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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15화)
第六章 운명의 길에 첫발을 딛다(3)
“흑흑. 전 어떻게 하라고 돌아가신 거예요. 왜 이토록 무거운 짐을 제게 지우셨나요?”
속만 썩인 자신이 용서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랑을 지키려 고집을 부리면서 아버지의 부아만 돋우었는데 이젠 그 죄를 갚을 방법이 없어졌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만 떠올랐고, 가슴을 메는 후회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깊은 슬픔은 시비의 조심스레 이어지는 말에 아득한 절망으로 변하였다.
“그 흉악한 짓을 한 놈이 글쎄 초관 선생의 시동인 효로라고 합니다.”
단장의 슬픔으로 이어지던 단소소의 울음이 일순 멈추었다. 효로?
바짝 여윈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효……로, 효로라고 했느냐?”
“네, 아가씨.”
사정을 아는 시비의 대답은 조심스러웠지만, 단소소의 귀에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효로, 효로가 어떻게……. 왜?”
“저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몰라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던 걸요.”
벌떡 몸을 일으킨 단소소가 시비를 재촉했다.
“그 착한 효로가 아버지를……? 믿을 수가 없구나. 앞장서거라. 오라버니를 봬야겠다.”
시비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지금 가셔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신 소장주님께 아무 말도 들으실 수 없으실 거예요. 조금 기다리셨다가 정신을 차리시고 나서 찾아가셔야 해요. 진정하세요, 아가씨.”
“아니다. 내 가서 오라버니의 상세도 확인하고 정신을 차리시면 직접 들을 것이다. 어서 안내하여라.”
몸을 일으킨 단소소가 재차 재촉하자 시비는 어쩔 수 없이 앞장섰다. 시비를 뒤따르는 단소소는 갖가지 상념에 가슴이 미어졌다.
‘효로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
***
어둑해진 길을 걷던 노인은 오랜만에 손자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맺힌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가끔 손에 들린 선물에 시선을 주면서 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마음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내상 치료를 성공했는지 예전의 병색이 완연했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불그스레한 안색과 형형한 안광, 힘찬 걸음걸이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한시라도 빨리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마을 어귀로 접어들었다.
“음.”
지독한 독기.
마을을 가득 채운 독기를 감지한 노인은 침음을 흘리며 안색을 굳혔다.
‘불길한 기운이군. 효로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
고개를 흔들었지만, 손자에 대한 걱정에 그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독기가 더욱 짙어지자 결국 신법을 펼쳤다.
쉬익―
엄청난 속도로 신형을 뽑아 올린 노인은 순식간에 자신의 장원으로 날아 내렸다.
“효로야! 홍 노파!”
다급하게 홍 노파와 손자의 이름을 부르며 손자의 방으로 다가간 노인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텅 빈 방이 노인을 실망시켰다. 다시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긴 노인이 막 방문을 잡아 갈 때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노인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뉘시오?”
인기척에 방문을 연 홍 노파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어르신.”
“잘 지냈는가? 내 좀 늦었네. 그동안 고생했겠구먼.”
노인의 치하에 홍 노파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쇤네가 고생은 무슨…….”
“효로는 어디 있는가? 마을 공기가 심상치 않네.”
손자의 행적을 묻는 노인의 질문에 홍 노파는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녀의 이상한 낌새에 불길한 예감이 든 노인이 안색을 굳히며 무서운 기세를 뿜었다.
“무슨 일인가? 효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노인의 사나운 기세에 홍 노파는 입술이 새파랗게 변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그게…….”
홍 노파가 말을 잇지 못하자 노인은 기세를 줄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어서 말해 보게. 무슨 일인가?”
홍 노파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쇤, 쇤네가 아무리 말려도 도련님께서 단가장 글 선생에게 글을 배우시겠다며 시동이 되기를 자청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쇤네는…….”
마음이 급했던 노인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효로가 지금 단가장에 있는가?”
“네, 어르신.”
단가장. 자신도 아는 장원이었다. 마을에 들를 적마다 본 마을에서 가장 큰 장원. 위치를 머리에 떠올린 노인의 신형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유령처럼 사라진 노인의 신형에 홍 노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다시 찌푸려졌다. 노인의 놀라운 능력에 놀라고, 효로를 괴롭힌 사실에 두려웠다. 노인이 알게 되면 어떤 치도곤을 당할지 훤히 보였다.
‘도, 도망가야 해.’
방에 들어간 홍 노파는 은자와 옷가지 몇 가지를 서둘러 챙기기 시작했다.
신법을 펼쳐 삽시간에 단가장에 다다른 노인은 신법을 거두고는 빠른 걸음으로 정문으로 향했다. 효로의 안위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다짜고짜 남의 집 담을 넘을 수는 없었다.
정문에 도착했을 때 마침 장원의 식솔로 보이는 한 장한을 발견한 노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여보게, 말 좀 묻겠네.”
장한은 노인을 아래위로 훑더니 노인이 장주에게 무슨 부탁을 하러 온 것으로 생각한 모양인지 불퉁스럽게 말을 뱉었다.
“장원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니 다음에 오시오.”
“난 이곳에서 글 선생의 시동으로 있는 효로란 아이의 할아비네. 그 아이를 좀 불러 줄 수 있겠나?”
노인의 말에 안색이 변하더니 장한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문 안으로 사라졌고, 잠시 후, 꽤 많은 사람이 우르르 몰려와 노인을 둘러쌌다.
둘러싼 이들의 흉흉한 기세를 모를 리 없지만, 노인은 차분한 표정으로 그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난 단지 손자를 보러 온 것뿐인데 왜 이리 핍박하려는 것인가?”
노인의 말에 쟁기를 꼬나 쥔 장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인이 그 악마 새끼의 조부가 맞소이까?”
