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염기 1권(23화)
第九章 만남은 이별을 낳고(3)


구결을 외운 효로는 그날부터 심법을 익히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파고드는 슬픔과 죄책감을 이기고자, 자신 안에 숨 쉬는 괴물을 통제하려,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고자 침식조차 잊은 채 촌각을 아껴 가며 수련에만 매진했다.
처음에 지나친 수련을 하는 효로가 걱정스러웠던 천 노인은 초목성수가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말리지 않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고, 기왕 그에게 무공을 가르칠 것이라면, 가능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더군다나 손자는 무림의 공적으로 낙인(烙印)찍혔지 않은가.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효로였기에 오히려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노인의 매몰찬 매질 때문인지 효로가 그동안 내공수련을 열심히 해 온 탓인지 심법수련은 일취월장(日就月將) 빠르게 성장했다.
조영영이 끼니 때마다 음식을 싸 왔지만, 효로의 입으로 들어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 이런 때도 통용될 수 있을까. 효로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자 어느새 그녀의 가슴속에 그가 성큼 들어와 자리 잡았다. 그녀는 율이 보고 싶어 효로를 찾는 것이라 핑계를 삼았지만, 그녀의 진실한 속내를 모르는 이는 효로가 유일했다.
초목성수도 효로가 싫지 않았기에 손녀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손녀에게 가르침을 베풀 때는 효로를 불러 같이 하도록 할 정도로 응원했다.
효로는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는 무리(武理)에 대해 배웠고, 초목성수로부터는 의술(醫術)을 배웠다. 자신의 깊은 곳에 숨은 괴물을 제거할 수 있을 방도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효로는 의술을 배움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조영영이 그의 수련과 공부를 알게 모르게 도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효로의 성장이 자신의 것보다 더 기뻤다. 효로의 수련이 점점 그 경지를 더해 갈수록 조영영의 연정(戀情)도 깊어졌다. 연심을 담은 탓인가, 소녀에서 여인으로 피어난 조영영의 모습은 환하게 빛났다. 이제 한껏 피어난 조영영의 모습은 두 노인이 보기에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초목성수와 반상을 사이에 두고 수담을 나누던 천 노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효로를 부탁하네.”
살짝 굳은 그의 모습에서 무슨 낌새를 차린 것일까. 초목성수의 얼굴이 덩달아 굳어졌다.
“중요한 일인가?”
“그렇다네.”
이미 마음을 굳힌 천 노인을 만류할 수 없던 초목성수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천 노인은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외유(外遊)는 손자를 중독시킨 놈을 잡아 무슨 독을 사용했는지 알아보려 함이었다. 무슨 독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면 초목성수가 손자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그의 도움이 필요하니 굳이 감출 필요는 없으리라.
“효로가 중독된 독을 안다면 녀석을 치료할 수 있겠는가?”
초목성수는 천 노인의 한마디에 그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네. 그러나 무슨 독인지 안다면 효로를 치료하는 방도를 찾는 일에 크게 도움은 될 것은 분명하네.”
“효로에게 무슨 독을 썼는지 알아볼 생각이네.”
“오래 걸릴 건가?”
“모르겠네. 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알아보겠네.”
탁.
손을 뻗어 돌을 하나 놓은 초목성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도 완전하지 않으니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천 노인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염려하는 친우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 탓이다. 천 노인이 자신의 돌을 반상의 한 부분에 올려놓았다.
“알았네.”
탁.
흑백 돌이 이룬 세력을 살피던 초목성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살던 마을로 갈 건가?”
“그럴 생각이네.”
천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를 저렇게 만든 놈을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겠는가. 놈의 뒤를 쫓는 듯 보이던 정무맹의 무인에게 소재 파악을 부탁해 두었으니 그를 찾아 물어볼 생각이었다.
‘놈,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천 노인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살짝 어렸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의 살기를 느꼈던 초목성수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날 밤, 효로의 심법 수련을 지켜보던 천 노인이 자신의 뜻을 밝혔다.
“효로야, 이 할애비가 잠시 어디 다녀와야겠다.”
효로의 눈에 서운한 감정이 살짝 어렸다. 힘들게 만났는데 다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일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네, 할아버지.”
“다녀와서 초식 수련을 시작하자꾸나.”
“네.”
효로의 마음을 읽었는지 천 노인의 따스한 손길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효로는 따뜻한 할아버지의 마음에 행복했고, 이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슬펐다.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 고개를 숙인 효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품에서 고개를 살짝 내민 율은 묘한 분위기를 느낀 탓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떨어지는 것뿐이라고는 하더라도 별리는 별리인지라 조손은 슬픔이 전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침묵과 애잔한 마음이 익어 가는 밤과 함께 점점 짙어져 한동안 이어졌다.

***

인면마의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 길을 나선 천 노인의 발길이 효로가 살던 소방(疏放)으로 향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마을에 도착한 천 노인은 황량함만이 가득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부분 마을 사람이 떠나 휑해진 마을은 한때 활기찬 마을이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인기척조차 드물게 느껴졌다.
더구나 홍 노파가 도망한 탓에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자신의 장원은 온통 거미줄투성이에다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처음 효로의 손을 잡고 왔던 때를 떠올리며 잠시 감회 어린 눈빛으로 장원을 둘러보던 천 노인은 몸을 돌렸다.
자신의 장원을 벗어난 천 노인의 발걸음은 전에 만난 정무맹의 무인이 머물렀던 단가장으로 향했다. 그에게 인면마의란 놈의 소재를 파악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을 잊지 않았었다. 혹시나 하고 도착한 단가장 역시 다른 곳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예전에 살던 많은 사람의 분주한 발길은 끊어졌고, 장원을 지키는 나이 많은 노인만 외로이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정무맹의 무인들도 철수한 후였다.
‘어디서 이놈들을 찾는가?’
정무맹의 무인들이 아직 머물리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헛걸음했다는 생각에 천 노인은 은근히 화가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언제 온다고 약속하지도 않았고, 분풀이할 상대조차 없는 곳에서 자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포를 펄럭이며 마을을 나선 천 노인은 잠시 생각하다 무림의 정보단체인 개방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래. 거지 놈들이라면, 뭔가 아는 게 있겠지.’

