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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21화)
第八章 아픔을 다독이고(4)


“조영영이에요, 할아버지.”
아직 완전히 만개하지 않은 한 송이 장미처럼 소담스럽고 아름다운 조영영이 인사하자 노인은 소녀를 찬찬히 살펴보며 이채를 발했다. 소녀는 얼마 지나지 않으면, 뭇 남자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노인은 미소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참으로 곱구나.”
“천가야, 행여 눈독 들이지 마라.”
“강가야, 운명이다.”
“뭐라?”
“그보다 먼저 이 아이 좀 진맥해 다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천 노인이 등에서 효로를 내려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러자 효로의 앞섶에서 율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빨간 눈을 또록또록 굴렸다.
율의 귀여운 모습에 조영영이 눈과 입을 동그랗게 만들고 바라보다 환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어머나, 귀여워라.”
그녀가 율에게 손을 가져가자 율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험악한 반응에 조영영의 환한 얼굴이 순식간에 울먹거렸다.
“할아버지…….”
초목성수의 얼굴에도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빨간 눈을 가진 다람쥐.
아니, 다람쥐라고는 할 수 없는 영물.
정식으로 알려진 이름은 혈안천색률서(血眼千色栗鼠).
천고의 영물로 만수기기(萬獸奇記)에 따르면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외피(外皮)에 금석(金石)을 무 자르듯 자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만수지왕이라는 산군(山君)마저 피한다는 흉포한 영물이었다. 자세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다람쥐와 같은 몸에 적안(赤眼)이 특징이며 극독을 가진 동물이나 약초를 주식으로 한다고 전해졌다.
어떻게 흉포한 영물이 소년을 따르는 것일까? 보기도 어렵고 흉포하기로 짝을 찾을 수 없다는 혈안천색률서가 사람을 따른다는 소리는 들은 적도 읽은 적도 없었다.
조영영은 자신의 애원을 외조부가 무시하자 시선을 돌려 천 노인에게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다.
“할아버지…….”
“저놈은 내가 키우는 동물이 아니라, 손자의 친구란다. 그러니 내가 어찌할 수 없구나. 하지만, 네가 조용히 부탁하면 그놈이 너를 친구로 삼아 줄지 모르겠구나.”
부드러운 천 노인의 말에 조영영이 용기를 내 율에게 부탁했다.
“저기, 다람쥐야, 나도 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사람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신기하게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율이 조영영의 무릎으로 폴짝 뛰어오르더니 가만히 배를 깔고 엎드렸다. 조영영의 얼굴이 활짝 피더니 조심스러운 손길로 율의 대가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는 율의 모습에 그녀의 얼굴은 천하를 얻은 듯 밝아지더니 연방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율이 효로의 몸을 떠나자 천 노인이 초목성수를 재촉했다.
“어서 좀 살펴봐 주게.”
“싫다. 내가 왜?”
“그러지 말고 사정 좀 봐주게.”
“천하에 의원이 나 혼자냐? 딴 데 가 봐라.”
초목성수가 냉랭하게 고개를 팩 돌려 먼 산을 바라보자 천 노인이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조영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아, 네 외할애비가 진료 안 한다는데? 율아, 가자.”
놀란 조영영이 호들갑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외할아버지께서는 무슨 병이든지 다 치료하실 수 있으시니 도와주실 거예요. 그렇죠? 외할아버지.”
“응? 응. 아무렴.”
엄지를 치켜들고 자신을 칭찬하는 외손녀의 초롱초롱한 시선에 얼떨결에 대답한 초목성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린 듯해 기분이 좋아진 소년의 조부는 입을 크게 벌리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자네는 천하제일신의(新醫)일세. 고맙네. 고마워. 하하하.”
신의(神醫)가 아니라 신의(新醫)란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초목성수의 찡그린 얼굴에 생긴 주름은 더 깊게 팼다.
‘망할, 좀 더 애를 먹였어야 하는데.’

