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강호애가(江湖愛歌) 1화
序章
정마대전(正魔大戰)이 발발했다.
긴 세월 힘을 기른 마교의 중원 진출에 이미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정파의 신경전에서 전쟁으로까지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장장 십 년.
옛 문파가 무너지고 새로운 문파가 들어섰다. 마교에 투신한 인사가 있는가 하면 전쟁 도중에 정파로 돌아선 자도 있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십 년.
잔인했던 전쟁은 마교의 승리로 끝났다. 마교는 당당하게 중원을 차지했고 정파는 후일을 기약하며 숨을 죽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사랑의 감정을 꽃피운 이들이 있었다.
결국, 그들도 집단을 떠나면 일개 사람이었으므로.
第一章 크리스마스에 교주님이 내려왔어요 (1)
전쟁은 길었으나 결국은 끝났다.
십 년의 정마대전(正魔大戰)은 소림의 성승 일선대사가 천마신교의 교주인 광신제(光神帝)-정파에선 광마제(狂魔帝)라고 부른다- 갈마운과의 일전에서 패배함으로써 마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정파 최고수인 일선대사가 패하자 정파의 사기는 꺾일 대로 꺾였고, 그 틈을 타 노도와 같이 들이닥친 마교에게 중원을 내주고 말았다.
마교가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신강의 척박한 땅에서 터전을 일궜던 수만 명의 마인이 중원으로 들어왔다. 마교는 광서성 십만대산(十萬大山)에 본거지를 짓고 곳곳에 마교 분타를 세운 후 배복하며 외쳤다.
「신교천하(神敎天下)! 만마앙복(萬魔仰伏)! 천세! 천세! 천천세-!」
온 중원에 울려 퍼진 마인들의 외침에 정파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새 사람은 옛사람을 바꾼다 했소이다. 비록 오늘은 교주가 이겼지만, 언젠가는 소승과 같이 지는 해가 될 날이 올 것이오.」
갈마운이 천천히 눈을 떴다. 꿈자리가 좋지 못했다. 이미 십 년도 더 지난 일이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갈마운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흥. 뒈져 버린 늙은이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갈마운이 침상에서 발을 내렸다. 자연스레 탁자에 손을 뻗어 주전자를 쥔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소야.”
“교주님. 기침하셨습니까. 천세. 천세. 천천세.”
“차가 식었구나. 다시 내오너라.”
“예. 교주님.”
문 너머로 엎드려 있던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광신제 갈마운.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천하제일인으로 현재는 중원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황제였다. 갈마운은 신강 태생으로 탁월한 근골 때문에 교주의 대제자가 되었고, 지학(志學, 열다섯)의 나이에 이미 검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도달했다.
정마대전이 발발한 건 그의 나이가 약관(弱冠, 스물)이었을 무렵으로 그때는 이기어검의 경지였다. 갈마운은 불치병을 앓고 있던 교주가 죽은 후 다른 제자들과의 일전 끝에 천마신교의 교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립(而立, 서른)에 심검을 다룸으로써 성승을 꺾고 중원을 집어삼켰다.
그런 인물치고 갈마운의 얼굴은 서생처럼 가는 선을 그렸다. 곧게 뻗은 짙은 눈썹만 아니었다면 저잣거리에서 마주쳐도 쉽게 기억에 남을 얼굴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시동이 쟁반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갈마운은 시동, 아소가 잔에 찻물을 채우는 동안 뒤이어 들어온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아 겉옷을 걸쳤다.
“교주님. 오늘은 복건성에서 상질의 철관음(鐵觀音)이 들어왔습니다.”
아소가 손으로 받친 찻잔을 무릎을 꿇고 공손히 내밀었다. 용대(龍帶)의 매듭을 묶는 시녀들 탓에 갈마운은 팔만 뻗어 찻잔을 쥐었다. 깊게 숨을 들이쉰 후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향이 좋구나. 하지만 일전의 용정차(龙井茶)가 더 낫다.”
“앞으로는 용정으로 올리겠습니다. 서호의 용정과 절강의 용정 중 어느 것이 더 입에 맞으신지요?”
“서호 것으로 해라.”
“예. 교주님.”
“그리고…….”
말끝을 흐린 갈마운이 유려하게 팔을 휘둘렀다. 막 물러나려던 시녀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사방에 피가 튀었다. 맥없이 허물어지는 시녀의 손에는 가는 세침이 들려 있었다. 아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손으로 덮어 안에 피가 튀지 않도록 조심했다.
“흐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건만.”
“교주님. 어찌하오리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갈마운의 말에 아소가 납작 엎드렸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바닥이 핏물로 흥건함에도 시동의 행동엔 거리낌이 없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하오나 교주님. 이런 일이 빈번하니 일벌백계를 하심이…….”
“아소야.”
“예. 교주님.”
