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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애가(江湖愛歌) 2화
第一章 크리스마스에 교주님이 내려왔어요 (2)
“……그렇군.”
갈마운이 몸 위에서 내려가자 카시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체를 일으킨 그를 보는 갈마운의 눈이 찌푸려졌다. 지금 보니 육 척(六戚, 약 180센티미터) 장신인 자신보다 거대한 남자였다. 항상 내려다보기만 했던 그로선 상대를 올려다보는 이 상황이 마뜩잖았다.
“음. 일단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습니다. 좀 전에도 옷을 갈아입히려다 당신의 공격을 받은 것이라…….”
“가져와.”
“하하. ……예.”
능숙한 명령조에 카시언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살면서 아버지 외에 처음으로 듣는 하대였다. 그를 가둔 이조차 말로는 존대를 표했기에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상대의 자연스러운 태도 때문일지도 몰랐다.
카시언은 옷장에서 셔츠와 바지를 꺼내 갈마운에게 건넸다. 갈마운은 생소한 의복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다시 내밀었다.
“시중을 들어라.”
“…….”
무언의 압박에 카시언은 굴복했다. 피로 질척이는 의복을 벗기고 젖은 수건으로 상처를 피해 조심스레 몸을 닦았다. 그는 상처에 가려 보지 못했던 수많은 상흔을 발견했다. 탄탄한 근육 사이로 온갖 흉이 빼곡했다. 가만히 쳐다보던 그는 갈마운의 짜증 어린 타박에 서둘러 붕대를 감고 옷을 입혔다.
옷을 다 입은 갈마운을 본 카시언은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다급히 참았다. 신장 차이가 있다 보니 셔츠의 품이 넉넉해 손등까지 소매가 내려왔다. 그 모습이 꽤 귀엽게 보였다.
“무얼 그리 보고만 있는 것이냐.”
갈마운이 손을 휘둘러 침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 의자를 끌어왔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이었다. 앞에 놓인 의자를 본 카시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 마법사입니까?”
“마법사?”
“이 의자를 끌어온 힘 말입니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본좌가 일일이 이런 걸 네놈에게 설명해야 하나? 앉기나 해라.”
궁금한 게 많았지만 카시언은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침대에 앉은 갈마운과 의자에 앉은 카시언은 마주 본 상태에서 긴 시간 대치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상대의 외향이 눈에 들어왔다.
카시언의 입에서 기묘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눈앞의 남자는 제국에선 흔치 않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사막인과 비슷한 황갈색 피부에 눈썹은 검은 물감처럼 진했고 길게 찢어진 눈은 서늘한 기색을 풍겼다. 나이는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약간의 잔주름과 노회한 눈에서 남자의 세월이 엿보였다.
상대가 신기한 건 갈마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색목인은 많이 보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마치 잘 빚은 도자기 인형처럼 기묘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꿀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새하얀 피부, 선홍빛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얼굴에 진 기묘한 그늘 때문에 생기 있어 보이진 않았다.
“제 이름은 카시언 드 사르시아입니다.”
“본좌는 갈마운이다.”
“…….”
“…….”
“……그게 끝입니까?”
“……그게 끝인 것이냐?”
한쪽은 사르시아의 대공이고 한쪽은 천마신교의 교주였다. 카시언과 갈마운은 자신의 신분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는 상대에게 당혹을 금치 못했다. 카시언은 다시 한번 자신을 소개했다.
“대 사르시아 제국의 대공입니다.”
“대공? 그건 무슨 직책이지?”
“……귀족입니다.”
“귀족? 관리란 말이군.”
“관리가 아닌…… 아, 아닙니다.”
카시언은 좀 더 부연 설명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반응을 보건대 자세히 설명해 줘도 귀담아들을 것 같지 않았다.
카시언과 다르게 갈마운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오만한 그로서는 상대방에게 재차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이곳이 어디…….”
갈마운의 말을 가르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익숙한 목소리에 카시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다급하게 갈마운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어서. 어서 누우십시오.”
“뭐? 이 무슨 무엄한…….”
“제발 부탁드립니다.”
카시언의 절박한 어조에 갈퀴처럼 굽은 갈마운의 손가락이 스르르 풀렸다. 긴 속눈썹 아래 황금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일단 카시언이 생명의 은인인 건 확실하니 갈마운은 한번 져 준다는 심보로 얌전히 자리에 누웠다. 그가 눈까지 감은 후에야 카시언은 입을 열었다.
“들어와라.”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좀 전에 차를 가져다준 시종이었다. 시종은 이번에도 찻잔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색이 무척이나 붉었다.
“이게 무엇이냐.”
“이곳에 아픈 환자가 있다고 해서 타 왔습니다. 몸을 회복하는 약입니다.”
