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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18화)
5장. 격랑의 물살(2)
“뭐 해?”
“저기, 아저씨…….”
피아의 시선은 하염없이 날아드는 하얀 꽃들을 향해 있었다.
“왜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하면서 또 다른 생명을 죽이는 걸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레스터는 피아의 말을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또 다른 생명을 죽이다니? 누가 또 죽었다는 거지?
그런 레스터를 대신해 카일이 입을 열었다.
“이런, 자애로운 사제님께서는 꽃의 죽음까지도 슬퍼하고 계시는 건가요?”
“같은 생명이잖아요. 제 눈에는 잔혹해 보이기만 해요.”
“하지만 사제님도 길을 걸을 때 발밑의 개미를 걱정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카일의 말에 피아는 당황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의도적인 게 아니니까…….”
“그럼 의도가 없으면 죽여도 괜찮은 건가요?”
“그, 그건 아니지만…….”
카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피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모든 생명을 아끼려는 마음은 훌륭하지만, 그건 신이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신을 따르려다간 분명히 견디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겠죠. 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기보다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걱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정 불편하시다면 눈을 감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모처럼의 볼거리를 놓치게 되는 건 후회할 만한 일이겠지요. 자, 다시 한 번 보시죠. 평생 두 번을 보기 힘들다는 ‘화이트 폴’입니다.”
카일의 말에 피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서 꽃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발그레한 볼에 떠오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일순간 카일마저도 넋을 잃을 정도였다.
“정말 아름답네요.”
“네. 사제님의 미소처럼요.”
“고개 내밀지 마.”
레스터가 피아의 뒷덜미를 잡고는 자리에 주저앉혔다.
“앗, 왜요? 이제부터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좀 즐기려고 하는데.”
“……신념 같은 걸 그렇게 막 바꿔도 되는 거냐?”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자는 게 제 신념이에요.”
“그럼 이것도 그 조그만 머리로 이해해 봐. 네가 지금 들떠 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좋을 게 있을까?”
“그렇게 들뜨진 않았어요.”
“너, 얼굴 빨개졌거든?”
“거짓말.”
피아는 혀를 내밀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레스터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닌 게 아니라 태어나서 이런 광경은 처음 보았다. 피아가 흥분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위령제 중에 들뜬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어쨌든 거대한 환영 인파로군요.”
카일이 천천히 입을 열자 레스터가 대답했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은 추측일 뿐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행사라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보는 건 힘들겠죠?”
“아마도.”
레스터도 역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인파는 수도의 전 시민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올바드 경이 설령 진짜 영웅이라 한들 화이트 폴이라니, 너무나도 과분한 처사였다. 까놓고 말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위령제를 흥행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누군가 이 행사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드 경이 영웅이 되길 원한 사람이 레스터 님뿐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카일의 말에 레스터는 깜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올바드 경의 영웅 만들기는 막스와 자신만의 비밀이었다. 그런데 카일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치차에서부터 퍼진 소문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제가 모른다면 말이 안 되지요.”
카일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창밖의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율리아와 피아가 듣지 못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쉽게 간파될 정도였나요…….”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레스터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알 사람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습격도…….”
“여느 귀족 중 하나겠지요. 그것에 큰 의미를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올바드 경을 영웅으로 만들어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사실이고, 그 사람에게 레스터 님의 존재가 아직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와 나의 이해관계는 일치하는 셈이로군요.”
“문제는 그게 언제 틀어질지 모른다는 점인데…… 아직까지는 정보가 너무 적군요. 추측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은 위령제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지요.”
레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수도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인파는 더욱더 몰려들었다. 위령제와 더불어 펼쳐지는 올바드 부자의 장례식 준비로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각지의 상가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광장이 보이는 고급 식당. 3층 전체를 빌려 창밖으로 이 모습을 내려다보던 인영이 있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와는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항상 머금고 있는 사내.
테오도르 데 마그누스 시리온, 제국의 황태자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광대놀음이야.”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 고급스런 찻잔에 들어 있는 것은 싸구려 페퍼민트 차. 특유의 텁텁한 뒤끝을 느끼며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제국민의 사기는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의 앞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콰이로 데 메디치. 상업에 밝아 일찌감치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의 적자로, 중키에 매부리코의 흔한 인상이지만 전도유망한 젊은이답게 맑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으며, 허물없이 테오도르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 있는 심복이자 오랜 친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바보 부자의 영웅 놀이는 아우가 기획하고 있는 거겠지?”
“이황자님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 제국 내의 주전파를 끌어모으고 계십니다. 저것은 그를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겠지요. 패배로 인해 침울해진 국내의 동향을 올바드 부자라는 영웅을 만듦으로써 그 힘을 하나로 결집시킨다. 미처 생각지 못한 발상의 전환입니다. 누가 떠올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이황자님의 진영이 머리를 잘 굴렸군요.”