갈마운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부드러운 바람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아소의 몸이 들렸다. 억지로 상체를 들게 된 아이의 눈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어린 시동의 애처로움이 안쓰러울 만도 하건만 그를 보는 갈마운의 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십 년 전, 성승과의 일전은 본좌의 승리로 끝났지만, 단전에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운기로 서서히 회복하곤 있으나 완전히 나으려면 족히 십 년은 더 걸릴 것이다. 신교에는 수많은 율법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강자존 약자멸(强者存 弱者滅)! 이만하면 놈들도 오래 참은 것이다.”
“하오나 교주님.”
“아소야. 오늘 꿈자리가 좋지 않다 했더니 이곳에 곧 불청객이 들이닥칠 것 같구나.”
어린 시동의 머리를 쓰다듬은 갈마운이 손을 내려 귀 뒤의 천극혈(天隙穴)을 짚었다. 아소의 고개가 까무룩 넘어가더니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갈마운의 눈에 얼핏 측은함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치려는 이들이 너라고 살려 두진 않을 테지.”
쾅-!
숨이 멎은 아소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문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갈마운에게 튀는 파편을 허공에서 나타난 다섯 명의 인영이 검을 휘둘러 가루로 만들었다.
“오무영(五無影). 물러서라.”
침입자에게 검을 뻗어 가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갈마운의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들의 임무가 교주 호위인 만큼 갈마운의 명령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갈마운은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차를 들이켰다.
“교주!”
“……차가 식었군.”
호기롭게 들어온 인물이 갈마운의 무심한 대꾸에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갈마운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본좌를 거슬리게 하는 이가 누군가 했더니 네놈이로구나.”
“흥. 그럼 누군 줄 아셨소? 당연히 이 능계악이야말로 교주의 뒤를 이을 인물이거늘.”
태양혈(太陽穴)이 불뚝 튀어나온 근육질의 장한이 거칠게 난 수염을 씰룩였다. 갈마운은 비열하게 입술을 비튼 능계악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낯익은 자들이 살며시 눈을 피했다.
아무리 단전에 흠이 있어도 능계악 따위로는 갈마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서서히 천마신공(天魔神功)을 일으키며 갈마운이 사납게 웃었다.
“멍청한 놈. 용의 꼬리가 된 줄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구나. 네 그런 점을 누누이 경계하라 했거늘!”
갈마운의 꾸지람에 능계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항상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칭찬 한 번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능계악은 수치심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버럭 소리쳤다.
“언제까지 내게 그렇게 훈계할 수 있는지 두고 봅시다. 사부!”
검강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하사받은 수라도(修羅刂)를 휘두르며 능계악이 짓쳐 들었다. 그에 갈마운의 몸에서 자색 빛이 피어올랐다.
***
“퉷!”
갈마운이 핏물 섞인 침을 뱉었다. 포위하듯 둘러싼 이들이 질린 얼굴로 침음성을 내뱉었다. 벌써 갈마운의 손에 흑마대(黑魔隊)와 마랑대(魔狼隊), 수라혈참대(修羅血斬隊)가 몰살당했다. 어깨가 뜯겨 나간 능계악이 씩씩거리며 갈마운과의 거리를 좁혔다.
“하나만 묻겠다. 네 사제는 어찌 되었느냐.”
“흥! 사부가 그토록 아꼈던 제자는 내 손에 명을 달리했소이다.”
“쯧쯧. 어리석은 놈. 그 아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그나마 네 명줄이 조금은 더 길었을 것을.”
“무슨 헛소리요? 사부. 이제 그만합시다. 세상이 바뀌었소. 신교는 더 높은 곳으로 향해야 하는데 병마로 골골대는 사부를 누가 믿고 따르겠소? 나 같은 새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 새로운 신교로 발돋움해야 하지 않겠소?”
눈에는 탐욕을 달고 입으로는 새 시대를 운운한다. 대제자의 헛소리에 갈마운의 입에서 한숨부터 나왔다. 복부를 틀어막은 손가락 틈새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집요하게 단전을 노리는 놈들에게 입은 검상이었다. 오무영(五無影)의 희생으로 다행히 단전은 지켰지만, 워낙 자상이 커서 회복하려면 많은 시일이 필요할 듯했다.
“사부. 제자의 간절한 부탁이오. 이젠 그만 죽어 주시오.”
갈마운의 눈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앞에는 능계악을 필두로 하는 신교의 반란 분자들이, 뒤에는 깎아지른 단애(斷崖,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어느 쪽을 택해도 살길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단전을 다쳤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복부에서 손을 뗀 갈마운이 능계악의 뒤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본좌를 언제까지 능멸할 셈이냐. 네가 아직 나에 대한 충심이 남아 있다면 그만 나오너라.”
“무슨 말을 하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능계악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몸통이 피 분수를 쏟아 내며 뻣뻣하게 굳은 채 옆으로 쓰러졌다. 나자빠진 대제자의 말로를 보는 갈마운의 얼굴엔 한 점의 동요도 없었다.
