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공중누각(空中樓閣) 2화
“호오? 저것은 노호창(怒號槍) 하대방의 십절화류창(十絶火流槍)이 아닌가? 최근에는 산해관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고향으로 제자를 보냈구만그래. 흘흘흘.”
개방의 복건성 분타주 취걸개는 동냥으로 채운 바가지 속의 음식물을 손으로 집어 먹으며 머리를 굴렸다.
“어디 보자. 노호창의 제자 이름이…….”
끙끙대며 고민하던 그는 뒤늦게 떠오른 이름에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그렇지! 멸염창(滅炎槍) 무명(無名)이었지!”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고, 아까워라! 호들갑 떨며 땅에 떨어진 걸 하나하나 주워 먹던 취걸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멸염창이 어찌 멸문한 무이문의 잔재를 찾을꼬?”
취걸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무언가 냄새가 났다. 정보의 냄새가. 이윽고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추억은 기억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사내는 허름하지만 깔끔한 사당을 쳐다보며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혼위전(魂慰殿)」
‘넋을 위로한다’라…….
눈을 감자 과거의 잔재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사람들이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하염없이 손짓했다. 허상임을 알아도 사내는 거부할 수 없었다. 눈을 뜨고 혼위전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내부에 자리한 수많은 위패가 그를 반겼다. 그 중앙에 아비의 위패가 있었다.
아비와의 추억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누구냐!”
“감히 무이문의 사당을 침범하다니!”
“정체를 밝혀라!”
상념이 깨지고 여럿의 기척이 느껴졌다. 비호처럼 내려앉은 이들이 사내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고요히 위패를 응시하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노립을 올려 시선을 맞춘 그가 느릿하지만 또렷하게 답했다.
“소생은 노호창의 제자이자 멸염창이란 과분한 별호로 불리는 무명이라 하오. 그리고…….”
오랫동안 말한 적 없다는 듯 쇳소리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는 목에서 옥패를 꺼내 그들에게 내보였다.
“멸문한 무이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능가의 운소요.”
***
“뭐! 누가 왔다고?”
노성을 지르며 방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손바닥을 내리치자 굉음과 함께 탁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거대한 덩치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뻗어 나왔다. 하인은 벌벌 떨며 제가 가져온 소식을 다시 고했다.
“무, 무이문의 생존자가 나타났답니다. 그것도 장절 능만협 대협의 아들인…….”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주가 밖으로 튀어 나갔다. 다급하게 마당으로 내려선 그는 방도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오는 한 사내를 발견하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침 그를 발견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강렬하게 부딪쳤다.
한참의 침묵 후 사내가 포권하며 읍했다.
“무림말학이 무림칠절(武林七絶)의 일인인 권절(拳絶)을 뵙습니다.”
“네놈은 누구냐.”
“…….”
“누구건대 감히 내 친우의 아들을 칭하느냐.”
불길을 담은 눈길이 사내에게 쏟아졌다. 손등에 힘줄이 파릇하게 솟은 것이 사내의 거짓이 밝혀지면 당장에라도 권장을 날릴 것 같았다.
“소생은 노호창 하대방의 제자이자…….”
제 목을 잠시 매만진 사내가 말을 이었다.
“참화를 맞은 무이문 문주 장절(掌絶) 능만엽의 아들인 능운소입니다.”
“……!”
소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능만엽.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한때 이 지역의 패자이자 무림칠절의 일인이었던 고명한 고수가 하룻밤 새 화를 당했고 문파마저 멸문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건 청림방의 방주인 단천악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능만엽은 그의 친우였다. 지금도 범인을 추적하는 그를 두고 강호 동도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현신이 있다면 능만엽과 단천악을 일컫는 거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거짓이다! 당시의 참화는 고절한 내 친우도 피할 수 없던 참혹한 것이었다. 미흡한 무공을 지녔던 아이가 어찌 살아남았겠느냐. 네 말이 진실이라면 증좌를 보여라!”
타당한 말이었다. 사내, 능운소는 품을 뒤적여 손바닥만 한 옥패를 꺼냈다. 구름 사이를 노니는 학에 새겨진 능(能). 능씨 가문의 명패였다. 보란 듯이 허공에 치켜든 그곳을 방주가 허공섭물로 끌어당겼다. 꼼꼼히 옥패를 살핀 그는 아직 가시지 않은 의혹을 내뱉었다.
“진패가 맞다. 허나 이것이 네가 능운소란 증거가 될 순 없다. 물건은 얼마든지 진짜처럼 만들 수 있으니.”
