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염기 1권(19화)
第八章 아픔을 다독이고(2)


과거 그를 가장 아껴 주던 사형이 그 악적을 추적하다 목숨을 잃었다. 화산으로 전해진 참혹한 사형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며 복수를 다짐했었지만, 그가 무림에 출두했을 때는 이미 그 악적이 종적을 감춘 탓에 갚아 주지 못했다. 복수의 기회를 찾은 그의 눈에서 퍼런 불길이 일렁였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남단(南丹)의 객잔에서 혈궁(血宮)의 인물들을 주살한 한 노인이 펼쳤다는 소문입니다.”
극진도가 들은 대로 전하자 북풍냉검은 인면마의와 묵염무영마를 저울질하는 모양인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단원들을 모두 모아라. 지금부터 인면마의는 포기하고 묵염무영마를 쫓는다.”
“존명.”
극진도가 명을 전하러 멀어지자 은림신접이 입을 열었다.
“부단주, 외람되지만, 지금의 인원으로 그놈의 뒤를 쫓는 것은 무리입니다. 증원 요청을 해야 합니다.”
극심한 분노 속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은 북풍냉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놈을 추적하며 맹에 증원 요청을 하게.”
“알았습니다.”
북풍냉검은 남단이 있음 직한 방향으로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기다려라. 내 기필코 네놈에게 죗값을 묻겠다.”
북풍냉검은 자신이 쫓을 적이 자신과 면식이 있음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바로 소년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더더욱.

***

“지금 그놈의 위치는?”
안달이 난 음성으로 말을 뱉은 초관, 아니 인면마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의 앞에 부복한 흑의인을 노려보았다.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어디에서도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쾅―
“큭.”
우당탕.
인면마의의 사정없는 발길질에 뒤로 나뒹굴었던 흑의인이 얼른 몸을 일으켜 다시 부복했다.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고 토혈했는지 그의 입 주변으로 번지던 핏물이 기어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지만, 인면마의도 흑의인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내 분명 그냥 감시만 하고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라 지시했음에도 멍청한 혈철호 그 새끼가 일을 망쳐?”
인면마의가 이를 부드득 갈자 흑의인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네놈은 그 멍청한 놈의 어디를 믿고 임무를 맡긴 거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곧 궁에 들어가 보고해야 하는데 뭐라 해야 하냔 말이야.”
자신의 제자만 아니었으면 인면마의는 흑의인을 진즉에 죽였을 터였다. 화풀이 대상을 찾으려는지 두리번거리던 그는 제자의 뒤편에 부복한 흑의인에게 느닷없이 장을 떨쳤다.
퍼석―
비명조차 지를 틈도 없이 머리가 박살 나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부르르 떨던 흑의인이 축 늘어졌다. 목숨이 끊어졌음에도 간헐적으로 사지를 퍼덕였고, 깨진 머리에서 울컥울컥 쏟아진 붉은 피가 바닥으로 천천히 퍼졌지만, 부복한 누구도 꼼짝하지 않았다.
인면마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상관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하는 수하는 살아 있을 의미가 없다.”
잠시 말을 멈춘 인면마의가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드시 그놈을 찾아서 내게 데려와라. 그렇지 못하면, 모두 지옥 구경을 하게 될 것이다.”
“존명.”
대답한 흑의인들이 엎드린 자세 그대로 스르르 모습을 감추었다.
혼자 남은 인면마의는 털썩 의자에 몸을 묻었다.
“쩝. 어떻게 구한 놈인데…….”
아까웠다. 너무도 아까웠다. 기백이 넘는 대상을 실험해 겨우 대법을 완성했는데 남의 손에 그것도 하필 묵염무영마의 손에 들어가다니. 묵염무영마의 전설 같은 무위가 사실이라면 손에서 그를 빼내 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소모한 약재뿐 아니라 시간과 들인 공이 얼마인가. 다시 대법을 실시할 약재도 없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꼭 효로를 확보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명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반드시, 반드시 놈을…….’