“영명하십니다. 교주. 천세. 천세. 천천세.”
살점 묻은 손을 허공에 털어 낸 남자가 깊이 포권했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카락 아래로 반안(潘安)에 비견될 만한 미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천마멸검대(天魔滅劍隊)의 대주 독고혁이 교주를 뵈옵니다.”
“옥면마검(玉面魔劍)인가.”
“예. 교주.”
“예상은 하고 있었다. 둘째 아이만 아니었다면 네가 제일이었으니까.”
“과분한 칭찬이옵니다.”
채 꽃피지도 못하고 사형의 손에 죽었을 제자를 생각했음인지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갈마운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장강의 앞 물결을 밀어 내는 건 뒷 물결이란 건가.”
독고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능계악이 죽을 때도 나서지 않았던 이들이 일제히 그의 뒤로 자리했다. 오랜 시간 함께 천하를 누볐던 옛 수하들의 배신에도 갈마운은 원망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갈마운은 자세는 공손하나 눈에 오만함을 가득 담고 있는 독고혁에게 나직이 경고했다.
“충고를 하나 하마. 너희가 본좌 모르게 정파의 뛰어난 후기지수(後起之秀, 후배 중 뛰어난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무협에서는 젊은 나이에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이들을 가리킴)를 학살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들의 오래된 저력이 두려웠겠지. 그러나 앞으로도 신교가 중원에 군림하려면 정파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진 말아야 할 것이다. 본좌의 말을 명심해라. 정파의 거머리는 끝이 없어서 언젠가는 신교의 머리를 밟고 다시 비상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예. 교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 독고혁을 보며 갈마운이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젊은 혈기에 휩싸인 젊은이는 한 치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 법이다. 자신의 지난날이 그랬고 눈앞의 독고혁이 그랬다. 답지 않은 친절은 이 정도면 되었다.
갈마운은 편안하게 뒤로 누웠다. 가벼운 부유감과 함께 빠르게 몸이 낙하했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흥. 누가 땡중 아니랄까 봐 앞날 한번 기막히게 맞췄구나. 빌어먹을.”
죽은 성승이 껄껄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수십의 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갈마운의 신형이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
대륙의 북방에 위치한 사르시아 제국의 겨울은 유달리 혹독했다. 강인한 육체를 가진 제국민들이 어지간하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추위에 인색한 그들도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어김없이 불을 밝히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을 밝히는 색색의 유리등 불빛으로 수도 사르스라나의 대로는 대낮처럼 환했다. 제국의 수도를 비롯해 지방의 도시도 빛을 밝히는 밤에 딱 한 군데 조용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산속에 위치한 신학 도서관이었다.
“그리하여 갈라진 땅에서 인간이 태어났다. 해와 달이 교차해 낮과 밤이 생기고…….”
길쭉한 손가락이 종이를 팔랑이며 넘겼다. 적막한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조용히 읊조리는 남자의 목소리뿐이었다. 그는 잉크병에 꽂혀 있던 깃펜을 꺼내 펴 놓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나갔다.
“……후우.”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남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황금빛의 머리카락이 차양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미인처럼 아름다운 얼굴 안에 자리한 황금색의 눈동자가 우울하게 물들었다.
“전하.”
느닷없는 부름에 남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시종 하나가 찻잔을 내밀고 있었다.
“카시언 대공 전하.”
재촉하듯이 찻잔을 내미는 시종의 무례함에도 남자, 카시언은 그것을 책할 수 없었다. 그저 찻잔을 받아 맑은 수면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투명한 색이지만 이 차의 진정한 정체는 따로 있었다.
카시언은 망설임 없이 찻물을 머금었다.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유심히 지켜본 시종이 빈 찻잔을 들고 소리 없이 물러났다. 기척이 사라지자 카시언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훔쳤다. 쓰디쓴 차가 속까지 메스껍게 했다.
“전하는 무슨.”
다시 펜을 들려던 카시언이 입술을 짓씹었다. 깃펜을 눕혀 놓는 바람에 종이에 잉크가 잔뜩 번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이라도 쐬며 답답한 속을 풀고 싶었다. 어차피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한정되어 있을지라도.
카시언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등을 켜지 않은 복도는 어둠으로 음울했다. 야외로 통하는 복도까지 걸어간 카시언은 그대로 정원으로 나갔다. 마른 풀 헤집는 발걸음 소리에 답답한 속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했다.
“후우우-”
하얀 입김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바람을 타고 온 희미한 종소리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쯤 산 아래에선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다시 가슴이 답답하게 막혔다.
작년까지만 해도 카시언 또한 수도의 인파에 뒤섞여 축제의 분위기를 즐겼다. 크리스마스가 생일이었기에 밤을 새울 순 없었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돌 수 있는 소소한 여유 정도는 있었다.
“아…….”
