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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 2화
<1> (2)
한율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마시는 걸로 듣는다?”
방법이 없었다. 권우의 탈퇴를 막을 수 있다면, 술에 취해서 헤롱헤롱 거리든 뭐든 신경 쓸 게 아니었다.
주방에 들어갔다 나온 권우는 호박색 코냑이 담긴 네모난 병과 손잡이가 짧고 둥근 잔 두 개, 그리고 얇게 자른 고깃덩어리를 가지고 나왔다. 한 손 가득 쥐어지는 잔에 술을 가득 따라 한율에게로 넘겼다. 한율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음료라도 타 마시고 싶어?”
“나 술 잘 못 마시는 거 알잖아.”
“내가 왜 알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기나 해.”
한율은 잔을 입술에 붙이고 꿀꺽꿀꺽 넘겼다. 단맛이 느껴진다고는 하나 술은 술이었다. 목구멍으로 겨우 넘기면서도 토기가 밀려왔다. 아,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술을 다 받아 마신 한율은 눈가의 주름이 접힐 정도로 세게 눈을 찡긋거렸다. 입 안이 텁텁했고, 목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권우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한율의 입에 고기를 넣어 줬다.
고작 한 잔뿐인데도 몸에 힘이 빠졌다. 한율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꾸벅꾸벅 고개를 움직였다. 피곤해. 그제야 누적된 피로가 몰려왔다.
일주일 전 앵콜 콘서트가 끝난 후로 쉬지 않고 일했다. 음악 작업과 동선 맞추기, 그리고 얼마 있으면 올 5기 팬클럽 창단식도 있었다. 정규 3집, 미니 앨범 열두 장, 리패키지 한 장. 지금까지 불렀던 음악만 수십 곡이었다. 그중에서 몇 곡을 간추리고, 또다시 동선을 짜고, 프로그램을 기획할 생각에 벌써 수명이 깎이는 기분이었다.
“차한율.”
“응.”
한율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잠잠해졌다. 원래도 호수처럼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술에 취하고 피로가 몰려온 그는 평소보다 더 낮은 텐션이었다.
“아직도 나 보면 키스하고 싶어?”
권우의 말에 한율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흐릿했던 시야에 초점이 잡혔다. 한율은 눈앞의 권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응.”
“섹스하고 싶고?”
“……응.”
알코올의 열기에 지나치게 익숙해졌다. 한율은 정신이 없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몰랐다. 본능이 이성보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최근 내 생각하면서 자위한 적 있냐?”
한율은 고개를 떨구고 양옆으로 저었다. 다시 권우에 의해 턱을 붙잡혔다.
“왜?”
“그 이후로…… 네가 나 싫어하잖아.”
“학습 능력은 좋네.”
권우의 얼굴이 천천히 한율에게 다가갔다. 옆으로 살짝 비낀 채 입술이 맞닿았다. 그뿐이었다. 한율은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고, 동공이 벌어졌다. 눈동자가 방황했다. 윗입술이 맞붙은 채로 권우가 말했다.
“좋아?”
한율이 고개를 저으려고 하자, 권우가 억지로 두 뺨을 틀어잡았다.
“말로 해. 좋아?”
“아니.”
“왜?”
“……부족해.”
“존나 밝힌다, 너. 내 이름 부르면서 딸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권우의 눈동자는 밝은 갈색이다. 햇빛을 받으면 회색빛을 띠기도 했다. 팬들은 그 눈을 보고,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눈이라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한율이 권우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도 그 눈 때문이었다. 권우의 눈동자는 감정을 숨겼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서러울 때도 눈동자의 빛은 항상 일정했다.
권우는 눈을 감았다. 한율의 아랫입술을 쭙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한율은 술에 취해 헤롱거리는 와중에도 머리로는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선을 넘으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거라고. 그러나 두 팔은 권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자신의 입술을 빠는 권우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위아래 치아를 파고든 혀가 권우의 혀와 뒤엉켰다.
선을 넘었다.
***
늦은 새벽이었다. 한율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몸 곳곳에 남은 권우의 흔적을 바라봤다. 키스를 한 다음엔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됐다. 소파 위에서 나체가 됐고, 침대로 가 몸을 뒹굴었다. 개처럼 몸을 맞붙인 채로 관계를 맺었다. 침대에는 미처 밀봉하지 못한 콘돔이 나뒹굴었다.
이 침대에 몇 명이나 왔었던 걸까.
