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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 7화

<2> (2)





권우는 한율의 패딩을 돌렸다. 분명 앞부분에 가 있어야 할 지퍼 부분이 등 뒤로 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돼.’

자신의 패딩 지퍼를 풀어서 한율의 것과 포갰다. 한율의 등으로 권우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두근두근. 아닌가? 내 거인가? 한율은 문득 자신의 떨림 때문인 것 같아 몸을 돌리려고 했다.

‘가만히 있어요. 저도 추워 죽겠으니까.’

권우는 한율의 어깨 위에 고개를 올렸다. 지나가던 선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 하는 거냐고, 둘이. 권우는 혀를 쯧쯧 차고는 말했다.

‘형은 콤비가 없어서 모르는 거야.’

‘너희가 무슨 콤비냐? 나랑 유리가 콤비고, 너는 현서잖아.’

‘아니거든? 저리 가. 우리 분위기 좋으니까.’

그때, 진행을 보던 아나운서가 말했다.

‘자, 여러분 이제 10초 카운트다운 후, 새해가 시작됩니다.’

10, 9, 8, 7, 6, 5, 4, 3, 2, 1.

하늘 위로 폭죽이 쏟아졌다. 커다란 종을 치는 소리와 팬들의 함성이 와-! 하고 크게 울렸다. 무대에서도 마찬가지로 짤깍짤깍 박수갈채가 터졌다. 아. 한율은 하늘을 보다가 옆을 흘깃거렸다.

‘형이 이번 해에 제일 처음 보게 되는 게 나네.’

한율의 어깨 위에 턱을 대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있던 권우가 천천히 꼿꼿하게 섰다. 한율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로맨틱한 순간을 마주할 수 없을 거라고, 한율은 밤새 뛰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비록 그날 무대를 마치고 권우가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



이른 오전, 한율은 대표에게 불려 갔다.

전날 새벽에는 일찍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후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권우는 키스가 전부였다. 집으로 데려가지도, 그 이상의 것도 없었다. 한율을 억지로 택시에 태워 숙소로 보내 버렸다. 동이 틀 무렵, 선후는 술에 떡이 되어 상엽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요즘 기자들이 코스원 집중하고 있는 거 알지?”

계약 만료 시기가 가까워진 만큼 더욱 그랬다. 주변 지인들을 찔러 다른 사무실과 계약을 하는지, 아니면 재계약을 하는지 물어봤다. 멤버끼리도 말을 아꼈다. 사적으로 친한 것과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다 맨 처음 탈퇴를 하니, 안 하니 떠든 게 권우였고, 나머지는 모두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말이 없는 이상 재계약을 하는 걸로 생각을 했다.

“선후랑 권우 그 자식들이 다른 회사 관계자 만난 게 사진으로 찍혔어.”

“네?”

선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선후라면 본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왜 갑자기……. 한율이 되묻자 대표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였다.

“아오. 권우야 뭐, 그렇다 쳐도. 그래, 선후 그 자식이 그래도 되냐? 투엠 관계자랑 만났대.”

배은망덕한 자식. 대표가 읊조렸다. 투엠은 꽤 큰 배우 소속사였다. 한율은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일단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 아무 말 없디?”

“네……. 그런 얘기까지는 안 해서.”

“너는 리더가 뭐 하는 거냐?”

불똥이 튀었다. 코스원에서 인기 1, 2순위에 해당하는 두 명이 다른 소속사 직원을 만났다는 건 회사 입장에서 꽤 곤란한 일이었다. 팀 존속에도 무리가 있고.

한율은 손을 앞으로 모았다. 손가락을 매만지며, 뒷말을 기다렸다.

“진권우 탈퇴한다고 할 때도 한마디도 못 해, 선후, 권우 다른 회사 알아본다고 하는 것도 몰라. 내가 그러라고 너 리더 시킨 줄 알아?! 제대로 된 돈줄도 안 되면 감정 노동이라도 해야 될 거 아니야!”

대표는 결국 언성을 높였다. 한율은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읊조렸다. 어휴. 한숨을 내쉰 그는 한율 쪽으로 서류 봉투를 던지듯이 내밀었다. 초록색 천 위에 통유리로 덮어 놓은 테이블 위로 툭 떨어진 봉투를 한율은 두 손으로 받아 열어 보았다.

A기업 홍보 대사 겸 광고 모델에 대한 계약서와 기획서였다. 웬만해선 회사를 통해 계약하는지라 이미 서명까지 모두 되어 있었다. 한율은 이게 뭔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대표는 그의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네 쪽으로 들어왔더라. 부분적인 광고는 아니고, 전체 광고야. 기업 브랜드. 우리 쪽에서 고르라고 하면 권우 찔러서 어떻게든 붙잡을 텐데, 일단 율이 네 쪽으로 들어왔어.”