볼에 차가운 물기가 닿았다. 카시언은 감촉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한 송이…… 두 송이…….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달빛에 반사된 하얀 눈이 간지럽게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볼에 닿은 눈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약간의 물기만을 남기고 증발해 버린 눈조차 반갑게 느껴졌다. 오롯이 홀로 있는 이곳에 또 하나의 방문객이 찾아온 듯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가.”
카시언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눈을 감고 온몸으로 눈을 맞았다. 고독만이 있는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싶었다.
풀썩.
“……!”
묵직한 무게감에 카시언이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황금빛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품 안에서 온몸이 피투성이인 사람이 끙끙 앓고 있었다.
“…….”
“…….”
시선이 마주쳤다. 긴 침묵과 함께 서로 눈만 멀뚱거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갈마운이나 지상에서 받아 준 카시언이나 상황 파악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네놈 누구…….”
“아.”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갈마운이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그제야 카시언은 상처의 근원지를 발견하고 복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낯선 손길에 갈마운이 벼락같이 카시언의 목을 움켜쥐었다. 큽, 하고 목 눌린 신음을 뱉으면서도 카시언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터졌다. 그대로 목을 날리려던 갈마운은 점점 고통이 사그라지는 것에 손아귀 힘을 풀었다.
“좀 자 두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큰 상처는 오래 걸리니까요.”
“뭐…….”
입을 열려던 갈마운은 내공과는 다른 기운에 속절없이 기절했다. 몸이 멀쩡했다면 어림없었겠지만, 한계까지 몰린 상태 때문에 카시언의 성력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카시언은 자그마한 체구의 이국적인 사람을 꼭 껴안았다. 차가운 몸에 따뜻한 체온이 스며들었다.
바람이 불었다. 점점이 내리던 눈이 이젠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사방에 흩날렸다. 성력을 많이 퍼붓는다고 상처가 완벽하게 낫는 건 아니라서 카시언은 대충 봉합이 되었다 싶었을 때 손을 떼어 냈다.
“…….”
이제 어쩔까. 이미 낯선 이의 기척을 들켰을 터였다. 원래라면 그들에게 넘기는 게 원칙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카시언은 갈마운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전하. 낯선 자는 안으로 들일 수 없습니다.”
복도 안으로 한 발 내딛자마자 허공에서 검은 그림자가 떨어졌다. 한쪽 무릎을 꿇은 복면인이 앞을 가로막자 카시언이 피투성이인 손을 내밀었다.
“이자는 병자다. 이런 사람까지 의심하는가?”
“제가 의원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이리 주십시오.”
카시언은 살짝 몸을 틀어 복면인의 손을 외면했다. 이곳에 갇힌 후론 한 번도 이런 적 없던 그인지라 복면인은 적잖이 놀랐다.
“전하.”
“나를 ‘보호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으냐. 혹 수상한 자일지라도 너희 손에서 빠져나갈 순 없을 터. 인정이 있다면 내일 있을 내 탄생일을 봐서라도 좀 봐다오.”
보호라기보단 감시라는 게 옳겠지만, 카시언은 굳이 그 사실을 표면화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위에 보고는 들어갈 겁니다.”
“그래. 고맙구나.”
기어코 애원하는 말까지 들은 후에야 복면인은 다시 허공으로 사라졌다. 카시언은 비참한 기분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 갇히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고 이곳을 지키는 이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카시언은 계단을 올라 이 층의 침실로 향했다. 한 손으로 갈마운을 지탱하고 문을 열었다. 벽난로를 지피지 않은 탓에 방안이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침대에 갈마운을 눕힌 뒤 부지런히 나무를 넣고 불을 지폈다. 이런 허드렛일도 하다 보니 이젠 익숙해졌다.
방에 딸린 욕실에서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나온 카시언은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피를 닦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옷을 벗겨야 했다. 괜히 머쓱함이 밀려왔다.
그는 손을 뻗어 피투성이인 상의를 벗기려 했다. 단추로 고정하는 사르시아 의복과 달라서인지 쉽게 매듭을 찾지 못했다. 몸을 더듬거리는 손길에 갈마운이 눈을 번쩍 떴다.
“헉!”
그대로 시야가 뒤집혔다. 침대에 처박힌 카시언 위로 갈마운이 올라탔다. 노회한 눈에 의심이 깃들고 손에는 자색 기운이 맴돌았다.
“네놈.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본좌의 몸에 손을 대다니 간이 부었구나.”
“……본좌?”
“보아하니 색목인인 것 같은데, 감히 신교의 교주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신교?”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갈마운은 자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의 반응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 풍경을 훑었다. 이국적인 방과 색목인. 천 길 낭떠러지 아래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아니, 애초에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무사히 받는 것부터가 불가능했다.
“이곳이 어디냐. 네놈은 누구지?”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갈마운이 힘을 거뒀다. 뜻밖의 물음에 카시언이 애매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야말로 상대가 누군지 묻고 싶었다.
“일단 제 위에서 내려오는 게 순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序章
정마대전(正魔大戰)이 발발했다.