“그렇구나. 놓고 나가거라. 일어나면 먹일 테니.”
“송구합니다만 지금 먹어야 합니다. 시일이 지나면 약효가 떨어지는 약인지라…….”
“…….”
이젠 한숨 쉬기도 지치는 상황이었다. 시종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으면서도 명백하게 찻잔을 내밀고 있었다. 먹이지 않는다면 물러나지 않을 태세였다.
카시언은 어쩔 수 없이 갈마운의 어깨를 흔들었다. 눈을 뜬 갈마운이 상체를 일으켰다.
“기운을 북돋아 주는 약이라고 합니다. 좀 드십시오.”
카시언이 시종에게 찻잔을 받아 내밀었다. 무심한 낯으로 찻잔을 받은 갈마운이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시종은 갈마운을 유심히 살피다가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뒤로 돌았다. 그러나 머리에 얹힌 손 때문에 방을 나가지 못했다.
“……?”
“이상하구나. 몸을 보하는 약이라는데, 왜 본좌의 몸은 독극물이라고 판단했을까?”
“……그!”
“잘못을 빌 필요는 없다. 받은 대로 갚으면 되니 말이다.”
갈마운은 그대로 백회혈(百會穴)에 기공을 흘렸다. 독문 무공인 지법(指法) 암환지(暗煥指)였다. 그대로 절명한 시종의 입에서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나왔다. 시체가 된 몸을 바닥에 내팽개친 갈마운이 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절대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눈을 홉뜬 카시언에게 나직이 경고한 그는 운기에 들어갔다. 카시언은 갈마운과 시종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시종의 코에 손가락을 대 봤지만 끊긴 숨이 돌아올 리 없었다. 미약한 숨이라도 있었다면 성력이라도 쓰겠는데 죽은 숨을 되살리는 건 아무리 카시언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곱게 죽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카시언은 시종의 충혈된 눈을 살며시 감겼다.
“아침이 되면 난리가 나겠구나.”
어쩌면 보고 싶지 않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올지도 몰랐다. 그가 미친 건 아닌지 확인할 테고 없는 핑계를 대서라서 더욱 집요한 이를 붙일 것이다. 카시언은 시신을 욕실로 옮겼다. 일단 아침까지만이라도 숨길 작정이었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갈마운의 몸에서 자색 빛이 돌더니 손가락 끝에서 검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치익, 하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흥. 쌍각사(雙角蛇)의 독보다는 못하군.”
“몸은 괜찮습니까?”
“별문제 없다.”
“…….”
“본좌를 죽이려고 한 자를 살려 둬야 할 이유가 있느냐?”
“아닙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늘진 얼굴 때문에 오해했나 싶어 카시언이 손사래 쳤다. 그래도 갈마운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나직이 한숨을 쉬곤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다시 마주 보게 된 상황에서 카시언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음.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서대륙의 사르시아 제국입니다.”
“사르시아?”
“예. 서대륙엔 세 개의 제국이 있고, 수십의 중소 왕국이 있습니다. 저는 제국 중 하나인 사르시아에서 대공의 위치에 있습니다. 대공은 쉽게 말하자면 황제의 형제를 이르는 말입니다.”
카시언의 말에 갈마운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유약해 보이는 남자가 황족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당연히 갈마운의 고향에도 황제가 있었고 친왕들이 있었다. 하지만 관(官)과 무림은 불가침 조약을 맺어서 딱히 가까이서 볼 기회는 없었다.
무엇보다 천마신교는 명을 건국한 주원장에게 버림받은 명교에서 갈라진 종파였다. 따로 신이 있는 명교와 달리 교주가 곧 신인 천마신교의 율법 때문에 이제 와 같은 취급을 하긴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황족이라는 말에 껄끄러움부터 들었다.
“황족?”
“예. 현 황제의 형이 됩니다.”
“동생이 황제라.”
갈마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난처한 미소를 보지 않더라도 상황이 짐작 갔다. 염연히 장자가 있는데 그 아우가 황제인 데다 사는 행색 또한 빈한했다. 딱 몰락한 황족의 몰골이었다.
그렇다고 카시언에게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이보다 못한 삶을 사는 자들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갈마운의 어린 시절 또한 그랬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갈마운은 무심하게 말을 돌렸다.
“명나라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명, 나라 말입니까?”
“그래. 명나라.”
“음……. 죄송하지만 그런 나라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바다 너머의 나라입니까?”
“바다?”
“예. 바다 건너에는 당신 같은 외모의 사람들이 산다고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얼핏 무시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아 갈마운이 되물었다.
“읽은 적이 있다?”
“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도서관이다 보니 여러 서적을 읽다가 스치듯이 본 것 같아서……. 그리고 이 나라는 내륙에서도 안쪽에 있어서 해상 교역이 활발하지 않아 바다 건너까지 배를 보내지 않습니다.”
