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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17화)
第七章 모이는 암운(暗雲) 속에서도(2)
그동안 효로가 열심히 수련한 탓에 한 번 빨려든 독기는 기맥을 벗어나지 못했고, 경맥을 따라 도는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독기가 어디로 새어 나가는지는 찾지 못했다.
심법의 묘용이 전신으로 기를 흩뿌리는 것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세세한 경로는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효로의 경우처럼 짙은 독기를 몸에 담은 경우는 전례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독기가 줄어드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독기만 모두 사라진다면, 손자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일 테니.
‘다행이다.’
노인은 손자의 전신을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과거에 그토록 해 주고 싶었지만, 깊은 내상 탓에 해 주지 못해 내내 마음에 걸렸던 추궁과혈을 시술하는 노인의 손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조금 강하게 누르고, 문지르고, 꼬집으며 효로의 전신 혈도를 자극했다.
효로의 몸 안으로 내력을 흘려 장부에 남은 독기와 찌끼들을 깨끗하게 제거했다. 그러나 기맥을 흐르는 독기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괜히 잘못 건드려 폭주라도 하는 날이면 오히려 손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한 차례 추궁과혈을 마친 노인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효로의 얼굴은 퉁퉁 부어 형편없었지만, 장부와 기맥은 제법 튼실한 것이 마음에 든 까닭이었다.
노인은 오랜만에 만난 손자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반추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대숲을 지나던 차가운 겨울바람이 날카로운 풍뢰(風쿂)를 남기며 스쳐 갔지만, 따스한 정이 가득한 방은 요요한 춘풍이 부는 듯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달포가 훌쩍 지났다.
효로의 부기 가득한 얼굴은 가라앉아 예전 귀여운 모습을 회복했지만, 회색 눈동자는 다시 검은색을 되찾지 못했고, 그저 온종일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것이 자신만의 세상에 꼭꼭 숨은 듯했다.
“이놈아, 밥 먹을 때는 흘리지 말아야 한다. 이 쌀 한 톨을 얻으려고 농부는 한여름을 뜨거운 햇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는 법이다.”
밥을 떠먹이던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손자의 뺨에 붙은 밥알을 떼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다시 국그릇을 들어 올린 노인이 효로의 입에 대고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 흘리면 엉덩이를 때려 줄 테다.”
노인의 으름장에도 효로의 입가로 국물이 흘러내렸다.
“쯧쯧, 이놈이 이젠 할아비 말을 무서워하지도 않는구나.”
깨끗한 면포로 손자의 입을 닦으며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네 녀석의 몸도 많이 좋아졌으니 할아비의 친구를 찾아가서 네놈에게 침으로 따끔한 맛을 보여 달라 부탁해야겠구나. 근데 그놈이 너를 치료해 줄지 모르겠구나. 군소리 없이 선선히 부탁을 들어주면 좋으련만 의외로 깐깐한 놈이라서…….”
심술이 그득한 그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는지 노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다시 노인이 얼굴을 펴더니 반상을 들고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그놈이 널 치료하도록 할 테니 넌 아무런 걱정을 말아라. 말 안 들으면 패지 뭐.”
노인의 농에도 무표정한 효로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노인은 효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지 계속 중얼거렸다.
“네 병을 치료하면, 마을에 한번 들르자꾸나. 보고 싶은 얼굴도 좀 보고, 갚아야 할 것도 있고 하니.”
마지막 말을 하며 노인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손자의 복수보다는 치료가 먼저였다. 복수야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라도 할 수 있지만, 치료는 시기를 놓치면 큰 후회로 남을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
세상과 단절된 효로와 할아버지는 몰랐지만, 천하는 한 마을을 몰살시킨 적안마동(赤眼魔瞳)의 등장으로 들끓었다. 처음 단가장과 마을의 비극이 전해졌을 때는 사실과 가까웠지만, 입을 하나 건널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난 적안마동의 무위는 어느새 천하에 그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마인으로 등극해 있었다.
“아, 이 친구야, 적안마동이 적안마동(赤眼魔童)이니 체구가 작은 아이가 틀림없다고 그러네.”
