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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너스 레퀴엠 1권(16화)
04. 일주일간의 휴가 그리고 다짐(10)


대한민국 서울 우주군 작전사령부
부속군 숙소 1층 식당
4월 10일 18:20

고대영 중사 일행들은 모두 각자 하나씩 집중할 만한 것들을 찾았다. 이민채 하사는 애니메이션과 소설, 김대국 상병은 우주군 교재, 전이석 일병은 27세기 과학 기술 서적을 말이다.
21세기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한 행동이었고 덕분에 많은 것을 잊을 수 있었지만 그런 것들에 집중하지 못하는 식사 시간이나 취침 시간에는 항상 어두운 표정이었다.
전희연 하사와 외출을 다녀온 이후 홀가분해진 표정이 된 고대영 중사는 식당 안을 가득 메운 어두운 분위기에 점차 짜증이 쌓여 갔다.
“이 자식들아! 누구 죽었냐!”
“컥컥! 무슨 말이십니까?”
옆에서 기계적으로 밥을 입에 우겨 넣던 이민채 하사가 깜짝 놀라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어라? 군인의 생명인 숟가락을 떨어뜨려? 중앙 홀까지 10초 준다! 선착순 2명까지! 늦게 온 새끼는 오늘 못 자고 혼자 숙소 건물 전체 청소다!”
어안이 벙벙해 있던 부하 군인들은 고대영 중사가 입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식사를 중단하고 잽싸게 식당을 빠져나갔다.
“3… 2… 1.”
그들을 뒤쫓으며 남은 시간을 외치던 고대영 중사는 일행들이 10초 내로 모두 중앙 홀에 집합하자 마음에 드는지 찌푸린 얼굴을 약간 풀고 그들 앞에 섰다.
“선착순은 농담이니까 이석아 그렇게 쫄 거 없다.”
마지막으로 도착해 홀로 청소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던 전이석 일병과는 다르게 반항심 다분한 이민채 하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말하려 했으나 고대영 중사가 눈에 힘을 주자 입을 다물었다.
고대영 중사가 한 번 열이 뻗치면 마신 강림은 애들 장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두가 찍소리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니들 27세기 와서 많이 힘든 거 나도 잘 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렇게 끙끙거릴 거냐?”
21세기 생각이 났는지 얼굴이 어두워진 전이석 일병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후려친 고대영 중사가 말을 이어 나갔다.
“니들 계속 군 생활하면서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한다 그랬지? 이민채! 넌 어떻게 할 거야?”
세 명 중 계급이 가장 높다는 이유로 지목된 이민채 하사는 이미 그와 관련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말을 내뱉었다.
“전 특기도 없고 기술도 없어서 그냥 가능한 오래 군 생활하고 싶습니다. 군인도 하나의 직업 아닙니까? 여가 시간도 나름 보장되니 계속 군에 있으면서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읽고 싶은 것 잔뜩 해 나갈 생각입니다.”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바랐던 고대영 중사는 김이 빠졌다.
“하긴 우리 오덕후씨께서 뭘 하겠니. 김 상병아, 너는?”
계급 순 덕분에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김대국 상병도 지체 없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집안이 원래 군인 집안이기도 했고 워낙 군인이 적성에 맞아 계속 군 생활을 할 겁니다.”
그나마 너는 정상이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고대영 중사는 시선을 돌려 전이석 일병을 쳐다보았다.
“너는?”
“저도 이 하사님과 비슷합니다. 군 생활을 하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기계 쪽으로 공부를 계속해 나가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군에서 정비창 쪽으로 빠져도 괜찮지 싶지 말입니다.”
한숨을 쉰 고대영 중사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니들 뭘 하고 싶든 계속 군에 있고 싶다는 거냐?”
모두가 예!로 화답하자 경직되어 있던 고대영 중사의 얼굴이 완전히 풀렸다.
“각자 하고 싶은 것들이 있잖아? 솔직히 나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27세기? 우주군? 나도 낯설고 짜증 나! 그런데 말이야 지금 우리는 27세기에 있고 다신 21세기로 돌아갈 수 없어. 그렇다면 21세기는 잊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해 나가면 되잖아? 우울해 있을 틈이 어딨어? 신기하고 재미난 게 잔뜩인데?”
어렵고 전문적 위로도 아닌 단순한 말임에도 3명의 군인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많이 사라졌다.
