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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1권(14화)
4장. 의문의 습격(3)
레스터는 눈앞이 번쩍하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머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자신을 누르고 있었다.
“아야야…….”
눈을 떠 보니 새하얀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허벅지 안쪽으로 눈이 돌아간 것은 지극히 본능적인 행위.
“으허엉?”
레스터의 얼굴이 폭발할 듯이 달아올랐다.
“피, 피, 피, 피, 피아. 너, 뭐, 뭐 하는 거야, 지금!”
“우우, 좋아서 여기 있는 거 아니거든요?”
치마가 훌렁 뒤집어진 채 레스터를 깔고 앉아 있던 피아는 머리를 부딪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레스터는 가까스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마부석으로 연결된 창을 열었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 우선이다. 레스터는 한숨을 내쉬며 마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갑자기 급정거를…….”
“길이 막혔는뎁쇼. 아무래도 이쪽으로는 못 갈 것 같습니다.”
“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란 레스터는 황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곳에는 가도를 막고 있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몇 그루가 사이좋게 드러누워 있었는데, 언뜻 보아도 사람의 힘으로 치우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히히힝.
뒤에서는 마부가 흥분하고 있는 말을 진정시키고 있었고, 레스터는 골치 아픈 듯이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오라버니, 어떻게 안 돼?”
율리아가 투덜거리며 레스터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차에서 내린 일행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며 길을 막고 있는 나무들을 쳐다보았다.
나뭇등걸을 만져 보던 카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절단면이 깨끗하군요. 누가 일부러 자른 것이 분명합니다.”
“네? 도대체 누가…….”
레스터가 의아해하는 순간, 카일이 율리아와 피아의 머리를 누르며 외쳤다.
“다들 엎드려요!”
파앙, 하고 레스터의 머리 옆을 스쳐 가는 무언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마차에 화살이 박힌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율리아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야야, 내 블라우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조심하십시오. 또 옵니다.”
“젠장!”
레스터는 순간적으로 실드를 펼쳤다. 화살이 실드에 박히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표면에 파문이 일며 화살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레스터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크게 외쳤다.
“모두 이쪽으로!”
레스터는 황급히 실드를 넓게 펼쳐 모두를 감싸고는 주변을 스캔했다. 넓게 펼쳐진 마력의 그물에 수십에 이르는 적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설마하니 제국의 문장을 달고 있는 마차를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나치게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둘이 아니야. 전원 긴장하고 대기해.”
잠시 후, 적들이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름기가 뚝뚝 흘러내리는 새카만 얼굴에, 동물 가죽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갑옷을 걸친 인영들이 검과 창, 도끼 등을 차고 있었다. 허술해 보이는 것치고는 무기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꽤나 이름 있는 산적패라는 뜻이었다.
얼핏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스무 명 이상. 보이지 않는 이들까지 더한다면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그중에서 곰의 가죽을 허리에 장식처럼 둘러맨 거구의 사내가 날카로운 칼을 뽑아 들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바로 이 패거리의 두목인 흑곰 우르속이었다.
압도적인 수의 차이를 의식해서인지, 그의 표정은 득의양양했다.
“마차와 여자만 넘기면 살려 주지. 그럴 텐가?”
히죽거리며 웃던 우르속의 눈이 율리아의 몸을 탐욕스럽게 훑었다. 그로서는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산구석에서 율리아와 같은 미소녀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였다.
레스터가 입을 열었다.
“이것 봐. 제국의 마차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흥, 그딴 거 알 게 뭐냐! 얘들아! 여자는 놔두고 사내 새끼들은 죽여! 머리를 따 오는 놈에게 여자들을 나 다음으로 맛볼 기회를 주마!”
―와아아아!
‘나 다음으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기에 산적들은 저마다 신나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음탕한 시선이 앞에 서 있던 율리아의 몸을 뱀처럼 훑고 지나갔다.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율리아의 몸매에 비해 유아 체형인 피아는 애초부터 산적들의 관심 밖이었다.
“이…… 이것들이.”