권우는 관계 중, 자연스럽게 협탁에서 콘돔과 러브젤을 꺼냈다. 차가운 러브젤이 둔부에 닿았을 때 한율은 인상을 찌푸렸다.
“으으…….”
한율은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나체인 건 권우나 저나 마찬가지였다. 거실로 나온 한율은 현관 옆에 팬들이 보낸 선물이 가득 쌓여 있다는 걸 알았다. 영화가 개봉한 후, 팬들이 따로 보낸 선물이었다. 한율은 그 선물 꾸러미를 바라보다가, 벽에 걸린 권우의 사진을 봤다. 화보를 찍은 잡지사에서 고맙다고 보내 준 것이었다. 그것은 한율의 집에도 걸려 있었다.
한율은 거실에 있는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방에도 욕실은 있었으나, 씻는 소리에 권우가 잠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제야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한율은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었다. 테이블은 키스하기 전과 똑같았다. 미처 비우지 못한 잔 속의 액체들, 늘어진 채 나무 트레이에 놓인 고깃덩어리. 권우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에 취한 건 한율뿐이었다. 그런데 키스를 했다. 죄악감이 머리 위를 덮쳤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한율의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선후였다.
“여보세요.”
-집에 왜 안 와? 오늘 스케줄 딱히 없었잖아.
“잠깐 사무실 들렀어. 대표님이 할 말 있다고 하셔서.”
-거짓말 좀 치지 마. 나도 지금 막 사무실에서 오는 중이거든? 너랑 진권우랑 같이 나갔다며.
“……응.”
-뭐, 다른 건 안 물어볼게. 일단 지금 숙소 올 거야?
“응, 저녁 먹었어?”
-지금 새벽 3시야. 빨리 와. 매니저 형 불러 줘?
“아니야. 택시 타고 갈게.”
전화를 마치고, 한율은 몸을 일으켰다. 몸의 관절이 죄다 꺾인 기분이었다. 한율은 문이 닫힌 권우의 방을 응시했다가 이내 현관으로 향했다.
***
한율은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다섯 명이 함께 살 때보다 집은 한참 작아졌다. 선후도, 저도 굳이 큰 아파트를 선호하지 않았다. 30평 초반대 크기로 각자 방이 있었다. 한율은 익숙한 길을 걸어나갔다. 밤이 늦어 숙소 앞에는 진을 치고 기다리던 팬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선후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머리띠로 앞머리를 죄다 올린 채로 품에 커다란 과자통을 안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다 늦은 시간에 뭐 하는 거지.
텔레비전에는 화질도 좋지 않은 흑백 영화가 방영 중이었다. 한율은 그대로 방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다 선후가 앉아 있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늦었네?”
“응, 이야기 좀 하다가.”
“술 마셨어?”
“조금. 그런데 괜찮아.”
“다행.”
방영되는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는 인위적이었다. 나름대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인 만큼 이것저것 조정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선후는 영화보다는 과자 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과자를 정신없이 먹다가 손가락을 쪽쪽 빨고, 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율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아니다.”
“뭐야.”
“아니야. 진짜.”
금방 후회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진권우가 탈퇴한다고 했다고? 그래서 자고 왔다고?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왜. 진권우 그 새끼 또, 탈퇴한다고 난동 부리디?”
“…….”
“그럼 그렇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문제였다.
한율은 할 말이 없어 입술을 축였다. 권우가 처음 탈퇴한다고 말했던 건 작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율의 자위를 본 다음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율은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일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
그날은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다. 깊은 잠을 자다가 깬 한율은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그 당시 주기적으로 나갔던 스케줄은, 조연으로 발탁된 주말 드라마였다. 연기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B였다.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무난한 성적이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평균 시청률 11퍼센트를 유지한 채로 끝이 났다. 주말 드라마치고는 그저 그런 성적이었다.
[형 오늘 스케줄 없어서 좋겠다]
[나도 지금 촬영 중인데 진심 개춥]
[사진]
[사진]
다섯 시간 전에 권우에게 온 메시지였다. 스스로 찍은 사진까지 들어 있었다. 권우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진을 보던 한율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하아.’
이마에 팔을 올린 채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짝사랑만 4년째였다. 처음 봤던 그 날부터 반했으니까. 얼굴만 보고 성격은 별로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한율의 뒤를 따라다녔다. 다른 멤버들도 있는데 굳이 한율만 찾고,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귓속말했다. 방송일 때만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더 문제였다.