“…….”
욕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교주가 된 후에 위엄 때문에 자제하긴 했지만, 본디 갈마운은 화가 나면 폭급한 인사였다. 그때만큼은 수하들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괜히 정파에서 광마제(狂魔帝)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카시언의 말을 종합하자면 갈마운은 전혀 모르는 곳에 홀로 떨어진 셈이었다. 어떻게 낭떠러지 아래에 이런 세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더 생각하기를 포기한 갈마운이 편하게 몸을 뉘었다. 옆으로 누워 머리를 괸 그가 반쯤 눈을 내리깔았다.
“일단 몸을 회복하고 나서 생각해야겠다.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니.”
“예. 큰 상처 같으니 푹 쉬십시오. 겨우 겉만 봉합했을 뿐이라 날이 밝으면 다시 치유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든지.”
봉사 받는 것에 익숙한 갈마운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런데 내게 한 치료가 대체 무엇이냐. 황족이라더니 의술까지 아는 것이냐?”
“음. 의술까진 아닙니다. 그저 신관이라 신성력을 쓴 것뿐입니다.”
“신관? 그게 뭐지?”
“신을 모시는 사람을 신관이라 합니다.”
“무자(巫子)쯤 되는가 보군. 이곳에선 무자가 사람까지 치료하나?”
카시언은 무자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행동으로 보였다. 갈마운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복부에 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미 효과를 보았던 갈마운은 경계하지 않았다.
하얀 손끝에서 빛이 흘러나와 배에 스며들었다. 잔여 독으로 따끔거리던 속이 편안해졌다. 갈마운이 호오, 하고 감탄했다.
“쓸모 있군.”
“하하……. 이 능력 때문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
갈마운이 내리깔았던 눈을 위로 치켜떴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카시언의 시선을 붙잡았다. 무저갱 같은 시선이었다. 당황하는 카시언을 향해 갈마운이 심드렁하게 명령했다.
“무료하구나. 쓰레기 같은 인생이겠지만, 네 이야기나 해봐라.”
“…….”
“대충 짐작 가니 자장가 부른다 생각하고 말해.”
강압적인 어조에 카시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제 일이라면 사르시아 제국민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영원의 황태자’란 불편한 동정을 받았다. 황제가 될 수 없는 황태자라니. 그만큼 조소 어린 호칭이 있을까.
하지만 눈앞의 갈마운은 동정이나 가여움 같은 헛된 감정을 가질 것 같진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황태자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카시언의 이야기는 제법 길었다.
카시언은 사르시아 제국의 황후 태생 일황자로서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되었다. 만약 아비인 황제가 돌연사하지 않았다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 카시언의 생일인 크리스마스에 황제가 갑자기 승하했고 야욕이 컸던 후궁 태생 둘째 동생에게 권좌를 빼앗겼다. 그 과정이 순식간에 이뤄져 동생이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
권력에서 밀린 황족의 말로야 뻔했다. 더군다나 황제보다 더 정통성을 지닌 전 황태자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다행히도 카시언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력이 있었고 신관이 되어 속세의 연을 끊겠다는 맹세를 하고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패륜 황제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동생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루한 이야기군.”
“하하. 그렇습니까.”
“내가 황제였다면 절대 널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후환은 애초에 제거하는 게 가장 현명한 법이니까. 네가 후일 자식이라도 낳아 봐라. 그것만큼 분란을 일으키는 일도 없지 않겠느냐.”
냉혹한 갈마운의 말에 카시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하게 눈을 휘며 웃는 그의 모습에 갈마운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좋다고 웃는 것이냐? 제 지위도 지키지 못한 패잔병이 속까지 없으면 병신이나 다름없지.”
“하하. 황제가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래서 저에게 꾸준히 약을 쓰고 있지요.”
“약?”
“음…… 후계를 생산하지 못하는 약입니다.”
“…….”
갈마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시언의 하체로 향했다. 노골적인 시선에 카시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하체를 가렸다.
“그, 그냥 씨만 말리는 겁니다. 기능에는 이상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했느냐?”
당신이 노골적으로 쳐다보지 않았느냐, 같은 말은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카시언은 손 부채질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발갛게 익은 그의 볼을 힐끗 본 갈마운이 무심히 눈을 돌렸다.
“계집애 같은 놈.”
“흠. 흠흠!”
헛기침을 한 카시언이 이제는 벌렁 드러누운 갈마운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 머무를 곳이 없다면 당분간 여기에 있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이곳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없다. 알고자 한다면 알게 되는 법. 본좌는 날이 밝으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 돌아갈 방법 같은 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갈마운의 미련 없는 태도에 카시언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일 년 가까이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한 그에게 갈마운은 오랜만에 만난 외부인이자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사람이었다.
