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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18화)
第七章 모이는 암운(暗雲) 속에서도(3)
단소운은 소소의 효로에 대한 마음을 잘 아는 탓에 쉽게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복수는 자신의 몫이었기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네 사람은 주제가 무거워지자 마음이 편치 않았기에 식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인면마의의 행적은 선임조장의 인솔로 일조와 이조가 수행한다. 사조는 나와 함께 소년의 종적을 추적한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하진충, 절대 무리하지 마라. 놈의 종적이 확인되면 추적만 하며 전서를 날리도록. 놈의 움직임을 보면 분명히 비호 세력이 있을 것이다. 조심해라.”
“네, 부단주님.”
“출발하라.”
“존명.”
복명한 섬류일수 하진충이 일이조를 인솔해 멀어지자 북풍냉검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남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아이들도 지금쯤 출발했겠군.’
지금쯤 단소운과 단소소도 각자의 길을 떠났을 터였다. 짧지만 함께 있었던 정이 남은 탓인가. 그들의 앞날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가. 은림신접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도 잘할 것입니다.”
북풍냉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래 주시게.”
방향을 잡은 은림신접이 몸을 날리자 북풍냉검과 정무추포단원들이 그의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고 무림공적에 등극한 적안마동을 잡으려 움직이는 그들의 마음은 무거웠고, 소년 조부의 무위가 그 마음에 납덩이를 더했다.
미약하긴 해도 소년의 몸에서 흐른 독기가 곳곳에 흔적을 남겨 두었기에 종적을 추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작은 초옥을 발견하고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곳에 한동안 머문 것은 확인했습니다만 그들이 어디로 떠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당에 남은 흔적을 보면 노인이 소년을 업고 경공으로 길을 떠난 듯 생각됩니다. 노인의 무위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보폭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더 추적하기 어렵습니다.”
은림신접의 보고에 북풍냉검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맹에 그의 종적을 놓쳤다고 보고해야 하는 일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오히려 다행스러운 마음은 또 무엇인가.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북풍냉검의 입이 열렸다.
“소년을 추적하는 임무는 중단하고, 선임조장의 추적에 합류한다. 바로 이동한다.”
북풍냉검의 명에 은림신접의 얼굴이 설핏 미소가 스쳤고, 가볍게 고개 숙여 복명한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뒤를 북풍냉검과 정무추포단원들의 신형이 바짝 따라붙었다.
***
북풍냉검의 빠른 움직임과 달리 손자를 등에 업은 노인의 표정과 걸음은 여유로웠다. 차가운 겨울바람도, 험한 산길도 그의 미소와 여유로움을 방해하지 않았다.
천하가 좁다 종횡하던 그의 신법은 완숙의 경지를 넘은 지 이미 오래였다. 한 걸음 살짝 내디디자 노인의 신형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천뢰유운신법(天쿂流雲身法).
표홀하고 부드러운 묘법이 가득한 신법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공능은 소림의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에 비견할 수 있는 뛰어난 신법이었다.
“이놈아, 다 큰 놈이 늙은이의 등에 업혀 가는 것이 좋으냐?”
손자를 추스르며 입은 툴툴거렸지만, 노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지워지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 손자는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다.
초점 없는 효로의 우울한 잿빛 눈동자는 노인의 걸음에 따라 가볍게 흔들리기만 했고, 꼭 다문 그의 입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내면에 깊이 숨은 의지는 노인의 지극정성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노인은 손자를 포기할 수도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오래된 내상을 치료한 의원을 찾아 길을 나선 참이다. 뛰어난 의술을 지녔지만, 성격이 지랄인 친구를 떠올린 노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치료를 거부하기만 해 봐. 아주 평생 못 잊을 경험을 선사해 주지.’
