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법을 쓰는 타이탄 1권(20화)
5장. 격랑의 물살(4)


그는 천천히, 하지만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기억해 주십시오! 이름없이 죽어 간 수많은 우리 병사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위대한 올바드 경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 구하려 한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 영웅과 우리 백성의 투혼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 간악한 크라수스의 침공에 의해 쓰러진 우리 아들들의 피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들은 엘프와 드워프의 사악한 마술로 우리 병사들을 죽이고, 또한 그 시신을 능욕했습니다! 이것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에 분노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크라수스의 어리석은 종자들과 그들에게 협력하는 이종족들을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제국의 책임을 망각하는 것이요, 아들들의 죽음에 침묵하는 것이요, 불의에 눈 돌리는 것입니다! 반드시 저 마족의 국가를 처단하여 우리가 흘린 피값을 받아 내고, 이 땅에서 저들을 척결하는 것이야말로 제국민의 자부심이요, 용기이자,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정신입니다!”
―우와아아아!!
일순간 광장 전체가 떠나갈 듯한 큰 소리로 뒤덮혔다.
“제국을 위하여!”
“황제 폐하 만세!”
“간악한 크라수스를 정벌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주먹을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당장에라도 크라수스로 쳐들어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한 분위기 와중에,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레스터가 있었다. 그는 불쾌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으나,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지 계속해서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지루한 건 둘째 치고, 역겨운 전쟁 미화까지는 도저히 못 참아 주겠군.”
대중은 감정에 쉽게 휩쓸린다. 복수라는 감정은 매우 직관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올바드 경의 존재를 통해 복수심을 불러일으키고 양념으로 이종족에 대한 반감까지 더해 분노를 가중시킨다. 결국 이를 통해 제국 내의 반전파들마저 마음을 돌리게 만들기 위한 수작임이 너무나도 빤히 눈에 보이고 있었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엘프는 그렇다 치고, 드워프는 마법을 못 쓰지 않아요?”
“그건 중요하지 않죠. 중요한 건 크라수스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이종족을 끌어들이는 것뿐입니다. 크라수스의 이종족 정책에 대해선 알고 계신가요?”
피아가 고개를 젓자 카일이 말을 이었다.
“크라수스의 확장 정책은 강경책만을 고집하는 제국과 달리 유화책과 강경책을 동시에 쓰고 있습니다. 반항하는 곳은 끝까지 몰아붙여 모두 노예로 삼아 버리지만, 항복하는 곳은 받아들여 공화국의 일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종족의 제한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엘프와 드워프를 비롯한 인간 외의 타종족에게까지 그 원칙이 적용되지요. 때문에 크라수스 공화국은 인간 외에도 수많은 다른 이종족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크라수스의 수도에서는 심심찮게 오크나 고블린 등도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와, 재미있을 것 같아요.”
피아가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보이자 레스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만만치 않아. 주류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 한정되어 있으니까. 어차피 거기에도 차별이 존재하고, 그 문제는 두고두고 공화국의 발목을 잡아챌 거야.”
“그래도 한 번쯤 가 보고 싶어요, 크라수스라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 이종족들을 본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몬스터라면 많이 봤지만…… 거기서는 그들도 사람처럼 대우받는 건가요?”
“그러다가 나중에 몬스터도 고쳐 주겠다고 나서는 건 아니겠지?”
레스터의 말에 피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면 안 되나요?”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때 단상 위로 또 한 명의 사람이 올라섰다. 그는 황태자 쪽 자리에 앉아 있던 인물로, 수만의 사람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식순에는 없었지만, 그가 황태자 측의 인물이라는 걸 알기에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는 못하는 사이 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제국민 여러분, 저는 방금의 연설자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의 첫 발언에 방금까지 제국을 찬양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 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웅변자가 연설을 시작하자 사람들 사이의 소요는 금세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방금의 웅변가보다는 조금 침착하게, 그리고 좀 더 여유롭게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다. 흥분으로 가득 찼던 광장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사람들 사이에 분노가 아닌 슬픔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은 선동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올바드 경이, 우리의 영웅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영토입니까, 아니면 제국의 자존심입니까? 모두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태어나고 살아갔던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위대한 올바드 경의 진정한 뜻을 따르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은 충분히 슬퍼하고 죽어 간 이들을 기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익한 피를 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고작 가치도 없는 한 뼘의 땅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제국민의 피를 흘려야 하며, 얼마나 더 많은 시민 여러분들의 혈세를 낭비해야 하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며 소요가 점점 일기 시작했다. 웅변가가 노리는 것은 수도 내의 시민, 즉 유산자 계급들이었다. 그들은 발전하는 수도의 경제에 힘입어 대두한 계층으로, 상업을 통해 돈과 권력을 확보한 신흥 계급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며 그들에게 막중한 세금이 부여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불만이 시민 계층 사이에서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황태자파의 웅변가는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제국은 강합니다. 끝없이 강하며,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걸어도 도달하지 못할 먼 곳의 땅을 얻기 위해 얼마나 더 무의미한 희생을 반복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해야 욕심이 다할 것입니까?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연설자는 강조하지도, 큰 목소리로 웅변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형님도 의뭉스러운 데가 있어. 이런 일을 벌이다니. 하긴 그러니 아버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이겠지.”
불쾌하다는 얼굴로 베르키우스가 입을 열자 바로 곁에 앉아 있던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그것과 이것은 다른 일이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이냐? 네 역할은 비탄 초원을 되찾는 일뿐이다. 전쟁을 더 이상 확산시키지 마라.”
“나를 형님 같은 겁쟁이 취급하지 말라고. 그런 쓸모없는 땅 하나를 먹자고 이런 일을 벌이는 줄 알아?”