이 또한 타당했다. 능운소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 손을 들었다. 천천히 원을 그리던 모양새에서 벼락처럼 기의 그물이 얽혔다. 그를 향해 방주가 달려들었다. 수십 번의 공수(攻守)가 오가더니 낙뢰처럼 내지른 방주의 권법을 능운수가 손날로 쳐 냈다. 깡! 하는 쇳소리와 함께 공격이 비틀렸다.
“귀척조수(晷斥爪手)!”
누군가가 그 무공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훌쩍 물러난 방주가 손을 털었다. 깊이는 얇았으나 틀림없는 친우의 무공이었다.
“……따라오너라.”
방주의 눈짓에 능운소를 둘러싸고 있던 방도들이 물러갔다. 등을 돌려 걸어가는 방주를 능운소가 뒤따랐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이 불편할 법도 하건만 노립 안쪽의 얼굴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정말 운소란 말인가?”
“어찌 그런…….”
그중에서도 네 명의 중년인이 보내는 시선이 가장 강렬했다. 그들은 불안한 눈으로 능운소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앉게.”
맞은편을 가리키는 손에 능운소가 자리에 앉았다. 그와 마주 보고 앉은 방주가 옥패를 돌려주었다.
“운소… 운소라…….”
오랜 이름이었다. 그때의 참화 이후로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 숙부.”
“…….”
단천악의 눈이 살풋 떨렸다. 능만엽과는 형제와도 같은 친우 사이인 데다 몇 살 어렸던 그는 능운소에게 항상 숙부라고 불렸다. 그제야 단천악은 사내의 외양을 천천히 살폈다. 얼굴 반쪽이 흉하게 일그러져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으나 생김새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있구나. 네게서 능 형의 얼굴이 보인다.”
단천악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하얀 피부에 미남자였던 능만엽을 떠올렸다. 눈앞의 사내도 죽은 친우처럼 새하얀 피부에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딱히 옥패가 아니라도 능만엽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둘이 부자라는 것에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닮은 얼굴이었다.
“믿, 을 수가 없구나. 그토록 참혹했던 곳에서 살아남았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제 손을 잡은 단천악을 보며 능운소가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그때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여길 찾아왔느냐?”
단천악의 얼굴엔 아직도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능운소는 껄끔거리는 목을 문지르며 느릿하게 지난 삶을 얘기했다.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저를 사부님께서 거둬 주셨습니다.”
“사부가 노호창 대협이라 했던가?”
“예. 제 아버님과 알던 사이라 했습니다.”
그 말에 단천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 대협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으나 그가 능 형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장원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늘.”
“친분이라기보단 큰 신세를 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숨기고 지금까지 길러 주신 겁니다.”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이상했지. 하 대협의 근거지는 이 근방인데 한동안 보이지 않았어. 간혹 산해관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사부님께선 알 수 없는 적에게서 절 보호하기 위해 새외로 떠돌았습니다. 변방을 비롯해 조선(朝鮮)까지 다녀왔지요.”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단천악은 과거에 몇 번 만났던 하대방을 떠올렸다. 강퍅한 인상에 냉소적인 성품이 무척 거만한 인사였다. 그런 이가 은혜를 갚기 위해 능운소를 빼돌렸다니.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네가 능운소란 것은 하 대협이 알려 준 것이냐?”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라서 사부님께 확인받았습니다.”
“그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고?”
집요한 물음에 능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얽힌 피부를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상흔의 원흉이라면……. 그렇습니다. 사부님께선 큰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기억나는 거라곤 가문의 무공 몇 수와 이름뿐입니다.”
“…….”
단천악이 나직이 탄식했다. 안타까운 얼굴과 달리 그의 마음은 내심 안도로 물들었다. 기억이 온전해도 거리낄 건 없었으나 이왕이면 없는 게 나았다.
“어찌 되었건 살아 있어 다행이다. 기억이야 고향에 돌아왔으니 언젠가는 떠오르지 않겠느냐. 청림방의 객방을 내어 줄 테니 장원에 머무르며 함께 노력해 보자꾸나.”
부드러운 다독임에 능운소는 손을 빼 깊이 포권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대협.”
“아까처럼 단 숙부라 부르거라. 네 아비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으니 너는 내 조카나 다름없다.”
“……예. 숙부님.”
“하인이 네가 지낼 방을 안내해 줄 것이다. 조만간 네 거처를 마련할 테니 그때까진 불편해도 참거라.”
그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리고 하인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능운소가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는 단천악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기억 소실이라?”
아직은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비고(秘庫)에 숨겨 놓은 물건을 떠올리며 입매를 쓸어내렸다.
“이곳입니다. 능 소협.”
