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19화)
5장. 격랑의 물살(3)


레스터와 카일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될 수 있으면 율리아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 레스터를 생각한 카일의 배려였다. 레스터는 차를 내려놓고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수도의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혹, 수도 내의 세력 관계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성년식을 마치자마자 전쟁터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알진 못합니다만, 황태자와 이황자 간의 갈등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레스터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수도의 정세에 관심이 없다 해도 제국의 후계에 관한 문제였다. 레스터와 같은 일선 장교 급이라면 그 정도는 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시다시피, 황태자는 전쟁을 꺼려합니다. 현 황제 폐하의 확장 정책으로 제국은 지나치게 오랜 기간 동안 전쟁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요. 이제는 제국도 내실을 다지고 제국민의 안정을 추구해야 할 때가 왔다는 의견이 귀족들 사이에서도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황제 폐하의 뜻도 그러하겠지요?”
레스터의 말에 카일이 감탄하는 빛을 띠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 정보가 일선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을 텐데, 대단하시군요.”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장에 있으니 더욱 느낄 수 있죠. 몇 년 전부터, 아마도 황태자가 후계로 인정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전쟁은 국지전으로 한정되기 시작하고, 국경을 확장하기보다는 확정하기 위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모든 실권이 황제 폐하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 정도 추측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특히나 전쟁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카일은 감탄하는 빛을 꺼뜨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현 이황자님은 젊은 시절의 황제 폐하와 가장 닮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호전적이며, 욕심이 큰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후계 자리를 탐내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렇다 보니 이황자님의 초조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것이 필요했지요.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세력을 키우기 위한 가장 편리한 방법은 단 하나였습니다.”
“전쟁…… 이겠지요.”
레스터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술을 떼었다.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깟 하찮은 권력욕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권력에 대한 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레스터로서는 도저히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다 호전적인 본인의 성격까지 맞물려, 이제 와서는 누구도 이황자님을 말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주류의 귀족 사회에서 밀려난 인물들까지 가담하면서 그 세력 역시 황태자 측과 상대할 만큼 커진 상황입니다.”
“언제 어디서 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네. 두 분 사이의 갈등은 어전회의에서까지 불거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있진 않았지만, 이미 궁녀들에게까지 퍼진 소문이니 그 여파는 상당한 정도였겠지요.”
레스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카일의 말대로, 그리고 자신의 추측대로 제국은 기나긴 전쟁의 역사를 끝내 가고 있었다. 일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되는 순간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진 행보는 그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되면 이황자는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비록 이황자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황제의 뜻과 역사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단 한 명의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추악한 발악과 그에 따른 참혹한 결과뿐이다. 원래라면 그렇게 흘러갔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전투, 레스터가 참전했던 그 전투 이후로 무언가 변해 가고 있었다.
레스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일 이변이 없었다면 저번 전투 역시 제국에서 손쉬운 승리를 따내고, 국경을 확정하는 것으로 끝났겠지요. 어쩌면 그것이 제국의 대군이 동원되는 마지막 전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전쟁이 끝나길 바란 레스터였다. 비록 최전방에서 싸우는 일개 말단 장교에 불과하지만, 흐름을 읽는 눈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레스터는 순간 오한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악마와도 같았던 붉은색의 타이탄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카일이 입을 열었다.
“전쟁이 고착화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 전쟁은 개인과 개인의 지략을 겨루는 것이 아닌, 보급과 세력의 싸움이 됩니다. 상식적인 행보라면 그 싸움에서 모든 것은 끝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군요.”
“네. 아직은 미약한 바람이지만, 나중에는 거대한 태풍이 될지도 모를 바람입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동쪽에서만 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일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레스터를 바라보았다. 레스터는 그의 뜻을 알 수 없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전혀 모르시는군요. 레스터 님께서는 명민하신 듯하다가도 자신의 일이 되면 아둔해지는 경향이 있군요. 아니,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 제가 그 바람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스스로 자각하지는 못하시겠지만, 지금 레스터 님께서는 제국의 두 주축 세력의 한가운데 위치해 계십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현재 황태자파와 이황자파는 언제 부딪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갈등이 두드러져 있습니다. 그 갈등은 이미 비대해져 아주 작은 촉매만으로도 거대한 불길이 되어 제국을 뒤덮을 것입니다. 그리고 레스터 님의 등장이 바로 그 촉매입니다.”
카일의 말에 레스터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다.
레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렴풋이…… 일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합니다. 태풍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순간, 레스터 님의 몸은 갈가리 찢겨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카일의 볼이 가볍게 씰룩였다. 그 얼굴은 틀림없이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레스터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기 이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카일을 바라보았다. 푸른 머리의 그 청년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롬바드 경은 왜 날 돕는 겁니까?”
