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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너스 레퀴엠 1권(14화)
04. 일주일간의 휴가 그리고 다짐(8)
힘을 모조리 경기에서 소진해 축 쳐진 고대영 중사를 보며 전희연 하사는 고대영 중사가 경기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전에 했던 외출을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적중하자 히죽거리며 실소를 흘렸다.
전희연 하사에게 넘겨받은 정보부 제복 상의를 입으려던 고대영 중사는 옷 입을 힘조차 남지 않았는지 입으려다 말고 옷을 대충 돌돌 말아 옆으로 던져 놓고 벌렁 드러누웠다.
“어휴, 피가.”
제복 안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들고 고대영 중사의 얼굴을 닦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민하던 전희연 하사는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묵묵히 고대영 중사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괜찮다고 말하는 고대영 중사의 말을 못 들은 척 고대영 중사의 얼굴에 묻은 피를 계속 닦아 내던 전희연 하사는 그래도 고대영 중사가 미래로 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텐데 활기차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안도했다.
물론 폭력을 넘어 사람이 죽어 나갈 것 같은 경기를 보며 조마조마 했던 것만 빼고 말이다.
“어? 말싸움 난 것 같습니다.”
전희연 하사의 말에 고개를 들어 연병장 중앙을 바라본 고대영 중사는 목에 준 힘을 빼 다시 목을 바닥에 뉘였다. 경기에서 졌음에도 불구하고 보급 중대장은 패배를 시인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짜증 나! 다녀오겠습니다.”
옆에 대충 던져 둔 제복 상의를 다시 돌돌 말아 옆구리에 낀 고대영 중사는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3번이나 넘어질 뻔한 위기를 겪고 나서야 고대영 중사는 모지윤 대위의 곁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졌으면 운동장 청소하십쇼! 왜 이리 똥고집입니까?”
“뭐? 똥고집? 나 한성식이야! 한성식 대위! 너 우주군 몇 기야?”
버럭 소리 지르는 한성식 대위를 보며 똥 씹은 표정을 짓던 고대영 중사가 입을 열었다.
“그러는 댁은 우주군 몇깁니까?”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녀석이 시비조로 묻자 한성식 대위는 더 화를 냈다.
“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우리 한성식 대위님 보다는 마른 것 같습니다.”
덤덤한 말투로 대답한 고대영 중사는 몹시 느린 속도로 옆구리에 끼고 온 제복 상의를 몇 번 털어 입었다.
옷을 다 입은 고대영 중사는 오른쪽 팔에 박혀 있는 정보부 마크에 그려진 무궁화 표시를 괜스레 손으로 훑어 냈다.
“피, 필승!”
깜짝 놀란 한성식 대위가 경례하자 고대영 중사는 예전에 읽었던 판타지 소설의 내용이 떠올랐다.
천민에 가까운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귀족이 되어 평소에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고대영 중사는 그 주인공의 심정이 어땠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상 교전에서 패배해 소위로 임관해서 한성식 대위를 보게 되면 꽤나 고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대영 중사는 지금은 일단 한성식 대위를 골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아직도 제 머리에 피가 안 말랐습니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모지윤 대위에게 고대영 중사가 머리를 들이대며 묻자 모지윤 대위 역시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제가 보기엔 다 말랐지 말입니다. 한성식 대위님이 보기에는 ‘우주군 수도 정보부’ 소속 고대영 소령님의 머리에 아직도 피가 안 마른 것 같습니까?”
죽이 잘 맞는 2인방을 보며 한성식 대위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정보부 장교에게 밉보이면 출세에 큰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였기에 그는 고대영 중사의 소속과 계급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아직 쉬라는 말을 하지 않아 한성식 대위는 여전히 경례를 한 상태로 외쳤다. 한성식 대위를 보며 썩은 미소를 짓고 있던 고대영 중사가 아주 낮게 물었다.
“오호? 뭘 시정하십니까?”
“고 소령님을 몰라 뵈어 무례를 저지른 점! 연병장 정리를 게을리 한 점!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청소 시작하십쇼.”
“예! 알겠습니다!”
제천함 제1격납고 중대원들이 모여 있는 스탠드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한성식 대위를 보며 잠시 싸늘한 눈길을 주던 고대영 중사의 웃음보가 터졌고 모지윤 대위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병장 한가운데 누워 데굴데굴 굴렀다.
“으하하하하하!”
한참 웃던 고대영 중사는 곁에 다가온 전희연 하사를 보며 그녀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말했다.
“전희연 님 저 거짓말은 안 했습니다? 우리 한성식 대위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겁니다.”
뭐라고 하지 않을까 약간 불안해진 고대영 중사는 전희연 하사가 웃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대영 소령님! 감사합니다! 매번 이렇게 신세를 지니. 제가 술로 한턱 크게 쏘겠습니다!”