키도 쑥 큰 데다 최근에는 운동까지 시작해 어깨도 탄탄해지고, 가슴까지 딱 벌어졌다. 건장한 성인 남자가 되었다.
권우의 몸을 상상하던 한율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려 성기를 문질렀다. 같은 그룹의 멤버, 자신을 의지하는 동생을 대상으로 자위를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늘 마음 한곳이 불편했다. 그러나 마음이 원하면 몸이 동하는 건 당연한 일. 죄악감을 꿰뚫은 본능에 한율은 바지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차피 멤버들도 모두 스케줄에 트레이닝을 갔으니 아무도 없을 거라 믿었다.
한율은 무릎을 세우고 천장을 본 채로, 성기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달뜬 숨을 내쉬며, 행위에 열중했기에 문이 열리는 전자음을 듣지 못했다.
‘흐으……. 권, 우야. 앗, 권우, 읏.’
모든 게 실수였다. 평소라면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권우의 이름이 그날따라 목 너머로 튀어 올랐다. 권우와의 행위는 있을 수 없었다. 권우는 연습생 시절에도 만나던 여자가 있었고, 띄엄띄엄 누군가를 만나곤 했다. 이때가 아니면 권우를 앓는 목소리로 부를 일도 없었다.
한율은 행위를 마친 후, 엉망이 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열기가 맴돌던 자리는 후회뿐이었다. 멤버들이 아무도 없기에 망정이었다. 샤워라도 할 생각에 옷을 꾸려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권우와 마주했다.
권우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저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그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한율을 찔렀다. 한율은 정액이 잔뜩 묻은 손을 뒤로 감췄다. 권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한율에게 다가갔다.
‘뭐 했냐?’
‘……뭐가’
‘씨발, 누구 이름 불렀냐고.’
한율의 심장이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 혈관들이 세게 뛰며, 한율의 목을 조였다. 치아끼리 맞닿아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턱이 떨렸다. 눈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권우는 제 머리를 쓸어 넘기곤 한율을 몰아붙였다.
‘대답 안 하냐?’
‘……미안.’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더러운 새끼.’
권우의 말 한마디가 한율에겐 비수로 꽂혔다. 기분 나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집에서 얼굴 맞대는 달릴 거 똑같이 달린 새끼가 자위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오죽하겠는가.
권우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힘과 동시에, 전자음이 들렸다. 잠깐의 정적 후, 한율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
문득, 그날이 생각났다. 한율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손톱 옆 거스러미를 떼어 냈다. 어느덧 영화가 끝나고, 심지어 창문 너머로 동이 텄다. 선후도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매니저 형이 몇 시에 온다고 했더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네, 형.”
매니저인 성제였다. 한율의 캐스팅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했다. 지금은 팀장까지 올랐다. 코스원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그의 역할이 컸다. 밤낮없이 일했으니까. 최근에는 결혼까지 해 더더욱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권우네 집에 가 있었다며? 이야기는 잘해 봤어?
“하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애들끼리 모여서 다시 해 봐야 될 것 같은데.”
-그래, 선후는 일어났어? 상엽이가 얼추 도착했을 텐데.
“아, 전화해 볼게요.”
-응, 샵에서 보자.
전화를 끊은 후, 소파에서 몸을 뒤척이며 자는 선후를 깨웠다.
“일어나야 돼. 우리 스케줄.”
“아, 귀찮아. 안 가. 때려치워.”
“안 일어나?”
한율의 목소리에 선후가 벌떡 일어났다. 어렸을 적 공포 영화에서 본 강시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길래 졸지에 한율이 놀랐다. 깜짝이야, 말을 내뱉자 선후가 눈도 뜨지 못한 채 씨익 웃었다.
“유리.”
“왜.”
유리는 선후가 혼자 부르는 별명이었다. 팬들과 함께 부르기는 하지만, 멤버들 중 그를 유리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왜 율도 아니고, 유리냐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MC가 묻자 그는 만지면 깨질 것 같다느니 사람이 투명하다느니 이유를 가져다 붙이곤 했다. 그게 이유가 아니라는 건 모두 알고 있었다. 율, 선후는 발음하기 번거로워했다.
한율은 멤버들 중에서 혼자만 예명을 썼다. 한율이라는 이름의 발음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한율’은 쉽지만, ‘한율아’는 어려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예명을 쓴다는 데에 불만은 딱히 없었다.