하인은 식객이 머무르는 전각의 방문을 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게 정리된 내부가 능운소를 반겼다.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장일.”
“예. 회주.”
하인이 냉큼 답했다. 굽실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생각보다 쉬웠어.”
능운소의 말에 하인, 장일이 허리를 들었다.
“의심 많은 작자입니다. 쉬이 본심을 드러내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큼!”
능운소가 작게 기침했다. 이토록 오래 말한 건 처음이었다. 화마에 상한 기도는 말을 할 때마다 통증을 일으켰다. 장일이 재빨리 품에서 새까만 환약을 꺼내 찻주전자에 넣었다. 그리고 잔에 찻물을 따라 능운소에게 내밀었다.
“오늘은 안 드셨죠?”
고개를 끄덕인 능운소가 단번에 찻물을 들이켰다. 목의 붓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장시간 움직이면 저리던 피부 당김도 부드럽게 풀렸다.
“보셨습니까? 장이와 장삼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끄덕. 능운소는 그를 보던 무리에 섞여 있던 장일의 형제들을 떠올렸다.
“모두 청림방에 잘 침투했습니다. 장삼은 방도들과 잘 어울리고 있고 장이는 이번에 부총관이 되었습니다. 그도 제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능운소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옆으로 간 장일이 자연스레 옷 시중을 들었다.
“아직 물건은 찾지 못했습니다.”
“귀한 것이니 놈의 비고에 있을 거야.”
“어찌하실 겁니까?”
“꽃에 벌레가 꼬이듯 놈을 꾀어내야지.”
참화를 일으킨 물건이었다. 이대로 창고에서 썩히기엔 아까울 것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났으니 저절로 몸이 달을 터였다.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셔야 합니다.”
장일의 당부가 아니라도 그럴 생각이었다. 이곳은 적의 심부였다. 단 하나의 꼬투리도 잡혀선 안 되었다. 긴 세월의 고생을 허투루 돌릴 순 없었다.
침의로 갈아입은 능운소가 자리에 누웠다. 그의 휴식을 위해 장일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적막한 내부에서 한숨이 나직이 터졌다.
끝내 장일에게 묻지 않은 말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없었지.”
답하는 이가 없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가 돌아오지 못할 시기를 노린 거였다. 능운소는 가면을 벗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심란함에 잠이 오지 않았다.
“호오? 저것은 노호창(怒號槍) 하대방의 십절화류창(十絶火流槍)이 아닌가? 최근에는 산해관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고향으로 제자를 보냈구만그래. 흘흘흘.”
개방의 복건성 분타주 취걸개는 동냥으로 채운 바가지 속의 음식물을 손으로 집어 먹으며 머리를 굴렸다.
“어디 보자. 노호창의 제자 이름이…….”
끙끙대며 고민하던 그는 뒤늦게 떠오른 이름에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그렇지! 멸염창(滅炎槍) 무명(無名)이었지!”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고, 아까워라! 호들갑 떨며 땅에 떨어진 걸 하나하나 주워 먹던 취걸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멸염창이 어찌 멸문한 무이문의 잔재를 찾을꼬?”
취걸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무언가 냄새가 났다. 정보의 냄새가. 이윽고 그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추억은 기억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사내는 허름하지만 깔끔한 사당을 쳐다보며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혼위전(魂慰殿)」
‘넋을 위로한다’라…….
눈을 감자 과거의 잔재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사람들이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하염없이 손짓했다. 허상임을 알아도 사내는 거부할 수 없었다. 눈을 뜨고 혼위전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내부에 자리한 수많은 위패가 그를 반겼다. 그 중앙에 아비의 위패가 있었다.
아비와의 추억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누구냐!”
“감히 무이문의 사당을 침범하다니!”
“정체를 밝혀라!”
상념이 깨지고 여럿의 기척이 느껴졌다. 비호처럼 내려앉은 이들이 사내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고요히 위패를 응시하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노립을 올려 시선을 맞춘 그가 느릿하지만 또렷하게 답했다.
“소생은 노호창의 제자이자 멸염창이란 과분한 별호로 불리는 무명이라 하오. 그리고…….”
오랫동안 말한 적 없다는 듯 쇳소리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는 목에서 옥패를 꺼내 그들에게 내보였다.
“멸문한 무이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능가의 운소요.”
***
“뭐! 누가 왔다고?”
노성을 지르며 방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손바닥을 내리치자 굉음과 함께 탁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거대한 덩치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뻗어 나왔다. 하인은 벌벌 떨며 제가 가져온 소식을 다시 고했다.