효로를 방으로 안고 들어가 침상에 눕히고 진맥을 시작한 초목성수는 거듭되는 놀람에 진맥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 이놈아,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
침중한 안색의 천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다. 어떤 처죽일 놈이 내 손자에게 사악한 대법을 펼쳤다고 하더군.”
천 노인은 자신이 들은 대로 초목성수에게 효로가 당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초목성수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효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놈도 지지리 고생했구나. 불쌍한 놈.”
천 노인에게 고개를 돌린 초목성수가 한층 부드러워진 입을 열었다.
“네놈이 이 아이의 상태에 대해 알아낸 것을 말해라.”
“음. 먼저 저 아이의 몸에는 극독이 잠재해 있네. 그렇지만, 의식을 잃은 동안에는 독기가 새 나오지 않는 듯하네. 그리고 독기는 기맥으로 흡수되어 유주하다가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아니면 어디에 축적되었는지 점점 약해졌다네. 독기가 기맥으로 흡수된 것은 내 독문심법 때문인 듯하지만, 그 외의 것은 어찌 된 영문인지 나도 모른다네.”
천 노인의 정체와 무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초목성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효로의 맥을 잡았다.
기맥 속에 잠재한 독기의 흐름을 따르며 진맥하던 초목성수는 독기들이 간경을 타고 흐르다 장문혈(章門穴)에 이르러 대맥(帶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대맥으로 스며든다?’
대맥은 열두 경맥의 넘치는 기를 수납하는 기맥인 기경팔맥 중 하나였다. 기경팔맥은 보통 폭우에 범람한 강물이 수로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처럼 열두 경맥의 넘치는 기운을 누설하는 경맥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맥으로 빠져나간 기는 체외로 유출되는 것이 정설이었다.
‘대맥이 열렸다는 말인가?’



第九章 만남은 이별을 낳고(1)


