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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

수민은 입을 딱 벌렸다. 마치 솜뭉치를 든 것처럼 상자는 그의 손에 매우 가볍게 들려 있었다. 그는 그렇게 척척 계단을 올라섰다.

“안 오실 겁니까?”

“가, 가요―!”

수민이 따라오지 않자 살짝 멈춰서 묻는다. 수민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번쩍 상자를 들고 있는 그의 체구가 듬직해 보였다.

[남자는 힘! ……파워 발기!]

수민은 번쩍 떠오르는 문구에 흠칫했다. 이게 다 동기 때문이라고 남 탓을 하며 수민은 재빨리 그를 뒤쫓아 갔다.



“고― 고마워요.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사무실까지 옮겨 주자 수민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직원들이 교육으로 나간 사무실은 썰렁했다. 수민은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자신의 책상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얼른 몸으로 책상을 가렸다.

“시원한 것 좀 마실래요? 캔 커피 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물 줄 테니까 가져가요. 공장 견학도 갈 텐데 필요할 거예요.”

수민은 신입들이 들어오면 으레 데려가곤 했던 공장 방문을 떠올리며 얼른 탕비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왔다. 건네주자 남자가 순순히 받는다. 수민은 그를 슬쩍 살폈다.

“입사……한 걸 환영해요.”

“…….”

“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전 개발 2팀의 이수민 대리라고 해요.”

“네.”

뭐지 이건. 이럴 땐 ‘네’가 아니라 보통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나? 근데 그는 말이 없었다. 아니, 없어도 너무 없다. 물병을 받고 어딘가를 뚫어져라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좀 무례하고.

‘응? 어딜 뚫어져라 봐?’

수민은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컴퓨터 모니터에는 근육질의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양쪽에서 찌르듯이 두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장면이 나와 있었다. 그의 머리 위쪽에 큼지막하게 써진 파워 정력이란 글자가 유난히도 굵게 보였다.

‘저 글씨체가 뭐였더라? 궁서체?’

잡생각을 1초 남짓 하던 수민은 이내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당황한 수민은 화면을 끄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했다.

“어, 어, 이게 왜…….”

그러나 마음이 너무 급한 나머지 엉뚱한 데를 클릭하고 말았다. 영상은 모니터를 꽉 채우며 확대되었다.

― 자고로 남자는 힘!

“허억―!”

불룩 튀어나온 남자의 중심부. 클로즈업되는 그 부분이 민망하기 짝이 없다. 성기의 적나라한 표피가 그대로 드러나는 클로즈업. 수민은 기겁하며 마우스를 마구 눌렀다. 그러나 끄기는커녕 오히려 소리 버튼만 더 키우고 말았다.

― 힘은 곧 정력이다! 어디까지 커질 수 있는지! 모든 남성의 히어로가 온다! 손가락을 튕기면 약골은 사라지고 파워 발기!

오, 맙소사.

파워 발기란 단어가 빈 사무실을 크게 울렸다.

“…….”

“…….”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민은 약간 넋 나간 표정으로 웃었다.

“아…… 저기.”

“가 보겠습니다. 문자가 와서.”

남자는 핸드폰 울림을 느꼈는지 멈칫했다. 수민은 열심히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지만 남자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공장 견학을 위해 신입 사원들을 태워다 줄 버스 시간이 다 되었는지 그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오해예요! 이건 완전히 오해야! 수민은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따라가서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전화가 울렸다. 수민은 어쩔 수 없이 전화기를 들며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걱정됐으나 한편으론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각종 야한 영상과 야스러운 문구가 넘쳐나는 이 시대, 특별할 게 없는 영상이었을 뿐이다. 수민은 걱정하지 말자고 다시 한 번 생각하며 통화에 집중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수민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져 오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좋았다. 자신의 책상에 음료수가 놓여 있거나 커피가 놓여 있으면 누군가 자신에게 따스한 마음을 베푼 거라고 생각했다. 빡빡한 회사 생활에서 사소하게 오가는 이런 정들이 나름 활력이 아니겠냐고 생각했지만 이상한 점은 누가 주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익명의 선물. 그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결정적인 것은 시선을 느끼고 나서부터였다.

처음 시선을 느낀 날. 그날은 날씨부터 이상했다. 오전부터 비와 눈이 섞여 내리는 추우면서도 눅눅한 요상한 이상기후가 한창일 때, 밀린 업무로 오후 내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와 씨름했던 수민은 어깨를 주무르다 묘한 시선을 느꼈다.

‘뭐지?’

고개를 돌려 확인했지만 자신 외에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컴퓨터에 영혼을 빼앗긴 채 한 달에 한 번만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월급을 향해 부지런히 타자를 두드리는 중생들. 아니, 동료들. 수민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또다.’

다시 집중하며 일하는데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 얼른 뒤를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수민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내가 잘못 느꼈나?’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도낏병인지 의심마저 들었다. 수민은 이 나이에 그 정도는 필요한 거 아니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려 상체를 위로 쭉 뻗었다. 그러자 유연한 의자 등받이가 기울어지며 몸 또한 뒤로 기울어졌는데 그 순간 수민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그때의 신입. 자신을 도와줬던 덩치의 남자. 파워 발기 광고를 함께 시청한 불운의 남자다. 수민은 벌떡 등을 세워 앉았다.

‘뭐야?’

설마 그가 나를 본 건가? 나를 쳐다보고 있던 거야? 수민은 흠칫했지만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봤을 때는 그는 자리에 없었다. 그 뒤로도 시선이 느껴져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와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그래서 수민은 우연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수민은 그가 자신을 지켜봤음을 확신하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점심을 먹고 팀장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직장 내 성희롱 교육을 듣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층의 한가운데 중앙 홀에 모여서 직원들이 삼삼오오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이 중앙 홀은 마치 네 갈래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처럼 커다란 공간에 둥글고 편안한 소파가 놓여 있어서 마치 만남의 장소처럼 안부를 묻거나 수다를 떠는 곳으로 직원들에게 애용되곤 했다. 수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파는 안락했고 위치도 좋았기 때문에 때론 수다가 30분이 넘게도 이어지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