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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너스 레퀴엠 1권(15화)
04. 일주일간의 휴가 그리고 다짐(9)
대한민국 서울 우주군 작전사령부
부속군 숙소 1층 세미나실
4월 10일 10:41
마지막 휴가 전날인 만큼 작전사령관과 이야기했던 조건에 대해 회의를 시작한 고대영 중사 일행은 고대영 중사가 작전사령관과 이야기했던 내용대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하고 회의를 종료하였다.
결국 시간 낭비나 마찬가지였던 짧은 회의를 마치고 고대영 중사는 세미나실 출입구를 열고 통로 쪽에 들어서기 위해 발을 옮겼다.
“오늘도 군 숙소에서 나가신다고 하셔서 왔습니다만, 오늘은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막 1층 세미나실 앞에 도착한 전희연 하사가 세미나실에서 나오는 고대영 중사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건넸다.
며칠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에 대해 익숙해진 전희연 하사는 이제 심하게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고서는 쉽게 소심해지지 않았다.
소심해지는 숫자가 줄다 보니 자연스레 대화가 늘었고 서로 상당히 친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평소와 달리 고대영 중사의 얼굴이 어두워 보이자 전희연 하사는 말끝을 흐렸다.
“아, 내일이면 작전사령관님과 면담이니 그전에 못 가 본 곳을 전부 다 가 보려 합니다. 이민채 하사와 전이석 일병은 서점을 적극 추천하는데 김대국 상병은 야구 배팅장을 추천해서 거기도 다 가 보고, 영화관도 가 보고… 다 가 볼 예정입니다.”
애써 활짝 웃는 고대영 중사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었는데 전희연 하사는 그 이유를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야구 배팅장 먼저 가 봅시다. 개인적으로 축구나 농구보다 야구 경기를 좋아해서 어렸을 때 배팅장도 자주 갔었습니다.”
작전사령부 부지를 벗어나 택시를 잡아탄 그들은 김대국 상병이 추천한 인근 야구 배팅장으로 향했다.
인식 카드로 돈을 입력하고 야구 배팅을 시작한 고대영 중사는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있는 힘껏 날아오는 청소년 야구볼인 연구를 알루미늄 배트로 쳐 날렸다.
깡!
―안타.
마지막 공은 직선 타구로 멀리 뻗어 나갔고 공의 착지 지점과 방향, 높이를 계산하여 배팅 기계가 결과를 알려 주었다.
“한 번 해 보시겠습니까? 속이 다 시원합니다.”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해서 그런지 배팅 후 몸을 풀던 고대영 중사가 야구 배팅을 권유했다.
“아, 아닙니다.”
평소 이런 운동과는 맞지 않던 전희연 하사는 손사래를 쳤고 몸 잘 풀었다며 히죽 웃던 고대영 중사는 이후 전희연 하사를 데리고 도시 곳곳을 싸돌아다녔다.
“오? 서점이 제가 알던 서점이 아닙니다?”
책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온통 책 소개 홀로그램과 컴퓨터로 가득 찬 서점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고대영 중사가 쳐다봤다.
“21세기와는 달리 책을 컴퓨터로 다운받아 보는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신기해하는 고대영 중사의 얼굴에는 또다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괜찮다고 하셨는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혹시 몸이라도 좋지 않은 것일까 전희연 하사는 전전긍긍했다.
“아이고, 걱정도 많으십니다. 회의하다 보니 좀 피곤해진 모양입니다.”
활기 차게 대답하는 고대영 중사의 모습에 나름 안심한 전희연 하사였지만 꺼림칙한 느낌은 가시질 않았다.
“그럼, 다른 곳도 가 봅시다.”
그들은 이후 서점 말고도 영화관, 백화점, 유명 음식점 등을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고대영 중사의 얼굴에서 어두운 분위기, 애매한 감정이 계속 느껴지자 전희연 하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고대영 님, 2시간 뒤면 복귀 시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들릅시다.”
“예?”
반문하는 전희연 하사를 다짜고짜 이끌고 고대영 중사는 통신기를 사용해 인근에 비행하던 빈 택시를 불러냈다.
“휴가가 끝나기 전에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예.”
