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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22화)
第九章 만남은 이별을 낳고(2)
북풍냉검은 아쉬웠다. 노인이 묵염무영마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노인이 그라면 이제 간신히 사형의 복수를 할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허무하게 날려 버려야 한다니.
천 근 납덩이를 가슴에 얹은 것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북풍냉검은 마치 노인이 주변 어디 숨기라도 한 듯 주변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은림신접도 그의 마음을 아는지라 부족한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한참을 말없이 주변을 훑던 북풍냉검이 입을 열었다.
“아닐세. 자네 잘못이 아니야. 노인의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을 자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네. 일단 인면마의를 먼저 추포하고, 노인의 종적이 드러나면 다시 시도하세.”
“네, 부단주님.”
“정무추포단은 일단 철수한다. 재정비하고 인면마의를 추적할 것이니 준비하도록.”
“존명.”
북풍냉검은 착잡한 마음을 안고 주변 산하를 둘러보았다. 노인의 종적을 놓친 아쉬움이 컸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노인이 묵염무영마인지 아닌지 밝히지 못한 사실이 못내 다행스럽기도 했다.
노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소년의 퉁퉁 부은 얼굴이 노인의 얼굴에 투영됐기 때문이었다. 적안마동. 어울리지 않는 별호를 얻은 불행한 소년에 대한 동정심인가. 북풍냉검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인연이 끝나지는 않을 터.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
***
조영영은 어떻게든 율의 환심을 사고 싶었다. 첫날만 조금 오래 자신에게 머물렀을 뿐 아직도 율은 자신에게보다 효로의 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그녀는 율을 볼 욕심으로 효로의 병수발을 자청해 매일 그의 곁에 머물면서 율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렸다.
여전히 효로의 품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율이 얄미워 흥흥거리던 조영영은 눈 감은 효로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보다 한 살 많다고 하기에 율과 친해지고 싶은 욕심으로 냉큼 오라버니로 삼은 효로의 눈 감은 얼굴은 평화스러웠다.
“눈썹은 기네.”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에 조영영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도 모르게 효로의 눈썹으로 살며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효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그녀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가만히 그를 살폈다.
효로는 머리가 좀 맑아진 느낌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정이었고, 그다음은 처음 보는 예쁜 소녀의 맑고 동그란 얼굴이었다. 항상 안개 속에 있듯 흐릿하던 머리도 전신을 누비던 지옥 같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꿈이런가. 꿈이라도 좋았다.
‘어디지?’
조영영은 효로의 눈동자가 까만 것을 보고 밖으로 냅다 소릴 질렀다.
“할아버지, 효로 오라버니가 정신 차렸어요. 어서 들어와 보세요.”
벌컥.
방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천 노인과 초목성수가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효로야, 정신이 드느냐?”
천 노인은 냉큼 효로의 머리맡에 자리 잡으며 입을 열었다.
효로는 꿈인지 생시인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할아버지.”
효로의 잠긴 음성이 흘러나오자 천 노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할아비 여기 있다. 괜찮으냐?”
“네.”
천 노인이 초목성수에게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서 진맥 좀 해 보게.”
“알았네. 너무 호들갑 떨지 말게.”
초목성수가 맥을 짚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효로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대맥에 숨은 독기를 제외하고는 정상인과 별다름이 없었다.
효로는 의식이 돌아오고, 입을 열었지만, 아직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이 뒤엉켜 복잡했다. 언뜻언뜻 떠오르는 기억들이 그를 계속 괴롭혔다. 애써 할아버지에게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어색한 미소만 떠오를 뿐이었다.
효로의 미소가 전과 같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천 노인이 자상한 손길로 효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네 몸을 회복하는 데 신경 쓰도록 하여라. 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도 된단다.”
“네.”
효로는 힘없이 대답을 하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어지러운 머리와 복잡한 심경에 극심한 피로를 느낀 그는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조영영이 궁금한 듯 작고 예쁜 입을 오물거렸다.
