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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13화)
第五章 넋을 놓다(3)
‘으읔. 어찌 된 일이지. 으으.’
뼈를 얼리는 듯한 한기와 온몸이 재가 될 것 같은 지독한 열기가 번갈아 가며 엄습했고, 알 수 없는 소리가 귓가를 윙윙대며 정신을 차리려는 그의 노력을 방해했다.
고통에 이미 익숙해진 그였지만, 지금의 고통은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비명이라도 지르면 고통이 줄어들까. 하지만, 입조차 벌릴 수도 없었다.
효로는 자신도 모르게 할아버지께서 전해 준 구결을 암송하고 호흡법을 시행하여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안간힘을 다했다.
‘천존지공(天尊地쭪) 건곤정의(乾坤定矣) 재천유상(在天有象) 재지유형(在地有形) 변화존의(變化存矣)…….’
그의 노력이 부족했는가. 점점 의식이 흐려지더니 아득한 느낌을 끝으로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아스라한 의식의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어느 순간, 미동도 없던 효로의 신형이 부르르 떨리더니 눈을 번쩍 떴다.
화악―
핏빛 적안.
피보다 붉은 기운이 그의 눈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오며, 몸에서 기이하고 광폭한 기운이 사막에서 피어나는 용오름처럼 거칠게 휘감아 돌며 주위로 퍼져 나갔다.
쾅―
피어오르던 향로가 박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방 안의 모든 기물이 거칠게 흩어졌다. 비록 기파가 전각을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흩날리는 파편이 삽시간에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눈송이처럼 날아 내렸다.
한 번의 폭발로 기운이 모두 흩어졌는가. 효로의 몸에서 뿜어지는 격렬한 기운은 사라졌지만, 적안은 여전히 사이한 붉은 기운을 줄기줄기 뿜었다.
전각의 밖에서 장원의 무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바쁘게 움직이던 단소운은 고막을 울리는 굉음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기운을 느끼고 놀라 전각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저건 뭐지?’
전각 안에서 한 쌍의 핏빛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동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손가락조차 까딱할 수 없었다.
정무추포단의 삼조장인 산화일장도 갑자기 들린 굉음에 단소운의 곁으로 날아와 내려서며 헛숨을 들이켰다.
“헉.”
몸을 일으키는지 적안이 위로 조금 이동하더니 잠깐 흔들렸다. 적안의 흔들림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경계했다.
“모두 조심해라.”
주위의 무인들에게 경고 한 산화일장은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핥고 침을 삼켰다.
“꿀꺽.”
단소운은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끼며 뽑아 든 검을 다잡았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에 흠칫 몸을 떨었다.
비틀거리는 적안이 전각 밖으로 서서히 몸을 드러내었다. 붉은 노을이 진 서녘 하늘을 등지고 모습을 드러낸 적안의 주인. 거칠게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흩날렸고 몸에서는 위험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효로의 작은 몸이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움직였다.
턱.
그가 걸음을 디딜 때마다 검게 변한 땅에서 시커먼 독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어스름해지기 시작한 터라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턱.
적안에서 붉은 기운이 뚝뚝 흐르는 듯한 기괴한 모습에 주변의 모든 이는 두려움과 괴이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산화일장은 적안의 주인이 작은 소년임을 확인하고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를 확인한 탓에 두려움은 조금 희석되었으나 소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은 탓이었다.
소년은 인면마의가 시행한 역천대법의 희생자가 아닌가. 아직 뚜렷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그에게 살수를 펼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단소운의 경우는 달랐다. 효로를 확인하자마자 불같은 노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 벌레처럼 하찮게 여기던 놈이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도 치욕스러웠다. 저놈이 두려움에 몸을 떠는 자신을 보고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단소운이 효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소협! 멈추시오.”
성급하다 느낀 산화일장이 고함치며 그를 막으려 했지만,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벼락같이 다가간 단소운이 검을 휘둘렀다.
쉬익―
간결하고 빠른 수법. 날카로운 파공음을 울리며 내공이 실린 예리한 검이 하얀 살기를 두른 채 효로의 목을 노리고 떨어지자, 지켜보는 산화일장의 눈이 커지고 안타까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에 소년의 가녀린 목이 베어지는 광경이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깡―
“헉.”
산화일장의 눈이 더욱 커졌고, 손을 썼던 단소운은 비칠거리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효로의 몸에서 발현한 강한 반탄력에 검을 든 그의 손은 거세게 떨렸다.
“소장주를 보호해라!”
소장주의 낭패한 모습에 단가장의 무인들이 효로의 주위를 에워싸고 저마다 병기를 꺼내 들며 은은한 살기를 뿜었다. 그들은 소장주에게 매일 매질당하는 효로의 약한 모습이 뇌리에 남은 탓에 그를 경시하는 마음이 컸다. 다만, 소장주가 아직 별다른 명을 내리지 않았기에 당장 움직이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단소운의 일그러진 얼굴이 점점 험악해지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놈을 내 앞에 꿇려라.”