크리스마스인 내일만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카시언은 침묵함으로써 갈마운의 뜻을 존중했다. 그는 한차례 고개를 흔들고는 시트를 들어 갈마운의 목까지 덮었다.
“날이 춥습니다. 당신은 환자이니 몸을 따뜻하게 하고 자는 게 좋아요.”
“……너는 어디에서 자지?”
타인에게 관심 없는 갈마운으로서는 뜻밖의 발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갈마운은 자신보다 커다란 신장을 가진 상대에게 완전히 관심을 끊지 못했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카시언은 기묘할 정도의 애처로운 분위기를 풍겼고 겉모습마저 아름다워 사람의 시선을 끄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난잡하게 놀던 갈마운마저 동할 만큼 구미가 당기는 외모였단 말이다.
“특별히 본좌의 옆에서 자는 영광을 주겠다. 올라와.”
“그 침대는 원래 제 것…….”
“바닥에서 자고 싶으냐?”
“감사합니다.”
아무리 카시언이라도 바닥에서 자고 싶진 않았다. 이 추운 날에 바닥에서 잤다간 다음 날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갈마운이 걱정되어서 다른 방으로 갈 수도 없었다. 힐끗 눈치 보며 침대 끝에 누운 카시언은 갈마운의 손에 의해 벽 쪽으로 옮겨졌다. 또다시 몸이 가볍게 들리자 카시언은 제가 일 년 사이에 깃털처럼 가벼워졌나 하는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뎅- 뎅- 뎅-
멀리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아.”
카시언이 의미 모를 탄성을 내뱉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갈마운이 물었다.
“무슨 소리지?”
“자정이 되면 울리는 종소리입니다. 이제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마스?”
카시언이 어깨를 돌려 반듯이 누웠다. 높은 천장에 진 그림자가 벽난로의 불길에 이지러졌다.
“카르시아는 다신교 국가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그중 한 신의 탄생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날은 제국의 대축제나 마찬가지라 전날인 전야제부터 시끌벅적하지요.”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네 탄생일이라고 했지.”
“……예. 오늘…입니다.”
이렇게 조용한 생일은 처음이었다. 가장 귀한 이로 태어났기에 매년 크리스마스엔 황궁에서 큰 연회를 열어 축하를 해 주었다. 작년에는 선황제의 승하로 엉망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외롭진 않았다.
얼마나 세월이 더 흘러야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카시언은 울적해졌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응? 뭐라고 했습니까?”
“나름대로 네가 생명의 은인인데 떠나기 전에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
“그래서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본좌를 따르기만 하면 되느니라.”
“갈마운 씨?”
갈마운이 벌떡 일어나더니 신을 신었다. 당황한 카시언이 상체를 일으켰다. 미처 침대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허리가 낚였다.
“엇!”
장신의 남자를 거뜬하게 옆구리에 낀 갈마운이 창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풀숲에 내려앉은 그는 그대로 신형을 튕기려다 날카로운 예기에 뒤로 몸을 물렸다.
사방에서 수십의 복면인이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검을 갈마운에게 겨눈 채 주위를 포위했다. 가장 앞에 있던 복면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분을 내려놓아라. 카시언 대공은 절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
“본좌가 왜 네 명을 들어야 하느냐?”
“말을 듣지 않겠다면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쳐라!”
복면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십 개의 검날이 짓쳐 들었다. 갈마운이 지면을 미끄러지듯 밟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대로 복면인의 아래로 파고들어 가슴에 마장(魔掌)을 날렸다.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상대의 가슴이 푹 함몰되었다. 안의 뼈는 가루가 되고 심장은 터져 나갔으리라.
딱히 검이 없어도 갈마운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창안한 신법인 천마귀영보(天魔貴永步)를 펼치며 적들을 하나하나 저승으로 보냈다. 마지막 복면인마저 피떡으로 만든 갈마운이 핏물에 절은 손을 털었다.
“시간만 지체했구나.”
사람 수십을 죽이고도 눈 하나 꼼짝하지 않는 그와 달리 내내 매달려 모든 과정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카시언은 연신 헛구역질을 해 댔다.
“그럼 진짜로 가 볼까.”
단전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 지칠 갈마운이 아니었다. 바로 천리비공보(千里飛空步)를 펼쳐 피비린내 나는 장소를 박차고 나갔다.
카시언은 빠르게 스치는 주위의 풍경에 혀를 내둘렀다. 무슨 수를 쓰는 건지 몰라도 자신이 치료한 이국의 남자는 마법사처럼 기이한 이능을 쓰고 있었다. 달리는 속도가 빨라 쏟아지는 눈조차 미처 쌓이기도 전에 흩어지기 바빴다.