긴 세월 힘을 기른 마교의 중원 진출에 이미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정파의 신경전에서 전쟁으로까지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장장 십 년.
옛 문파가 무너지고 새로운 문파가 들어섰다. 마교에 투신한 인사가 있는가 하면 전쟁 도중에 정파로 돌아선 자도 있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십 년.
잔인했던 전쟁은 마교의 승리로 끝났다. 마교는 당당하게 중원을 차지했고 정파는 후일을 기약하며 숨을 죽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사랑의 감정을 꽃피운 이들이 있었다.
결국, 그들도 집단을 떠나면 일개 사람이었으므로.
第一章 크리스마스에 교주님이 내려왔어요 (1)
전쟁은 길었으나 결국은 끝났다.
십 년의 정마대전(正魔大戰)은 소림의 성승 일선대사가 천마신교의 교주인 광신제(光神帝)-정파에선 광마제(狂魔帝)라고 부른다- 갈마운과의 일전에서 패배함으로써 마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정파 최고수인 일선대사가 패하자 정파의 사기는 꺾일 대로 꺾였고, 그 틈을 타 노도와 같이 들이닥친 마교에게 중원을 내주고 말았다.
마교가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신강의 척박한 땅에서 터전을 일궜던 수만 명의 마인이 중원으로 들어왔다. 마교는 광서성 십만대산(十萬大山)에 본거지를 짓고 곳곳에 마교 분타를 세운 후 배복하며 외쳤다.
「신교천하(神敎天下)! 만마앙복(萬魔仰伏)! 천세! 천세! 천천세-!」
온 중원에 울려 퍼진 마인들의 외침에 정파인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 새 사람은 옛사람을 바꾼다 했소이다. 비록 오늘은 교주가 이겼지만, 언젠가는 소승과 같이 지는 해가 될 날이 올 것이오.」
갈마운이 천천히 눈을 떴다. 꿈자리가 좋지 못했다. 이미 십 년도 더 지난 일이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갈마운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흥. 뒈져 버린 늙은이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은 갈마운이 침상에서 발을 내렸다. 자연스레 탁자에 손을 뻗어 주전자를 쥔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소야.”
“교주님. 기침하셨습니까. 천세. 천세. 천천세.”
“차가 식었구나. 다시 내오너라.”
“예. 교주님.”
문 너머로 엎드려 있던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광신제 갈마운.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천하제일인으로 현재는 중원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황제였다. 갈마운은 신강 태생으로 탁월한 근골 때문에 교주의 대제자가 되었고, 지학(志學, 열다섯)의 나이에 이미 검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에 도달했다.
정마대전이 발발한 건 그의 나이가 약관(弱冠, 스물)이었을 무렵으로 그때는 이기어검의 경지였다. 갈마운은 불치병을 앓고 있던 교주가 죽은 후 다른 제자들과의 일전 끝에 천마신교의 교주가 되었다. 그리고 이립(而立, 서른)에 심검을 다룸으로써 성승을 꺾고 중원을 집어삼켰다.
그런 인물치고 갈마운의 얼굴은 서생처럼 가는 선을 그렸다. 곧게 뻗은 짙은 눈썹만 아니었다면 저잣거리에서 마주쳐도 쉽게 기억에 남을 얼굴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시동이 쟁반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갈마운은 시동, 아소가 잔에 찻물을 채우는 동안 뒤이어 들어온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아 겉옷을 걸쳤다.
“교주님. 오늘은 복건성에서 상질의 철관음(鐵觀音)이 들어왔습니다.”
아소가 손으로 받친 찻잔을 무릎을 꿇고 공손히 내밀었다. 용대(龍帶)의 매듭을 묶는 시녀들 탓에 갈마운은 팔만 뻗어 찻잔을 쥐었다. 깊게 숨을 들이쉰 후 한 모금 차를 들이켰다.
“향이 좋구나. 하지만 일전의 용정차(龙井茶)가 더 낫다.”
“앞으로는 용정으로 올리겠습니다. 서호의 용정과 절강의 용정 중 어느 것이 더 입에 맞으신지요?”
“서호 것으로 해라.”
“예. 교주님.”
“그리고…….”
말끝을 흐린 갈마운이 유려하게 팔을 휘둘렀다. 막 물러나려던 시녀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사방에 피가 튀었다. 맥없이 허물어지는 시녀의 손에는 가는 세침이 들려 있었다. 아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손으로 덮어 안에 피가 튀지 않도록 조심했다.
“흐음.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건만.”
“교주님. 어찌하오리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갈마운의 말에 아소가 납작 엎드렸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바닥이 핏물로 흥건함에도 시동의 행동엔 거리낌이 없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하오나 교주님. 이런 일이 빈번하니 일벌백계를 하심이…….”
“아소야.”
“예. 교주님.”