대충 샤워만 한 채 밖으로 나왔다. 곧 6월임에도 새벽 공기는 제법 싸늘했다. 한율은 두 팔을 겨드랑이 밑에 끼고 몸을 달달 떨었다.
“옷도 안 챙기고 뭐 하냐.”
선후는 제가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의 지퍼를 내리고 품을 벌렸다.
“들어와. 형님이 허락해 준다.”
“됐어. 괜찮아.”
“뭐 해, 안 들어오냐?”
“아, 됐다니까.”
실랑이는 계속됐다. 안 들어간다는 한율과 허락한다는데 왜 안 들어오냐, 추워서 벌벌 떠는 것보다 낫다는 선후가 옥신각신했다.
그때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 건물 앞까지 들어왔다. 또 다른 매니저 상엽이 멤버들을 데리러 올 때 끌고 오는 차였다. 이 동네는 한율과 선후뿐이었다. 나머지 멤버들은 성제가 데리고 오곤 했다.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며 두 사람을 밝혔다. 차가 경적을 울릴 때까지도 기척을 못 느끼지 못했다. 한율은 결국 선후의 품 안에서 눈을 깜빡이다가 헛기침을 한 후, 차에 올랐다.
“상엽이, 안녕.”
“형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후와 상엽의 안부 인사에 잘 잤냐고 물어보려던 한율이 굳어 버렸다. 차에는 웬일로 권우가 타고 있었다. 자지도 않고,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새끼야, 인사도 안 하냐?”
선후가 권우의 팔뚝을 툭 치곤 옆에 앉았다. 한율도 권우를 슬쩍 본 다음, 뒷좌석에 올랐다. 권우는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새벽부터 힘 좋네.”
“무슨 뜻?”
“말이 그렇다고.”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후, 휴대폰을 만졌다. 선후가 뒤를 돌아 두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제 둘이 술 마셨다며.”
“누가 그래.”
“율이가 그러더만.”
“뭐, 그렇지.”
“그래서 결론은?”
“뭐가.”
“탈퇴하냐고 안 하냐고. 트위터 보니까 난리던데. 네가 인터뷰 좆같이 해서.”
“난 성의껏 했는데, 읽는 사람이 문제 있다고 느끼면 그건 읽는 사람 문제고.”
또 시작이다.
두 사람은 만나는 족족 기 싸움을 했다. 선후는 유독 권우에게만 날을 세웠다. 한율은 뒤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곤 눈치를 보다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가, 도로에는 차도 많이 없었다.
“탈퇴하냐고, 안 하냐고. 본론만 말해.”
“안 해. 됐어?”
“왜? 배우병 걸려서 난리 치더니.”
“본인이나 잘해. 가만히 있는 사람 속 긁지 말고.”
“너 때문에 한율이가…….”
“선후야.”
결국엔 한율까지 끼어들었다. 슬슬 시동을 걸어오던 선후가 한율을 바라봤다. 걱정하는 건 안다. 그러나 리더라는 자리는 원래 그랬다. 다른 멤버가 친 사고도, 모두 제가 수습해야 했다. 비난도 비판도 제 몫이었다. 한율에게는 익숙했다. 연습생 시절부터 그랬으니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몰려온 두통으로 한율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풀었다. 선후를 부른 이후에, 권우는 계속 한율을 응시하고 있었다.
“율이, 머리 아프냐?”
“괜찮아. 샵 가서 약 먹으면 돼. ……그리고 다행이네. 권우 탈퇴 안 한다는 건. 이렇게 쉽게 맘 바꿀 줄은 몰랐는데.”
“탈퇴했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말한다?”
빈정거리긴.
심기 꼬인 대화를 나누며, 어느덧 샵 앞에 도착했다. 다섯 명이 함께 타고 다니는 밴이 입구에 서 있었다.
“주차하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 계세요.”
상엽의 말에 문 쪽에 앉은 선후가 먼저 내렸다. 그다음으로 내려야 할 권우가 내리지 않자, 한율이 멀뚱히 보다가 먼저 엉덩이를 뗐다. 차에서 막 걸음을 뗄 무렵, 권우가 말을 걸어왔다.
“얘기 좀 해.”
“여기에서?”
“아니, 저쪽.”
샵 마당의 구석이었다. 어차피 샵에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권우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놓고 먼저 걸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한율도 그의 뒤를 따랐다.