그들도 알고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27세기에 적응해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 말해 주지 않았고 그들이 어떻게 해 나아가야 할지 길을 잡아 주지도 않았다. 그들이 바랐고 들었어야 할 말은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쉬운 것이었다.
“과거는 잊고 앞으로 잘해 나가자고. 정신 바짝 차려!”
고대영 중사의 짧은 말에 모두 머릿속에 가득 찬 안개가 거둬지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과거에게 얽매이지 말고 체념하라고, 새 삶을 살라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전차장님.”
“뭔데!”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냐는 듯 버럭 소리 지르는 고대영 중사에게 이민채 하사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빨리 식당 안 돌아가면 로봇들이 식사 치우지 말입니다.”
“아.”
뻘쭘해진 고대영 중사는 일행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올 때와는 다르게 식당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대한민국 서울 우주군 작전사령부
부속군 숙소 1층 중앙홀
4월 11일 14:45

첫 휴가날부터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휴가라기 보다 마음을 정리하는 나날이 되었던 고대영 중사는 전희연 하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신세 한탄부터 옆집에 새로 입양한 강아지 이야기까지 전희연 하사는 편하게 이야기했는데 고대영 중사는 그런 전희연 하사의 말발에 휘말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부 늘어놓는 자신을 발견했다.
서로 존대를 하지 않고 반말을 한다면 10년 정도는 알고 지냈던 절친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로 일주일 만에 그들은 그렇게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렇게 친해지다 보니 고대영 중사는 전희연 하사의 장단점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장점으로는 첫째 엄청난 준비성, 고대영 중사가 어떤 것을 필요로 하면 마치 도X에몽의 도구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바로 준비를 마치는 점.
둘째는 정보력. 정보부라 그런지 사소한 것까지도 세세히 알고 있었는데 특히 우주군에 대한 것이라면 영관급 장교만큼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는 심성. 말 그대로 엄청나게 착했다.
단점도 꽤 있었는데 첫째는 자식 걱정하는 어머니처럼 엄청난 잔소리를 구사한다는 것과 둘째는 가끔 소심증이 재발해 상당히 소심해진다는 것 정도였다.
“거기서 정장을 입는 바람에 시험관으로 오해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받은 팜플렛을 옆에 끼고 있었던 것도 오해를 불러일으킨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기는 한데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후훗! 팜플렛 때문일 것 같습니다. 제 친구 중에도 그런 오해를 받았던 친구가 있었는데… 헉! 이제 슬슬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시간을 망각하고 있던 전희연 하사가 시간을 확인하고 기겁하자 고대영 중사는 이제 일어날 때가 된 모양이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으으윽! 잠깐 애들 좀 보고 갑시다.”
1층 중앙 홀에서 가장 가까운 201호실을 쓰는 전이석 일병의 방으로 걸어가 초인종을 누른 고대영 중사는 문이 열리자 방 안에 들어섰다.
“뭐하냐?”
“24세기에 완성된 2차 하전 입자빔 실용 이론에 대해 읽고 있었습니다.”
아직 27세기형 개인 PC 사용이 어색했는지 직접 종이에 공학 계열 기술들을 이것저것 옮겨다 적어 놓았는데 그 분량이 엄청났다. 쉬라고 주는 휴가 때 기계 공부만 하는 전이석 일병을 보며 혀를 내두른 고대영 중사는 적당히 공부하라는 말을 남기고 김대국 상병이 쓰는 202호 초인종을 눌렀다.
마찬가지로 문이 열렸는데 의외로 김대국 상병은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침대에 편히 누워 TV를 보고 있는 것이 마지막 날만은 말 그대로 편히 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휴가 날이니 오늘 정도는 운동이나 훈련 생각 말고 푹 쉬어.”
마지막으로 이민채 하사가 생활하는 203호 초인종을 눌렀는데 초인종을 10번 정도 누르고 나서야 이민채 하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
“아, 애니 보고 있어서 못 들었습니다.”
“덕질은 좀 작작 해라. 마지막 날이니 눈 혹사시키지 말고 좀 휴식을 즐겨.”
“하하! 걱정 마십쇼! 제겐 이게 제대로 휴식을 즐기는 법이지 말입니다!”