“악마라니?”
노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장한이 눈을 부라렸다.
“효로 새끼가 장주님을 해치고, 소장주님의 팔을 잃게 하였단 말이오. 그러니 악마지 뭐겠소. 그 새끼의 일가가 맞소이까?”
순간 노인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뭔가 변고가 생긴 것이다. 불길한 마음에 노인의 기운이 거칠어졌다.
노인의 입이 열리며 여태 부드러웠던 음성이 아니라 지옥의 유부에서나 들을 것 같은 차갑고 건조한 음성이 흘렀다.
“그 아이, 어디에 있나?”
단지 한마디 말을 뱉었을 뿐인데 그를 에워쌌던 장한들이 지독한 공포에 휩싸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오줌을 지렸다. 노인의 몸에서 광포한 기운이 거칠게 일렁거리며 짙어지자 심약한 이들은 그대로 기절했다.
“어디 있나?”
노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고인은 뉘십니까?”
인면마의의 종적을 놓치고 장원으로 돌아오던 북풍냉검은 광포한 기운을 감지하고 신법을 펼쳐 수하들보다 먼저 서둘러 도착하였고, 눈앞에 서서 기운을 뿜어내는 노인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간파한 그는 정중하게 물었던 것이다.
노인의 싸늘한 음성이 전해졌다.
“난 효로의 할아비다. 그 아이 어디 있나?”
효로?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북풍냉검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는 아이가 맞는다면, 안에 있을 것입니다. 저도 걱정하는 차였으니 함께 들어가시지요.”
노인의 조금 부드러워진, 염려 가득한 음성이 흘렀다.
“걱정하다니.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니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노인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어서 앞장서게.”
북풍냉검이 앞장서서 들어가자 노인이 쓰러진 장한들을 일견하더니 그의 뒤를 급히 따랐다. 삼조가 포위한 전각에 도착한 북풍냉검과 노인은 느껴지는 위험한 기운에 안색을 굳혔다. 북풍냉검이 노인에게 다시 포권을 취했다.
“제가 없는 동안 또 다른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연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상대의 정중한 태도에 무턱대고 강짜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게.”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북풍냉검이 삼조장 산화일장 기양천을 찾았다. 효로의 뒤를 쫓는 산화일장 대신 부조장이 다가와 보고하는 것을 들은 북풍냉검은 놀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장주와 소장주가 당한 일도 문제지만, 극독에 중독된 극강 고수의 손자인 효로가 지금 이곳에 없다는 말에 놀람과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갔나?”
“조장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효시(嚆矢)를 쏘아 올리면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위치를 확인하고 내게 보고하게.”
“존명.”
북풍냉검이 시선을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손자를 찾는지 침중한 안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노인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웠다. 잰걸음으로 노인에게 돌아가던 그의 뇌리에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하는지 걱정이 가득했다.
삐이이이―
경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노인에게 한마디라도 잘못한다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전해야 할 소식이 좋지 않은 것이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노인의 곁으로 다가간 북풍냉검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르신,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안색은 딱딱하게 굳었지만,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부드러웠다.
“말하게.”
북풍냉검은 자신이 아는 한 자세하게 노인에게 은림신접으로부터 들었던 효로의 생활과 인면마의가 그에게 해로운 대법을 펼친 듯 생각된다는 짐작을 말했다. 제법 길게 이어진 그의 말을 다 들은 노인의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쾅―
“감히 단가장과 마을 사람들이 그 아이를 그렇게 취급했단 말인가? 감히!”
격노한 노인이 강하게 진각을 밟자 광포한 기운이 자욱한 먼지를 휘감아 치솟아올랐다. 갑작스런 굉음에 귀를 막으며 비틀거리던 모두의 놀란 시선이 노인에게 모였고, 내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한 북풍냉검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지금 급한 것은 극독에 중독된 그 아이를 찾는 것입니다. 분을 가라앉히시고 고정하십시오.”
수양이 대단한지 노인의 기운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노기는 노인의 눈에 가득 일렁거렸다.
“그 아이가 잘못되는 날에는 단가장과 이 마을 전체, 그리고 자네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네. 내 장담하지.”
노인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건조하고 냉랭한 음성에 산전수전 다 겪은 북풍냉검조차 등에 전율이 찌르르 흘렀다. 소년에게 일이 생기면 분명히 노인의 말대로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는 오싹한 공포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서둘러 다가온 부조장이 소년의 위치를 보고했다.
“부단주님, 지금 동북방으로 마을을 벗어난 지점에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얼른 신색을 바로 한 북풍냉검이 노인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수하의…….”
“나도 들었네.”
노인의 신형이 희미해지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놀란 북풍냉검이 시선을 옮기니 노인의 신형은 벌써 저만치 깨알만 하게 변해 있었다.
‘도대체 노인의 정체가…….’
신법을 펼치며 마을을 지나던 노인의 눈에 중독된 마을 사람들의 시체와 그 주변에서 오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러나 노인의 눈에는 한 점의 동정심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 면면을 뇌리에 담아 두려는 듯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만약 그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네놈들이 내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번개처럼 날아가던 노인의 신형은 마을을 벗어난 지점에서 아래로 급속하게 떨어졌다.
“헉.”
조심스럽게 효로의 뒤를 따르던 초전우는 갑작스런 노인의 등장에 경악성을 뱉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소년의 앞을 가로막은 노인은 놀라는 그는 안중에 없는지 안타까운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효로야. 이 할아비가, 죄 많은 할아비가 이제야 왔구나. 미안하다, 효로야.”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효로의 얼굴과 온몸에 가득한 생채기를 확인한 노인의 몸에서는 하늘을 찌를 듯 분노가 피어올랐고, 노안(老眼)에는 슬픔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