 심플하면서도 멋졌다. 게다가 욕실에서 바다를 볼 수 있게 만들어놓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피로뿐만 아니라 갑갑한 마음을 풀기에도 제격이다.
몸에 힘을 풀어 턱까지 물에 담근 채 준세는 생각에 잠겼다. 슬럼프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뭔가가 꼬인 채 풀리지 않고 있다. 이러다 영영 끝나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아예 글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있어야 할까. 계약해둔 것들을 전부 해지해달라고 할까. 그러면 출판사 사람들은 또 눈에 불을 켜고 잡아먹으려 들겠지.
해결책이 없는 고민에 답답해진 그는 물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누웠다. 숨을 참으며 눈을 뜨자 수면 위로 욕실 천장이 일렁였다. 이대로 입을 벌리면 죽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준세는 범인이 물속에서 살인을 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목에 손이 감긴 채 버둥거리는 피해자를 죽일 때 그는 웃고 있었을까. 아니면 죄책감에 괴로워했을까.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준세는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욕조에서 벌떡 일어서며 숨을 몰아쉬었다. 젖은 근육질의 몸이 들썩이는 숨소리를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머리가 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