第一章 크리스마스에 교주님이 내려왔어요 (2)
“……그렇군.”
갈마운이 몸 위에서 내려가자 카시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체를 일으킨 그를 보는 갈마운의 눈이 찌푸려졌다. 지금 보니 육 척(六戚, 약 180센티미터) 장신인 자신보다 거대한 남자였다. 항상 내려다보기만 했던 그로선 상대를 올려다보는 이 상황이 마뜩잖았다.
“음. 일단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습니다. 좀 전에도 옷을 갈아입히려다 당신의 공격을 받은 것이라…….”
“가져와.”
“하하. ……예.”
능숙한 명령조에 카시언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살면서 아버지 외에 처음으로 듣는 하대였다. 그를 가둔 이조차 말로는 존대를 표했기에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상대의 자연스러운 태도 때문일지도 몰랐다.
카시언은 옷장에서 셔츠와 바지를 꺼내 갈마운에게 건넸다. 갈마운은 생소한 의복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다시 내밀었다.
“시중을 들어라.”
“…….”
무언의 압박에 카시언은 굴복했다. 피로 질척이는 의복을 벗기고 젖은 수건으로 상처를 피해 조심스레 몸을 닦았다. 그는 상처에 가려 보지 못했던 수많은 상흔을 발견했다. 탄탄한 근육 사이로 온갖 흉이 빼곡했다. 가만히 쳐다보던 그는 갈마운의 짜증 어린 타박에 서둘러 붕대를 감고 옷을 입혔다.
옷을 다 입은 갈마운을 본 카시언은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다급히 참았다. 신장 차이가 있다 보니 셔츠의 품이 넉넉해 손등까지 소매가 내려왔다. 그 모습이 꽤 귀엽게 보였다.
“무얼 그리 보고만 있는 것이냐.”
갈마운이 손을 휘둘러 침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 의자를 끌어왔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이었다. 앞에 놓인 의자를 본 카시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 마법사입니까?”
“마법사?”
“이 의자를 끌어온 힘 말입니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본좌가 일일이 이런 걸 네놈에게 설명해야 하나? 앉기나 해라.”
궁금한 게 많았지만 카시언은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침대에 앉은 갈마운과 의자에 앉은 카시언은 마주 본 상태에서 긴 시간 대치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상대의 외향이 눈에 들어왔다.
카시언의 입에서 기묘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눈앞의 남자는 제국에선 흔치 않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사막인과 비슷한 황갈색 피부에 눈썹은 검은 물감처럼 진했고 길게 찢어진 눈은 서늘한 기색을 풍겼다. 나이는 짐작하기 힘들었지만 약간의 잔주름과 노회한 눈에서 남자의 세월이 엿보였다.
상대가 신기한 건 갈마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색목인은 많이 보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마치 잘 빚은 도자기 인형처럼 기묘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꿀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새하얀 피부, 선홍빛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얼굴에 진 기묘한 그늘 때문에 생기 있어 보이진 않았다.
“제 이름은 카시언 드 사르시아입니다.”
“본좌는 갈마운이다.”
“…….”
“…….”
“……그게 끝입니까?”
“……그게 끝인 것이냐?”
한쪽은 사르시아의 대공이고 한쪽은 천마신교의 교주였다. 카시언과 갈마운은 자신의 신분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는 상대에게 당혹을 금치 못했다. 카시언은 다시 한번 자신을 소개했다.
“대 사르시아 제국의 대공입니다.”
“대공? 그건 무슨 직책이지?”
“……귀족입니다.”
“귀족? 관리란 말이군.”
“관리가 아닌…… 아, 아닙니다.”
카시언은 좀 더 부연 설명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반응을 보건대 자세히 설명해 줘도 귀담아들을 것 같지 않았다.
카시언과 다르게 갈마운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오만한 그로서는 상대방에게 재차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이곳이 어디…….”
갈마운의 말을 가르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익숙한 목소리에 카시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다급하게 갈마운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어서. 어서 누우십시오.”
“뭐? 이 무슨 무엄한…….”
“제발 부탁드립니다.”
카시언의 절박한 어조에 갈퀴처럼 굽은 갈마운의 손가락이 스르르 풀렸다. 긴 속눈썹 아래 황금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일단 카시언이 생명의 은인인 건 확실하니 갈마운은 한번 져 준다는 심보로 얌전히 자리에 누웠다. 그가 눈까지 감은 후에야 카시언은 입을 열었다.
“들어와라.”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좀 전에 차를 가져다준 시종이었다. 시종은 이번에도 찻잔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색이 무척이나 붉었다.
“이게 무엇이냐.”
“이곳에 아픈 환자가 있다고 해서 타 왔습니다. 몸을 회복하는 약입니다.”
“그렇구나. 놓고 나가거라. 일어나면 먹일 테니.”
