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뷰어

공중누각(空中樓閣) 1화



序章





“도련님! 도련니임……!!!”

앳된 목소리가 애타게 누군가를 찾았다. 전각 지붕 위에 숨은 아이가 제 입을 막고 작게 키득거렸다. 볼이 통통하게 오른 귀여운 외양의 사내아이였다. 그 옆에서 팔베개하고 드러누운 또 다른 아이가 작게 혀를 찼다.

“벌써 한 식경(약 30분)째잖아. 적당히 하고 내려가.”

“싫-거든. 공부하기 싫단 말야.”

“네가 그러면 혼나는 건 저 애일 텐데.”

“명이 너 얄미워!”

제 편을 들어 주지 않는 친우가 야속했는지 아이가 고개를 팩 돌렸다. 몸을 옹송그리고 나 삐졌소, 시위하는 모습에 아이, 단화명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독이듯 까만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금세 마음이 풀린 아이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건 단화명이 지붕 아래로 뛰어내리는 모습이었다.

“앗! 이 배신자!”

탁, 가볍게 착지한 단화명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울먹이며 배회하던 시동이 그를 발견하곤 활짝 웃었다.

“명이 공자님!”

화명은 말없이 제가 뛰어내린 지붕 쪽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든 시동이 아이를 발견했다. 기겁한 아이가 도망치려 했지만, 시동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도련니이이이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아이가 귀를 막았다. 이리 큰 소리니 저를 기다리고 있을 스승도 들었을 게 뻔했다. 아이는 입을 삐죽이곤 지붕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시동이 상기된 얼굴로 달려와 아이의 두 손을 잡았다.

“빨리. 빨리요!”

“아, 알았어!”

팔을 흔들며 재촉하는 것에 아이는 미적미적 움직였다. 붙잡힌 이상 도망가긴 그른 셈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 단화명을 쳐다봤다.

“이 못된 놈!”

마지막 발버둥 같은 말에 단화명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제 주인 몰래 연신 고개를 꾸벅이는 시동을 보며 미려하게 웃었다.

“나 못된 거 이제 알았어?”

“이익!”

아예 배웅하겠다는 듯 손까지 흔들었다. 아이는 발을 쿵쿵 굴리며 시동을 앞서 나갔다. 그 뒤를 시동이 헐레벌떡 뒤쫓았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무척 청명한 날이었다.



***



그해.

무이문(武理門)에 화마가 피어올랐다.







第一章 능운소





낫처럼 휜 달 위로 구름이 드리웠다. 사흘이나 이어졌던 문주의 탄신연이 끝난 밤이었다. 연일 떠들썩했던 게 거짓인 듯 사위가 적막하기만 했다.

“불이야……!!! 컥!”

위험을 알리는 목소리가 단말마와 함께 사라졌다. 쓰러진 문도의 뒤로 화마가 치솟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불이 순식간에 수많은 전각을 집어삼켰다. 기이한 건 이토록 큰불임에도 건물 안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단 것이다.

쿨룩. 쿨룩.

아이는 연신 기침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기도가 타는 듯이 아팠다. 이미 복도는 눈앞이 흐릴 만큼 매캐한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늦게까지 뒤척이다 설게 잔 게 천만다행이었다. 일어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연기에 질식했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아이는 불이 났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했지만 도통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복도를 가득 메운 연기 사이로 불꽃이 너울거렸다. 그 반대편으로 달음박질치며 한껏 숨을 참았다. 다행히 매일 드나들던 길이라 그런지 무사히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학! 하아. 하아. 하아…….”

시원한 밤공기에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건물 내부가 화덕 안처럼 뜨거웠던 탓에 피부가 화상이라도 입은 듯 따가웠다.

“어, 어머니.”

아이는 뒤늦게 제 어미를 떠올렸다. 혹시 먼저 나왔나 싶어 주변을 둘러봐도 저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쿠웅!

문설주 하나가 불길과 함께 쓰러졌다. 전각 지붕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이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무서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쇳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손목을 낚아챘다.