소장주의 명이 떨어지자 단가장 무인들이 주저 없이 동시에 몸을 날려 효로를 덮쳐 갔다. 무공도 모르는 힘없는 소년을 제압하려는 그들은 내력조차 끌어올리지 않은 채 완력만으로 효로의 팔과 목을 잡아 갔다.
건장한 무인들의 공격에 저항할 수 없었던가. 효로는 그저 가만히 서서 움직임이 없었다.
무인들의 손이 효로의 몸에 닿는 순간 효로의 적안이 살짝 짙어졌고, 그의 몸에서 기이한 반탄력이 피어났다.
“읔.”
“큭.”
“헉.”
쿵.
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사방으로 튕긴 무인들이 바닥을 뒹굴며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지켜보던 단소운과 산화일장은 드러난 결과에 놀라 눈이 커졌다. 효로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 공격한 무인들이 튕겨진 것이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놈.”
놀랐음에도 이를 부드득 간 단소운이 다시 몸을 날려 효로에게 짓쳐 들어갔다.
휙―
뭔가 이상함을 느낀 산화일장이 바닥에 뒹군 무사들을 지켜보다 다급히 단소운을 말렸다.
“소장주!”
그러나 이미 단소운은 효로에게 다가서며 목을 잡아 갔다. 효로의 괴이한 적안이 더욱 짙어졌다.
“컥.”
쿵.
단소운도 단가장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효로의 목을 잡은 손으로 느껴진 강한 반탄력에 튕겨 흙바닥에 나뒹굴며 신음을 흘렸고, 어느 틈에 중독되었는지 그의 손이 점차 검게 물들었다.
단소운은 놀라고 당황한 마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팔과 효로를 번갈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점점 검게 변하는 자신의 팔에서 참기 어려운 고통이 밀려왔다.
‘어찌 이런…….’
산화일장은 소장주의 손이 검게 변한 것을 보고 전각 안에 극독이 있다는 은림신접의 말이 떠올랐다. 더구나 먼저 공격했던 무인들은 바닥에 쓰러져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독?’
독도 보통 독이 아니었다. 그저 상대에게 닿았을 뿐인데 모두 절명했고, 소장주는 팔이 검게 변했다.
“조심해라. 독이다.”
타격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지 뒤로 한 걸음 물러선 효로는 핏빛이 줄줄 흐르는 적안으로 자신을 공격한 단소운을 잠시 노려보더니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서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면서도 천천히 다가서는 표정 없는 효로의 타는 듯한 적안은 붉은 노을과 어울려 사신(死神)처럼 보였는지라 단소운은 갑자기 극심한 공포에 빠져들었다.
“오, 오지 마.”
공포에 질린 단소운이 보법을 펼쳐 피할 생각도 못하고 효로가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 치며 허둥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적안을 일렁이며 다가서는 효로의 걸음은 멈춰지지 않고 점점 가까워졌다.
‘젠, 젠장.’
第六章 운명의 길에 첫발을 딛다(1)
산화낙영장(散花落英掌)을 극성으로 익힌 산화일장도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내력이 실린 검을 튕겨 내는 데다 극독을 뿜어내는 상대에게 육장(肉掌)으로 공격해 물리칠 자신이 없었다. 몸을 피할 수도 없고 단소운을 구하려 공격할 엄두도 나지 않는 진퇴양난에 처한 그는 그저 움찔거리기만 했다.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던 장주는 자식이 위험에 처하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무인들이 죽었고 효로의 적안이 줄기줄기 불을 뿜고 있는데도 그의 눈에는 위기에 빠진 단소운의 모습만 보였다. 단소운에게 달려가던 장주는 급한 마음에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네 이놈! 당장 걸음을 멈추지 못할까!”
효로는 장주의 호통에 잠시 흠칫했지만, 발걸음을 멈추기에는 부족했는지 단소운에게 다가서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몸에서 위험한 기운이 더 짙게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저벅. 저벅. 저벅.
효로의 발걸음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엉덩이 걸음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단소운은 무겁게 내리누르는 공포에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체념했다. 그의 뇌리로 지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고 그의 눈가에 회한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이 맺혔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때, 그의 귀를 때리는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운아, 얼른 피해라. 컥.”
황급히 눈을 뜬 단소운은 효로의 몸을 끌어안은 장주의 모습에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무공을 모르는 장주가 효로를 막을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그저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는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아버님.”
“어서, 피하래도. 쿨럭.”
극독을 뿜는 효로의 몸을 끌어안아 검게 변한 장주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입에서 검은 피를 울컥 토했다. 그러면서도 효로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고통이 가득한 시선으로 단소운에게 몸을 피하라 연방 재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