“송구합니다만 지금 먹어야 합니다. 시일이 지나면 약효가 떨어지는 약인지라…….”
“…….”
이젠 한숨 쉬기도 지치는 상황이었다. 시종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으면서도 명백하게 찻잔을 내밀고 있었다. 먹이지 않는다면 물러나지 않을 태세였다.
카시언은 어쩔 수 없이 갈마운의 어깨를 흔들었다. 눈을 뜬 갈마운이 상체를 일으켰다.
“기운을 북돋아 주는 약이라고 합니다. 좀 드십시오.”
카시언이 시종에게 찻잔을 받아 내밀었다. 무심한 낯으로 찻잔을 받은 갈마운이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시종은 갈마운을 유심히 살피다가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뒤로 돌았다. 그러나 머리에 얹힌 손 때문에 방을 나가지 못했다.
“……?”
“이상하구나. 몸을 보하는 약이라는데, 왜 본좌의 몸은 독극물이라고 판단했을까?”
“……그!”
“잘못을 빌 필요는 없다. 받은 대로 갚으면 되니 말이다.”
갈마운은 그대로 백회혈(百會穴)에 기공을 흘렸다. 독문 무공인 지법(指法) 암환지(暗煥指)였다. 그대로 절명한 시종의 입에서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나왔다. 시체가 된 몸을 바닥에 내팽개친 갈마운이 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절대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눈을 홉뜬 카시언에게 나직이 경고한 그는 운기에 들어갔다. 카시언은 갈마운과 시종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갔다. 시종의 코에 손가락을 대 봤지만 끊긴 숨이 돌아올 리 없었다. 미약한 숨이라도 있었다면 성력이라도 쓰겠는데 죽은 숨을 되살리는 건 아무리 카시언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곱게 죽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카시언은 시종의 충혈된 눈을 살며시 감겼다.
“아침이 되면 난리가 나겠구나.”
어쩌면 보고 싶지 않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올지도 몰랐다. 그가 미친 건 아닌지 확인할 테고 없는 핑계를 대서라서 더욱 집요한 이를 붙일 것이다. 카시언은 시신을 욕실로 옮겼다. 일단 아침까지만이라도 숨길 작정이었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갈마운의 몸에서 자색 빛이 돌더니 손가락 끝에서 검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치익, 하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흥. 쌍각사(雙角蛇)의 독보다는 못하군.”
“몸은 괜찮습니까?”
“별문제 없다.”
“…….”
“본좌를 죽이려고 한 자를 살려 둬야 할 이유가 있느냐?”
“아닙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늘진 얼굴 때문에 오해했나 싶어 카시언이 손사래 쳤다. 그래도 갈마운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나직이 한숨을 쉬곤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다시 마주 보게 된 상황에서 카시언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음.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서대륙의 사르시아 제국입니다.”
“사르시아?”
“예. 서대륙엔 세 개의 제국이 있고, 수십의 중소 왕국이 있습니다. 저는 제국 중 하나인 사르시아에서 대공의 위치에 있습니다. 대공은 쉽게 말하자면 황제의 형제를 이르는 말입니다.”
카시언의 말에 갈마운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유약해 보이는 남자가 황족이라니 믿기 힘들었다. 당연히 갈마운의 고향에도 황제가 있었고 친왕들이 있었다. 하지만 관(官)과 무림은 불가침 조약을 맺어서 딱히 가까이서 볼 기회는 없었다.
무엇보다 천마신교는 명을 건국한 주원장에게 버림받은 명교에서 갈라진 종파였다. 따로 신이 있는 명교와 달리 교주가 곧 신인 천마신교의 율법 때문에 이제 와 같은 취급을 하긴 힘들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황족이라는 말에 껄끄러움부터 들었다.
“황족?”
“예. 현 황제의 형이 됩니다.”
“동생이 황제라.”
갈마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난처한 미소를 보지 않더라도 상황이 짐작 갔다. 염연히 장자가 있는데 그 아우가 황제인 데다 사는 행색 또한 빈한했다. 딱 몰락한 황족의 몰골이었다.
그렇다고 카시언에게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이보다 못한 삶을 사는 자들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갈마운의 어린 시절 또한 그랬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갈마운은 무심하게 말을 돌렸다.
“명나라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명, 나라 말입니까?”
“그래. 명나라.”
“음……. 죄송하지만 그런 나라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바다 너머의 나라입니까?”
“바다?”
“예. 바다 건너에는 당신 같은 외모의 사람들이 산다고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얼핏 무시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아 갈마운이 되물었다.
“읽은 적이 있다?”
“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도서관이다 보니 여러 서적을 읽다가 스치듯이 본 것 같아서……. 그리고 이 나라는 내륙에서도 안쪽에 있어서 해상 교역이 활발하지 않아 바다 건너까지 배를 보내지 않습니다.”
