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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20화)
第八章 아픔을 다독이고(3)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지.
손을 섞은 적은 없지만, 그의 신법만 보더라도 자신의 경지는 훌쩍 넘어 높은 곳에 다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을 생각할수록 그의 뇌리에는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가 알려진 대로 잔혹한 마인이라면, 어찌 그런 정순한 기세를 지닐 수 있을까?’
마인이라면, 그것도 보통 마인도 아니고 무림공적으로 사해를 울린 마인이라면 그런 정순한 기운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그의 몸에서 미약한 마기(魔氣)나 사기(邪氣)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노인이 묵염무영마라면 사형의 원수였다. 사형의 한을 풀어 주는 것을 최대의 명제로 삼은 그로서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노인이 묵염무영마라는 확신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
북풍냉검의 머리는 복잡하게 얽혔고, 가슴은 돌을 얹은 듯 무거웠다. 갖가지 상념에 시달리는 그의 귀로 은림신접의 음성이 들렸다.
“부단주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항상 명쾌한 지시를 내리던 북풍냉검의 입에서 자신의 의견을 묻는 말이 흘러나오자 은림신접은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지금 성급한 판단은 시기상조인 듯합니다. 제가 비록 노인과 소년을 언급했지만, 노인이 묵염무영마라는 것은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추측한 것일 뿐 실제로 전에 보았던 노인이 객잔에서 살수를 펼친 노인이라는 확증은 없습니다. 해서 제 생각에는 일단 객잔에서 묵염산혼권을 펼친 노인을 추적하며, 그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우선으로 보입니다.”
“일단 우리의 추측을 보고하지는 말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확신을 얻을 때까지 유보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추측을 보고했다가 자칫 애먼 사람을 공적으로 몰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처리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북풍냉검이 찡그렸던 인상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자네 말대로 하지. 신중한 것이 나중에 후회를 남기는 것보다 나으니.”
은림신접도 그와 동일한 고민을 했던지 얼굴이 밝아졌다. 북풍냉검이 미소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하진충!”
“넵. 부단주.”
“객잔에서 살수를 펼친 노인을 추격한다. 대원들에게 출발 준비를 하라 전하게.”
“존명.”
섬류일수가 대원들에게 명을 전하고 출발 준비를 서두르는 것을 바라보던 북풍냉검과 은림신접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제발 추측이 틀렸으면…….’
***
“율아.”
계곡에서 점심을 먹고 주변 풍경을 즐기며 잠시 휴식을 취하던 노인이 효로의 품에서 꼬물거리는 작은 짐승을 불렀다. 율은 노인이 다람쥐 같다 하여 붙여 준 이름이었다.
이름을 알아들었는지 효로의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귀여운 모습에 노인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꼬리가 붙은 모양이다. 여기서 효로를 지키고 있어라. 내 얼른 다녀오마.”
율이 효로의 품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무엇을 하는지 다시 꼬물거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노인의 신형이 마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노인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계속 열심히 움직이던 율이 잠시 효로의 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율의 빨간 눈이 더 짙어져 피 같은 붉은 안광이 줄줄 흘렀고 날카로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제법 무성한 가지에 은신한 채 목표물을 육안으로 확인한 혈잠단(血潛團) 이 지단주(支團主)는 노인의 신형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수하들에게 주의를 주려 고개를 돌리다 코앞에 있는 노인의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나무에서 떨어졌다.
쿵―
“큭.”
지단주가 발각되자 단원들이 미리 정한 수칙대로 콩 튀듯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추적과 정보탐지를 주로 하는 혈잠단의 특성상 은신술과 신법을 위주로 수련했고, 그들에게 최우선은 확보한 정보를 궁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재빨리 몸을 굴려 신형을 일으킨 지단주는 금방 자신이 떨어졌던 가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 내가 잘못 본 걸까?’
아직도 거칠게 뛰는 놀란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주변을 면밀히 살피던 그의 귀로 날카로운 비명이 파고들었다.
“으악.”
“악.”
“컥.”
거의 동시에 비명이 사방에서 들렸다. 도주하던 수하들의 비명임을 직감적으로 감지한 지단주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어떻게 사방으로 도주하는 수하들을 거의 동시에 공격했단 말인가. 노인의 무위는 자신의 상상을 초월했다.