한 장한이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자 그의 동료인 듯한 이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라도 그러네. 생각해 보게. 그런 무위를 가진 마인이 어찌 어린아이겠나. 아마 체구가 작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 틀림없을 거네.”
“허어, 그 친구, 어디서 누구한테 헛소문을 듣고 고집을 피우는가? 그 마을에서 온 장씨에게 직접 들었다네. 작은 아이가 틀림없네.”
“허참. 아니라도 그러네.”
두 장한이 서로 옳다고 주장하며 언성을 높이자 객잔 안의 모든 이들이 각자 주워들은 소문을 말하며 두 패로 갈라졌고, 급기야 금방 주먹다짐이라도 할 듯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적안마동의 붉은 눈을 보기만 해도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몸이 굳어 꼼짝할 수 없다더군.’
‘가볍게 손을 휘저으니 산이 쪼개지고 강이 갈라졌다던데?’
‘독장 일수에 절대고수들이 추풍낙엽이 되었다더군.’
소문은 날로 과장이 더해져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안마동은 마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정파인들은 겉으로는 코웃음 쳤지만, 내심 두려운 마음을 가질 정도였다.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정무맹에서 나서 동분서주하며 소문을 단속했고 호사가들의 입을 닫을 수는 있었지만, 곳곳에서 자신이 적안마동입네 하는 가짜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여전히 그의 명성은 높기만 했다.
급기야 정무맹에서는 적안마동을 공적으로 지목했다. 정무맹에서 공적으로 지명한 이유를 선포했다.
첫째, 눈이 붉어지는 것은 지나친 화기(火氣)가 위로 올라가 눈에 머무는 것으로 이것은 마공의 뚜렷한 징후다. 적안은 특히 극악한 마공 수련의 후유증으로 생기는 것으로 무림의 큰 해악이다.
둘째, 무공을 모르는 백성에게 손을 써 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중죄이다. 더구나 극랄한 독을 사용해 마을 전체를 몰살시키려 한 죄는 공적으로 선포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셋째, 정상적인 대결이 아닌 비겁한 암수로 화산제자를 공격한 것은 무림의 도의에 어긋난 것이니 간교한 그의 공격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으려 공적으로 선포해 무림으로부터 격리한다.
무림이 크게 술렁였다. 새로운 마인의 등장은 항상 많은 화제를 몰고 다녔고, 많은 무림인은 공적을 추포하는 영예를 얻으려 눈에 불을 켜고 적안마동을 찾아다녔다.
***
인면마의의 종적은 묘연했다. 단가장 뒷산의 작은 동굴에서 그가 머물렀던 흔적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그의 행적은 다시 수면 아래로 숨겨졌다.
단가장에 머물면서 인면마의의 행적을 계속 추적하던 북풍냉검은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절반도 넘게 이번 재앙으로 목숨을 잃었기에 마을은 그저 슬픔과 황량함만이 가득했다. 내막을 아는 북풍냉검은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그리 아프지도 않았다.
‘뿌리는 대로 거두는 것인가?’
그의 곁으로 은림신접이 조용히 다가왔다.
“부단주님, 맹에서 명이 내려왔습니다.”
건네지는 전서를 받아 펼친 북풍냉검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은림신접이 궁금한 듯 물었다.
“무슨 명입니까?”
“소년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고, 우리에게 그 소년을 추포하라는 명일세.”
“소년을 왜?”
“소년이 몸에 품은 극독이 무림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이네.”
위험하기는 했다. 소년이 품은 극독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자신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년은 인면마의가 펼친 사악한 대법의 희생자가 아닌가. 더구나 소년은 무공도 모르지 않는가. 무공을 모르는 무림공적이라니.
“그래도 그건 좀…….”
“나도 그리 생각하네. 소년은 인면마의의 독수에 당한 희생자나 마찬가지인데…….”
북풍냉검이 맹에 알리면서 세세하게 정황을 기록해 전서를 보냈건만, 생각지도 않았던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전후 사정을 잘 아는 그들은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은림신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북풍냉검이 무심한 시선을 마을로 돌렸다.