“아직 오늘 일과 끝나지 않으신 것 아닙니까?”
어떻게 쏠 건데? 라고 묻는 고대영 중사에게 모지윤 대위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대기 군인은 딱히 작업이 없기 때문에 중식 시간 이후에는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집니다. 중식 시간이후에는 병들을 제외한 부사관, 사관들은 외출이 허가됩니다. 지금 나갔다 옵시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고대영 중사를 마치 범죄자 끌고가듯 양팔을 붙잡아 연행하기 시작한 모지윤 대위와 다른 군인들이 검문소를 목표로 그 자세 그대로 고대영 중사를 질질 끌고 갔다.
“정말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십니다. 저것도 재능일까요?”
짧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전희연 하사는 질질 끌려가는 고대영 중사를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한민국 서울 우주군 작전사령부
부속군 숙소 1층 식당
4월 9일 18:33
이틀 동안 담당관 전희연 하사를 데리고 서울 곳곳을 누빈 고대영 중사는 휴가를 보람차게 쓰고 있다는 생각에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생수 자판기인 줄 알고 뽑아 마셨더니 컴퓨터 연료였다던지 택시를 탔는데 하늘로 붕 떠올라 극심한 멀미에 시달린 것은 빼고 말이다.
“아하. 그렇다면 전희연 님이 우주군에 임관한 이유가…….”
저녁을 따로 밖에서 먹기는 애매한 시간이라 군 숙소로 귀가한 고대영 중사는 전희연 하사에게 저녁 시간인데 이참에 군 숙소에서 식사라도 하고 가지 않겠냐 권유했고 전희연 하사는 집에 도착하면 저녁 시간이 지나 버리던 차에 잘 됐다며 고대영 중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예, 집안 대대로 우주군 복무를 해 왔던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아버지나 어머니가 함께 우주군에 복무하는 것을 보고 존경하고, 부러워 했던 점도 작용했습니다.”
“옛날로 치자면 무관 집안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단기 하사를?”
21세기 한국군의 부사관 복무는 군 생활이 단기, 장기로 나뉘는데 단기는 남성의 경우 4년, 여성의 경우 3년을 복무하고 장기의 경우, 인생 대부분을 군에서 보낼 각오를 한 군인들이 4년을 넘어 퇴역까지 군 복무를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장기라 해도 얼마 안 돼 나오는 경우도 있다.
우주군 부사관도 그와 같은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부사관 임관 후 1년이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이런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라고 회의를 느껴 단기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짚던 전희연 하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에는 힘이 없었다.
“업무 파악하고 힘든 시기가 지나니 보람도 느껴지고 즐거워졌습니다. 게다가 군에서 나가 봤자 어차피 지루한 직장 생활밖에는 남지 않잖습니까? 그러느니 보람도 느껴지고 즐거운 군 복무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전희연 하사의 말을 듣던 고대영 중사는 예전에 전역한 군인이 한동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았다.
“27세기 우주군 부사관도 단기가 확정나면 장기로 변경 신청을 못하나 봅니다?”
21세기 한국군은 단기에서 장기로의 변경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진 성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군대로 몰리면서 장기 복무 신청이 어려워졌고 장기 복무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개고생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 고대영 중사는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다시 장기로 바꾸고 싶지만 이미 결정 난 사항이라 3개월 뒤 전역해야 합니다.”
겉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아쉬워 하는 목소리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고대영 중사는 묘책을 하나 제시했다.
“그렇다면 장교 시험을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있던 21세기에서도 부사관에서 시험 치고 장교가 된 경우가 좀 있었습니다.”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우주군 장교는 엘리트들밖에는 못 들어가는지라……. 적어도 몇 년은 공부에 전념해야 합니다.”
엘리트도 아닌데 일단 장교가 되기로 확정 난 고대영 중사는 괜스레 찔끔했다.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는데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고대영 님 같은 분과 군 생활을 같이 하면 꽤나 즐거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에요.”
단순히 재미난 사람과 함께 군 복무하면 즐겁지 않겠냐는 취지로 말했지만 말의 의미가 다른 의미로 전달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전희연 하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동안 아무 말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전희연 하사를 보며 음식을 삼키다 웃음이 터져 버린 고대영 중사는 식도에 걸린 음식 때문에 상당히 고통스러워했다.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전희연 하사가 등을 두드려 줘 가까스로 진정한 고대영 중사는 전희연 하사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강 건너 할아버지를 뵌 것 같다고 허풍을 떨었다.
“식사 다 하셨으면 일어나시죠.”
“아, 예!”