“아.”

“대표 만난 적 있어?”

“네, 저번에…… 잡지 촬영 갔을 때요. 그때 몇몇 광고주분들 오셨거든요. 따로 불려 가서 뵌 적 있어요.”

“그 인간이 침대 시중이라도 들으라고 하디?”

한율의 표정이 굳었다. 손을 내저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하자, 대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뒤늦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런 의미는 아니다. 미안.’ 한율은 괜찮다고 했다. 괜찮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에게 따지기를 하겠는가, 왜 자신이 광고를 따 오면 그렇게 반응을 하냐라고 말은 못 하니까.

한율은 당장 다음 주에 촬영 일정이 잡혔다고 했다. 여기에서 이미지 못 따 오면 힘들다는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그런데…… 권우는…… 탈퇴 안 한다고 하던데요.”

“어, 그러더만. 둘 다 사진 저번 주 거였대. 권우는 재계약한다고 말했고, 선후는…… 모르겠다. 가서 이야기나 좀 해 보고, 불만 있으면 나한테 말해 줘. 불편하면 성제도 괜찮으니까.”

“네.”

한율은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대표에게 꽤나 예쁨받는 연습생 한 명이 그를 향해 인사했다. 한율도 살짝 목례를 한 후,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맞춰 탔다.

한율은 곧 있을 회의로 성제와 멤버들을 기다리며 호준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아, 네, 선배.

호준은 수화음이 두 번 가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한율은 막상 전화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고 보니 A기업 대표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명함 주고받는 건 당연한 건데, 너무 긴장해 그 사실까지 잊고 있었다.

“아, 호준아, ……그 오늘 계약서 확인했어.”

-회사 광고요?

“응. 그런데 대표님 전화번호를 몰라서 일단 너에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제가 따로 말할게요.

“내가 따로 연락드려야 되지 않을까?”

-아니에요. 그거 저랑 선배랑 친해졌다고 해서 된 거 아니에요. 원래 회사 이미지랑 잘 맞아서 후보에 있었어요. 겸사겸사예요.

1층 자동문이 열렸다. 한율은 문이 열린 쪽을 바라봤다. 권우가 모자를 눌러쓴 채 들어오고 있었다. 사무실 앞에서 진 치고 있던 팬에게 받은 팬레터를 바로 옆에 보이는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한율과 눈이 마주쳤다.

-저 선배.

“응?”

한율은 걸음을 옮겨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권우는 멈춰 서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저녁 식사 같이해요.

“아, 오늘 저녁?”

-네, 선배 바쁘시면 어쩔 수 없긴 한데, 그래도…….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잠깐 팬클럽 창단식 회의만 하고, 다른 건 없어.”

-아, 진짜요?

“응, 어디에서 볼래?”

호준은 자신이 차가 있으니 사무실 앞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반면 한율은 자동차가 없었다. 스무 살이 되면 대부분 따는 운전면허도 없었다.

우리 사무실 어딘지 알아? 한율의 물음에 호준은 왜 모르냐고, 기다릴 테니까 대충 끝나는 시간을 알려 달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후배랑 단둘이 밥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보통은 회식이나, 선배들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일이 많았다. 끌려가서도 얘가 코스원이야. 하며 인맥 자랑에 쓰였다. 자랑삼을 인맥도 아닌데 그랬다.

“약속 있냐?”

한율의 주변을 서성거리던 권우가 물었다. 한율은 어젯밤의 감각이 생생했다. 권우의 입술에서 느껴지던 인위적인 맛이.

‘일이라고 생각해.’

권우의 말이 떠올랐다. 맞아. 일이야. 기분이 나쁘더라도 최대한 억눌러야 해. 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올까 봐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안 돼. 오늘 우리 집 가.”

“뭐?”

“우리 집 가야 된다고, 너.”

“약속 있다고 했잖아, 지금.”

“다른 애 데리고 가?”

“…….”

“또, 사진 찍히고 그런 관계 아니다. 친한 사이일 뿐이다. 구구절절 떠들어야 마음이 좀 편하겠어?”

“지금 협박하는 거야?”

“그래.”

권우는 덤덤히 말했다. 웬만해선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 한율까지 입술을 깨물었다. 권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대표님. 지금 도착했어요.’ 그는 통화하며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한율은 권우가 서 있던 자리를 응시하다가 이내 그의 뒤를 따랐다.



***



세미나실로 맨 처음 들어온 건 선후였다. 선후는 배를 부여잡으며 숙취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우는소리를 냈다. 한율은 선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혹시 투엠 관계자 만났어?”

“대표님이 바로 꼰지르디?”

“어. 그런 거는 말해야 될 거 아니야.”