“명령이 내려지면 따라야만 하는 것이 우리 운명이 아니겠나. 조장들을 모으게.”
“알았습니다.”
막 명을 수행하려 몸을 돌리던 은림신접의 움직임이 들려오는 부단주의 음성에 멈추었다.
“근데…….”
다시 부단주를 향한 은림신접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이 이상하구먼. 자네 그 연유를 아는가?”
마을로 시선을 돌린 은림신접의 눈에 정든 마을을 떠나는 한 가족의 행렬로 보이는 움직임이 들어왔다.
“마을에 다시 소년이 복수하러 돌아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돈다고 하더군요. 횡액을 피하려 마을을 떠나는 이들인 모양입니다.”
북풍냉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저들은 횡액이라 생각하겠지…….”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을 탓하는 것이 인심이 아닌가.
“그럼 저는 조장들에게 명을 전하겠습니다.”
“수고하시게.”
몸을 돌린 은림신접이 멀어지자 무림공적이 가지는 의미를 아주 잘 아는 북풍냉검은 시리도록 파란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타깝군. 무공을 익히지 않은 최초의 무림공적이 된 건가?’
노인의 보복이 있을까 걱정하던 북풍냉검은 달포가 넘어가자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소년이 잘못되었다면, 경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노인이 이미 마을과 단가장을 쑥밭으로 만들러 달려왔을 터인데 아직 조용하다는 말은 소년에게 별문제가 없다는 의미였다.
“다행이군.”
뜬금없는 북풍냉검의 말에 함께 조반을 먹던 은림신접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년의 조부를 잠시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흘린 말이네.”
은림신접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색을 굳혔다. 함께 식사하던 단소소의 바짝 야윈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고, 한동안 몸져누워 있다가 겨우 거동할 수 있게 된 단소운의 파리한 안색도 딱딱하게 굳었다.
단소소는 효로에 대한 애증(愛憎)으로 황폐해진 상태였지만, 아직도 그를 생각만 하면 가슴이 멨다.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 가고 오라버니의 팔을 잃게 한 것이 그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야속하고 미운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했고, 막을 사이도 없이 어머니가 아버지의 참변에 놀라 달려가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다 남아 있는 독에 목숨을 잃었을 때는 기어이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애원에도 오라비가 그에게 날마다 모진 매질을 했으며 초관 글 선생이 못할 짓을 했다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놓았다. 지금에 와서는 그를 미워하는지 연모하는지 자신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매일 눈물로 지새우고 있었다.
단소운의 눈은 증오의 불길로 활활 타고 있었다. 부모의 원수.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가 효로였다. 더구나 이제는 자신의 사랑하는 누이마저 때때로 마치 벌레 보듯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터라 그에 대한 미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하지만, 그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의 할아비란 노인이 초고수라는 말을 들은 탓에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회복되는 대로 스승을 찾아 무공을 더 수련해 반드시 아버지의 복수를 하리라 다짐에 다짐을 더할 뿐이었다.
모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자 북풍냉검이 미안했던지 화제를 바꾸었다.
“소장주, 아니 이제 장주이시지. 장주, 이제 어찌할 생각이시오?”
단소운으로서는 정무추포단의 부단주인 북풍냉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은인이라 할 수 있었기에 그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화산을 찾을 생각입니다.”
단소운의 대답에 은림신접이 끼어들었다.
“자네가 떠나면 단가장과 자네 누이는 누가 보살필 건가? 내 생각에는 너무 무책임한 결정 같구먼.”
대답은 단소소에게서 나왔다.
“저도 보타문으로 갈 생각입니다.”
은림신접이 물었다.
“보타문에 인연이 있는가?”
“네. 연전에 자비신니(慈悲神尼)께서 장원을 방문하셨을 때 사제삼세(師弟三世)의 연(緣)을 맺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은림신접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단소운은 속으로 놀랐다. 동생의 무재를 탐낸 자비신니가 아버지를 설득해 반강제로 사제지연을 맺기는 했지만, 소소는 절대 무공을 배우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보타문으로 가겠다는 말을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저 암담한 현실을 피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무공을 배워 복수하겠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