***

손자를 등에 업은 노인은 인적이 드물고 지형이 험난한 곳만을 이용해 이동했다. 손자도 적안마동이라 불리며 무림공적이 되었고, 객잔에서의 펼친 손속으로 자신의 존재도 무림에 알려졌을 테니 두 무림공적의 행로가 순탄할 수 있겠는가.
앞을 막아서는 자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낭비하게 될 시간이 아까웠던 노인이 택한 최선의 경로였다. 자신의 종적을 따르는 자들이 험한 심산유곡에서 쉽게 따라붙지도 못하도록 빠르게 움직이며 흔적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이 녀석아, 배고프면 말을 해야지.”
등에 업힌 손자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엉덩이를 살짝 때렸다. 지금까지 이동하면서도 먹을 것은 철저하게 챙겨 먹었다. 약해진 손자의 기력을 걱정한 그의 배려였다.
신법을 멈춘 노인은 안력을 돋우어 약간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먹을 것을 구하는 동안 손자가 안전하게 있을 장소를 찾아야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동굴을 발견한 노인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쉬익―
순식간에 동굴 앞에 도착한 노인은 기감을 넓게 펼쳐 동굴 안을 살폈다. 행여 주인이 있을까 살피던 노인은 기감에 걸리는 것이 없자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겉보기와 달리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졌고, 막다른 곳은 노인이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머리가 천정에 닿지 않을 만큼 적당히 높고 넓었다.
손자를 끌러 조심스레 내려놓고, 바닥에 겉옷을 벗어 깔고 눕혔다.
“잠시만 기다려라. 내 가서 먹을 것을 구해 오마.”
묵묵부답인 효로의 태도에 노인의 눈에 안쓰러움이 설핏하게 스쳤다. 남겨 둔 효로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동굴을 나선 노인은 주변을 살피며 먹을 것을 찾았다.

한편, 노인의 기척이 멀어졌을 때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효로가 누운 뒤쪽 벽이 허물어지더니 핏빛 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분명히 사람의 눈은 아니었고, 눈 사이 간격이 그리 넓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크지 않은 짐승이었다.
잠시 눈동자만 굴리던 짐승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다람쥐만 한 몸집이었지만, 꼬리가 토끼처럼 동그랗고 짧은 데다 눈이 붉으니 토끼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귀가 그리 길지 않으니 토끼라 할 수도 없었다.
작은 짐승은 효로를 보고 잠시 으르렁대며 경계하다 그가 미동도 않자 조심스럽게 다가가 냄새를 맡는지 킁킁거렸다. 그래도 효로의 움직임이 없자 대담해진 짐승은 효로의 전신을 킁킁거리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효로를 살피던 짐승은 노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귀를 쫑긋 세웠다. 짐승의 붉은 눈이 날카로워지더니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듯 안광이 짙어졌다.
식용 가능한 열매 몇 가지를 구해 서둘러 동굴로 돌아온 노인은 손자의 곁에 짐승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보통 작은 짐승들처럼 인기척에 도망가지도 않고 제법 사나운 기세를 뿌리는 것이 양순한 짐승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혹 손자에게 해코지하지 않을까 염려된 탓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던 노인은 짐승이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기운을 줄였다.
“크르렁.”
작은 짐승은 효로 앞을 가로막고 위협적으로 으르렁댔다. 노인은 마치 짐승이 ‘내가 먼저 발견했으니 내가 주인이다’ 하는 듯한 느낌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노인은 왠지 짐승이 손자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놈아, 내가 그 녀석의 할아비다. 그러니 그리 경계할 필요가 없다.”
노인의 말을 알아들은 걸까. 짐승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불을 뿜는 듯한 안광도 훨씬 부드러워졌기에 노인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효로에게 다가갔다. 짐승은 잠시 경계하며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효로의 몸에서 멀어지지도, 노인에게 위협적인 으르렁거림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자세를 낮추고 작은 짐승의 앞에 열매를 내려놓자 몇 번 열매와 노인을 번갈아 보던 짐승이 열매를 킁킁대더니 조금씩 갉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노인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노인은 손에 남은 열매를 입에 넣고 꼭꼭 씹은 후, 그 즙을 뱉어 효로의 입으로 흘려 넣었다. 반복해서 효로를 먹이는 모습을 작은 짐승이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효로의 뺨으로 흐른 즙을 홀짝홀짝 핥았다. 귀여운 모습에 노인이 미소를 흘렸다.
가져온 열매를 모두 먹인 노인은 효로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법을 운행했다. 일반 심법이라면 짐승을 곁에 두고 감히 시도할 수 없겠지만, 노인이 익힌 심법은 운행하는 동안 스스로 몸을 보호하는 기운을 흘리는 천고의 심법이었다.
노인은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처음 손자를 안았을 때 침습한 독기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노인이 정심한 내공을 가지고 있었기에 독기를 눌러 둘 수는 있었지만, 워낙 지독한 독기라 쉽게 통제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심법을 운용해 독기를 몰아내려 했지만, 독기는 여전히 노인의 심장 어림에 머물며 그를 괴롭혔다.
자신조차 통제하기 어려운 극독을 손자는 몸 안에 그득 안고 있는 것이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심법을 운용할 때마다 노인은 손자의 신비한 능력에 속으로 감탄했다.
작은 짐승은 잠시 노인을 지켜보다 효로의 품으로 파고들더니 고개를 빼꼼 내밀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일노일소일수(一老一少一獸)의 기묘한 동숙(同宿)의 밤은 점점 익어 갔다.

