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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1권(17화)
4장. 의문의 습격(6)


분명히 가슴을 관통한 화살은 사라져 있었고, 상처만이 목숨을 앗아 갈 뻔한 그 순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지금은 그 상처도 아물어 커다란 흉터가 되어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치료하려면 방법은 신성력이나 그에 준하는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어느새 치료를 모두 마친 피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우르속은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피는 멎었으니 생명엔 지장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당분간은 절대로 싸우면 안 돼요.”
그녀의 말투는 연달아 신성력을 사용한 후유증으로 인해 힘이 없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기품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우르속과 같이 밑바닥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생리적인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봐,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네가 날 구해 주기라도 했다는 거야?”
우르속의 말에 피아가 무언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긍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우르속은 그제야 피아가 입은 옷차람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얀색의 짧은 로브 밑으로 또 하얀색 린넨 스커트 차림이다. 얼핏 보면 그냥 단순한 순례자들의 복장이지만, 이런 옷을 입는 곳이 또 한 군데 있다. 군대에 소속된 전쟁 사제들이다.
“설령 네가 날 구해 주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네가 누구라도 내게 명령할 권리는 없다!”
우르속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외쳤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도 적에게 구함을 받았다는 게, 그것이 조그만 여자아이라는 데 자존심이 상했다.
피아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뜻이 아니구요. 그게…… 보는 것과 달리 신성력은 만능이 아니라서,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활성화시켜 빠르게 회복시키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막 끊어진 근육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싸움을 한다면 근육조직과 뼈가 뒤틀린 채로 이렇게 붙어 버릴 텐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피아는 손가락을 엇갈리게 맞대며 살짝 미소지었다. 자기 딴에는 친절하게 설명하자고 한 얘기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한 협박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평생 동안 후유증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다. 우르속의 경우는 심장 주변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다. 심장이 멎으면 그냥 죽는다는 건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흥, 협박인가?”
“아니, 부탁이에요. 싸우지 말아요. 아저씨들 죽는 거 별로 보고 싶지 않아요.”
“……웃기는 계집이군. 같잖은 동정심이라면 그쯤에서 접어 두는 게 어떤가? 이래 봬도 난 너희들을 죽이려 한 사람인데 말이지.”
비록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일만 잘 풀렸다면 지금 쓰러져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이 사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살려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값싼 동정에 눈물이라도 흘리길 바라는 것인가.
지끈.
순간, 가슴의 상처에서 묵직한 고통이 느껴졌다. 한차례 몸을 뒤흔드는 고통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자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제야 그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절반 정도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중 태반은 전투 불능이고, 그나마 다행인 건 죽은 사람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중상이라 해도 붕대를 칭칭 감고서 숨을 쉬고 있었다. 이 여사제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일은 실패…… 인가?’
마법사와 괴물 같은 계집. 그리고 자신에게 화살을 날린 푸른 머리의 사내까지, 저쪽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상태였다.
십만 마르크라는 큰 금액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런 건 사소한 문제였다. 당장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변방의 산적 따위가 번영하는 제국의 마차를 건드렸으니, 제 명에 죽지 못할거라는 것은 당연한 추측. 아마도 이 이야기가 제국 정부에 흘러 들어간다면 근처의 모든 산적이란 산적은 씨가 마를 것이다.
우르속은 십 년간 산적질을 해 온 사나이였다. 그동안 죽을 고비는 숱하게 넘겨왔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지금 이 순간,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도가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우르속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레스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물러날 테니 없던 일로 해 주시오.”
무리해서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돈이야 죽으면 필요없는 것이니까.
레스터 입장에서도 더 이상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적이라면 가차없이 베겠지만, 이미 꼬리를 내린 개를 죽이는 것은 레스터 입장에서도 뒷맛이 좋지 않았다.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이쯤에서 물러서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좀 염치가 없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냐?”
빈정거리는 카일의 말에 우르속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래라는 것은 상호간에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성립되지요. 그쪽에서 목숨을 원한다면 그만큼의 무언가를 내어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카일은 빈정거리는 태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레스터가 보기에 그것은 반쯤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아마도 본래의 성격일 것이다.
“무엇을 원하지? 보다시피 우리는 산적이다. 줄 만한 것이라고는 이 몸뚱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남색을 원하나?”
“그런 농담할 여력이 있으면 이 질문에 답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 습격을 누가 사주했습니까?”
“어떻게?”
우르속은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카일의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리 간단한 걸 모른다면, 어깨 위의 물건이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우르속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사내 앞에서는 거짓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르속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속을 지킨다면 말해 주겠다.”
“롬바드 가의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거짓이겠지. 우르속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거짓 같은 약속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흑곰 우르속의 산적단은 사설 용병대 일도 겸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마차 한 대의 습격을 의뢰받았다. 의뢰금은 십만 마르크, 상례대로 의뢰자의 신원은 묻지 않았지만, 그 모습으로 보아 한 가지 유추는 가능했다.
아마도 귀족, 혹은 그에 준하는 지위의 사람이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국가의 관리직에서 일하는 인물이다.
“굳이 감추려 들지도 않더군. 특유의 내려다보는 시선과 말투, 그리고 무엇보다 잰체하는 그 발걸음. 틀림없는 귀족이었지.”
우르속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비록 자신이 선택했다고는 하나 귀족들의 다툼에 연루되어 비참한 꼴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새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또 무언가 있지 않습니까?”