“그것은 즐거운 여행을 함께한 동료로서의 애정이라고 해 두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죽음에 처할지도 모르는 당신의 처지에 대한 동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오퍼레이터를 잃고 싶지 않은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책임감도 작용한다고 할 수 있겠죠.”
“솔직한 이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능숙한 편은 아니나, 그렇다고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믿을 정도로 어수룩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위험하다.
레스터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그런 경고가 울리고 있었다.
카일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핑계는 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제가 지금 레스터 님을 돕고 싶다는 것이고, 레스터 님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거기에 솔직한 이유 같은 것이 필요할까요?”
“신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그다지 기꺼운 일은 아닙니다.”
“저를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다만, 제 말이 옳다 생각될 때는 주저하지 말고 행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
쾅!
레스터는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시종일관 유들거리는 태도가 결국 레스터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당신에게는 유희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합니다! 일순간의 기분 전환으로 이용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런 도움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오 할입니다.”
“무슨?”
카일의 덤덤한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레스터였다.
“뭐가 오 할이라는 겁니까?”
“지금 레스터 님이 생각하고 계신 방법으로는 살아날 확률이 반반이라는 겁니다.”
“무슨…… 내가 무얼 생각하는지 어떻게 안다는 겁니까?”
“타이탄.”
순간, 레스터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에게 감정을 숨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쯤은 레스터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고정관념을 버리면 그림이 그려지지요.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옳다는 오만입니다. 레스터 님께서도 그것을 이용한 것 아니었습니까? 마법사가 타이탄을 움직일 리 없다. 그러니 아군의 등을 지킨 것은 올바드 경의 공이며, 목숨을 던져 아군을 지키기 위한 결정을 내린 것도 올바드 경이다. 오퍼레이터인 자신은 결정권이 없기에 아무런 죄를 물을 수 없다.”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전부 다.”
“어떻게…….”
레스터의 놀라는 말에 카일이 부드럽게 웃었다.
“전부 제 눈으로 본 것이니까요.”
“설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겁니까? 참모진들은 이미 모두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장은 언제나 변수로 가득한 곳이지요. 저 역시 그런 장면을 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마법을 쓰는 타이탄이라니! 상상이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레스터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알려진 이상, 더 버틸 이유도 없었다. 지금은 받을 수 있는 도움이라면 최대한 받아야 했다.
“그럼 카일 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일단 두 쪽의 동향을 살펴야 합니다. 지금쯤은 눈치채셨겠지만, 위령제를 이용하려는 쪽은 이황자 쪽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향으로 봤을 때, 레스터 님의 미래가 그리 밝지는 않아 보입니다. 당장은 살아남을 수 있더라도 언젠가는 그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성격이 포악하고, 황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선민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으며, 자신아래의 인간에게 잔혹한 면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황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그렇다면 황태자에게 기대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그것은 하책입니다. 황태자는 익히 알려진 반전파. 앞으로 있을 전투의 상징이 될 레스터 님을 굳이 살려 두어 전쟁을 확산시키는 것을 두고 볼 이유가 없습니다.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더라도 공들여 레스터 님을 살릴 이유도 없지요.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레스터 님은 태풍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황태자파와 이황자파, 그 사이에서 조율을 해내야만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카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위령제는 조용한 군중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수만의 사람들이 수도의 넓은 광장에 발 디딜 틈 없이 몰려 있는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관이었다. 그 한가운데, 높게 쌓인 단상 위에 황태자와 이황자가 나란히 앉아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옆으로 그들을 지지하는 많은 귀족들이 늘어서 있었다.
단상 위에는 이황자파에서 나온 사람이 한창 연설 중이었다.
“올바드 경의 숭고한 희생은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다한 것뿐만 아니라, 귀족과 평민의 구분 없이 우리 모두가 제국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친애하는 올바드 경의 높은 인덕과 학식, 뛰어난 무용과 끝없는 기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마지막까지 전장을 지키는 책임감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숭고함을 넘어선 어떤 것이었으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제국의 안녕을 지켜 낸 위대한 희생이었습니다.”
광장에 모인 수만의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그의 말은 지리멸렬하고 장황하긴 했지만, 기이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고,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여러분, 저는 감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습니까? 오늘 이곳에 모인 많은 분들은 올바드 경의 모습을 궁금해하실 것입니다. 올바드 경의 무용을 궁금해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분위기에 휩쓸려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숨을 멈추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사소한 것들이 아닙니다. 올바드 경과 함께 스러져 간 제국의 청춘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무엇을 위해 죽어 갔는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것들을 진정으로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올바드 경과 우리의 병사들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웅변가의 말에 빨려들고 있었다. 연설 중간,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광장은 이글거리는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무언가를 갈구하듯 웅변가의 얼굴,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이황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