어떤 내공심법도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을 제외한 기경(奇經)을 이용하지는 못했다. 사람의 몸에 팔과 다리 같은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 있고, 오장육부처럼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이 있듯이 열두 정경맥과 임맥, 독맥의 진기 유통은 심법으로 조절할 수 있지만, 나머지 기경의 진기는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 어떤 심법으로도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
그러나 소년의 대맥에는 엄청난 독기가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효로가 강한 기운을 느끼면 그 독기가 발현한다고 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소년은 대맥에 스며든 독기를 운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혹시 자네의 심법으로 대맥에 흐르는 기운을 조절할 수 있는가?”
“아닐세. 내 심법도 열두 경맥과 임, 독맥을 이용할 뿐이지 나머지 기경은 활용할 수 없다네. 그런 심법이 있다는 말조차 금시초문(今時初聞)일세.”
“음.”
초목성수는 침음을 흘리며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그의 신중한 모습에 천 노인은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손자의 눈 감은 얼굴을 쳐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호호호.”
율과 많이 친해진 모양인지 조영영의 맑고 영롱한 웃음소리가 방문을 넘어왔다. 그녀의 웃음소리로 장고에서 깨어난 초목성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이런 상식 밖의 문제는 상식 밖의 방식으로 해결하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지.”
천 노인이 영문을 몰라 하자 초목성수가 조영영을 불렀다.
“영아, 잠시만 이리 오너라.”
“네. 외할아버지.”
대답 소리와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리며 귀여운 얼굴이 불쑥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품에 율이 다소곳이 안겨 빨간 눈을 굴렸다.
초목성수가 자상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맥이 무엇인 줄 아느냐?”
“네. 허리띠처럼 생겼다고 이름이 대맥이라 붙여진 기경팔맥 중 하나로 허리 부위의 경맥과 통하며 간경(肝經)과 이어진 기맥이에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런데 이 소년의 대맥에 독이 머물고 있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조영영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모든 맥은 그 출입처가 있어요. 대맥에 독기가 쌓였다 함은 필시 들어간 곳이 있을 테고 들어갔다면, 나오는 곳이 있을 거예요. 제 생각으로는 나오는 곳이 아마 담경(膽經)의 임읍(臨泣)이라 생각해요. 약한 독기라면, 임읍을 통해 독기를 누설시키면 될 것이고, 강한 독기라면…….”
그녀가 말을 줄이자 초목성수와 천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확실한 단초가 있을 터였다.
“그냥 내버려 두면 돼요.”
“컥.”
“윽.”
두 노인이 휘청거렸다.
“치료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이야기냐?”
“네. 대맥은 족삼음(足三陰)·삼양(三陽)·기경팔맥을 속박하며 긴밀하게 상호 보완하는 기경이에요. 그렇기에 강한 독기를 제거하려 잘못 건들면 독기가 담경을 타고 전신으로 퍼질 수도 있는 등 더 나쁜 결과가 나올 수 있어요. 특히 대맥은 모든 관절의 운동 능력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기에 아차 하면 평생 누워 지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긴밀한 관계로 말미암아 위기(衛氣)들의 작용이 가장 활발하다고 할 수 있으니 적절하게 침(鍼)으로 통제만 한다면, 자체 정화의 효과를 볼 수 있으니 굳이 건드려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조영영이 상세하게 대맥을 설명하자 천 노인은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히 손자와 비슷한 또래의 조그만 여자 아이가 자신조차 인정한 초목성수의 식견(識見)을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 노인의 놀란 모습에 초목성수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랑을 시작했다.
“이 아이의 영특함은 하늘이 내리신 걸세. 아마 세상에 이 아이보다 뛰어난 머리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네. 허허허.”
은근히 부아가 난 천 노인이 초목성수를 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치료는 안 할 텐가?”
초목성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못 들었나? 건드리지 말라잖는가.”
급기야 천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신이라도 차리게 해 줘야지!”
“아, 아. 알았네. 너무 열 내지 말게.”
효로의 의식을 회복하는 치료는 진맥을 통해 효로의 풍부혈(風府穴)을 막은 위기(衛氣)를 이미 확인했었기에 당장 시술이 가능했다. 강한 독기가 머리로 스며들 듯하자 심법으로 강해진 위기들이 풍부혈을 막아 머리로 향하는 독기의 침습을 막은 것이었다.
금방 위기를 풀지는 못하지만, 칠 주야 정도면 충분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그 후에 독기가 어떻게 반응할지가 문제일 뿐이었다.
“어서 자침하게.”
이번에는 초목성수가 슬그머니 화가 났다.
“아, 이놈아. 고만 좀 보채. 한다니까?”
“이 썩을 놈이, 말만 하지 말고, 침 놔!”
“네놈이 자꾸 열 뻗치게 하는데 침을 어떻게 놔. 당장 꺼져.”
아쉬운 천 노인이 수그러들었다.
“알았다. 내 자리를 비켜 주지.”
“끙.”
벌떡 일어서 밖으로 나가던 천 노인이 버럭 소릴 질렀다.
“잘 놔!”
“아나.”
휙―
천 노인은 침통이 날아오자 얼른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쾅―
퍼버벅.
“끙.”
방 안에서 바닥에 흩어진 가느다란 침을 줍느라 끙끙대는 초목성수의 앓는 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

북풍냉검은 차분한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먼저 도착해 주변을 둘러본 은림신접이 북풍냉검의 곁으로 다가왔다.
“부단주님, 남은 흔적에서 노인과 혈궁의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노인의 뒤를 쫓던 혈궁의 인물들이 그의 손에 척살된 것 같습니다. 어디서인지는 모르지만, 이곳 나뭇가지에 먼저 도착해 적의 수장을 잡은 것으로 보이고, 도주하는 혈궁의 인물들을 하나씩 처치한 모양인데…….”
은림신접이 말끝을 흘리자 북풍냉검이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런데?”
“제가 알기에 혈궁에서 누군가를 추적하는 일은 혈잠단이 맡습니다. 그들의 신법과 은신술은 일절로 알려졌는데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는 그들을 처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맹주님 정도의 무위가 아니라면 힘든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노인은 아주 수월하게 처리한 듯 보여 누군가 조력자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은림신접의 말에 북풍냉검은 침음을 흘렸다. 노인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조력자라니. 결코, 쉽게 지나칠 문제가 아니었다.
“노인의 행적을 계속 추적할 수 있겠나?”
은림신접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부터는 노인이 마음먹고 흔적을 지우며 이동했는지 아니면 조력자가 흔적을 지웠는지 남은 것이 없습니다. 계속 추격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네. 노인의 정확한 무위도 알지 못하면서 주변을 수색하면 뒤따르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그조차도 불확실합니다. 이 넓은 산을 전부 뒤지며 희미한 흔적을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