<1> (2)
한율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마시는 걸로 듣는다?”
방법이 없었다. 권우의 탈퇴를 막을 수 있다면, 술에 취해서 헤롱헤롱 거리든 뭐든 신경 쓸 게 아니었다.
주방에 들어갔다 나온 권우는 호박색 코냑이 담긴 네모난 병과 손잡이가 짧고 둥근 잔 두 개, 그리고 얇게 자른 고깃덩어리를 가지고 나왔다. 한 손 가득 쥐어지는 잔에 술을 가득 따라 한율에게로 넘겼다. 한율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음료라도 타 마시고 싶어?”
“나 술 잘 못 마시는 거 알잖아.”
“내가 왜 알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기나 해.”
한율은 잔을 입술에 붙이고 꿀꺽꿀꺽 넘겼다. 단맛이 느껴진다고는 하나 술은 술이었다. 목구멍으로 겨우 넘기면서도 토기가 밀려왔다. 아,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술을 다 받아 마신 한율은 눈가의 주름이 접힐 정도로 세게 눈을 찡긋거렸다. 입 안이 텁텁했고, 목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권우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한율의 입에 고기를 넣어 줬다.
고작 한 잔뿐인데도 몸에 힘이 빠졌다. 한율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꾸벅꾸벅 고개를 움직였다. 피곤해. 그제야 누적된 피로가 몰려왔다.
일주일 전 앵콜 콘서트가 끝난 후로 쉬지 않고 일했다. 음악 작업과 동선 맞추기, 그리고 얼마 있으면 올 5기 팬클럽 창단식도 있었다. 정규 3집, 미니 앨범 열두 장, 리패키지 한 장. 지금까지 불렀던 음악만 수십 곡이었다. 그중에서 몇 곡을 간추리고, 또다시 동선을 짜고, 프로그램을 기획할 생각에 벌써 수명이 깎이는 기분이었다.
“차한율.”
“응.”
한율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잠잠해졌다. 원래도 호수처럼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술에 취하고 피로가 몰려온 그는 평소보다 더 낮은 텐션이었다.
“아직도 나 보면 키스하고 싶어?”
권우의 말에 한율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흐릿했던 시야에 초점이 잡혔다. 한율은 눈앞의 권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응.”
“섹스하고 싶고?”
“……응.”
알코올의 열기에 지나치게 익숙해졌다. 한율은 정신이 없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몰랐다. 본능이 이성보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최근 내 생각하면서 자위한 적 있냐?”
한율은 고개를 떨구고 양옆으로 저었다. 다시 권우에 의해 턱을 붙잡혔다.
“왜?”
“그 이후로…… 네가 나 싫어하잖아.”
“학습 능력은 좋네.”
권우의 얼굴이 천천히 한율에게 다가갔다. 옆으로 살짝 비낀 채 입술이 맞닿았다. 그뿐이었다. 한율은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고, 동공이 벌어졌다. 눈동자가 방황했다. 윗입술이 맞붙은 채로 권우가 말했다.
“좋아?”
한율이 고개를 저으려고 하자, 권우가 억지로 두 뺨을 틀어잡았다.
“말로 해. 좋아?”
“아니.”
“왜?”
“……부족해.”
“존나 밝힌다, 너. 내 이름 부르면서 딸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권우의 눈동자는 밝은 갈색이다. 햇빛을 받으면 회색빛을 띠기도 했다. 팬들은 그 눈을 보고,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눈이라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한율이 권우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도 그 눈 때문이었다. 권우의 눈동자는 감정을 숨겼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서러울 때도 눈동자의 빛은 항상 일정했다.
권우는 눈을 감았다. 한율의 아랫입술을 쭙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한율은 술에 취해 헤롱거리는 와중에도 머리로는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선을 넘으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거라고. 그러나 두 팔은 권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자신의 입술을 빠는 권우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위아래 치아를 파고든 혀가 권우의 혀와 뒤엉켰다.
선을 넘었다.
***
늦은 새벽이었다. 한율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몸 곳곳에 남은 권우의 흔적을 바라봤다. 키스를 한 다음엔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됐다. 소파 위에서 나체가 됐고, 침대로 가 몸을 뒹굴었다. 개처럼 몸을 맞붙인 채로 관계를 맺었다. 침대에는 미처 밀봉하지 못한 콘돔이 나뒹굴었다.
이 침대에 몇 명이나 왔었던 걸까.