“그렇다 해도 화이트 폴이라…… 웃기는 노릇 아닌가. 패전을 숨기기 위해 이 정도 이벤트를 만들어 내다니. 제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타락한 것인가. 아버님은 이걸 보고 뭐라 하시던가?”
“황제 폐하의 의중을 알긴 어렵습니다. 다만, 백성을 다루기 위해서는 때로 거짓이 필요한 법입니다, 황태자 전하.”
콰이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언제 어느 시대고 상관에게 직언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특히나 제국의 황태자 앞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테오도르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런 콰이로를 바라보았다.
“자네 의견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군. 이대로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위선과 거짓으로 쌓아 올린 제국이 과연 지금의 성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영원한 제국은 없습니다.”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테오도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이 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니 망정이지, 만일 궁내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 그것은 황태자의 심복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황태자로서 이 나라를 영원한 제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돼. 과거의 역사를 또 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제국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전쟁은 적어지고 세계는 평화로워지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제국에 평화를 쥐어 주는 것이야.”
“당신의 뜻이 곧 저의 뜻. 온 힘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콰이로의 확신에 찬 대답에 테오도르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건 그렇고, 아우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좀 알아낸 것이 있나?”
“우선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올바드 경의 시신을 호송하는 마법사 말입니다만…….”
“저 친구 말인가?”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려 광장에 들어서고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 안쪽에 희미하게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콰이로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현재 올바드 경의 마지막을 아는 자는 그가 유일하다고 하더군요.”
“그건 무슨 뜻인가?”
“메로링거 올바드 경에 대해 약간 조사를 해 봤습니다. 아무래도 신입 기사인데다가 별다른 실적이 없어 조사하는 데 애를 먹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의외로 올바드 경뿐만 아니라, 그의 오퍼레이터까지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조사한 바에 의하면…….”
콰이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망자에게 결례가 될 수도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을 황태자에게 전달하는 것 역시 그의 일이었다.
“메로링거 올바드 경의 기사로서의 능력은 의문. 그러나 레스터 펠리노라는 오퍼레이터의 수준은 발군이다. 여타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판단할 경우, 올바드 경이 퇴각하는 아군의 등을 지킬 수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이상이 참모진의 의견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쇼는 뭐란 말이지?”
테오도르의 시선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마차에 고정되어 있었다.
콰이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소문의 근원지를 추적한 결과, 레스터 펠리노란 자의 소행인 듯합니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퍼뜨린 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콰이로의 보고에 테오도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제국을 능멸한 자에 대한 분노가 아닌, 일종의 호기심이었다.
“영민한 자로군. 제국 전체를 상대로 이런 쇼를 벌일 생각을 하다니, 사고의 범주가 남다른데다 과단성까지 갖추고 있군. 동생은 이미 알고 있겠지?”
“처음에는 몰랐다 하더라도, 지금쯤은 눈치채고 있을 것입니다. 이번 위령제가 끝나는 대로 그 마법사의 처우가 결정될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그 오퍼레이터와 이황자님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황입니다. 그것이 이어진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겠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걸세.”
“무언가 짐작이 가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피를 이은 혈육이란 무서운 거지. 내가 아는 동생이라면, 절대로 그를 살려 두지 않을 걸세.”
테오도르는 무거운 얼굴로 광장을 빠져나가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일순간 바람이 거세게 불자, 마차를 향해 흩날리던 하얀 꽃잎들이 허망하게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꺄하하하!”
“아하하하!”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방 안. 열 명은 족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침대 위에서 두 소녀가 깔깔거리며 뛰어놀고 있었다.
“야, 인마. 먼지 날려.”
그러나 레스터의 핀잔에도 율리아는 멈출 기색이 없어 보였다. 한참을 뛰어놀던 두 사람이 지칠 무렵, 레스터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아를 향해 다가간 레스터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넌 이제 돌아가 봐야 되지 않아?”
“하루만 더 있다가 갈게.”
귀빈관에 온 것은 처음이다. 율리아는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버리기 싫다는 듯 레스터에게 매달렸다.
“성안에 들어오는 건 대단한 사람 아니면 안 되거든? 그런데 이번 기회 놓치면 또 언제 들어오게 될지도 모른단 말야.”
“그렇긴 하지만…….”
레스터는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도 모르는 판국에 동생을 성안에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율리아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하자 레스터는 자신의 말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헤어지면 또 한동안 못 볼 거잖아.”
“……알았어. 투정 부리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은 올바드 경의 시신을 인도하고 이곳까지 오는 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만큼 당장 오늘 내일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넵. 다음부터는 멋진 기사가 되어 나타나겠습니다!”
율리아는 멋들어지게 척 경례를 하더니 레스터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카일이 들어서자 율리아는 레스터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오고는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우애가 좋은 남매로군요.”
“카일 님도 부러우면 동생 하나 만드세요.”
율리아의 대답에 카일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고 생각 중입니다. 펠리노 양만큼 아름다운 동생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무슨 일입니까, 카일 님? 할 일은 다 마치셨습니까?”
레스터가 카일의 말을 끊으며 묻자 카일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