“히익!”

놀란 아이가 몸을 움츠렸다. 상대는 봐주지 않고 몸을 잡아끌었다. 어찌나 힘이 강한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

“아, 안 돼! 어머니가!”

콰르르르르---

애처롭게 뻗은 손 너머로 건물이 무너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히 붕괴했다. 아이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왈칵 눈물이 터졌다. 충격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 위로 불길에 휩싸인 기둥이 떨어졌다.



“헉!”

사내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떴다. 꿈인가, 현실인가. 그는 천천히 기감을 일으켰다. 물이 새는 천장과 꿉꿉한 먼지 냄새, 이불의 거친 촉감······. 이곳이 어딘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서서히 떠올랐다.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고자 주변 객잔에 들른 게 어제였다. 허름한 겉모습처럼 내부 또한 무척 낡은 곳이었다.

“꿈 한번 요란하게 꾸는구나.”

주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활짝 열린 창밖으로 아직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창틀에 걸터앉은 중년인이 손에 든 잔을 휙 던지자 막 상체를 일으킨 사내가 가뿐히 잡아챘다. 꽉 찬 술이 잠시 너울거리긴 했지만 잔 밖으로 흘러내리진 않았다.

“구월에 서풍은 불어오는데(九月西風興) 달은 차고 서리는 희게 엉기는구나(月冷霜華凝). 임 생각에 가을밤은 길고(思君秋夜長) 혼백은 하룻밤에도 아홉 번을 오른다(一夜魂九升).”

중년인이 술을 들이켰다. 화주가 화끈하게 목을 데웠다.

“그리워서 꿈을 꾸는 것이냐, 아니면 꿈이 널 찾아오는 것이냐.”

“그리 애틋한 감정은 아닙니다. 사부님.”

사내의 입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중년인을 따라 잔을 비운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거미줄처럼 금이 퍼졌다. 손을 놓으면 금세라도 잔이 부서질 듯했다.

“꿈은 꿈이되 그리운 꿈이 아닐 뿐입니다.”

잔이 두둥실 떠 다시 중년인에게로 돌아갔다. 사내가 물었다.

“이 정도면 되었습니까, 사부님?”

중년인은 기의 그물로 얼기설기 붙어 있는 잔을 흡족하게 응시했다.

“비명횡사할 정도는 아니구나.”

그는 미련 없이 잔을 바깥으로 던졌다. 부서진 조각이 흙탕물에 처박혔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겁니까.”

그림자 속에서 흑의인 셋이 걸어 나왔다. 침상 아래에 나란히 무릎 꿇은 그들을 향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흑의인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긴 시간 고생했던 보상을 드디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오래도록 이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중년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기대되는구나. 피로 시작된 악연의 끝 또한 피로 끝날 것인가.”

그는 십 년 전, 길가에 쓰러져 있던 아이를 떠올렸다. 불에 녹은 살갗 아래의 까만 눈이 인상적이었더랬다.

“아니면 피안화를 맺지 못하고 거꾸로 쓰러질 것인가.”

다시 잔을 기울인 중년인이 낄낄 웃었다.

“복수의 화신을 주웠으니 이 또한 내 운명이련가. 운소야. 네 끝이 어찌 될 것 같으냐?”

사내, 능운소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비명횡사할 팔자는 아닐 겁니다.”

그 말에 중년인의 홍소가 더 깊어졌다.



***



원(元) 제국의 무인 통제 정책으로 근근이 맥을 이었던 정파 무림은 명(明)의 건국과 함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하지만 빛을 보기도 전에 사파의 수좌였던 사자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당대 천하제일인이자 사자맹의 맹주인 오절무제(五絶武帝) 사지평이 금분세수(은퇴식) 하기까지 근 오십여 년을 사파에게 지배받았다.

그리고 백 년 후.

사파일통의 시대가 언제였냐는 듯 무림은 정파의 주도 아래 영화를 꽃피웠다. 오파일방 삼대 세가가 구파일방 오대 세가로 늘어나고 정파에 가담한 문파가 각 지역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거듭났다.