권우는 관계 중, 자연스럽게 협탁에서 콘돔과 러브젤을 꺼냈다. 차가운 러브젤이 둔부에 닿았을 때 한율은 인상을 찌푸렸다.
“으으…….”
한율은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나체인 건 권우나 저나 마찬가지였다. 거실로 나온 한율은 현관 옆에 팬들이 보낸 선물이 가득 쌓여 있다는 걸 알았다. 영화가 개봉한 후, 팬들이 따로 보낸 선물이었다. 한율은 그 선물 꾸러미를 바라보다가, 벽에 걸린 권우의 사진을 봤다. 화보를 찍은 잡지사에서 고맙다고 보내 준 것이었다. 그것은 한율의 집에도 걸려 있었다.
한율은 거실에 있는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방에도 욕실은 있었으나, 씻는 소리에 권우가 잠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제야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한율은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었다. 테이블은 키스하기 전과 똑같았다. 미처 비우지 못한 잔 속의 액체들, 늘어진 채 나무 트레이에 놓인 고깃덩어리. 권우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에 취한 건 한율뿐이었다. 그런데 키스를 했다. 죄악감이 머리 위를 덮쳤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한율의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선후였다.
“여보세요.”
-집에 왜 안 와? 오늘 스케줄 딱히 없었잖아.
“잠깐 사무실 들렀어. 대표님이 할 말 있다고 하셔서.”
-거짓말 좀 치지 마. 나도 지금 막 사무실에서 오는 중이거든? 너랑 진권우랑 같이 나갔다며.
“……응.”
-뭐, 다른 건 안 물어볼게. 일단 지금 숙소 올 거야?
“응, 저녁 먹었어?”
-지금 새벽 3시야. 빨리 와. 매니저 형 불러 줘?
“아니야. 택시 타고 갈게.”
전화를 마치고, 한율은 몸을 일으켰다. 몸의 관절이 죄다 꺾인 기분이었다. 한율은 문이 닫힌 권우의 방을 응시했다가 이내 현관으로 향했다.
***
한율은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다섯 명이 함께 살 때보다 집은 한참 작아졌다. 선후도, 저도 굳이 큰 아파트를 선호하지 않았다. 30평 초반대 크기로 각자 방이 있었다. 한율은 익숙한 길을 걸어나갔다. 밤이 늦어 숙소 앞에는 진을 치고 기다리던 팬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선후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머리띠로 앞머리를 죄다 올린 채로 품에 커다란 과자통을 안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다 늦은 시간에 뭐 하는 거지.
텔레비전에는 화질도 좋지 않은 흑백 영화가 방영 중이었다. 한율은 그대로 방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다 선후가 앉아 있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늦었네?”
“응, 이야기 좀 하다가.”
“술 마셨어?”
“조금. 그런데 괜찮아.”
“다행.”
방영되는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는 인위적이었다. 나름대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인 만큼 이것저것 조정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선후는 영화보다는 과자 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과자를 정신없이 먹다가 손가락을 쪽쪽 빨고, 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율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아니다.”
“뭐야.”
“아니야. 진짜.”
금방 후회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진권우가 탈퇴한다고 했다고? 그래서 자고 왔다고?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왜. 진권우 그 새끼 또, 탈퇴한다고 난동 부리디?”
“…….”
“그럼 그렇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문제였다.
한율은 할 말이 없어 입술을 축였다. 권우가 처음 탈퇴한다고 말했던 건 작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율의 자위를 본 다음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율은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일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
그날은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다. 깊은 잠을 자다가 깬 한율은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그 당시 주기적으로 나갔던 스케줄은, 조연으로 발탁된 주말 드라마였다. 연기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B였다.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무난한 성적이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평균 시청률 11퍼센트를 유지한 채로 끝이 났다. 주말 드라마치고는 그저 그런 성적이었다.
[형 오늘 스케줄 없어서 좋겠다]
[나도 지금 촬영 중인데 진심 개춥]
[사진]
[사진]
다섯 시간 전에 권우에게 온 메시지였다. 스스로 찍은 사진까지 들어 있었다. 권우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진을 보던 한율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하아.’
이마에 팔을 올린 채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짝사랑만 4년째였다. 처음 봤던 그 날부터 반했으니까. 얼굴만 보고 성격은 별로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한율의 뒤를 따라다녔다. 다른 멤버들도 있는데 굳이 한율만 찾고,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귓속말했다. 방송일 때만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더 문제였다.