“…….”
욕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교주가 된 후에 위엄 때문에 자제하긴 했지만, 본디 갈마운은 화가 나면 폭급한 인사였다. 그때만큼은 수하들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괜히 정파에서 광마제(狂魔帝)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카시언의 말을 종합하자면 갈마운은 전혀 모르는 곳에 홀로 떨어진 셈이었다. 어떻게 낭떠러지 아래에 이런 세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더 생각하기를 포기한 갈마운이 편하게 몸을 뉘었다. 옆으로 누워 머리를 괸 그가 반쯤 눈을 내리깔았다.
“일단 몸을 회복하고 나서 생각해야겠다.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니.”
“예. 큰 상처 같으니 푹 쉬십시오. 겨우 겉만 봉합했을 뿐이라 날이 밝으면 다시 치유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든지.”
봉사 받는 것에 익숙한 갈마운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런데 내게 한 치료가 대체 무엇이냐. 황족이라더니 의술까지 아는 것이냐?”
“음. 의술까진 아닙니다. 그저 신관이라 신성력을 쓴 것뿐입니다.”
“신관? 그게 뭐지?”
“신을 모시는 사람을 신관이라 합니다.”
“무자(巫子)쯤 되는가 보군. 이곳에선 무자가 사람까지 치료하나?”
카시언은 무자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행동으로 보였다. 갈마운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복부에 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미 효과를 보았던 갈마운은 경계하지 않았다.
하얀 손끝에서 빛이 흘러나와 배에 스며들었다. 잔여 독으로 따끔거리던 속이 편안해졌다. 갈마운이 호오, 하고 감탄했다.
“쓸모 있군.”
“하하……. 이 능력 때문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죠.”
갈마운이 내리깔았던 눈을 위로 치켜떴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카시언의 시선을 붙잡았다. 무저갱 같은 시선이었다. 당황하는 카시언을 향해 갈마운이 심드렁하게 명령했다.
“무료하구나. 쓰레기 같은 인생이겠지만, 네 이야기나 해봐라.”
“…….”
“대충 짐작 가니 자장가 부른다 생각하고 말해.”
강압적인 어조에 카시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제 일이라면 사르시아 제국민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영원의 황태자’란 불편한 동정을 받았다. 황제가 될 수 없는 황태자라니. 그만큼 조소 어린 호칭이 있을까.
하지만 눈앞의 갈마운은 동정이나 가여움 같은 헛된 감정을 가질 것 같진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황태자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카시언의 이야기는 제법 길었다.
카시언은 사르시아 제국의 황후 태생 일황자로서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되었다. 만약 아비인 황제가 돌연사하지 않았다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 카시언의 생일인 크리스마스에 황제가 갑자기 승하했고 야욕이 컸던 후궁 태생 둘째 동생에게 권좌를 빼앗겼다. 그 과정이 순식간에 이뤄져 동생이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
권력에서 밀린 황족의 말로야 뻔했다. 더군다나 황제보다 더 정통성을 지닌 전 황태자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다행히도 카시언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력이 있었고 신관이 되어 속세의 연을 끊겠다는 맹세를 하고서야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패륜 황제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동생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루한 이야기군.”
“하하. 그렇습니까.”
“내가 황제였다면 절대 널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후환은 애초에 제거하는 게 가장 현명한 법이니까. 네가 후일 자식이라도 낳아 봐라. 그것만큼 분란을 일으키는 일도 없지 않겠느냐.”
냉혹한 갈마운의 말에 카시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하게 눈을 휘며 웃는 그의 모습에 갈마운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좋다고 웃는 것이냐? 제 지위도 지키지 못한 패잔병이 속까지 없으면 병신이나 다름없지.”
“하하. 황제가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래서 저에게 꾸준히 약을 쓰고 있지요.”
“약?”
“음…… 후계를 생산하지 못하는 약입니다.”
“…….”
갈마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카시언의 하체로 향했다. 노골적인 시선에 카시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하체를 가렸다.
“그, 그냥 씨만 말리는 겁니다. 기능에는 이상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했느냐?”
당신이 노골적으로 쳐다보지 않았느냐, 같은 말은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카시언은 손 부채질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발갛게 익은 그의 볼을 힐끗 본 갈마운이 무심히 눈을 돌렸다.
“계집애 같은 놈.”
“흠. 흠흠!”
헛기침을 한 카시언이 이제는 벌렁 드러누운 갈마운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혹, 머무를 곳이 없다면 당분간 여기에 있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이곳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없다. 알고자 한다면 알게 되는 법. 본좌는 날이 밝으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 돌아갈 방법 같은 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갈마운의 미련 없는 태도에 카시언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일 년 가까이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한 그에게 갈마운은 오랜만에 만난 외부인이자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사람이었다.