‘헉.’
갑자기 노인의 신형이 원래 그 자리에 계속 있었듯 그의 눈앞에 번쩍 나타났다. 눈을 뜨고서도 노인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겨우 진정시키던 심장이 더 거칠게 뛰었고,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죽음.’
노인의 손속을 피할 자신도 없었고, 피할 수 있어도 돌아가면 임무를 실패한 책임으로 돌아올 것은 죽음뿐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듯한 절망감에 이를 악문 지단주는 손을 들어 자신의 천령개를 힘껏 내리쳤다.
쿵―
지단주의 돌연한 자결에도 눈썹조차 까닥하지 않은 노인은 차가운 시선으로 식어 가는 지단주의 시체를 내려다보다 중얼거렸다.
“쥐새끼는 쥐새끼군.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겠구나.”
노인의 중얼거림이 채 허공에 흩어지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안개가 스러지듯 사라졌다.
노인이 사라지고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가슴에 붉은 궁(宮) 자를 새긴 일단의 무리가 싸늘하게 식은 지단주의 시신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중 한 인물이 시신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이 지단주입니다. 자결한 듯 보입니다.”
보고를 받은 흑의 복면인이 젊은 청년인 듯 맑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노인과 아이의 흔적은?”
“주변에는 혈잠단원들의 시체만 있을 뿐 노인의 종적은 묘연합니다.”
“하긴 도주하는 혈잠단원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무위를 가졌다면, 마음만 먹으면 쉽게 피할 수 있겠지. 하지만 평생 숨어 다닐 수는 없을 터, 곧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철수한다.”
청년이 순순히 물러서자 수하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몸을 돌리려던 청년이 뭔가 떠오른 듯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아 참! 누가 맨 앞에 섰었지?”
종적을 추적하려 맨 앞에서 일행을 이끌었던 흑의 복면인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속하입니다.”
일순 청년의 손이 쾌속하게 휘둘러졌다.
서걱―
어느 틈에 발검해 흑의 복면인의 팔을 베어 버리고 다시 착검하는 동작이 물 흐르듯 유려한 것이 청년의 경지가 보통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수하의 팔을 베고도 복면 사이로 드러난 시선에는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청년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팔을 잃은 흑의인이 붉은 피 분수를 뿜는 팔을 지혈하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 둘만 남아 이곳을 정리하고 나머지는 철수.”
청년이 발을 굴려 신형을 뽑아 올리자 나머지 흑의인들도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들이었지만, 궁을 떠날 수 없는 운명이었기에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주어진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자신들이 모신 주군, 한령마검(寒靈魔劍) 진가기(陳嘉騎)의 명령은……
***
우르릉.
폭이 십여 장이나 되고 높이는 이십여 장쯤 됨 직한 거대한 폭포가 세월의 무게를 더한 굵은 물줄기를 쏟으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우렁찬 소리를 토해 내고 있었다. 천근 물기둥이 용소를 때려 피어오른 하얀 물안개가 마치 승천하는 백룡의 꿈틀거림처럼 보였다.
경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장관을 마주한 노인이 손자를 한 번 추슬렀다.
“인석아,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굳건히 선 장대한 폭포에서 풍기는 당당함이 보이느냐?”
노인의 물음에 소년은 대답이 없었고, 대신 소년의 품속에서 머리를 내민 율이 찍찍거리며 대답했다.
“여기가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너와 나의 새로운 운명. 로야, 이번에는 행복이 가득한 운명을 만들어 보자꾸나.”
등에 업힌 손자의 잿빛 눈동자는 변화가 없었지만, 등으로 전해진 따스함에 노인은 미소를 피우며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주변을 휘둘러 본 노인이 발을 살짝 굴리자 이 장이나 솟구친 그의 신형은 허공중에 안개처럼 흩어졌다.
쉬익―
***
초목성수(草木聖手) 강통(姜通)은 외손녀인 선풍의교(仙風醫嬌) 조영영(曺瓔瓔)과 함께 약재를 다듬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영아, 지금 네가 다듬는 것이 무엇이냐?”
조영영이 눈을 살짝 빛내며 입을 열어 옥음을 흘렸다.