복건성의 청림방(淸林幇)도 그런 경우였다. 원래는 정사지간의 위치에 있던 문파였으나 십 년 전의 무이문 혈사 이후로 완전히 정파로 돌아섰다. 앞장서서 혈사의 원흉을 쫓는 청림방주를 보며 무림 동도들은 복건쌍절(福建雙絶)의 의리를 칭송했다.

“노인장. 길 좀 묻겠소이다.”

가판의 먼지를 털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노립(삿갓)을 깊게 눌러쓴 장신의 사내가 장승처럼 앞에 서 있었다.

“이 근처에 십여 년 전 변을 당한 무이문 문도들의 사당이 있다고 들었소만.”

“크흠!”

노인이 딴청을 부리며 가판을 힐끗거렸다. 가판 위엔 용안, 여지, 비파 등의 과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뻔히 보이는 속내에 사내가 노립을 살짝 위로 올렸다. 닳고 해진 검은 무복 위로 왼쪽 얼굴을 가린 흑색의 가면이 보였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안쪽에서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용안 하나 주시오.”

노인은 뒤늦게 사내의 등에 자리한 날카로운 창을 발견했다. 무림인! 일순 노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 아닙니다요! 바로 요 모퉁이만 돌면 사당입죠, 예.”

연신 굽실거리는 노인의 태도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흘린 기세를 거둔 그는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국경에서 복건성 성도까지 쉬지 않고 달려 심신이 고단했지만, 줄곧 그리워했던 곳이 지척이라 생각하니 없던 힘도 나는 기분이었다.

사내가 객잔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아이 하나가 툭 튀어나와 거세게 충돌했다.

“앗! 죄송합니다요, 나리!”

당황한 낯으로 연신 굽실거린 아이가 사내를 스쳐 지났다. 아니, 지나려 했다.

“사죄할 필요 없다.”

아이의 몸이 길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창간(창의 자루)으로 등을 후려친 사내가 아이의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본디 사내의 품에 있던 것이었다.

“운이 좋구나. 오늘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으니.”

“운 좋기는 개뿔! 외지인이 현지인을 핍박하면 쓰나, 앙?”

“퉤! 거, 애가 불쌍하지도 않나. 적선 좋잖아?”

사내가 몸을 일으키자 험악한 인상의 파락호 셋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노점상에게 자릿세나 뜯는 별 볼 일 없는 인사들이지만, 뒤에 흑룡방이 버티고 있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이들이었다.

“애가 안 불쌍하면 나는 어때? 그 전낭만 바치면 고이 보내 주지.”

낄낄대며 얼쩡거리는 그들의 행동에 사내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았던 기분은 진작 날아갔다. 창을 꺼낸 그의 손이 천천히 휘돌았다. 창신이 무섭도록 회전하며 불꽃을 일으켰다. 기의 그물이 창날에 응집됐다. 세찬 바람에 돌가루가 비산했다.

“어어……?”

그제야 사내의 심상찮음을 눈치챈 파락호들이 뒷걸음질 쳤다.

“우,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우린 그 유명한 흑룡방의…… 끄아아아악!!!”

“히이익!”

눈 깜짝할 새 파락호 하나의 귀가 날아갔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핏방울에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파락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먼저 나오는 이부터 죽이겠다.”

창이 쾅! 땅에 박혔다. 준(鐏)이 한 자(약 30센티미터) 가까이 박힌 것에 파락호들은 사내가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의 고수임을 깨닫곤 그대로 줄행랑쳤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아이도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사내는 창을 뽑아 다시 등에 걸쳤다. 하산하는 동안 수없이 겪은 일이라 놀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근방을 장악한 듯한 사파 무리를 보니 눈빛이 침잠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이문이 멸문하지 않았다면 저런 조무래기들이 설칠 수나 있었겠는가. 사내는 고개를 절레 젓고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한 노인이 지켜보고 있었다. 비루한 행색에 이가 누런 거지였는데, 허리춤에 삼 결 매듭을 맨 개방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