“무슨 소리냐?”
“이번 기회에 내가 어떤 인물인지 보여 주겠어. 아버님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말이지. 이번 원정으로 비탄 초원뿐만이 아니라, 공화국의 속주를 빼앗아 오겠다, 이 말이야.”
이황자의 말에 테오도르는 놀라며 동생을 노려보았다. 동생이 하는 말은 단순한 국지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크라수스 공화국의 속지를 빼앗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보 같은……! 그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둘 줄 아느냐?”
“그래? 형님이 날 막을 수 있을까? 형님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말뿐인 평화를 외치는 와중에도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는 적들은 세력을 키우고 있어. 형님은 제국을 위한다고 하지만, 평화를 외치다가 결국에 몰락해 간 나라의 역사는 수없이 많아. 잊지 말라고, 강한 힘만이 평화를 지속시킬 수 있다는 걸. 지금의 번영한 이 나라가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어.”
베르키우스의 눈은 이미 공화국을 패퇴시키고 개선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수만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찬양하며 노래부르고 기꺼이 환호할 것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싸울 생각이냐? 싸우고 싸우고 싸워서, 결국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이 죽고 나서야 싸움을 그만둘 셈이냐?”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는 집어치우지. 나는 지금 눈앞의 일을 이야기하는 거니까. 형님은 날 막을 수 없을 거고, 이번 원정을 끝내고 나면 아마 형님과 내 위치는 바뀌어 있겠지.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황태자라는 위치를 빼앗기는 게 두렵다고.”
베르키우스의 노골적인 발언에 테오도르의 얼굴이 분노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동안 동생의 기행을 수없이 지켜봐 왔다. 그때마다 이해해 보려고 애쓰고, 수없이 달래도 봤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벽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큰 강으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는 어찌 그렇게 네 생각만 하는 거냐.”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게 뭐가 나쁘지? 형님도 형님 생각만 하라고. 괜히 감당할 수도 없는 것들을 건드리지 말고. 형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잘 보란 말이야.”
베르키우스의 말에 테오도르가 광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위령제에 모여 있는 수만의 군중들 사이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한편에선 주전론을, 한편에선 평화론을 외친다. 이내 이곳저곳에서 말다툼하는 소리, 비명 소리,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 사이의 소요가 커지고, 서로를 비난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만 명이 모인 광장이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순간 아찔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당장에라도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베르키우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이 형님이 말하는 평화라는 거겠지. 덕분에 누군가의 죽음이 빨라지게 되었군.”
“무슨 소리냐?”
“저 마법사, 올바드 경의 오퍼레이터라고 했지? 원래라면 당분간은 살려 두려고 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이벤트가 필요하지 않겠어? 전쟁 전에 뿌려질 산 제물의 피는 역시 인간의 것이 최고지.”
“뭐라고?”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려 레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주변의 일에 관심이 없는 듯 시큰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광장의 소요는 점점 커져 가고, 베르키우스가 자신의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진압하도록.”
“네, 전하.”

제도 그리크의 한편에는 가로 삼백, 세로 사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공터가 존재했다. 그곳은 제국에서 관리하는 타이탄의 공식적인 시훈련 장소로,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어 있지 않았다. 타이탄이 기동할 때 느껴지는 땅의 울림조차도 빠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마법진으로 꼼꼼하게 둘러싸인 그곳에서 평소와 같이 기동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국 타이탄 관리소장, 미하일 보로미로프 후작은 와인을 한잔 마시며 느긋하게 식후의 노곤함을 즐기고 있었다.
차양으로 둘러쳐진 그의 자리는 훈련장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에서는 한눈에 타이탄의 움직임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열두 대의 타이탄이 서로 치고받으며 조심스럽게 움직임을 체크하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개발되었다는 기체가 바로 저 녀석입니까?”
미하일의 곁에서 와인을 들고 있던 푸른 머리의 청년, 카일 드 롬바드가 입을 열었다. 롬바드 가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로, 카일 역시 어린 시절부터 미하일과 자주 만남을 가졌고, 비록 나이 차는 많이 나지만 미하일 역시 카일의 높은 식견을 존중해 그를 가까이 두어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표준 기종인 슈바르츠 급을 개량한 녀석이지. 아직 정식 명칭은 부여되지 않았네만, 임시로 슈바르츠―II라고 부르고 있네. 출력을 대폭 상승시키는 데 성공했다네.”
“현재의 출력보다 더 높이는 것이 가능합니까?”
카일이 놀랍다는 듯이 반문하자 미하일은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자네, 타이탄의 구동 원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부분은…….”
“하긴 타이탄의 원리라는 것이 일단은 대외비이니만큼 모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아니지. 일단 마나 제네레이터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타이탄 조종부에 위치하는 엘레나트 코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엘레나트 코어는 타이탄을 조종하기 위한 핵심 부위였다. 오너가 코어에 마나를 주입하면, 코어는 마나를 방사하기 시작한다. 그런 뒤 방사된 마나는 납으로 둘러싸인 타이탄의 미스릴 신경망으로 흘러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리 집적 가능량만큼 마력을 채워 놓은 미스릴은 잉여 마나를 소화하지 못하고 내보내게 되는데, 신경망을 둘러싼 납 탓에 마나가 밖으로 새지 못하고 신경망을 따라 흐르게 된다. 신경망을 따라 흐른 마나는 각 관절부의 엘레나트 머슬에 축적, 다시 방사되어 타이탄의 움직임이 가능하게 된다는 원리였다.
즉, 엘레나트 코어는 타이탄의 심장부나 마찬가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