키도 쑥 큰 데다 최근에는 운동까지 시작해 어깨도 탄탄해지고, 가슴까지 딱 벌어졌다. 건장한 성인 남자가 되었다.
권우의 몸을 상상하던 한율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려 성기를 문질렀다. 같은 그룹의 멤버, 자신을 의지하는 동생을 대상으로 자위를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늘 마음 한곳이 불편했다. 그러나 마음이 원하면 몸이 동하는 건 당연한 일. 죄악감을 꿰뚫은 본능에 한율은 바지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차피 멤버들도 모두 스케줄에 트레이닝을 갔으니 아무도 없을 거라 믿었다.
한율은 무릎을 세우고 천장을 본 채로, 성기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달뜬 숨을 내쉬며, 행위에 열중했기에 문이 열리는 전자음을 듣지 못했다.
‘흐으……. 권, 우야. 앗, 권우, 읏.’
모든 게 실수였다. 평소라면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권우의 이름이 그날따라 목 너머로 튀어 올랐다. 권우와의 행위는 있을 수 없었다. 권우는 연습생 시절에도 만나던 여자가 있었고, 띄엄띄엄 누군가를 만나곤 했다. 이때가 아니면 권우를 앓는 목소리로 부를 일도 없었다.
한율은 행위를 마친 후, 엉망이 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열기가 맴돌던 자리는 후회뿐이었다. 멤버들이 아무도 없기에 망정이었다. 샤워라도 할 생각에 옷을 꾸려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권우와 마주했다.
권우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저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그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한율을 찔렀다. 한율은 정액이 잔뜩 묻은 손을 뒤로 감췄다. 권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한율에게 다가갔다.
‘뭐 했냐?’
‘……뭐가’
‘씨발, 누구 이름 불렀냐고.’
한율의 심장이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 혈관들이 세게 뛰며, 한율의 목을 조였다. 치아끼리 맞닿아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턱이 떨렸다. 눈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권우는 제 머리를 쓸어 넘기곤 한율을 몰아붙였다.
‘대답 안 하냐?’
‘……미안.’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더러운 새끼.’
권우의 말 한마디가 한율에겐 비수로 꽂혔다. 기분 나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집에서 얼굴 맞대는 달릴 거 똑같이 달린 새끼가 자위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오죽하겠는가.
권우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힘과 동시에, 전자음이 들렸다. 잠깐의 정적 후, 한율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
문득, 그날이 생각났다. 한율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손톱 옆 거스러미를 떼어 냈다. 어느덧 영화가 끝나고, 심지어 창문 너머로 동이 텄다. 선후도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매니저 형이 몇 시에 온다고 했더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네, 형.”
매니저인 성제였다. 한율의 캐스팅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했다. 지금은 팀장까지 올랐다. 코스원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그의 역할이 컸다. 밤낮없이 일했으니까. 최근에는 결혼까지 해 더더욱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권우네 집에 가 있었다며? 이야기는 잘해 봤어?
“하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애들끼리 모여서 다시 해 봐야 될 것 같은데.”
-그래, 선후는 일어났어? 상엽이가 얼추 도착했을 텐데.
“아, 전화해 볼게요.”
-응, 샵에서 보자.
전화를 끊은 후, 소파에서 몸을 뒤척이며 자는 선후를 깨웠다.
“일어나야 돼. 우리 스케줄.”
“아, 귀찮아. 안 가. 때려치워.”
“안 일어나?”
한율의 목소리에 선후가 벌떡 일어났다. 어렸을 적 공포 영화에서 본 강시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길래 졸지에 한율이 놀랐다. 깜짝이야, 말을 내뱉자 선후가 눈도 뜨지 못한 채 씨익 웃었다.
“유리.”
“왜.”
유리는 선후가 혼자 부르는 별명이었다. 팬들과 함께 부르기는 하지만, 멤버들 중 그를 유리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왜 율도 아니고, 유리냐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MC가 묻자 그는 만지면 깨질 것 같다느니 사람이 투명하다느니 이유를 가져다 붙이곤 했다. 그게 이유가 아니라는 건 모두 알고 있었다. 율, 선후는 발음하기 번거로워했다.
한율은 멤버들 중에서 혼자만 예명을 썼다. 한율이라는 이름의 발음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한율’은 쉽지만, ‘한율아’는 어려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예명을 쓴다는 데에 불만은 딱히 없었다.