고대영 중사의 말에 전희연 하사는 그가 꼭 가 보고 싶은 곳에 대한 생각 때문에 오늘 하루 고대영 중사의 분위기가 이상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택시가 도착하자 택시 문을 열어 전희연 하사가 먼저 탑승하도록 배려하고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택시에 탑승했다.
27세기의 택시는 기본적으로 21세기 택시와 비슷한 방법으로 운영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는데 운전수가 없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운전수는 필요 없었다.
택시에 탄 고대영 중사는 전희연 하사가 손목에 차고 있는 것과 비슷한 손목 장착형 다목적 컴퓨터로 뭔가를 더듬거리며 검색했다.
“통일 기념 공원으로 가 줘.”
―목적지가 통일 기념 공원입니까?
통일 기념 공원이 목적지가 맞는지 택시의 인공지능 컴퓨터가 고대영 중사에게 물었고 고대영 중사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괜찮으십니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움츠린 전희연 하사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고대영 중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할 뿐입니다.”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아 택시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고 내리기 전에 인식 카드로 택시비를 결제한 고대영 중사는 택시에서 내려 통일 기념 공원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통일 기념 공원은 남북한이 통일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으로 공원 한가운데 거대한 호수가 있다.
미래라고 공원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네.”
삭막한 목소리를 들은 덕분일까? 전희연 하사는 고대영 중사 일행을 만나기 전 그들에 대한 자료에 수록되어 있던 내용 중 고대영 중사가 살던 장소를 떠올렸다.
21세기에는 아파트 단지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통일 기념 공원이 그 아파트 단지를 대신 메우고 있는 이 장소, 21세기에서 고대영 중사가 살았던 곳이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전희연 하사는 마음속을 후벼 파는 안타까움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고대영 중사를 뒤따르기만 했다.
“잠시만!”
얼굴 표정이 급변한 고대영 중사는 전희연 하사가 따라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렸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인공 호수 바로 앞이었는데 뒤에서 고대영 중사를 바라보는 전희연 하사는 그가 인공 호수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기분 탓인가 봅니다. 뭔가 그리운 향기가…….”
21세기 고대영 중사의 집 근처에 심어져 있던 나무에게서 났던 향기와 비슷한 향기라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기분 탓인지 잠시 혼란스러워 하던 고대영 중사는 인공 호수를 응시하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휴가 동안 애들이랑 놀고, 전희연 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고대영 중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전희연 하사는 묻지 않고 기다려 주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무 말 없이 고대영 중사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놀라느라, 당황하느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떠오릅니다. 아프간 전우들? 아프가니스탄과 경기도에서 죽인 사람들? 그런 게 아닙니다. 혼자 있거나 잠자기 전에 미친 듯이 사무치고 떠오르는 것은…….”
휴가 동안 고대영 중사가 어두워질 때가 가끔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웃고 떠들고, 놀라느라 고대영 중사의 마음을 깊숙이 보지 못했던 전희연 하사는 지금 인공 호수를 맥없이 쳐다보는 고대영 중사의 얼굴을 보고나서야 그가 그동안 은근히 어떤 고통에 시달려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고대영 중사는 자신의 고민이나 감정을 남에게 이야기하기 보다는 속으로 삭히는 쪽에 가까웠고 웬만해서는 쉽게 자신의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았던 탓도 있긴 했다.
“가족입니다.”
바닥에서 작은 돌멩이를 집어든 고대영 중사는 있는 힘껏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저기, 저곳 GPS상으로는 제가 살던 곳입니다.”
잔잔한 호수에 빠진 돌멩이가 만든 물의 파문을 응시하던 고대영 중사는 다시 허리를 숙여 이번에는 4개가 넘는 돌덩이를 집어 들어 다시 던지기 시작했다.
“저긴 제가 다니던 학원.”
던져진 돌멩이는 그렇게 멀리 날아가지 못했지만 서로 다른 곳에 떨어졌다. 워낙 광활한 인공 호수라 고대영 중사가 원하는 거리까지 돌멩이가 날아가지는 못했지만 대충 방향만 들어 맞으면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저긴 친구들과 자주 가던 피시방.”
퐁당.
“저긴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처음으로 야구라는 것을 배웠던 공원.”