크리스마스인 내일만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카시언은 침묵함으로써 갈마운의 뜻을 존중했다. 그는 한차례 고개를 흔들고는 시트를 들어 갈마운의 목까지 덮었다.
“날이 춥습니다. 당신은 환자이니 몸을 따뜻하게 하고 자는 게 좋아요.”
“……너는 어디에서 자지?”
타인에게 관심 없는 갈마운으로서는 뜻밖의 발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갈마운은 자신보다 커다란 신장을 가진 상대에게 완전히 관심을 끊지 못했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카시언은 기묘할 정도의 애처로운 분위기를 풍겼고 겉모습마저 아름다워 사람의 시선을 끄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난잡하게 놀던 갈마운마저 동할 만큼 구미가 당기는 외모였단 말이다.
“특별히 본좌의 옆에서 자는 영광을 주겠다. 올라와.”
“그 침대는 원래 제 것…….”
“바닥에서 자고 싶으냐?”
“감사합니다.”
아무리 카시언이라도 바닥에서 자고 싶진 않았다. 이 추운 날에 바닥에서 잤다간 다음 날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갈마운이 걱정되어서 다른 방으로 갈 수도 없었다. 힐끗 눈치 보며 침대 끝에 누운 카시언은 갈마운의 손에 의해 벽 쪽으로 옮겨졌다. 또다시 몸이 가볍게 들리자 카시언은 제가 일 년 사이에 깃털처럼 가벼워졌나 하는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뎅- 뎅- 뎅-
멀리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아.”
카시언이 의미 모를 탄성을 내뱉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갈마운이 물었다.
“무슨 소리지?”
“자정이 되면 울리는 종소리입니다. 이제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마스?”
카시언이 어깨를 돌려 반듯이 누웠다. 높은 천장에 진 그림자가 벽난로의 불길에 이지러졌다.
“카르시아는 다신교 국가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그중 한 신의 탄생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날은 제국의 대축제나 마찬가지라 전날인 전야제부터 시끌벅적하지요.”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네 탄생일이라고 했지.”
“……예. 오늘…입니다.”
이렇게 조용한 생일은 처음이었다. 가장 귀한 이로 태어났기에 매년 크리스마스엔 황궁에서 큰 연회를 열어 축하를 해 주었다. 작년에는 선황제의 승하로 엉망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외롭진 않았다.
얼마나 세월이 더 흘러야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카시언은 울적해졌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응? 뭐라고 했습니까?”
“나름대로 네가 생명의 은인인데 떠나기 전에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
“그래서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본좌를 따르기만 하면 되느니라.”
“갈마운 씨?”
갈마운이 벌떡 일어나더니 신을 신었다. 당황한 카시언이 상체를 일으켰다. 미처 침대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허리가 낚였다.
“엇!”
장신의 남자를 거뜬하게 옆구리에 낀 갈마운이 창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풀숲에 내려앉은 그는 그대로 신형을 튕기려다 날카로운 예기에 뒤로 몸을 물렸다.
사방에서 수십의 복면인이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검을 갈마운에게 겨눈 채 주위를 포위했다. 가장 앞에 있던 복면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분을 내려놓아라. 카시언 대공은 절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
“본좌가 왜 네 명을 들어야 하느냐?”
“말을 듣지 않겠다면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쳐라!”
복면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십 개의 검날이 짓쳐 들었다. 갈마운이 지면을 미끄러지듯 밟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대로 복면인의 아래로 파고들어 가슴에 마장(魔掌)을 날렸다.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상대의 가슴이 푹 함몰되었다. 안의 뼈는 가루가 되고 심장은 터져 나갔으리라.
딱히 검이 없어도 갈마운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창안한 신법인 천마귀영보(天魔貴永步)를 펼치며 적들을 하나하나 저승으로 보냈다. 마지막 복면인마저 피떡으로 만든 갈마운이 핏물에 절은 손을 털었다.
“시간만 지체했구나.”
사람 수십을 죽이고도 눈 하나 꼼짝하지 않는 그와 달리 내내 매달려 모든 과정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카시언은 연신 헛구역질을 해 댔다.
“그럼 진짜로 가 볼까.”
단전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 지칠 갈마운이 아니었다. 바로 천리비공보(千里飛空步)를 펼쳐 피비린내 나는 장소를 박차고 나갔다.
카시언은 빠르게 스치는 주위의 풍경에 혀를 내둘렀다. 무슨 수를 쓰는 건지 몰라도 자신이 치료한 이국의 남자는 마법사처럼 기이한 이능을 쓰고 있었다. 달리는 속도가 빨라 쏟아지는 눈조차 미처 쌓이기도 전에 흩어지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