***

“묵염무영마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령마검 진가기의 보고를 받은 인면마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실이냐고 되물었다. 한령마검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가 단가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면마의는 이마를 찌푸렸다. 효로가 죽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가 죽었다면 자신으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궁주의 자비를 바랄 명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이제껏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것도 효로를 통해 대법을 완성할 길을 만들어 두었다는 데 있는 상황에서 그가 죽었다면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었다. 묵염무영마는 효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묻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는 자신이라 해도 함부로 건드리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묵염무영마와 부딪치는 것은 적극 피하며 그의 뒤를 쫓아라. 그를 쫓다가 보면 효로 놈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해라. 절대 그와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존명.”
예를 취하며 고개를 숙인 한령마검은 사부의 명을 기쁜 마음으로 받들었다. 묵염무영마를 상대하라는 명이라도 떨어지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직접 손을 섞은 적은 없을지라도 묵염무영마의 이름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다시 인면마의의 말이 이어졌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순찰각주와 함께 움직이도록.”
“존명.”
손짓으로 한령마검을 물러가라 명한 인면마의는 의자에 깊이 몸을 묻으며 눈을 반짝였다.
‘어디 있느냐? 효로. 숨바꼭질은 그만하고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

“예전에 이곳에 개방의 분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무의(武宜)에 들어선 천 노인은 거지가 머물 만한 곳을 눈여겨 살피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거지는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 설혹 개방의 분타가 없다 하더라도 어찌 이리 거지가 없다는 말인가. 어지간한 마을에는 다리 밑에 거지 한둘은 분명히 있을 터였지만, 이곳은 거적때기를 걸친 움막만 덩그러니 비어 있을 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개방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천 노인은 객잔을 찾았다. 요기를 하며 거지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아볼 요량이었다. 객잔 안으로 들어서던 천 노인은 반갑게 맞으며 자리로 안내하는 점소이에게 동전 몇 문을 건네주었다.
‘기름칠을 하면 저놈의 주둥이가 훨씬 부드럽게 움직일 테지.’
노회한 천 노인의 예상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동전을 건네받은 점소이는 객잔의 유명한 음식부터 주르르 읊었다. 천 노인은 약간 시장했던 참이라 제법 비싼 음식을 몇 가지 주문했고, 점소이는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하고 주방으로 뛰어갔다.
‘개방의 분타가 어디로 이전하기라도 했는가?’
천 노인은 여러 가지 상념에 잠겨 있다가 점소이가 음식을 내오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손님,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제가 주방장에게 잘 부탁해 재료를 넉넉하게 쓰도록 했으니 더 맛있을 겁니다. 헤헤헤.”
“고맙네. 맛깔스러워 보이는군.”
“많이 드십시오.”
인사하고 떠나려는 점소이를 천 노인이 불러 세웠다.
“이보게.”
“네, 손님. 더 필요하신 것이라도…….”
“아닐세.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불렀다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아는 것이라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마을에 들어온 후로 거지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네. 본래 이 마을에는 거지가 없는가?”
점소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요. 세상 천지에 거지가 없는 마을도 있답니까?”
천 노인은 개방의 이목에 자신이 걸렸음을 직감했다.
‘그렇군. 내가 오는 것을 안 게야.’
“허허허. 신기한 일이로세. 거지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증발한 모양일세.”
“네. 그런 모양입니다.”
맞장구를 친 점소이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차려진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던 천 노인은 어떻게 개방의 거지들을 찾을지 방도를 생각했다.
‘주변을 잘 살펴야겠군.’
개방이 몸을 숨겼다 하나 자신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수상한 움직임을 찾아야 했다. 느긋한 식사를 마친 천 노인은 음식 값을 치르고 객잔을 나섰다.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주변을 탐색하던 천 노인은 결국 자신의 기감을 거스르는 기운을 느꼈다. 마을 밖으로 천천히 걸음하며 자세히 살피니 느껴진 기운이 자신을 뒤따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 밖 한적한 곳에 이른 천 노인은 벼락같이 놈을 덮쳤다. 그의 느닷없는 행동에 상대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상대는 중년 거지였다. 혈을 짚어 제압한 천 노인이 차가운 음성을 흘렸다.
“개방의 방도가 아니라면, 살려 줄 생각이 없다. 개방도냐?”
하얗게 얼어붙은 거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 노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개방에 물어볼 것이 있으니 분타주를 만났으면 한다. 안내하겠느냐?”
고민하는 듯 거지는 난감한 기색을 흘리며 대답이 없었다. 개방도의 고민을 이해한 천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도 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물어볼 것이 있어 만나고 싶을 뿐이다. 내 절대 손을 쓰지 않을 것이니 안내하여라.”
얼굴을 굳힌 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노인은 그의 점혈을 풀어 주며 부드럽게 음성을 흘렸다.
“고맙다.”
아혈이 풀린 거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개방에 손을 쓰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는다.”
개방도가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노선배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개방 무의 분타주 불취개(不醉짵) 반찬수(半贊壽) 묵염무영마 노선배께 인사드립니다.”
상대가 분타주라는 말에 천 노인은 의혹의 눈길을 흘렸다.
“분타주가 직접 움직였다?”
“네. 노선배의 움직임을 살피는 일에 수하들을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천 노인이 다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