그 말을 끝으로 고대영 중사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곁에 여자가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인공 호수를 응시하던 고대영 중사의 눈가에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우는 소리 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려보내던 고대영 중사는 아무 감정 없는 말투로 차분히 말을 꺼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봄 나들이 겸 공원으로 향했던 8살의 고대영 중사는 그 당시 장난스러우셨던 아버지의 표정과 짓궂은 장난에도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 주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고대영 중사의 머릿속에서 차례차례 떠올랐다.
이후 학업, 그리고 군 입대로 가족과는 더 이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고 부모님과 사이가 많이 서먹해졌던 고대영 중사는 독립 이후 딱히 중요한 날이 아니면 부모님 댁을 찾지 않았다.
그런 불효자인데 부모님은 고대영 중사가 집을 찾을 때면 한상 가득 음식을 내오셨다. 분명 며칠 전부터 준비하셨으리라.
“그리운 것보다 죄송합니다. 부모님께.”
그런 자신에게 언제나 웃어 주고, 걱정해 주는 부모님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고 고대영 중사는 격정을 잠재우기 위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윽.”
부모님에 이어 성인이 된 후에도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알고 지내던 많은 인연들이 고대영 중사의 머릿속에 소용돌이쳤다.
고대영 중사 일행은 미래에 오기 직전에 그리고 도착한 이후도 온갖 험한 일을 겪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낯선 미래에 와서도 꿋꿋이 버텨 내던 그들이, 그리움이라는 것에 조금씩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고대영 중사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을 양은 상당히 많았다.
자신이 살던 곳과 같은 장소에 서 있지만 시간이 달랐다. 올 수는 있지만 만날 수는 없다. 볼 수는 있지만 찾을 수는 없다.
“고대영 님.”
언제나 활기차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던 고대영 중사가 참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전희연 하사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혈관이 터질 정도로 꽉 주먹을 쥐고 있는 고대영 중사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듯 잡은 전희연 하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상대방을 위로해 줘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싶은 아슬아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희연 하사의 얼굴을 본 고대영 중사는 오른손 소매로 대충 눈물을 훑어 냈다.
“이곳에 올까 말까 그동안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정리 같은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미래에 온 이상 어느 정도 굳은 각오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다짐일까요?”
전희연 하사가 감싼 고대영 중사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그리고 대학생이 되고, 군인이 되어서도 딱히 정말 뭔가 하고 싶었던 것이 없었습니다. 제 입으로만 제가 결정한 일이다! 하고 싶었던 일이다! 라고 늘어놓고 다녔습니다만,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뭔가 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것도 못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 중 정말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통계상으로는 30% 정도 된다고 하지만 분명 그 이하일 것이다.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27세기에 도착해서야 하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아니, 하고 싶다기보다 지키고 싶다고 해야 맞겠습니다만 21세기에 살 때는 정작 가족, 친구들에 대한 소중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이제 마지막 남은 부하 3명이라도 어떻게든 지켜 주고 싶습니다. 제게 마지막 남은 옛 인연들이니 말입니다.”
이제 21세기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에게 남은 21세기의 인연은 군에서 만난 3명의 부하밖에 남지 않았다.
며칠 전에 꿨던 악몽이 쉽게 가시지 않았고 그 악몽은 부하 군인들을 더욱 소중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지키고 싶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닙니다. 몇 세기가 지나서도 절 맞아 준 대한민국, 그리고 그 대한민국에서 생길 새로운 인연들도 모두 제가 지킬 겁니다. 예를 든다면 전희연 님이나 모지윤 대위 일행들이 되겠지 말입니다.”
“지킨다… 군인으로써 말입니까?”
전희연 하사가 묻자 고대영 중사는 히죽 웃었다.
“예. 전 계속 군에 남을 겁니다. 아니, 보다 높은 군인이 돼서 대한민국을 지켜 나갈 겁니다. 그게 27세기에서 새 삶을 살게 된 제 목표입니다. 그리고…….”
아직 울음기가 남아 불안정하게 숨을 몰아쉬던 고대영 중사는 개운하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옛날이 그리워지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인연들을 잔뜩 만들어 나갈 겁니다. 새 삶을 만들어 나갈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고대영 중사의 눈은 더 이상 슬픔이 잠겨 있지 않았다. 오로지 굳은 결심만으로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