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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너스 레퀴엠 1권(10화)
04. 일주일간의 휴가 그리고 다짐(4)
대한민국 서울 우주군 작전사령부
부속군 숙소
4월 5일 10:50
샤워 시설을 이용해 깔끔하게 씻은 고대영 중사는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301호실로 들어온 전희연 하사가 건넨 우주군 지급 구두를 신고 곧바로 외출하려 했으나 아침을 꼭 챙겨 먹어야 한다고 어머니 같은 잔소리를 하는 전희연 하사의 기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식사까지 마쳤다.
덕분에 군 숙소를 나선 시간은 예정보다 무려 40분이나 늦어졌다.
“바람이 참 시원합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 군 숙소 정문을 나서는 고대영 중사를 맞아 주었고 같이 걷고 있던 전희연 하사도 그 바람이 무척 시원했는지 표정이 무척 밝아졌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4월 초라 그런, 응? 저건 무슨 작업을 하는 겁니까?”
우주군 작전사령부 정면의 공원을 거닐던 고대영 중사는 한 무리의 군인들이 삽을 들고 열심히 땅을 파는 장면을 목격했다.
“체력 증강 훈련의 일환으로 실시되는 작업 같습니다. 작전사령부 부지 내에 체력 증강을 위한 기구들이 많지만 역시 직접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것이 몸에 더 좋죠.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죠?”
“예나 지금이나 열심히 삽질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겁니까.”
미래라면 삽질만큼은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고대영 중사는 왠지 눈물이 나려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바로 식목일이었군요.”
잊고 있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전희연 하사를 보며 고대영 중사는 오늘이 4월 5일 식목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로 도착해 정신이 없다 보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한 고대영 중사는 삽으로 일정 깊이의 구덩이를 만들고 나무를 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군인들 곁으로 걸어갔다.
미래로 와서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잡생각이 크게 늘었고 그런 잡생각을 빨리 잊도록 도와주는 것이 육체 노동이라는 것을 고대영 중사는 잘 알고 있었다.
“작업을 좀 돕고 싶습니다만, 남는 삽 있으십니까?”
정보부 소속 영관급 장교가 말을 걸어오자 깜짝 놀란 현장 지휘관은 급히 거수경례를 했다.
“필승! 대위 모지윤!”
타 함정이나 타 부대의 군인은 서로 남남이기에 경례를 붙이거나 관등성명을 대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정보부 군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보부 군인들은 타 함정이나 타 부대로 나가 감찰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아 일반적으로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정보부 군인에게는 무조건 거수경례를 하거나 관등성명을 대는 것이 관례가 되어 버렸다.
“아, 쉬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삽 있습니까? 작업을 돕고 싶습니다만.”
정보부 영관급 장교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게 한 무례를 저지른 현장 지휘관, 대기 13중대의 중대장 모지윤 대위는 고대영 중사의 눈치를 보며 열심히 삽질을 하던 군인들 중 한 명을 불러냈다.
“야, 현재야! 거기 남은 삽 좀 가지고 빨리 와라! 험험, 보시는 것과 같이 야외 체력 훈련의 일환으로 나무를 심고 있었습니다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작업을 돕고 싶다는 말을 들었지만 괜히 불안해졌는지 안색이 하얗게 질린 모지윤 대위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남는 시간이 좀 있으니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 돕고 싶습니다.”
영관급 장교 중 이렇게 상냥한 사람이 있었다니 하고 감동한 모지윤 대위는 숨을 헐떡이며 삽을 가져온 이현재 소위에게 삽을 넘겨받아 경건하다는 말이 어울릴 법한 자세로 고대영 중사에게 삽을 건넸다.
“어디를 작업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쇼.”
“저기서 저기까지입니다.”
손으로 대강 작업 구역을 가르켜 주는 모지윤 대위에게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고대영 중사는 제복 상의를 벗어 동참하려고 팔을 걷어붙이는 전희연 하사에게 건네고 기다려달라는 말만 남긴 채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고대영 중사를 단순히 정보부 영관급 장교로 오해하고 있던 현장 군인들은 고대영 중사가 일반 군인들의 작업 속도에 비해 무려 4∼5배나 빠른 속도로 삽질을 해 나가자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히 삽질 마스터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작업 속도였다.
“헉! 1소대장, 정보부는 행정 계열 아니었냐?”
넋을 잃고 고대영 중사의 업적을 쳐다보던 모지윤 대위가 멍한 목소리로 이현재 소위에게 물었고 모지윤 대위와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있던 이현재 소위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음… 100% 행정직입니다. 그런데 저분은 특전사 같지 말입니다? 특전사나 수색대 출신이겠지 말입니다?”