“할아버지, 어때요?”
초목성수가 맥을 짚던 손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보이는구나. 지금은 잠이 들었다. 이 녀석이 편히 쉬도록 우리는 나가 있자꾸나.”
“네.”
초목성수와 율이 따라 나오지 않아 섭섭한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조영영이 밖으로 나가고, 천 노인은 잠시 더 머물며 손자의 머리만 하염없이 쓸어 올렸다.
드디어 효로가 바깥나들이 할 정도로 회복되었을 때, 산천은 파릇파릇한 새싹이 가득했고, 한층 부드러워진 바람이 계곡을 쓰다듬는 훌쩍 다가온 봄 무렵이었다. 연신 쫑알대며 율의 관심을 끌려 애쓰는 조영영의 품에 율을 건넨 효로는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아 망연한 시선으로 봄물이 가득 오른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반복해서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은 쉬지도 않고 계속 그를 괴롭혔다. 단가장주의 마지막 모습, 아비의 죽음에 단소운의 애통해하는 모습, 낯익은 아이들의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 자식의 죽음에 통곡하던 아낙들의 절규, 분노하던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 등이 효로의 얼굴에서 미소를 앗아 가 버렸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야.’
그때는 어찌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움직이는 몸. 잠재의식 속에서 그들의 희생을 막으려 애를 썼지만, 비극은 피할 수 없었다. 애써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라 자위(自慰)해도 지독한 슬픔과 죄책감은 희석되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조각난 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탓에 효로는 이제 과거 아무것도 모르는 때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할아버지를 만난 기쁨도 그의 슬픔을 쉽사리 가려 주지 못했고, 편해진 생활도 그의 맑은 웃음을 되돌려 주지 못했다.
상념에 잠겼던 효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누님…….’
머릿속에 떠올린 단소소에게 안부조차 물을 면목이 없었다.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은 효로의 숨을 턱 막히게 하였다. 이제 그녀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아비를 죽게 한 자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그녀 앞에서 자신의 심장을 갈라 두 손으로 바치면 용서를 얻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당장 달려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고, 손을 잡고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그녀의 원망 어린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가슴이 너무 아려 숨조차 쉬기 어려웠고, 소리 없이 흐른 눈물이 효로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산에도 새살이 돋는구나.”
갑자기 들린 음성에 효로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효로의 음성에 스민 슬픔의 여운을 알아차렸는지 초목성수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나간 시간은 아무리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앞으로가 중요한 것이지 과거에 마음 쓸 필요는 없단다.”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지난 일들이 모두 생각나느냐?”
“전부는 아니지만, 조각조각 기억납니다.”
효로의 대답에 초목성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힘들겠는가? 모르는 이들도 아니고 낯익은 이들을 죽게 만든 자신이 얼마나 밉겠는가? 착한 심성을 가진 효로가 겪는 아픔을 읽은 초목성수는 당장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효로에게 다른 아픈 소식을 전해야 했던 초목성수는 마음을 다잡으며 무거운 음성을 흘렸다.
“네 할아버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무 충격적인 소식이었는가. 딱딱하게 안색을 굳힌 효로는 멍하니 말이 없었다. 시선을 먼 곳으로 둔 초목성수는 인내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효로의 입이 열렸다.
“할, 할아버지께서 다…… 나으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최근에는 단 한 번도 아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태도에 병이 완치된 것으로 생각했던 효로에게 초목성수의 말은 청천벽력이었고 지독한 아픔을 안겨 주었다.
초목성수는 자신의 말이 효로에게 더 큰 충격과 아픔을 줄 것인 걸 알았지만, 솔직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나도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최근에 심장으로 침습한 독기를 제때 제거하지 못한 탓에 상태가 악화한 것이지.”
쇠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에 효로는 아찔함을 느끼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독기. 할아버지에게 침습한 독기가 무엇이겠는가. 자신의 몸에서 뿜어진 것이리라.