“큰 의미 없어. 그냥 이야기나 하자고 해서 만난 거야. 솔직히 지금 회사만큼 잘 쳐주는 데가 어디 있다고.”

“…….”

“그리고 코스원 그만둘 생각도 없고. 내가 진권우냐?”

“내가 뭐.”

선후가 말을 내뱉던 찰나 권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아메리카노가 담긴 테이크아웃 잔이 들려 있었다. 선후는 권우를 보다가 쩝, 아쉬운 소리를 내곤 다시 한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신경 쓸 거 아니야. 내가 어제 대표님한테 말했어. 그만둘 생각 없다고. 지금 당장 계약서에 도장 찍고 올게. 그렇게 불안하면.”

“불안한 거 아니야.”

“유리야,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8년이야. 그렇게 못 믿어?”

“못 믿는 거 아니라니까.”

“알지.”

권우는 테이블의 맨 끝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그 후에는 침묵의 시간이었다. 선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휴대폰을 만졌고, 권우는 팔짱을 낀 채로 한율을 응시했다. 한율은 할 일이 없어 손톱을 세워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오늘 끝나고 어떻게 할 거야.”

권우가 한율에게 말했다. 선후는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한 번씩 흘끔거렸다.

“별수 없잖아. ……너희 집 가야지.”

“무슨 약속인데.”

“…….”

“뭐야? 오늘 너희 또 만나?”

“무슨 약속이냐고.”

선후의 말을 무시하고 권우가 다시 물었다. ‘너, 누구 만나냐?’ 선후까지 시선을 돌렸다. 바로 어제 애인이 없다고 말했건만, 누굴 만나고 약속이 있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한율은 고개를 저었다.

“호준이 만나서 저녁 먹기로 했어.”

“밀레니어?”

“응.”

“걔 어제 보니까 술 존나 세더라. 꿋꿋하게 마셔도 아무렇지 않던데. 야, 그리고 걔 A기업 아들이라며? 어쩐지 그 옆에 붙어 있던 아재들이 쩔쩔매더라.”

“어, 어…….”

한율이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권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호준에게서는 그럼 내일 오후에는 시간 괜찮냐는 연락이 왔다. 얘는 바쁘지도 않은가. 활동기에 행사까지 뛰는 것 같던데.

한율은 시간을 정했다. 2시에 만나서 점심 먹자. 호준은 어울리지도 않게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안뇽.”

곧이어 현서와 자하도 들어왔다. 자하는 쓰던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현서는 말없이 가지고 온 책을 뒤적거렸다. 자하가 입을 열었다.

“형들 어제 대표님이랑 술 마셨다며.”

“어. 대표님 또 개 됐잖아. 말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 사회면 갈 뻔.”

“나도 보고 싶다. 대표님이랑 술 마시는 거 너무 웃겨.”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자하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동했다. 풀어놓은 고삐는 웬만하면 멤버들과 회사 사람 안쪽이었다. 열다섯 살에 데뷔했기 때문에 그의 주변 사람이라 하면 모두 회사 관계자들이었다. 공식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지 얼마 안 돼 그는 모든 것에 흥미롭고 재밌어했다. 덕분에 다른 멤버들만 죽어났다.

“둘이 마셔라, 다음에.”

“으, 그건 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등장했다. 대표가 들어왔다. 한율은 방금 전 그에게 한 소리 듣고 왔기 때문에 눈치를 봤다. 대표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함께 들어온 기획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가지고 온 자료를 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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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h 팬클럽 창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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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나 날짜, 장소 같은 건 이미 정해져 있고.”

“그냥 데뷔곡이랑 타이틀곡 몇 개 부르고, 팬송 하나 부르면 되는 거 아니에요?”

“노래는 그렇게 해. 게임 같은 건…….”

“그냥 포스트잇 같은 거 떼서 팬들 질문 들어 주기 해요. 아니면 회사에 원하는 거?”

“아서라. 쌍욕 나올까 봐 무섭다.”

“그걸 아는 분이 그러시네.”

“권우, 말해 봐. 뭐 하는 게 좋겠냐?”

한율과 권우의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흩어졌다. 권우는 별생각 없다는 듯 앞에 놓인 펜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대표의 심기를 건드렸다.

“너희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았다. 너무 나태해졌다. 데뷔 초의 열정이 사라졌다. 그거 팬들은 모르는 척하지만 뒤에서 다 말 나온다. 너희만큼 성공하고 싶어서 애들이 발버둥을 친다. 어쩌구저쩌구……. 막상 권우에게는 말 못 하니, 멤버 전체를 두리뭉실 묶어서 말했다.