몸을 부르르 떨던 율리아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거기, 너! 쳐다보지 마! 너, 인마! 상상도 하지 마!”
“잠깐! 상상도 하지 말라는 건 무리다!”
율리아의 외침에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그제야 자신의 말에서 모순을 깨달은 율리아가 입술을 잘근 물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을 빼 들었다.
“그건 그렇네. 그럼 그냥 머리통을 날려 버리면 되겠지? 머리가 없으면 생각도 못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몸을 훌쩍 띄웠다. 단련된 하체에서 뿜어나오는 폭발적인 도약력이 그녀를 새처럼 허공으로 밀어 올렸다. 눈을 의심하고 싶을 정도의 가벼운 몸놀림. 모두가 감탄하는 와중에 레스터만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이 계집애야! 누가 나서랬어?”
“오라버니는 구경만 해!”
그녀는 그렇게 외치고는 여전히 상상의 나래를 열심히 펴고 있는 산적들의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
“어이쿠, 호박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오는구나! 그렇게 서둘지 않아도 오빠가 귀여워해 줄 텐데!”
“몸놀림만큼이나 허리 놀림도 좋은지 어디 한 번 볼까?”
“누가 호박 가슴이야!”
율리아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대사를 던지며 그들을 향해 검을 들이대었다. 이 시점에서 그녀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산적은 아무도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그것은 그 미모에 가려진 진실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얀 블라우스와 숏 스커트 차림에 검 하나만 들고 있는 무방비한 모습이라 해도 그녀는 기사였다. 그것도 수도 아카데미 내로 한정한다면 탑을 달리는 실력자. 흥분한 상태에서도 절도와 유려함을 갖춘 그녀의 검은 산속에서 여행객의 돈주머니를 터는 산적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었다.
“어엇!”
“우왓아아앗?”
카앙!
산적들의 당황한 듯한 외침과 함께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가 허공을 비산했다. 이만저만 방심한 것이 아닌 듯, 손에서 무기를 놓친 산적들이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비켜! 이 멍청한 놈들!”
무기를 잃은 산적들을 밀치고 다른 산적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계집이 생각보다 강하다. 그러나 그뿐, 이쪽은 숫자가 완전 많으니까 밀어붙이면 결국 이 여자는 내 밑에서 앙앙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듯 산적들의 눈은 완전히 욕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순식간에 적들의 숫자가 불어나자 율리아도 긴장한 듯 더욱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챙! 창! 콰당! 퍽! 콰장창!
그녀의 검 앞에 산적들이 엎어지고 뒹굴고를 반복하며 흉하게 나자빠졌다. 그 반면에 율리아는 완벽에 가까운 검술을 여유있게 구사하고 있었다. 백 년 이래 검술의 천재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 듯, 겨우 성년식을 마쳤음에도 그 실력은 여타의 기사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율리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스터는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이렇게 자랐구나 하는 대견함, 이제 내 품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하는 안타까움 등이 교차했다.
“히야앗!”
율리아의 기합 소리가 쩌렁했다. 어느새 그녀는 성인이 되었고, 자신의 품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아이로 있어 주었으면 했지만 그것이 못난 욕심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레스터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크게 외쳤다.
“야이, 계집애야! 속옷 보이잖아!!”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바보같이!”
율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한 손으로 스커트를 내리눌렀다. 그 틈을 노리고 손도끼 하나가 그녀의 옆구리를 찍어 왔다. 죽일 생각은 없는 듯, 그리 힘이 담겨 있지 않은 일격이었지만 맞으면 꼼짝없이 당한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체중이 가볍고 완력이 약한 그녀로서는 한 손으로 롱 소드를 사용해야 하는 실드 파이팅을 익히기에는 부적합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가벼운 검을 택하고, 유연한 몸놀림과 날카로운 감각을 키워 나갔다. 실제로 ‘청경’이라 불리는 그녀의 초감각은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뒤에서 날아오는 검도 피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흥!”
율리아는 부드럽게 허리를 틀며 공격을 흘리고 그 기세를 살려 살짝 몸을 띄우며 오른발로 도끼를 쥔 손을 후려 찼다.