“무, 무이문의 생존자가 나타났답니다. 그것도 장절 능만협 대협의 아들인…….”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주가 밖으로 튀어 나갔다. 다급하게 마당으로 내려선 그는 방도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오는 한 사내를 발견하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침 그를 발견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강렬하게 부딪쳤다.
한참의 침묵 후 사내가 포권하며 읍했다.
“무림말학이 무림칠절(武林七絶)의 일인인 권절(拳絶)을 뵙습니다.”
“네놈은 누구냐.”
“…….”
“누구건대 감히 내 친우의 아들을 칭하느냐.”
불길을 담은 눈길이 사내에게 쏟아졌다. 손등에 힘줄이 파릇하게 솟은 것이 사내의 거짓이 밝혀지면 당장에라도 권장을 날릴 것 같았다.
“소생은 노호창 하대방의 제자이자…….”
제 목을 잠시 매만진 사내가 말을 이었다.
“참화를 맞은 무이문 문주 장절(掌絶) 능만엽의 아들인 능운소입니다.”
“……!”
소란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능만엽.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한때 이 지역의 패자이자 무림칠절의 일인이었던 고명한 고수가 하룻밤 새 화를 당했고 문파마저 멸문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건 청림방의 방주인 단천악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능만엽은 그의 친우였다. 지금도 범인을 추적하는 그를 두고 강호 동도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현신이 있다면 능만엽과 단천악을 일컫는 거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거짓이다! 당시의 참화는 고절한 내 친우도 피할 수 없던 참혹한 것이었다. 미흡한 무공을 지녔던 아이가 어찌 살아남았겠느냐. 네 말이 진실이라면 증좌를 보여라!”
타당한 말이었다. 사내, 능운소는 품을 뒤적여 손바닥만 한 옥패를 꺼냈다. 구름 사이를 노니는 학에 새겨진 능(能). 능씨 가문의 명패였다. 보란 듯이 허공에 치켜든 그곳을 방주가 허공섭물로 끌어당겼다. 꼼꼼히 옥패를 살핀 그는 아직 가시지 않은 의혹을 내뱉었다.
“진패가 맞다. 허나 이것이 네가 능운소란 증거가 될 순 없다. 물건은 얼마든지 진짜처럼 만들 수 있으니.”
이 또한 타당했다. 능운소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 손을 들었다. 천천히 원을 그리던 모양새에서 벼락처럼 기의 그물이 얽혔다. 그를 향해 방주가 달려들었다. 수십 번의 공수(攻守)가 오가더니 낙뢰처럼 내지른 방주의 권법을 능운수가 손날로 쳐 냈다. 깡! 하는 쇳소리와 함께 공격이 비틀렸다.
“귀척조수(晷斥爪手)!”
누군가가 그 무공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훌쩍 물러난 방주가 손을 털었다. 깊이는 얇았으나 틀림없는 친우의 무공이었다.
“……따라오너라.”
방주의 눈짓에 능운소를 둘러싸고 있던 방도들이 물러갔다. 등을 돌려 걸어가는 방주를 능운소가 뒤따랐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이 불편할 법도 하건만 노립 안쪽의 얼굴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정말 운소란 말인가?”
“어찌 그런…….”
그중에서도 네 명의 중년인이 보내는 시선이 가장 강렬했다. 그들은 불안한 눈으로 능운소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앉게.”
맞은편을 가리키는 손에 능운소가 자리에 앉았다. 그와 마주 보고 앉은 방주가 옥패를 돌려주었다.
“운소… 운소라…….”
오랜 이름이었다. 그때의 참화 이후로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단 숙부.”
“…….”
단천악의 눈이 살풋 떨렸다. 능만엽과는 형제와도 같은 친우 사이인 데다 몇 살 어렸던 그는 능운소에게 항상 숙부라고 불렸다. 그제야 단천악은 사내의 외양을 천천히 살폈다. 얼굴 반쪽이 흉하게 일그러져 가면으로 가리고 있었으나 생김새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있구나. 네게서 능 형의 얼굴이 보인다.”
단천악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하얀 피부에 미남자였던 능만엽을 떠올렸다. 눈앞의 사내도 죽은 친우처럼 새하얀 피부에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딱히 옥패가 아니라도 능만엽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둘이 부자라는 것에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닮은 얼굴이었다.
“믿, 을 수가 없구나. 그토록 참혹했던 곳에서 살아남았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제 손을 잡은 단천악을 보며 능운소가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그때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여길 찾아왔느냐?”
단천악의 얼굴엔 아직도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능운소는 껄끔거리는 목을 문지르며 느릿하게 지난 삶을 얘기했다.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저를 사부님께서 거둬 주셨습니다.”