갈마운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부드러운 바람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아소의 몸이 들렸다. 억지로 상체를 들게 된 아이의 눈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어린 시동의 애처로움이 안쓰러울 만도 하건만 그를 보는 갈마운의 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십 년 전, 성승과의 일전은 본좌의 승리로 끝났지만, 단전에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운기로 서서히 회복하곤 있으나 완전히 나으려면 족히 십 년은 더 걸릴 것이다. 신교에는 수많은 율법이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강자존 약자멸(强者存 弱者滅)! 이만하면 놈들도 오래 참은 것이다.”
“하오나 교주님.”
“아소야. 오늘 꿈자리가 좋지 않다 했더니 이곳에 곧 불청객이 들이닥칠 것 같구나.”
어린 시동의 머리를 쓰다듬은 갈마운이 손을 내려 귀 뒤의 천극혈(天隙穴)을 짚었다. 아소의 고개가 까무룩 넘어가더니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갈마운의 눈에 얼핏 측은함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치려는 이들이 너라고 살려 두진 않을 테지.”
쾅-!
숨이 멎은 아소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문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갈마운에게 튀는 파편을 허공에서 나타난 다섯 명의 인영이 검을 휘둘러 가루로 만들었다.
“오무영(五無影). 물러서라.”
침입자에게 검을 뻗어 가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갈마운의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들의 임무가 교주 호위인 만큼 갈마운의 명령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갈마운은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차를 들이켰다.
“교주!”
“……차가 식었군.”
호기롭게 들어온 인물이 갈마운의 무심한 대꾸에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갈마운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본좌를 거슬리게 하는 이가 누군가 했더니 네놈이로구나.”
“흥. 그럼 누군 줄 아셨소? 당연히 이 능계악이야말로 교주의 뒤를 이을 인물이거늘.”
태양혈(太陽穴)이 불뚝 튀어나온 근육질의 장한이 거칠게 난 수염을 씰룩였다. 갈마운은 비열하게 입술을 비튼 능계악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낯익은 자들이 살며시 눈을 피했다.
아무리 단전에 흠이 있어도 능계악 따위로는 갈마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서서히 천마신공(天魔神功)을 일으키며 갈마운이 사납게 웃었다.
“멍청한 놈. 용의 꼬리가 된 줄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구나. 네 그런 점을 누누이 경계하라 했거늘!”
갈마운의 꾸지람에 능계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항상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칭찬 한 번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능계악은 수치심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버럭 소리쳤다.
“언제까지 내게 그렇게 훈계할 수 있는지 두고 봅시다. 사부!”
검강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하사받은 수라도(修羅刂)를 휘두르며 능계악이 짓쳐 들었다. 그에 갈마운의 몸에서 자색 빛이 피어올랐다.
***
“퉷!”
갈마운이 핏물 섞인 침을 뱉었다. 포위하듯 둘러싼 이들이 질린 얼굴로 침음성을 내뱉었다. 벌써 갈마운의 손에 흑마대(黑魔隊)와 마랑대(魔狼隊), 수라혈참대(修羅血斬隊)가 몰살당했다. 어깨가 뜯겨 나간 능계악이 씩씩거리며 갈마운과의 거리를 좁혔다.
“하나만 묻겠다. 네 사제는 어찌 되었느냐.”
“흥! 사부가 그토록 아꼈던 제자는 내 손에 명을 달리했소이다.”
“쯧쯧. 어리석은 놈. 그 아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그나마 네 명줄이 조금은 더 길었을 것을.”
“무슨 헛소리요? 사부. 이제 그만합시다. 세상이 바뀌었소. 신교는 더 높은 곳으로 향해야 하는데 병마로 골골대는 사부를 누가 믿고 따르겠소? 나 같은 새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 새로운 신교로 발돋움해야 하지 않겠소?”
눈에는 탐욕을 달고 입으로는 새 시대를 운운한다. 대제자의 헛소리에 갈마운의 입에서 한숨부터 나왔다. 복부를 틀어막은 손가락 틈새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집요하게 단전을 노리는 놈들에게 입은 검상이었다. 오무영(五無影)의 희생으로 다행히 단전은 지켰지만, 워낙 자상이 커서 회복하려면 많은 시일이 필요할 듯했다.
“사부. 제자의 간절한 부탁이오. 이젠 그만 죽어 주시오.”
갈마운의 눈이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앞에는 능계악을 필두로 하는 신교의 반란 분자들이, 뒤에는 깎아지른 단애(斷崖,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어느 쪽을 택해도 살길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단전을 다쳤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복부에서 손을 뗀 갈마운이 능계악의 뒤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본좌를 언제까지 능멸할 셈이냐. 네가 아직 나에 대한 충심이 남아 있다면 그만 나오너라.”
“무슨 말을 하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능계악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몸통이 피 분수를 쏟아 내며 뻣뻣하게 굳은 채 옆으로 쓰러졌다. 나자빠진 대제자의 말로를 보는 갈마운의 얼굴엔 한 점의 동요도 없었다.