“그래도 훈련 안 한지 꽤 되셨을 텐데? 헐!”
고대영 중사가 21세기 기갑 부대 출신이고 군 생활을 하며 무수한 삽질을 해 왔기에 삽질만큼은 고대영 중사가 소속된 기갑 부대 전체를 통틀어 가히 최강이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 턱이 없었다.
삐삑―! 삐삑―!
군인 한 명이 하루 동안 꼬박 작업해도 끝낼 수 있을지 의문인 작업량을 1시간 만에 다 해치우는 업적을 일궈 낸 고대영 중사가 허리를 곧추세워 잠시 쉬고 있을 때 고대영 중사가 입고 있었던 제복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고대영 님! 전화 왔습니다.”
정장 주머니에서 선 없는 이어폰처럼 생긴 기기를 꺼낸 전희연 하사는 쉬고 있는 고대영 중사에게 그 기기를 건네주려다 두 손에 흙먼지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귀에 꽂아 줄까 말까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기기를 꽂아 주었다.
“통신보안… 아니, 여보세요?”
말소리를 인식한 통신기는 상대방과 통신을 연결해 주었고 작은 홀로그램을 고대영 중사의 눈앞에 재생시켜 전화를 건 상대방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 홀로그램에 표시되어 있는 이름은 고대영 중사도 잘 알고 있는 자신의 K1A1 전차, 포수를 맡고 있는 군인의 이름이었다.
―으허허헝! 전차장님!
연결되자마자 이민채 하사의 우는 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고 고대영 중사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서점입니다! 여기 완전 보물 창고입니다! 감동이지 말입니다. 으허허허헝! 전산으로 모든 서적이 정리되어 있는데 없는 게 없습니다! 제가 보던 것들도 전부!
고대영 중사의 머릿속에는 순간 좋아하는 소설이나 서적들을 끝없이 널려 있고 그 한가운데 만세를 부르짖는 이민채 하사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정말 불필요한 통화라고 생각한 고대영 중사는 곧바로 통신기의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는데 통신이 끊기기 직전에 행복에 겨운 소리를 내는 전이석 일병의 목소리도 살짝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삽질이나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단 말이지?’라고 질투인지 짜증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에 북받쳐 오른 고대영 중사는 기존의 삽질 속도의 2배에 가까운 속도로 삽질을 해 댔고 옆에서 같이 삽질을 하던 모지윤 대위는 다시 얼이 빠졌다.
“헐, 1시간이나 그 속도로 작업했는데 오히려 속도가 더 빨라졌어.”
“저, 저건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었지 말입니다.”
함께 삽질을 하던 이현재 소위는 삽질의 신을 직접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고대영 중사가 기존의 군인들이 작업을 시작 한 이후 중간쯤부터 삽질에 참여한 덕분에 7시간으로 예상했던 작업이 단 4시간에 끝나 버렸다. 고대영 중사의 빠른 작업 속도에 다른 군인들이 맞춰 가려고 노력하다 보니 작업 속도가 무척 빨라졌기 때문이다. 고대영 중사는 들고 있던 삽을 모지윤 대위에게 돌려주었다.
“제가 쓰던 삽이 아니라 작업 속도가 좀 늦어진 것 같습니다.”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 고대영 중사를 보며 모지윤 대위는 “그럼 원래 쓰던 삽을 쓰면 도대체 얼마나 더 빨라지는 겁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도 쓰다 보니 삽이 잘 들어서 작업은 편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십쇼! 필승!”
엄청난 작업량을 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영 중사의 제복 하의는 약간의 흙먼지 말고는 그리 더러워지지 않았다. 바지의 흙먼지를 손으로 대충 털어 내 다시 새것처럼 말끔하게 만든 고대영 중사는 전희연 하사가 앉아 있는 벤치로 향했다.
전희연 하사는 고대영 중사가 작업에 동참하자 자기도 작업을 돕겠다 말하며 어떻게든 작업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그런데 운동할 겸 하는 것이니 앉아서 쉬고 있어 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고대영 중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희연 하사는 벤치에 얌전히 앉아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응?”
기다리다 지쳤는지 벤치에 앉아 곤히 잠든 전희연 하사를 보고 인형 같다고 느낀 고대영 중사는 자는데 깨우면 몹시 짜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게다가 깨워야 하는 상대방이 여자이기까지 하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멍하니 서서 고뇌하던 고대영 중사는 그냥 바람이라도 쐬자라고 생각하며 전희연 하사의 옆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다 보니 삽질을 하며 잊으려 했던 생각들이 고대영 중사의 머릿속에 스멀스멀 떠올랐다.