노인의 내공이 깃든 안력에 멀리 마을이 끌려 들어왔다. 해가 서녘으로 기울기 시작했으니 객잔에서 하루를 묵어 가리라 생각한 노인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오늘은 예서 쉬어 가자꾸나. 따뜻한 물에 몸도 담그고.”
방을 정하고 손자를 따뜻한 물로 씻기고 먹이고 재우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노인은 잠이 든 손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랫동안 금했던 술이 문득 생각난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아, 할아비는 목을 축이고 올 테니 푹 쉬어라.”
안타까운 시선으로 일견하고 아래로 내려간 노인은 제법 독한 동주(董酒)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하고 객잔 안을 둘러보았다. 제법 많은 손님이 왁자지껄하며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개중에 많은 수가 무기를 소지한 무림인들이었다.
과거라면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제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잊힌 인물이니 더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점소이가 술과 안주를 내오자 노인은 자신의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쪼르륵―
맑고 짙은 주액이 잔을 가득 채웠고, 코를 찌르는 주향이 풍겼다. 노인은 술잔을 지그시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더니…….’
세상에 진저리를 치고 은거를 하려는 때 효로를 얻어 행복했었고, 내상을 치료하고 이제 막 손자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즐기려던 순간에 이런 불행이 닥쳐온 것을 생각하던 노인은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목젖이 화끈 타올랐다.
“크윽.”
오랜만의 독주가 목구멍을 찌르르 울리더니 순식간에 뜨거운 느낌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무거웠던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
“그 마을이 텅 비었다는 소식 들었는가?”
“어디 마을 말인가?”
“아, 그 정무맹에서 무림공적으로 선포한 적안마동이 살육을 저질렀던 마을 말일세.”
노인은 옆자리에서 들려온 무림공적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던가. 과거 자신도 무림공적으로 몰려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가.
‘무림공적이라…….’
무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적안마동이 그렇게 흉악한 놈이란 말인가?”
“글쎄. 나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소문에 과장이 많다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독공으로 마을 하나를 몰살시켰다는 것을 보면 보통 놈은 아닐 걸세.”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북풍냉검 대협이 이끄는 정무추포단이 그곳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도 그놈을 못 막았다는 말인가?”
“자네가 잘못 안 걸세. 당시 북풍냉검 대협은 인면마의를 뒤쫓고 있었기에 그곳에 없었다네. 그가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참상이 벌어진 후였다고 알려졌네.”
귀동냥하던 노인은 들어 봄 직한 이름이 나오자 불길한 기분에 그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안색을 굳혔다.
적안마동(赤眼魔瞳).
자신이 효로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 손자의 눈이 붉었다. 인면마의, 북풍냉검의 이름도 되살아났다.
‘그때 부단주라 불린 자의 이름이 북풍냉검이었지?’
그가 쫓던 인물이 인면마의, 그놈이 손자에게 손을 썼다고 했던 그의 말도 떠올랐다. 노인의 얼굴에 분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인면마의,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지옥을 보여 주마.’
그들의 이야기를 대충 유추해 보다 공적이라는 적안마동이 손자라는 결론에 이른 노인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허! 무공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공적으로 지목해 노리다니. 내 이놈들을 그냥…….’
손자를 치료하는 일이 급하지만 않다면 당장 정무맹으로 쳐들어가 요절을 내고 싶었다. 노인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켜고 거칠게 내려놓았다.
쾅.
요란한 소리에 주변의 무인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노인을 쳐다보다 그들의 눈에 비친 광경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단단한 나무 탁자에 술잔이 절반이나 박혀 있었다.
탁자를 부수는 정도는 어지간한 무인들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술잔을 보호하며 나무에 깊숙이 박아 넣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고한 내공을 가진 고수만이 가능할 수법을 아무렇지 않게 펼친 노인이 얼굴을 벌겋게 달군 채 씩씩거리는 탓에 왁자지껄하며 소란스럽던 객잔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적막에 잠겨 들었다.