“영명하십니다. 교주. 천세. 천세. 천천세.”
살점 묻은 손을 허공에 털어 낸 남자가 깊이 포권했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카락 아래로 반안(潘安)에 비견될 만한 미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천마멸검대(天魔滅劍隊)의 대주 독고혁이 교주를 뵈옵니다.”
“옥면마검(玉面魔劍)인가.”
“예. 교주.”
“예상은 하고 있었다. 둘째 아이만 아니었다면 네가 제일이었으니까.”
“과분한 칭찬이옵니다.”
채 꽃피지도 못하고 사형의 손에 죽었을 제자를 생각했음인지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갈마운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장강의 앞 물결을 밀어 내는 건 뒷 물결이란 건가.”
독고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능계악이 죽을 때도 나서지 않았던 이들이 일제히 그의 뒤로 자리했다. 오랜 시간 함께 천하를 누볐던 옛 수하들의 배신에도 갈마운은 원망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갈마운은 자세는 공손하나 눈에 오만함을 가득 담고 있는 독고혁에게 나직이 경고했다.
“충고를 하나 하마. 너희가 본좌 모르게 정파의 뛰어난 후기지수(後起之秀, 후배 중 뛰어난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무협에서는 젊은 나이에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이들을 가리킴)를 학살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들의 오래된 저력이 두려웠겠지. 그러나 앞으로도 신교가 중원에 군림하려면 정파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진 말아야 할 것이다. 본좌의 말을 명심해라. 정파의 거머리는 끝이 없어서 언젠가는 신교의 머리를 밟고 다시 비상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예. 교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 독고혁을 보며 갈마운이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젊은 혈기에 휩싸인 젊은이는 한 치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 법이다. 자신의 지난날이 그랬고 눈앞의 독고혁이 그랬다. 답지 않은 친절은 이 정도면 되었다.
갈마운은 편안하게 뒤로 누웠다. 가벼운 부유감과 함께 빠르게 몸이 낙하했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흥. 누가 땡중 아니랄까 봐 앞날 한번 기막히게 맞췄구나. 빌어먹을.”
죽은 성승이 껄껄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수십의 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갈마운의 신형이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
대륙의 북방에 위치한 사르시아 제국의 겨울은 유달리 혹독했다. 강인한 육체를 가진 제국민들이 어지간하면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추위에 인색한 그들도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어김없이 불을 밝히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을 밝히는 색색의 유리등 불빛으로 수도 사르스라나의 대로는 대낮처럼 환했다. 제국의 수도를 비롯해 지방의 도시도 빛을 밝히는 밤에 딱 한 군데 조용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산속에 위치한 신학 도서관이었다.
“그리하여 갈라진 땅에서 인간이 태어났다. 해와 달이 교차해 낮과 밤이 생기고…….”
길쭉한 손가락이 종이를 팔랑이며 넘겼다. 적막한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조용히 읊조리는 남자의 목소리뿐이었다. 그는 잉크병에 꽂혀 있던 깃펜을 꺼내 펴 놓은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나갔다.
“……후우.”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남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황금빛의 머리카락이 차양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미인처럼 아름다운 얼굴 안에 자리한 황금색의 눈동자가 우울하게 물들었다.
“전하.”
느닷없는 부름에 남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시종 하나가 찻잔을 내밀고 있었다.
“카시언 대공 전하.”
재촉하듯이 찻잔을 내미는 시종의 무례함에도 남자, 카시언은 그것을 책할 수 없었다. 그저 찻잔을 받아 맑은 수면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투명한 색이지만 이 차의 진정한 정체는 따로 있었다.
카시언은 망설임 없이 찻물을 머금었다.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유심히 지켜본 시종이 빈 찻잔을 들고 소리 없이 물러났다. 기척이 사라지자 카시언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훔쳤다. 쓰디쓴 차가 속까지 메스껍게 했다.
“전하는 무슨.”
다시 펜을 들려던 카시언이 입술을 짓씹었다. 깃펜을 눕혀 놓는 바람에 종이에 잉크가 잔뜩 번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이라도 쐬며 답답한 속을 풀고 싶었다. 어차피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한정되어 있을지라도.
카시언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등을 켜지 않은 복도는 어둠으로 음울했다. 야외로 통하는 복도까지 걸어간 카시언은 그대로 정원으로 나갔다. 마른 풀 헤집는 발걸음 소리에 답답한 속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듯했다.
“후우우-”
하얀 입김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바람을 타고 온 희미한 종소리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쯤 산 아래에선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다시 가슴이 답답하게 막혔다.
작년까지만 해도 카시언 또한 수도의 인파에 뒤섞여 축제의 분위기를 즐겼다. 크리스마스가 생일이었기에 밤을 새울 순 없었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돌 수 있는 소소한 여유 정도는 있었다.
“아…….”