지난밤, 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기억과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눈시울이 붉어진 그에게 함께 작업했던 모지윤 대위가 다가왔다.
“저희들은 이제 식사하러 갈 예정입니다만… 같이 가시겠습니까?”
가짜 하품을 하며 하품 탓에 눈물이 나왔다는 행동을 취한 고대영 중사는 앞으로 나머지 3명을 이끌 리더로써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벌써 중식 시간입니까?”
“딱 중식 시간 절반 정도 지났습니다.”
“마침 출출했는데 같이 갑시다.”
작업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서 그런지 배가 고파진 고대영 중사는 자고 있는 전희연 하사를 어쩔 수 없이 깨웠다.
여기가 어디? 난 누구? 라고 말하는 듯한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 있는 전희연 하사를 데리고 그는 모지윤 대위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대한민국 서울 우주군 작전사령부
부속군 숙소 301호
4월 6일 03:14
대한민국 경기도 인근 상공에서 고대영 중사는 대한민국함으로 접근해 오는 우주 해적의 전투함과 교전을 치르고 있었다.
―함체 파손율 5.7% 좌현 F―04 구역부터 I―10구역까지의 모든 제1장갑이 대파! 부포 1기 반파!
―적함 지속 접근 중!
―함포 에너지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사격 실시! 쏴!”
―발사합니다.
대한민국함에서 발사된 빔 줄기들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적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속도를 올려 대한민국함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적함과의 거리 3km! 본 함과 충돌합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고대영 중사는 중앙 모니터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적함은 대한민국함이 좌측으로 회두하려 하자 대한민국함의 우현에 위치한 부 함포들에게 사격을 받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함이 회두하는 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함체를 틀어 접근하고 있었다.
―충격에 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적함의 함수와 충돌할 것으로 예상되는 구역은 제1격납고 구역입니다.
“잠깐! 악! 안 돼! 당장 애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켜!”
―시간이 부족…….
쿠우우우우!
물리적 충돌로 인해 대한민국함은 찢겨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동쳤고 고대영 중사는 거센 충격에 몸을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부하 4명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지 강력한 충격파에도 정신만은 멀쩡했다.
“윽!”
―치치칙! 제1격납고 출입구 파손. 제1격납고 외부 제1장갑이 대파되었습니다. 적함과의 충돌로 인한 고도 변경을 막기 위해 함의 기동을 강제로 정지합니다.
―화재 구역 발생! 제1격납…….
적함과의 충돌로 인해 갖가지 문제가 동시에 발생했고 그 때문인지 슈퍼컴퓨터의 목소리에는 아주 조금 잡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고대영 중사는 함의 상태보다 부하들의 안전이 더 급했다.
“내 부하들은 어떻게 됐어! 당장 말해!”
부하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고대영 중사에게 알려 주기 위해 슈퍼컴퓨터는 제1격납고 내부를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를 중앙 모니터와 연결해 주었다.
중앙 모니터에 비춰진 제1격납고 내부의 모습은 처참했다. 내부 곳곳이 파괴되어 연기와 불이 뿜어져 올라왔고 제1격납고 깊숙이 수용되어 있던 K1A1 전차에도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K1A1 전차 조종수 해치가 열리고 누군가가 조종석에서 빠져나오려다 축 늘어졌다. 얼마 안 가 K1A1 전차 일부분에서 시작된 불길이 K1A1 전차 전체를 집어삼켜 버렸다.
조종석에서 빠져나오려다 죽은 누군가는 고대영 중사가 잘 알고 있던 김대국 상병이었다. 비교적 생존 확률이 높은 조종수가 죽었다는 것은 다른 군인들도 K1A1 전차 내에서 모두 숨을 거뒀다는 것을 의미했다.
“악!”
비명을 지르며 고대영 중사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잠에서 깬 그는 빠르게 사방을 훑어보고는 안도했다.
‘뭐 이런 개 같은 꿈이 다 있어.’
27세기로 와 버려 가족, 친구, 터전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마지막 남은 군식구들인 이민채 하사, 김대국 상병, 전이석 일병마저 잃게 된다면 더 이상 살 의지조차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삽질을 해 편히 잠들 수 있었던 고대영 중사는 악몽 덕분에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킨 그대로 온갖 잡생각에 시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