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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염기 1권(24화)
第九章 만남은 이별을 낳고(4)


“내가 묵염무영마라는 사실은 어찌 알았나?”
“개방의 이목은 예민합니다. 노선배께서 소방에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부터 개방의 눈은 노선배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천 노인은 침음을 흘렸다. 이미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은 지 오래라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개방은 자신을 알아보고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음, 그랬는가?”
“노선배님, 묻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 노인은 불취개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인면마의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 주게.”
잠시 생각하던 개방 분타주는 자신의 머리에 담긴 것을 비교적 상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인면마의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방 분타주의 말을 정리하면, 인면마의는 혈궁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하며 정무맹에서 무림공적으로 선포한 자였다. 그가 익힌 의술과 독술(毒術)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무공도 상당히 뛰어나다고 알려졌다. 그게 다였다.
물론 놈이 어디서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한 과거 행적은 어느 정도 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놈의 소재인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혈궁에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도 있지만, 사실 혈궁과의 관련 여부도 불투명했고, 혈궁의 위치도 알려진 바가 없으니 찾을 방도가 없었다.
“제가 아는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불취개의 말에 천 노인은 이마를 찌푸렸다. 자신이 알고자 하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불취개의 맑은 눈동자는 그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터라 그를 닦달할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지금 정무맹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게 있는가?”
질문의 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취개가 되물었다.
“노선배님을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나를 무림공적으로 계속 추적하는가를 묻는 걸세.”
“아! 네.”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불취개가 말을 이었다.
“물론 무림공적으로 계속 추적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노선배님을 담당한 추포단은 부단주인 북풍냉검 종낙현은 노선배님을 추적하기보다는 인면마의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당분간 움직이시는 데는 그리 불편하지 않으실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천 노인이 다시 물었다.
“내 듣자 하니 최근에 무림공적으로 선포된 이 중에 적안마동이 있다던데 그가 그리 위험한 인물인가?”
불취개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적안마동은 비록 정무맹에서 무림공적으로 선포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면마의의 사악한 대법의 희생자이며, 지닌 극독을 제외하고는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의 전말을 아는 이들은 모두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의 행방이 묘연하기에 그저 북풍냉검에게 일임한 상황입니다. 혹시 노선배님께서 아는 사람입니까?”
천 노인이 적안마동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불취개가 눈을 반짝였다. 천 노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최근에 그가 무림공적으로 지목되었다는 말에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것뿐일세.”
“네. 그러셨군요.”
물어보고 싶은 것을 모두 질문한 천 노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맙네. 내 개방의 친절을 잊지 않겠네.”
“몸조심하십시오.”
무림공적인 자신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하는 불취개가 이상하게 생각된 천 노인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림공적인 내게 왜 이리 잘 해 주는가?”
불취개가 빙그레 웃었다.
“일단 노선배께서 개방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까닭에 저로서도 적극 도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개방의 이목은 예민하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왜 노선배께서 무림공적이 되신지 이유를 아는 개방이 적대적 입장을 취할 리가 있겠습니까.”
천 노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네. 그만 가 보시게.”
“네. 노선배님께서도 건강하십시오.”
불취개가 포권을 취하며 인사하고 총총히 멀어졌다. 개방을 통해서도 뾰족한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천 노인은 개방에서 효로가 있던 마을에 감시를 붙였다면, 놈들도 그리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천 노인은 기감을 펼쳐 주변을 살폈지만, 걸려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기다리면 놈들이 알아서 찾아오겠지.’
놈들을 유인하려면 인적이 드문 곳이 나을 것이란 생각에 관도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천 노인이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온 듯하군. 기가 정순하지 못한 것을 보면 정파 놈들은 아닌 듯하니 혈궁 놈들이겠군. 예상대로 제 발로 찾아오다니 놈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었군.’
유람하듯 천천히 걷던 천 노인의 신형이 어느 순간 갑자기 허깨비처럼 꺼졌다.
천 노인을 미행하던 순찰각주와 수하들은 그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놀라 몸을 움츠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다.’
순찰각주는 옆에 있는 한령마검에게 전음을 전했다.