촐랑거리는 이민채 하사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긴 고대영 중사는 점점 뒤통수 때리는데 맛이 들리는 것 같다고 느끼고 앞으로는 말로만 갈구는 것이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전희연 하사와 함께 중앙 홀로 돌아왔다.
“이제 가면 되려나?”
각자 그리움을 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고대영 중사는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5분 남았습니다. 출발하셔야 합니다.”
“갑시다.”
작전사령관실로 향하는 고대영 중사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대한민국 서울 우주군 작전사령부
작전사령관실
2670년 4월 11일 15:00

“충성! 중사 고대영!”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정확한 시간에 작전사령관실에 들어선 고대영 중사는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했다.
“쉬어. 그래 확실히 정했나?”
책상 의자에 앉아 책상에 오른손 팔꿈치를 기대고 오른손으로 턱을 받친 자세로 문대진 대장이 묻자 고대영 중사는 거수한 오른손을 풀고 열중쉬어로 자세를 바꾸었다.
“이전에 말씀드린 그대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럼 자네들이 모두 동의한 것으로 알겠네. 내일부터 한 명도 빠짐 없이 사관학교 교육을 받게 될 걸세.”
책상 위에 생성된 홀로그램들을 펜으로 누르며 원하는 정보를 찾던 문대진 대장에게 고대영 중사가 질문을 했다.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생각해도 좀 말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박에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음, 뭔가?”
펜을 손에서 내려놓고 몸을 의자에 파묻는 문대진 대장에게 고대영 중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해 들은 바로는 대한민국함은 70만 톤급 대형 우주 전함으로 고급 지휘부가 함장 1명, 부함장 1명, 참모진 3명으로 구성된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현직 함장들과의 가상 교전에서 저희들이 이기게 될 경우 전 대한민국함의 함장으로 가게 되고 이민채 하사는 부함장, 김대국 상병과 전이석 일병은 각각 참모로 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참모가 한 명 비지 않습니까?”
“그렇지.”
간단하게 맞장구를 치던 문대진 대장은 그제야 고대영 중사가 비게 될 참모 1명의 자리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비는 참모 자리에 제 담당관인 전희연 하사를 두어 저를 보좌하도록 하게 하고 싶습니다.”
고대영 중사의 말을 듣고 10초가량 침묵하던 문대진 대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는?”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마른침을 삼킨 고대영 중사는 이미 이런 상황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전희연 하사는 정보부 단기 하사로 3개월 뒤 전역 예정입니다. 대한민국 우주군이 그런 유능한 인재를 놓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펜을 집어 들어 정보를 검색하던 문대진 대장은 전희연 하사의 신상 정보를 책상 중앙에 띄워 놓았다.
“단순히 이뻐서 중요한 인재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군. 개인적인 감정 때문인가?”
“헙? 흠흠! 전희연 하사와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단순히 친구 사이입니다.”
여전히 굳어 있는 문대진 대장에게 고대영 중사는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을 꺼냈다.
“전희연 하사는 함장이라거나 다른 고급 인력에 맞지 않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희연 하사와 일주일간 동행하며 전희연 하사가 준비성이 철저하다는 것, 그리고 영관급 장교에 버금 갈 정도로 상당한 우주군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모진이란 함장을 보조하기 위한 인력으로 준비성 및 정보를 가장 필요로 하는 보직입니다. 더구나 함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참모가 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런 것 같군. 그런데 그것뿐인가?”
다시 한 번 묻자 고대영 중사는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이유를 댔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 보탰다.
“저희 일행의 존재를 아는 것은 작전사령관님을 비롯한 각 부서 지휘부 몇 명, 그리고 이번에 저희를 담당하게 된 담당관 4명이라 알고 있습니다. 담당관 4명에게는 우리 존재를 기밀로 하기 위해 1년간 추가 감시를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전희연 하사에게 들었습니다. 감시 대상 한 명을 제 일행에 엮어 한꺼번에 감시하는 것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생판 모르는 남이 참모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전희연 하사가 참모로 와 줬으면 하기도 합니다. 제가 27세기에 와서 처음 친해진 사람 중 하나입니다. 함께 군 복무를 한다면 저로써는 무척 즐거울 것 같습니다. 비밀을 아는 친구만큼 속 시원히 지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습니까?”
자신이 말한 것들이 전희연 하사를 참모로 올리는데 확실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고대영 중사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