제법 많은 무림인이 있었지만, 무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이 노인과 어린아이라는 속설이 거짓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끼며 그저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어느 순간, 노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이더니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고, 곧이어 객잔의 방이 늘어선 이층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일순간 객잔 안의 모든 시선이 이층으로 이어졌다.
노인의 신형이 방문을 부수며 손자가 누워 있는 방에 도착한 직후 창이 깨지며 흑의 복면인들이 날아들었다.
와자작.
복면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경악이 어렸다. 분명히 노인이 아래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지붕에서 창으로 날아들었는데 어느새 노인이 방 안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놀란 그들의 눈에 노인의 권이 희미하게 번쩍였다.
“감히!”
펑― 펑― 펑―
“큭.”
“윽.”
날아오던 흑의인들은 바닥에 발도 디뎌 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튕겨 나갔다.
쿵― 쿵― 쿵―
노인이 실수한 것인가. 아니면 노인의 권을 피한 것일까. 그들 중 한 명은 무사히 바닥에 내려서 엉거주춤 자세를 잡았다. 노인의 시선이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살기를 머금고 날카롭게 번쩍였다.
순찰당주 혈철호(血鐵狐) 황적염(黃積閻)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끝이라도 까닥하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노인의 수법에 눈 깜짝할 새 염라대왕을 마주할 것 같았다.
손자 앞에서는 주책없이 허허거리는 힘없는 노인이었으나 적을 앞에 둔 노인은 절대자의 기세로 주변을 장악했다. 노인의 입이 열리며 무거운 음성이 흘렀다.
“뭐하는 놈들이냐?”
낮은 노인의 음성이 혈철호의 고막을 강하게 때리고 뇌리를 뒤흔들었다.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평소 고수라 자부하던 그의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노인의 기세가 조금 줄어들었다.
“뭐하는 놈인지 묻고 있다.”
혈철호의 입이 힘겹게 열리며 떨리는 음성이 흘렀다.
“패, 패자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오. 죽, 죽이시오.”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할 수 있는 어미 닭조차 새끼를 지키려 독수리와 맞서는 것이 이치일진대 하물며 독수리인 노인이 손자를 노린 흑의인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지랄하네.”
노인이 가볍게 일수를 흔들었다. 그의 손짓은 가벼웠지만, 혈철호는 가슴을 쇠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에 입으로 붉은 피를 토하며 객잔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잠시 부르르 떨던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기세를 죽여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온 노인이 손자가 누운 침상으로 다가가며 중얼거렸다.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다. 누구든 걸리면 죽인다.”
효로를 등에 업고 질끈 묶은 노인이 방 안을 한번 휘둘러 보고는 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눈 깜짝할 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쉬익―
객잔의 주인이 굉음에 놀라 서둘러 방으로 달려왔을 때는 부서진 창과 문만이 그에게 방에서 일어난 일을 증언하고 있었고, 창밖에 널브러진 주검이 꿈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단을 일으킨 범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객잔 주인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 수리비는…….”
第八章 아픔을 다독이고(1)
무림이 다시 들끓었다.
묵염산혼권(墨炎散魂拳).
작은 마을에서 발견된 악마의 권법.
과거 천하를 들썩이다 홀연히 자취를 감춘 묵염무영마(墨炎無影魔)라 불린 무림공적이 사용했던 무공으로 파괴적인 위력과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묵염무영마의 다른 무공인 묵월마염도와 마찬가지로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오그라들며 기맥을 상하게 하는 지독한 화상을 남기는 무공이었다. 얼마나 많은 무인이 그저 스친 것만으로 무림을 떠나야 했던가. 다시 나타난 묵염산혼권은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독한 공황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세상 모두가 그를 두려워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무인이 있었다.
“어디서 그 무공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북풍냉검은 객잔에서 들은 소문을 전하는 사조장 극진도(戟震刀) 홍황영(洪煌榮)에게 급히 되물었다.
그는 묵염무염마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