“당귀(當歸)예요.”
“당귀는 언제 채취하는 것이 좋으냐?”
초목성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영영이 대답했다.
“서리가 내린 후부터 초설이 내리기 전까지 얻는 것이 가장 좋아요.”
“약재로는 어떤 것이 가장 좋으냐?”
“뿌리를 캐서 줄기와 잔뿌리를 잘라 버리고 햇볕에 말린 것으로 특이한 향기가 있으며 조금 맵고 단맛이 나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뿌리가 굵고 길며 향이 강한 것이 약재로서 으뜸이에요.”
도무지 막힘이 없는 외손녀의 영특함에 초목성수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떤 약성이 있느냐?”
“조금 매우니 오행 중 금(金)의 속성이 있고, 단맛이 있으니 토(土)의 속성도 가지고 있어요. 진통(鎭痛), 배농(排膿), 지혈(止血), 강심(剛心) 작용이 있어요.”
“그래서?”
“금과 토의 속성을 가진 장부로는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과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이 있지요. 그래서 어지럼증, 부인병, 임산부의 산후 회복에 주로 쓰이며 이 밖에도 폐장(肺臟)의 병에서 오는 심한 기침, 폐경(肺經)이 관장하는 피부병인 부스럼 등에 쓰이는 약재예요. 그리고 보혈(補血) 강심(强心) 작용을 하는 탓에 사물탕(四物湯), 귀용탕(歸茸湯), 소요산(逍遙散), 공진단(供辰丹) 등 보약재에 중요한 약재로 사용돼요. 또한…….”
“됐다. 그만해라.”
조영영의 말을 끊은 초목성수는 눈을 날카롭게 번쩍이며 대문 밖을 노려보았다.
“이 망할 놈아, 네놈 병은 다스려 주었지 않느냐? 또 얼마나 귀찮게 하려 찾아왔느냐? 에라, 이 썩을 놈아.”
외조부의 갑작스런 악다구니에 조영영은 눈이 동그랗게 변해 그의 시선을 쫓았다. 누군가를 둘러업은 건장한 노인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때려죽일 놈이 있나. 친구가 왔으면, 맨발로 후다닥 뛰어나올 일이지. 어디 악다구니부터 씹어 대느냐? 죽을래?”
초목성수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악을 바락바락 썼다.
“뭐? 친구? 야, 이 썩을 천가 놈아, 어디 친구가 없어서 네놈을 친구로 삼겠느냐? 다 죽어 가는 놈을 살려 주었더니 친구란 놈이 약재란 약재는 다 처먹고 소리도 없이 도망갔냐? 약값 내놔라. 이놈!”
초목성수는 눈에 독기가 어렸다. 그때 소모한 약재가 얼마인가. 아직도 절반도 다시 채우지 못한 약탕고를 떠올리면 이가 뿌드득 갈렸다.
“내가 언제 도망갔었느냐? 손자 놈이 보고 싶어 잠시 외출한 것을 보고 도망이라니. 사람을 뭐로 보고. 맞을래?”
초목성수의 신형이 흐릿하게 사라지더니 노인의 코앞에 나타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 때려 봐, 이놈아. 어디서 못된 주먹질이나 배워 와서 걸핏하면 때린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어디 때려 봐!”
예상보다 거센 반응에 천 노인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천하의 묵염무영마가 물러섰다는 사실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초목성수가 얼른 신형을 날려 외손녀에게 날아오더니 싱글벙글하며 입을 열었다.
“영아, 봤지? 저놈이 뒤로 물러섰다. 카카카. 저놈이 나한테 겁먹고 뒤로 물러서는 거 봤지?”
노인은 잠시 멍하니 섰다가 초목성수가 조영영에게 하는 말을 듣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패 죽여도 시원찮은 늙은이가…….”
노인의 말에 초목성수가 고개를 팩 돌리며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네놈 등에 매달린 녀석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은 듯 보이는데 나한테 개기시겠다고?”
노인이 흠칫 놀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닐세. 반가워서…….”
“지랄.”
“정, 정말일세.”
조영영은 두 노인의 장난에 그만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풋.”
두 노인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 쏟아지자 조영영이 얼른 누군가를 등에 진 노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