결국, 할아버지도 자신으로 인해 천명을 누리지 못하신다는 말인가. 가슴이 무너져 숨을 쉴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도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느라 할아버지께 밝은 미소도 보여 주지 못했었다. 이 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저 때문에…….”
믿기지가 않아서. 믿고 싶지 않아서 효로는 열리지 않는 입을 간신히 벌려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다.
초목성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몸에서 나온 독기 때문이지.”
무너진 효로는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한마디 더하였다.
“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죄를…….”
효로의 짙은 슬픔을 느꼈는지 초목성수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를 토닥였다.
“네가 무공을 배우지 않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배워라. 내 생각에는 그것이 네 할아버지께 마지막으로 효도하는 것이다. 무공을 익혀 그의 풀지 못한 아픔을 네가 풀어 주어라.”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아 눈물만 흘리는 효로는 대꾸할 수 없었다. 천 근 바위가 누르는 듯 무거운 마음에 효로는 땅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끄으윽.”
전해지는 절절한 슬픔에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한 초목성수는 눈시울을 붉히며 먼 곳으로 시선을 둔 채 안타까운 침음만 흘렸다. 하지만, 한 번은 겪어야 할 진통.
“과거와 같은 잘못을 피하려면 무공을 익혀라. 네 안에 있는 괴물을 다스릴 방법을 익혀야지 다시 후회스럽고 슬픈 일을 만들지 않을 것이 아니냐. 내가 네게 해 줄 말은 이것뿐이다.”
효로의 눈물이 잔뜩 배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남은 시간이 얼, 얼마나 됩니까?”
“길어야 두 해 정도일 거다.”
더 있다가는 주책없이 눈물을 흘릴 것 같았던 초목성수가 몸을 돌려 효로에게서 멀어졌다. 그의 뒤로 억눌린 울음이 계속 뒤따랐다.
“끄으윽.”
율을 데리고 멀어졌던 조영영은 효로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그와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나눈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어깨가 떨리는 효로의 웅크린 모습에서 전해지는 절절한 슬픔에 그녀의 눈에서 부지불식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율도 느끼는 게 있는지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무 슬퍼. 무엇이 그를 이토록 애통하게 하지?’
남자의 숨죽인 오열이 전하는 애통함에 그녀의 가슴은 먹먹했다. 모든 것을 안다는 그녀도 효로의 슬픔을 설명할 수 없었다. 세상이 밝기만 하던 자신에게 슬픔을 알게 한 그가 밉기도 했지만, 기울기 시작하는 마음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나요?’
며칠 후, 무공을 배우겠다는 효로의 말에 천 노인은 속으로 반색하면서도 걱정 반 의혹 반으로 물었다.
“왜 무공을 배우려 하느냐?”
효로의 입에서 단단한 음성이 흘렀다.
“제 안의 괴물을 다스리고 싶습니다. 놈의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무공을 익힘으로 몸과 마음의 통제력을 높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효로에게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천 노인의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무엇을 아끼겠느냐. 그리하자.”
효로는 할아버지의 기뻐하는 모습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내공심법의 구결을 다시 일러 주마.”
노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유심현현경(明惟心顯炫勁)의 구결을 전하기 시작하자 효로가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대저 만물의 근본은 하나에 이르니 명유(明惟)로 그 이치를 득하면, 극(極)에 달할 수 있을지니 그 방도는 이러하니라. 천존지공(天尊地?) 건곤정의(乾坤定矣) 재천유상(在天有象) 재지유형(在地有形) 변화존의(變化存矣)…….”
마음가짐이 달라진 탓인가. 전에 들은 구결인 탓인가. 효로는 겨우 두 번 일러 준 구결을 머리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자구만 외우면 되었지만, 이제는 진정으로 수련하려면 그 의미와 취기하는 법, 운용하는 법을 다 익혀야 하기에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