“이미 그에게 발각된 모양이오. 수하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이 좋을 듯하오.”
눈을 빛낸 한령마검도 그러한 사실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한령마검이 몸을 일으키며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한곳으로 모여 혈라포불진(血羅捕佛陣)을 펼쳐라.”
한령마검의 명을 받은 수하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포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포진하기도 전에 순찰각주의 옆으로 천 노인이 유령처럼 스르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손을 뻗어 순찰각주의 견정혈(肩井穴)을 짚어 왔다.
쉬익.
강맹한 내공이 실린 일수가 대기를 일그러뜨리며 다가오는 모습에 순찰각주는 놀라면서도 혈사탈각(血蛇脫殼) 수법으로 몸을 교묘하게 비틀어 그의 손길을 피했고, 한령마검도 그 틈을 타 황급히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천 노인은 자신의 일수를 피한 순찰각주에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일 강해 보이는 놈을 먼저 제압하려던 자신의 의도가 빗나간 것이다. 과거에도 자신의 손을 이리 피할 수 있는 무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중년인으로 보이는 상대가 자신의 금나수를 피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조금은 놀랐다.
“오호. 제법이군.”
순찰각주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자신의 무기를 빼어 든 그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노선배, 비겁하외다.”
“비겁?”
“명성이 자자하신 선배께서 어찌 기습을…….”
천 노인이 주변을 휘둘러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쯧. 떼로 덤비는 놈들이 비겁 운운하다니 가소롭구나.”
그때, 느닷없이 한령마검의 외침이 들려왔다.
“진을 발동시켜라!”
천 노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고, 그와 마주하고 있던 순찰각주는 낭패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진이 발동하면, 함께 진세에 갇히는 것이지 않은가.
혈라포불진은 무위가 높은 무인을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한 진법이었다. 한령마검이 이끄는 혈살단 고유의 진법이었고, 위력이 대단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진의 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갇히게 되면 자신도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진이 완성되기 전에 벗어나야 했다. 마음이 급해진 순찰각주는 황급히 몸을 날려 진세를 벗어났다. 혹여 천 노인이 뒤에서 공격해 올까 조마조마하던 그는 진을 벗어나도록 천 노인이 공격하지 않자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 노인은 할 테면 해보라는 듯 무심한 눈길과 오연한 자세로 진을 맞았다. 순찰각주가 진세에서 멀어지자 한령마검의 수하들은 주저 없이 진을 발동시켰다. 자신을 네 겹으로 둘러싼 흑영들이 빠르게 교차하며 회전하자 진 안에 갇힌 천 노인은 점점 날카로워지는 진압이 전신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느꼈다.
‘제법 강한 진이군.’
휙― 휙―
천 노인은 마치 즐기기라도 하는 듯 뒷짐을 진 채 여유로웠다. 진압이 제법 강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 위력의 진은 내력의 일부만을 운용해도 누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진의 변화가 어떨지 궁금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치르는 생사결을 좀 더 즐기고 싶었기에 서두르지 않고 진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진의 회전이 빨라졌다. 천 노인은 진의 변화를 관찰하는 데 정신을 집중시켰다. 과거 자신이 정파의 추격을 당하면서 겪었던 많은 진법과 머릿속으로 비교하던 그는 그리 뛰어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헙.’
갑자기 주위를 빠르게 회전하던 흑영들이 색색의 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다. 경각심을 느낀 천 노인은 황급히 호흡을 멈추었지만, 이미 한 모금 들이킨 후였다.
일순 끌어올린 내공이 흩어지며 기운이 흔들렸다. 놈들이 뿌린 것은 내공이 흩어지게 하는 산공분(散功粉)의 한 종류리라. 무인의 싸움에 산공분을 사용하는 것은 무혼을 중시하는 그의 성정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다른 색의 가루도 뿌린 것을 보면, 산공분과 독분(毒粉)을 동시에 살포해 내력을 떨어뜨리며 중독시키려는 듯하였다. 그의 눈동자에 노기(怒氣)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이 망할 쥐새끼들이 감히…….’
“살(殺)!”