한율은 앞에 놓은 종이의 글자를 하나하나 읽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프로그램은 나오지 않았다. 거기에서 거기였다. 차라리 팬들 심기 건드릴 바에야 남들 다 하는 패턴으로 하는 게 좋았다.

한율은 멤버들 중에서 유독 팬의 눈치를 많이 봤다. 코어 팬이 가장 적었기에 떠나는 게 두려웠다. 아이돌에서 배우 노선을 탔던 선배 중 한 명도 그에게 항상 보이던 팬이 사라졌을 때의 공허함이 제일 두려웠다고 말했다. 한율은 이도 저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부담감이 컸다.

“그럼…… 뭐, 일단은 그렇게 하고.”

“네.”

“너희 미리 말하는데, 만약 다른 회사랑 컨택 있으면 무조건 나에게 먼저 와서 말해야 된다. 부담스러우면 율이에게 말해. 얘들아, 우리가 함께한 게 벌써 5년, 6년, 한율이랑 선후는 8년이다. 알겠니?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잘하자.”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을 돌아다니던 한율을 붙잡은 건 권우였다. 졸지에 팔뚝이 붙잡혀 몸을 돌리게 된 한율은 눈을 깜빡이며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집에 가야지.”

“어, 어…… 잠깐만.”

한율은 목소리를 낮추고, 앞에 앉아 있던 기획팀 직원에게 말했다.

“팀장님, 저 그럼 다음 주 촬영 누구랑 가요?”

“글쎄. 일단은…… 성제가 낫겠지. 걔가 그래도 싸바싸바는 좀 하거든.”

“네, 제가 형한테 말할까요?”

“아니야. 오후에 회의 있으니까, 그때 내가 말할게.”

“네, 감사합니다.”

다음 주 A기업 광고 촬영에 대한 문제였다. 단체 CF는 꽤 찍었지만, 개인 광고는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큰 대기업의 광고인 만큼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화를 마친 한율은 권우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는 웬일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가지고 왔어?”

“어.”

“어제 술 마셨잖아.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어제 술 마신 건 이미 끝났고, 잠은 다섯 시간 잤어. 잔소리 좀 작작해.”

괜한 걱정이었다. 권우는 손을 뻗어 리모컨 키를 눌렀다. 삐빅- 기계음과 함께 자동차가 반응했다. 랜드로버에서 나온 SUV 차량이었다. 권우는 생긴 것과 달리 차체가 큰 자동차를 선호했다. 산 한복판에 내려도 끄떡없을 법한 두툼한 타이어와 높은 검정 차체는 작은 방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한율은 권우의 자동차를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작년 11월에 구입했는데 권우가 자동차를 바꾸자 팬들은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거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권우야 항상 만나던 사람이 있었지만, 요 근래에는 주기적으로 만나는 것 같진 않았다. 여자 생겼냐고 묻는 선후에게 사고 싶어서 산 건데 뭐가 문제냐고 대꾸했다. 정말 개인의 선호에 의해 바꾼 자동차 같았다.

“저녁 안 먹었지.”

“응, 안 먹어도 돼.”

“또 나중에 쓰러져서 병원 실려 가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해.”

한율은 데뷔 초반에 자주 병원 신세를 졌다. 원체 마른 체구라 딱히 다이어트를 한 것도 아니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입맛이 없었고,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걸핏하면 픽픽 쓰러지곤 했다. 그때 항상 한율을 업고, 매니저에게 가던 것도 권우였다.

한율은 문득 생각하다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과거를 생각하다 보면 권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필연적인 짝사랑이었다. 첫 만남에서 한눈에 반한 건 그 밑받침이 됐을 뿐이었다. 설사 그 자리에서 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율은 언젠가 권우를 사랑하게 될 운명이었다.

“그럼…… 피자.”

“피자?”

“응.”

한율은 피자를 좋아했다. 노릇노릇한 치즈와 느끼함을 잡아 주는 토마토소스, 어떤 토핑을 올려도 다 맛있었다.

데뷔하기 전에는 잘 먹지 못했다. 다섯 명의 가족은 피자 한 판으로는 부족했다. 늘 두 마리가 싼 가격에 배달 오는 치킨집에서 시켜 먹곤 했다.

연습생 때는 가끔 밤늦은 시간까지 연습하다 보면 지금의 매니저인 성제가 시켜 주곤 했다. 그때는 선후, 현서와 잘도 먹었다. 선후와 현서는 더 이상 즐기는 것 같진 않았다. 밖에 나가면 더 비싸고 고급스러운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있었다. 콘서트 직전이나 바쁜 스케줄, 혹은 몸이 지쳐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을 때나 시켜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다.

“집 가서 시켜.”

무뚝뚝한 그 목소리에 한율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렸다. 집 가서 시키라는 건 자신의 말을 들어준 것 같았다.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마음은 정말 제멋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