힘이 크게 실리진 않았지만 관절을 겨냥한 정확한 타격!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산적이 무기를 놓치는 찰나, 회전력을 살린 검이 산적의 몸을 크게 베었다.
촤아악!
가죽 갑옷과 함께 산적의 살이 갈라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힘이 부족하지만 않았다면 단숨에 허리가 끊어졌을 일격.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산적의 빈 공간을 다른 이가 메우며 달려들었다.
“핫!”
그 순간, 짧은 기합성과 함께 율리아가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울리는 강한 진각에 달려들던 산적이 황급히 물러서자, 그곳으로 검을 찔러 넣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비명과 동시에 머리 위로 검이 스쳐 가자 율리아는 자세를 낮춘 그대로 왼발을 크게 회전하며 오른발의 뒤쪽으로 붙였다.
따당!
팽이처럼 회전하며 두 번의 공격을 튕겨 낸 그녀는 이어 백스텝을 밟으며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정통파 제국 검술이 아닌, 아크로바틱 스타일과 함께 알려진 체술을 총동원한 그녀만의 오리지널 검술이었다. 그것이 어린 나이에 여자로서 천재라고까지 추앙받는 그녀의 진면목. 기술과 속도를 이용한 그녀의 검은 민첩하고, 유연하며, 시의적절했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레스터의 눈에는 그녀의 화려한 기술마저도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로 보이고 있었다.
“됐으니까 그만하고 빠져나와!”
레스터의 주위로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쳤다. 마법을 구축한 그의 주위로 대기 중의 마나가 이끌리고, 원소 계통 마법 중에서도 가장 자신있어 하는 화염계 술식이 팽팽하게 가속되어 구(球)의 형태로 맹렬하게 끓어올랐다.
대기는 불꽃으로 화하고, 불꽃은 적의를 일으키고, 적의는 만물을 불사지르노라!
레스터가 오른손을 크게 떨치자 대기가 불타오르는 소음과 함께 화염의 구체가 적진을 향해 발사되었다.
쑤와아아아!
콰앙!
“크아악!”
마법의 반동으로 뜨거운 열기가 확 퍼졌다. 그 일격에 율리아를 향해 달려들던 산적 몇이 단숨에 폭발에 휘말리며 나가떨어졌다.
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산적들.
보다 못한 몇몇이 그들의 몸에 붙은 불을 끄고자 달려들었다.
씨이잉!
그 순간, 서늘한 파공음이 날아들고,
“빙고.”
카일이 즐거운 듯 중얼거렸다.
픽.
동료를 구하려던 산적 하나가 카일의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움직이는 타깃을 상대로 화살을 정확히 쏘기란 매우 어려운 일. 게다가 숙련된 검사의 칼도 막아 내는 몇 겹의 무두질된 가죽 갑옷이다. 그마저도 뚫어 버리는 카일의 솜씨는 그야말로 달인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전장을 슥 훑어본 후에 다시 두 개의 화살을 집어 들었다. 군더더기없는 그 사수의 동작은 그가 끊임없이 수련을 거듭해 왔음을 알게 해 주었다.
“잔챙이들은 잡아 봐야 소용이 없을 테고…….”
화살 하나는 입에 물고, 하나는 시위에 걸어 천천히 당겼다. 실패할 일은 없지만, 만에 하나를 위한 방편이다. 율리아가 전면에서 활약해 준 덕에 여유가 생겼다 해도 압도적으로 수가 많다는 것을 적들이 제대로 인식하는 순간, 소수로 어설프게 짜여진 이런 진형은 단숨에 무너지게 된다.
‘고래로부터 말하기를…….’
활시위가 후방으로 향했다. 곰 가죽을 허리에 두른 흑곰 우르속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두목이리라.
끼기익.
합성궁의 활대가 신음 소리를 내며 엄청난 장력이 화살에 걸리고, 화살을 입에 문 채 카일은 조용히 읊조렸다.
“개를 잡으려면 머리를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