다음 날 아침, 밤을 새워 심법을 수련한 노인이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키자 효로의 품에서 꿈틀거리던 짐승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붉은 눈만 제외하면 영락없는 다람쥐의 형상이었다.
“내 나가서 먹을 것을 구해 올 테니 넌 효로를 잘 지켜라.”
노인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짐승의 입에서 찍찍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동굴 밖으로 나가자 작은 짐승은 누운 효로의 가슴에 올라서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경계를 서는 병사의 모습처럼…….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노인은 짐승의 앞에 얼마의 열매를 내려놓고 지난밤처럼 열매를 씹어 손자의 입으로 흘려 넣었다. 손자에게 열매를 모두 먹인 노인이 짐승에게 미소를 보냈다.
“하룻밤 신세졌구나. 우리는 이제 가야 한단다. 잘 있어라.”
말을 마친 노인이 손자를 등에 업고 단단히 묶었다. 노인이 걸음을 옮기려 몸을 돌리자 작은 짐승이 냉큼 그의 앞을 막았다.
찍찍.
노인은 자신에게 무어라 이야기하는 듯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혹시나 싶어 자세를 조금 낮추었다. 그러자 작은 짐승이 폴짝 뛰어올라 효로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허허허. 너도 같이 가고 싶은 게로구나.”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효로의 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짐승이 마치 그렇다는 듯 찍찍거렸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 너 하나 더 짊어지는 것이 무에 어렵겠느냐.”
동굴을 나선 노인이 크게 호흡을 한 번 하고 주변을 찬찬히 살피더니 힘차게 발을 구르자 한 덩어리가 된 일노일소일수가 순식간에 까만 점으로 화했다.

***

남단의 객잔.
묵염무영마가 나타난 객잔에 여장을 푼 북풍냉검과 정무추포단은 주변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보통 노인인 줄 알았는데…….”
객잔 주인은 당시를 떠올리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부서진 방을 수리하느라 들어간 돈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방 하나를 완전히 박살을 내고 도망갔지 뭡니까? 꼭 좀 잡아 주십시오.”
객잔 주인의 말에 은림신접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묵염무영마가 누구인가. 무림인들에게는 무한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기필코 수리비를 받고야 말겠다는 객잔 주인의 용기에 애도를 보냈다.
“내 가능하면 꼭 주인장과 대면하도록 노력하겠네.”
은근히 비꼬는 말에도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 객잔 주인이 호들갑스럽게 대답했다.
“대협만 믿겠습니다. 헤헤. 꼭 기회를 마련해 주십시오. 수리비를……. 헤헤.”
마치 이미 수리비를 받은 것처럼 얼굴이 환해진 객잔 주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은림신접이 고개를 흔들었다.

객잔 주인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모은 단원들이 보고를 마쳤을 때 그들 모두의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소년과 조부.
북풍냉검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기를 빌면서 입을 열었다.
“위 근착, 자네 생각도 소년의 조부가 묵염무영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은림신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객잔 주인의 설명으로는 환자인 듯한 손자를 업고 객잔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또 객잔 탁자에 새겨진 고명한 수법을 보면 노인의 무위가 대단함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이는 전에 보았던 노인과 소년밖에 없습니다만, 꼭 그들이라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조리 있는 은림신접의 분석에 북풍냉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보았던 노인의 무위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