카일의 말에 우르속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무언가 주저하는 듯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늑대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지.”
“늑대라…… 확실합니까?”
“거짓이라면 이 자리에서 내 배를 가르지.”
카일은 우르속을 흘낏 쳐다보았다. 우르속은 더 이상 감추는 것이 없다는 듯 그를 마주 보았다.
카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목숨과 교환하기엔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실속없는 정보로군요. 제국에 늑대를 문장으로 쓰는 귀족이 얼마나 많은 줄 알고 있습니까? 제국 내부에서만 두 자리 수가 넘어갑니다.”
“어쩌란 말이냐. 난 본 것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카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스터를 바라보았다. 레스터 역시 별 이견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다시 볼일이 없으면 좋겠군. 산적질을 할 힘이 있으면 군대에 지원하도록 해. 가까운 치차에 가면 양식과 잠자리 정도는 제공해 줄 테니까.”
“군대라…… 어려운 요구를 하는군.”
“지금보단 나을 테지.”
레스터는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5장. 격랑의 물살(1)


“바람이 불면 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릅니다.
행여 데이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바리오 왕국의 재상, 훌리오 데 아르데인.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성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석회질이 다수 섞여 있는 석벽은 멀리서 볼 때 하얀 눈으로 쌓은 것 같아 한때 겨울의 성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백색의 성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 석벽 사이로 높은 탑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저것이 바로 마에스터 장 폴 드뤼에가 설계한 삼중 나선 첨탑입니다. 성벽을 따라 50미터 간격으로 늘어서 있고, 유사시엔 군사적인 기능도 가능하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심미적인 요소가 좀 더 많이 고려되어 있지요. 황제 폐하께서 출정에서 돌아오실 무렵, ‘나를 맞아 줄 성이 이토록 초라해서야 되겠느냐, 성을 따라 높고 웅장한 탑을 세우도록 하라’고 하신 데 착안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계부터 완공까지는 15년 정도 걸렸습니다.”
“예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외적의 침입 따윈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내륙 지역에, 그것도 오로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저런 걸 세운 다는 게 전 이해가 되지 않아요. 돈이 남아 도는 건가요?”
율리아가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레스터가 가볍게 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율리아, 문화란 한 국가의 국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해. 실제로도 제국은 돈이 많긴 하지. 그러나 그 돈으로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저렇게라도 해서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쥐어 주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한 국고 낭비 아닐까?”
“하지만 그 돈이면 굶어 죽어 가는 수만 명의 사람을 구할 수도 있잖아.”
“참 좋은 발상이긴 한데 말이지…….”
레스터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율리아는 아직 배울 것이 많았다.
세상이 그저 그런 선한 마음씨로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카일이 대신 말을 이었다.
“제국은 공식적으로 극빈 계층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의 은덕으로 제국민은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제국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난한 자를 위해 돈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율리아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지금의 제국이 역사 이래로 경험하기 힘든 호황기인 건 사실입니다. 덕분에 찌꺼기의 찌꺼기의 찌꺼기만을 받아먹고 산다 하더라도 일반 백성들은 살아 나갈 수 있죠. 그 정도 돈을 비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조금씩 상황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지난 삼십 년간 전쟁이 없던 해가 없었어. 제국이 제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재정이 무한정한 것은 아니야.”
다시 레스터가 말을 이었다. 전쟁에는 많은 돈이 든다. 구세대 전쟁에 따르는 보급의 문제뿐 아니라, 현대의 전쟁에는 타이탄이라는 돈 덩어리가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돈을 물 쓰듯이 사용하다 보니 바다가 말라 있었다…… 뭐, 이런 거야?”
율리아의 말에 대답한 것은 레스터였다.
“아직은 괜찮아. 하지만 전쟁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때는 모르지.”
덜컹!
성이 가까워지자 레스터 일행은 속도를 줄여 천천히 다가갔다. 영웅의 시신이 실린 마차가 온다는 소식에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성 밖에서부터 레스터 일행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아!”
피아가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럴 만도 했다. 수만의 사람들이 성 바깥에서부터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검정색의 수의를 입거나, 여의치 않은 경우 검은 띠를 손목에 두르고 있었다. 그 검은 인파들은 조용하지만 기이한 열기를 띠고서는 레스터 일행의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마차 안에서도 일순간 침묵이 맴돌았다. 창밖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오오, 영웅이시여…….”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하얀 백발의 노파. 그녀는 이번 전쟁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병사의 가족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하얀 국화를 마차를 향해 던졌다.
툭.
그것을 시작으로 하나씩하나씩, 마차를 향해 하얀 국화가 던져졌다. 성 위에서, 아래에서 하얀 꽃송이가 흩뿌려졌다. 장관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행은 조용히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새 마차가 가는 길은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서도 사람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검은 옷과 하얀 국화의 대비는 수도 전체가 흑백의 세계로 변한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수도 전체에 퍼져 있는 애도의 기운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서 있어 기이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자 기쁨이며, 열광이자 분노였다. 사람들은 영웅의 탄생을 기뻐하며, 또 그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 올바드 경의 죽음에 바쳐지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광경이었다.
레스터는 왠지 모르게 조용한 피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광경은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구경거리였다. 호기심이 많은 피아라면 틀림없이 좋아할 터. 그러나 지금쯤 한창 들떠 있어야 할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무거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