진을 주축을 이루는 흑영의 외침에 진의 움직임이 변화하였다. 진의 후열에서는 독분과 산공분을 살포하는 동안 전열을 차지한 흑영들이 무기를 떨쳐 살수를 펼치기 시작했다.
쉭― 슈욱―
화가 치민 탓에 십성의 내력을 끌어올린 천 노인이 진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한순간 힘껏 진각(震脚)을 굴렀다.
쿠웅―
“컥.”
“쿨럭.”
노기가 실린 천 노인의 공력은 무서웠다. 그를 중심으로 둥글게 파문(波紋)을 이룬 사나운 기파(氣波)가 자욱한 먼지를 피워 올리며 진을 거칠게 휩쓸었다. 진을 펼치던 흑영 중 입에서 피를 뿜으며 튕겨 나 차가운 바닥에 나뒹군 전열은 사나운 기파에 기맥이 끊어지며 그대로 절명했다. 후열의 흑영들은 극심한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컥울컥 선홍의 붉은 피를 토했다. 토혈에 내장 조각이 희끗희끗 보이는 것으로 보아 회생이 불가능할 듯 보였다.
몸을 비틀거린 한령마검과 순찰각주도 전해지는 무서운 기운에 전력으로 저항하며 눈이 커졌다. 단지 한 번 구른 진각을 통해 전달된 순수한 묵염무영마의 내력은 자신들의 상상을 초월한 위력으로 다가왔다.
놀라고 당황한 그들의 입에서 침음이 절로 나왔다.
“크윽. 이, 이런…….”
여전히 천하를 오시(傲視)하는 듯 당당한 모습으로 굳게 선 천 노인 역시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당혹해하고 있었다. 산공독을 너무 경시한 것일까. 내력을 급격히 끌어올려 진각을 내딛는 순간 진기가 흐트러지며 심장에 눌러 두었던 독기가 발작해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해진 탓이었다.
황급히 독기의 발작을 막았지만, 천천히 세력을 확장하는 산공독은 그의 내력을 조금씩 갉아먹는 중이었다. 빠르게 놈들을 처치하고 안전한 곳으로 가서 요상(療傷)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겪을 수도 있으리라.
‘젠장.’
“혈궁의 잡종들이렷다.”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 묵염무영마의 손에 위험한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것을 본 한령마검과 순찰각주는 입조차 열지 못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망할, 노인네가 이렇게 강할 줄은…….’
짝짝짝.
“과연 허명이 아니외다.”
박수 소리와 함께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령마검과 순찰각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천 노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타난 이가 숨어 있던 것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다만, 먼저 모습을 드러낸 놈들을 처리하고 상대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 등장한 것을 보면, 놈들과 한패가 틀림없으리라.
“네놈은 누구냐?”
“조천관(趙天貫)이라 하외다.”
인면마의 조천관. 그러나 자신의 별호는 밝히지 않았기에 천 노인은 놈이 자신이 찾는 인면마의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위가 먼저 모습을 드러낸 두 놈보다 높아 보이는 것을 보아 허투루 볼 놈은 아니리라.
“무명소졸(無名小卒)은 아닐 터. 별호는 없느냐?”
“어찌 묵염무영마 선배 앞에서 별호를 입에 올리겠소. 그냥 무명소졸로도 영광이외다.”
영악한 인면마의는 묵염무영마의 상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상대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한 기색을 발견한 그는 자신의 의도가 정확하게 먹혀들었음을 파악했다.
‘산공분에 중독되었다.’
자신이 수하들에게 지급한 가루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군자산(君子散)보다 훨씬 뛰어난 위력을 지닌 산공분이었다. 음식물에 섞어 섭취해야 하는 여타의 산공독과 달리 대기 중에 흩뿌려 하독(下毒)하는 산공분은 그 효과를 여러 차례 증명했었다.
비록 묵염무영마가 경지를 짐작하기 어려운 무인이라 하더라도 내공을 운용해서 무공을 펼칠 터. 중독만 되면, 산공분의 공능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지독하게 조심스러운 그가 모습을 드러낸 데는 그런 계산이 바탕에 깔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