음식을 날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빈 접시를 들어 나르는 공중 이동 로봇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전희연 하사가 고대영 중사의 말에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 숙소 출입문까지 마중 가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루 종일 담당관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고대영 중사를 따라다니느라 고생한 전희연 하사에게 조금이라도 뭔가 해 주고 싶었던 고대영 중사는 거절하는 전희연 하사에게 어차피 중앙 홀에 바람이라도 쐴 겸 나가는 것이라고 둘러대며 전희연 하사를 데리고 식당을 나섰다.
“니들 여기서 뭐하냐?”
중앙 홀에 설치된 의자에는 그동안 나돌아다니기 바빠 식사 시산을 제외하고는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군인 세 명이 뭔가에 몹시 열중하며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살려 주십쇼, 전차장님.”
이민채 하사에게 붙잡혀 강제 노동을 당하고 있던 김대국 상병이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고대영 중사에게 다가갔고 이민채 하사는 그런 김대국 상병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게, 우주군 교재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민채 하사님이 억지로 끌고 오셨습니다.”
“야! 그걸 꼰지르냐!”
학생주임 앞에서 모든 걸 술술 털어놓는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낀 학생 같은 표정을 지은 이민채 하사가 버럭 소리쳤고 고대영 중사는 골치 아프다 듯 눈썹을 찌푸렸다.
“어차피 휴가니까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만, 공부하겠다는 애는 좀 내버려 둬라.”
“아, 알겠습니다.”
“근데 뭐하냐니까?”
두 군인이 들고 있던 종이를 낚아챈 고대영 중사는 멍하니 종이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엉? 뭐 그 뭐더라? 건X? 그 인간형 로봇인가 그거지? 왜 이런 걸 그리고 있냐?”
학생 시절 TV에서 비슷한 로봇을 본 고대영 중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반면 옆에 서 있던 전희연 하사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설계도 같습니다? 인간형 병기는 효율성이 없어 아무도 거들떠도 안 봅니다만, 아니, 그보다 이거 직접 설계하신 겁니까?”
콧대가 높아진 전이석 일병 대신 이민채 하사가 설명했다. 대강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한 고대영 중사는 이야기의 핵심만 간추렸다.
“그러니까 우리 지상 최고의 오덕 이 하사가 지상 최고의 기계덕후 전이석 일병을 꼬드겨 건X 실제 설계도를 만들고 있었고 그 설계도에 도입될 장치에 대한 문헌이 필요하자 김대국 상병을 억지로 끌고와 관련 문헌들을 간추리게 시켰다?”
“헤헤, 그렇습니다.”
뭐가 그렇게 기분 좋은지 웃는 이민채 하사의 얼굴에 설계도를 집어 던져 버릴까 고민하고 있던 고대영 중사 옆에서 전희연 하사는 설계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래로 오신 지 며칠도 안 되셨을 텐데 어떻게 이런 완성도의 설계도를…….”
그 설계도에는 27세기 과학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휴가 첫날, 과학 관련 서적을 잔뜩 사들고 온 전이석 일병은 며칠간 방에 틀어 박혀 책만 읽어 댔고 덕분에 미래 과학 지식들을 상당히 많이 습득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쓸데없는 인간형 병기의 설계도라지만 세세하게 미래 기술을 접목시킨 전이석 일병에게 전희연 하사는 감탄했다.
“쉬라고 하니까 이런 뻘짓이나 하고 있었냐? 죄 없는 김 상병만 괴롭히고 말이야. 어디 보자 주머니에…….”
설계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고대영 중사는 그들을 단순히 오덕으로 치부했다. 주머니를 뒤지던 그는 이내 수도 정보부 마크가 그려진 라이터를 꺼내 설계도에 불을 붙였다.
“확 태워 버린다?”
“아악! 태워 버린다가 아니라 태우고 계시잖습니까!”
반쯤 까무러친 전이석 일병과 달리 거칠게 항의하는 이민채 하사에게 고대영 중사는 썩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 로봇에 대가리 따 버리고 전차 포탑 올리기 전까진 난 반댈세.”
“아니 반대고 자시고 벌써 다 탔잖습니까! 아? 오 나름 골 때리겠지 말입니다?”
단순한 건지 멍청한 건지 고대영 중사의 말에 흥미로워하는 이민채 하사와는 달리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전이석 일병은 반대했다.
“그렇게 되면 설계를 전체적으로 변경해야 합니다. 충격 지지대는 물론… 아? 차라리 4족 전차를…….”
“무슨 건탱크냐! 하지마 인마!”
“저기 4족 전차는 이미 실전 배치된 지…….”
“오오! 간다, 전희연 하사! 전차는 충분한가!”
격렬하게 토론을 벌이는 이민채 하사, 전이석 일병, 전희연 하사를 보며 고대영 중사와 김대국 상병은 동시에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