볼에 차가운 물기가 닿았다. 카시언은 감촉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한 송이…… 두 송이…….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달빛에 반사된 하얀 눈이 간지럽게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볼에 닿은 눈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약간의 물기만을 남기고 증발해 버린 눈조차 반갑게 느껴졌다. 오롯이 홀로 있는 이곳에 또 하나의 방문객이 찾아온 듯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가.”
카시언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눈을 감고 온몸으로 눈을 맞았다. 고독만이 있는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싶었다.
풀썩.
“……!”
묵직한 무게감에 카시언이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황금빛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품 안에서 온몸이 피투성이인 사람이 끙끙 앓고 있었다.
“…….”
“…….”
시선이 마주쳤다. 긴 침묵과 함께 서로 눈만 멀뚱거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갈마운이나 지상에서 받아 준 카시언이나 상황 파악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네놈 누구…….”
“아.”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갈마운이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그제야 카시언은 상처의 근원지를 발견하고 복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낯선 손길에 갈마운이 벼락같이 카시언의 목을 움켜쥐었다. 큽, 하고 목 눌린 신음을 뱉으면서도 카시언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터졌다. 그대로 목을 날리려던 갈마운은 점점 고통이 사그라지는 것에 손아귀 힘을 풀었다.
“좀 자 두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큰 상처는 오래 걸리니까요.”
“뭐…….”
입을 열려던 갈마운은 내공과는 다른 기운에 속절없이 기절했다. 몸이 멀쩡했다면 어림없었겠지만, 한계까지 몰린 상태 때문에 카시언의 성력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카시언은 자그마한 체구의 이국적인 사람을 꼭 껴안았다. 차가운 몸에 따뜻한 체온이 스며들었다.
바람이 불었다. 점점이 내리던 눈이 이젠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로 사방에 흩날렸다. 성력을 많이 퍼붓는다고 상처가 완벽하게 낫는 건 아니라서 카시언은 대충 봉합이 되었다 싶었을 때 손을 떼어 냈다.
“…….”
이제 어쩔까. 이미 낯선 이의 기척을 들켰을 터였다. 원래라면 그들에게 넘기는 게 원칙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카시언은 갈마운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전하. 낯선 자는 안으로 들일 수 없습니다.”
복도 안으로 한 발 내딛자마자 허공에서 검은 그림자가 떨어졌다. 한쪽 무릎을 꿇은 복면인이 앞을 가로막자 카시언이 피투성이인 손을 내밀었다.
“이자는 병자다. 이런 사람까지 의심하는가?”
“제가 의원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이리 주십시오.”
카시언은 살짝 몸을 틀어 복면인의 손을 외면했다. 이곳에 갇힌 후론 한 번도 이런 적 없던 그인지라 복면인은 적잖이 놀랐다.
“전하.”
“나를 ‘보호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으냐. 혹 수상한 자일지라도 너희 손에서 빠져나갈 순 없을 터. 인정이 있다면 내일 있을 내 탄생일을 봐서라도 좀 봐다오.”
보호라기보단 감시라는 게 옳겠지만, 카시언은 굳이 그 사실을 표면화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위에 보고는 들어갈 겁니다.”
“그래. 고맙구나.”
기어코 애원하는 말까지 들은 후에야 복면인은 다시 허공으로 사라졌다. 카시언은 비참한 기분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 갇히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고 이곳을 지키는 이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카시언은 계단을 올라 이 층의 침실로 향했다. 한 손으로 갈마운을 지탱하고 문을 열었다. 벽난로를 지피지 않은 탓에 방안이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침대에 갈마운을 눕힌 뒤 부지런히 나무를 넣고 불을 지폈다. 이런 허드렛일도 하다 보니 이젠 익숙해졌다.
방에 딸린 욕실에서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나온 카시언은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피를 닦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옷을 벗겨야 했다. 괜히 머쓱함이 밀려왔다.
그는 손을 뻗어 피투성이인 상의를 벗기려 했다. 단추로 고정하는 사르시아 의복과 달라서인지 쉽게 매듭을 찾지 못했다. 몸을 더듬거리는 손길에 갈마운이 눈을 번쩍 떴다.
“헉!”
그대로 시야가 뒤집혔다. 침대에 처박힌 카시언 위로 갈마운이 올라탔다. 노회한 눈에 의심이 깃들고 손에는 자색 기운이 맴돌았다.
“네놈.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본좌의 몸에 손을 대다니 간이 부었구나.”
“……본좌?”
“보아하니 색목인인 것 같은데, 감히 신교의 교주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신교?”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갈마운은 자신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의 반응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 풍경을 훑었다. 이국적인 방과 색목인. 천 길 낭떠러지 아래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아니, 애초에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무사히 받는 것부터가 불가능했다.
“이곳이 어디냐. 네놈은 누구지?”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갈마운이 힘을 거뒀다. 뜻밖의 물음에 카시언이 애매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야말로 상대가 누군지 묻고 싶었다.
“일단 제 위에서 내려오는 게 순리에 맞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