“사부가 노호창 대협이라 했던가?”
“예. 제 아버님과 알던 사이라 했습니다.”
그 말에 단천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 대협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으나 그가 능 형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장원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늘.”
“친분이라기보단 큰 신세를 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숨기고 지금까지 길러 주신 겁니다.”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이상했지. 하 대협의 근거지는 이 근방인데 한동안 보이지 않았어. 간혹 산해관 근처에서 목격했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사부님께선 알 수 없는 적에게서 절 보호하기 위해 새외로 떠돌았습니다. 변방을 비롯해 조선(朝鮮)까지 다녀왔지요.”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단천악은 과거에 몇 번 만났던 하대방을 떠올렸다. 강퍅한 인상에 냉소적인 성품이 무척 거만한 인사였다. 그런 이가 은혜를 갚기 위해 능운소를 빼돌렸다니.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네가 능운소란 것은 하 대협이 알려 준 것이냐?”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라서 사부님께 확인받았습니다.”
“그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고?”
집요한 물음에 능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얽힌 피부를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상흔의 원흉이라면……. 그렇습니다. 사부님께선 큰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기억나는 거라곤 가문의 무공 몇 수와 이름뿐입니다.”
“…….”
단천악이 나직이 탄식했다. 안타까운 얼굴과 달리 그의 마음은 내심 안도로 물들었다. 기억이 온전해도 거리낄 건 없었으나 이왕이면 없는 게 나았다.
“어찌 되었건 살아 있어 다행이다. 기억이야 고향에 돌아왔으니 언젠가는 떠오르지 않겠느냐. 청림방의 객방을 내어 줄 테니 장원에 머무르며 함께 노력해 보자꾸나.”
부드러운 다독임에 능운소는 손을 빼 깊이 포권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대협.”
“아까처럼 단 숙부라 부르거라. 네 아비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으니 너는 내 조카나 다름없다.”
“……예. 숙부님.”
“하인이 네가 지낼 방을 안내해 줄 것이다. 조만간 네 거처를 마련할 테니 그때까진 불편해도 참거라.”
그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리고 하인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능운소가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는 단천악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기억 소실이라?”
아직은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비고(秘庫)에 숨겨 놓은 물건을 떠올리며 입매를 쓸어내렸다.
“이곳입니다. 능 소협.”
하인은 식객이 머무르는 전각의 방문을 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게 정리된 내부가 능운소를 반겼다.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장일.”
“예. 회주.”
하인이 냉큼 답했다. 굽실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생각보다 쉬웠어.”
능운소의 말에 하인, 장일이 허리를 들었다.
“의심 많은 작자입니다. 쉬이 본심을 드러내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큼!”
능운소가 작게 기침했다. 이토록 오래 말한 건 처음이었다. 화마에 상한 기도는 말을 할 때마다 통증을 일으켰다. 장일이 재빨리 품에서 새까만 환약을 꺼내 찻주전자에 넣었다. 그리고 잔에 찻물을 따라 능운소에게 내밀었다.
“오늘은 안 드셨죠?”
고개를 끄덕인 능운소가 단번에 찻물을 들이켰다. 목의 붓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장시간 움직이면 저리던 피부 당김도 부드럽게 풀렸다.
“보셨습니까? 장이와 장삼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끄덕. 능운소는 그를 보던 무리에 섞여 있던 장일의 형제들을 떠올렸다.
“모두 청림방에 잘 침투했습니다. 장삼은 방도들과 잘 어울리고 있고 장이는 이번에 부총관이 되었습니다. 그도 제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능운소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의 옆으로 간 장일이 자연스레 옷 시중을 들었다.
“아직 물건은 찾지 못했습니다.”
“귀한 것이니 놈의 비고에 있을 거야.”
“어찌하실 겁니까?”
“꽃에 벌레가 꼬이듯 놈을 꾀어내야지.”
참화를 일으킨 물건이었다. 이대로 창고에서 썩히기엔 아까울 것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났으니 저절로 몸이 달을 터였다.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셔야 합니다.”
장일의 당부가 아니라도 그럴 생각이었다. 이곳은 적의 심부였다. 단 하나의 꼬투리도 잡혀선 안 되었다. 긴 세월의 고생을 허투루 돌릴 순 없었다.
침의로 갈아입은 능운소가 자리에 누웠다. 그의 휴식을 위해 장일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적막한 내부에서 한숨이 나직이 터졌다.
끝내 장일에게 묻지 않은 말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는 없었지.”
답하는 이가 없어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가 돌아오지 못할 시기를 노린 거였다. 능운소는 가면을 벗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심란함에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