대충 샤워만 한 채 밖으로 나왔다. 곧 6월임에도 새벽 공기는 제법 싸늘했다. 한율은 두 팔을 겨드랑이 밑에 끼고 몸을 달달 떨었다.
“옷도 안 챙기고 뭐 하냐.”
선후는 제가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의 지퍼를 내리고 품을 벌렸다.
“들어와. 형님이 허락해 준다.”
“됐어. 괜찮아.”
“뭐 해, 안 들어오냐?”
“아, 됐다니까.”
실랑이는 계속됐다. 안 들어간다는 한율과 허락한다는데 왜 안 들어오냐, 추워서 벌벌 떠는 것보다 낫다는 선후가 옥신각신했다.
그때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 건물 앞까지 들어왔다. 또 다른 매니저 상엽이 멤버들을 데리러 올 때 끌고 오는 차였다. 이 동네는 한율과 선후뿐이었다. 나머지 멤버들은 성제가 데리고 오곤 했다.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며 두 사람을 밝혔다. 차가 경적을 울릴 때까지도 기척을 못 느끼지 못했다. 한율은 결국 선후의 품 안에서 눈을 깜빡이다가 헛기침을 한 후, 차에 올랐다.
“상엽이, 안녕.”
“형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선후와 상엽의 안부 인사에 잘 잤냐고 물어보려던 한율이 굳어 버렸다. 차에는 웬일로 권우가 타고 있었다. 자지도 않고,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새끼야, 인사도 안 하냐?”
선후가 권우의 팔뚝을 툭 치곤 옆에 앉았다. 한율도 권우를 슬쩍 본 다음, 뒷좌석에 올랐다. 권우는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새벽부터 힘 좋네.”
“무슨 뜻?”
“말이 그렇다고.”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후, 휴대폰을 만졌다. 선후가 뒤를 돌아 두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제 둘이 술 마셨다며.”
“누가 그래.”
“율이가 그러더만.”
“뭐, 그렇지.”
“그래서 결론은?”
“뭐가.”
“탈퇴하냐고 안 하냐고. 트위터 보니까 난리던데. 네가 인터뷰 좆같이 해서.”
“난 성의껏 했는데, 읽는 사람이 문제 있다고 느끼면 그건 읽는 사람 문제고.”
또 시작이다.
두 사람은 만나는 족족 기 싸움을 했다. 선후는 유독 권우에게만 날을 세웠다. 한율은 뒤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곤 눈치를 보다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턱을 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가, 도로에는 차도 많이 없었다.
“탈퇴하냐고, 안 하냐고. 본론만 말해.”
“안 해. 됐어?”
“왜? 배우병 걸려서 난리 치더니.”
“본인이나 잘해. 가만히 있는 사람 속 긁지 말고.”
“너 때문에 한율이가…….”
“선후야.”
결국엔 한율까지 끼어들었다. 슬슬 시동을 걸어오던 선후가 한율을 바라봤다. 걱정하는 건 안다. 그러나 리더라는 자리는 원래 그랬다. 다른 멤버가 친 사고도, 모두 제가 수습해야 했다. 비난도 비판도 제 몫이었다. 한율에게는 익숙했다. 연습생 시절부터 그랬으니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몰려온 두통으로 한율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풀었다. 선후를 부른 이후에, 권우는 계속 한율을 응시하고 있었다.
“율이, 머리 아프냐?”
“괜찮아. 샵 가서 약 먹으면 돼. ……그리고 다행이네. 권우 탈퇴 안 한다는 건. 이렇게 쉽게 맘 바꿀 줄은 몰랐는데.”
“탈퇴했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말한다?”
빈정거리긴.
심기 꼬인 대화를 나누며, 어느덧 샵 앞에 도착했다. 다섯 명이 함께 타고 다니는 밴이 입구에 서 있었다.
“주차하고 갈게요. 먼저 들어가 계세요.”
상엽의 말에 문 쪽에 앉은 선후가 먼저 내렸다. 그다음으로 내려야 할 권우가 내리지 않자, 한율이 멀뚱히 보다가 먼저 엉덩이를 뗐다. 차에서 막 걸음을 뗄 무렵, 권우가 말을 걸어왔다.
“얘기 좀 해.”
“여기에서?”
“아니, 저쪽.”
샵 마당의 구석이었다. 어차피 샵에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권우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놓고 먼저 걸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한율도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