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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6화)
3장 스켈레톤은 말을 못한다?(2)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선 방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이었다. 밝은 갈색의 의자와 차를 마시는 용도로 사용되는 듯한 작은 탁자, 그리고 두 개의 큰 책장과 고풍스런 침대. 이 방의 원래 용도가 마왕 집무실이 아니라, 그녀의 방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이 방의 중심에 주변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는 차갑고 딱딱해 보이는 검은색의 사무용 책상. 그곳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질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내가 앞에 서자, 그녀는 조금 전과는 다른 심각한 태도로 말을 내게 건넸다.
“카지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그러시지요.”
지나치게 심각한 듯한 그 모습에 불안감이 생기지 않음은 거짓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경험에 따르면, 이런 경우 내게 허락될 것은 추궁 뒤에 주어질 잠깐의 변명의 시간뿐이리라.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곳으로 온 것이지요?”
“예?”
얼떨결에 나온 내 어설픈 되물음으로 인한 잠깐의 정적이 주변을 덮어 가며 회색빛으로 물들이려는 순간,
“커흠, 아,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왔냐고 하셨나요?”
서투른 헛기침으로 겨우 그 분위기를 만회하긴 했지만, 역시 저 질문에 대한 답이 문제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대로 고하는 것이겠지만 지나가다가 신관 아이들한테 맞는 걸 도와준 할아버지가 파멸의 마도사 중 한 명이고, 그 대가로 소개받은 일자리가 여기라는 황당무계한 말을 이 분위기에서 곧이곧대로 했다가는 괜히 의심만 받을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말하기 힘든 건가요?”
잠시간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심각해져 있었다.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아차 하는 마음에 성급히 입을 열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답이 떠올랐을 리 만무했다. 어디까지나 머리가 쓸 만한 변명을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시간 벌이 대답이 고작이었다.
“단지…….”
“단지요?”
“엘레나 님께서 왜 그런 것을 물어보시는지, 그 저의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짧은 시간에 만족할 만한 대처를 한 스스로의 임기응변을 칭찬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려 하는데, 한층 더 차가워진 그녀의 그 표정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카지한은 제가 당신에게 질문을 하는 것에도 저의를 숨겨야 한다고 말하시는 건가요?”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어떠한 기세 때문인지 긴장감에 내 심장은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럼에도 지금 내 얼굴과 목소리는 차분하다 못해 그녀의 모습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 밝혔음에도 이제 와 갑자기 그런 물음을 하시니 의아했을 뿐입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설사 제가 다시 일자리를 찾아 왔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믿지 않으시거나 오히려 더 상황이 악화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조금은 냉기가 덜해진 그녀의 목소리에 그나마 한숨 놓이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놓치는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한순간의 말실수와 한순간의 방심이 죽음과 파멸에 이르게 만든다는 사실은, 지난 이십 년간의 세월이 내 머릿속과 몸 구석구석에 남겨 준 교훈들 중 하나였다.
“카지한, 당신은 이곳에 올 때 상당한 고위급 이동 마법인 다크 홀을 통해서 왔어요.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서 그 정도의 흑마법을 시전할 만한 기운을 느끼지 못했고, 그건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당신은 완전히 다른 뼈를 재구성하는 수준급의 네크로맨싱을 행했어요.”
그녀의 설명 중 내 실력을 칭찬하는 듯한 말이 있다 해서 조금 전처럼 마냥 들뜰 만큼 나는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고, 여기까지 듣고 나서도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할 만큼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면 엘레나 님께서는 제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능력과 정체를 숨긴 채, 이 백색마궁에 잠입했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아니라면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대가도 없이 일한다는 것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렵겠죠. 거기다 엘런이 보낸 전단지는 단 한 장, 그것도 마계에 있는 파멸이란 칭호를 얻은 흑마법사들만이 출입 가능한 총지부에 보낸 거예요. 당신이 파멸의 칭호를 가졌을 리는 없으니, 그들 중 한 명의 제자 혹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어떤 관계를 가졌음이 당연하고, 그 다크 홀도 그들 중 한 명이 직접 시전한 거겠죠.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자신과 관련된 사람을 마왕성에 보낼 만한 자는, 적어도 파멸이란 칭호를 받은 이들 중에는 없어요.”
어리게만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역시 마왕이란 칭호에 걸맞게 냉정하게 사태를 분석하고 결론을 낸 그녀의 판단력은 분명 대단했다. 거기다 그런 그녀의 추리는 분명 보편적인 상황이라면 거의 100% 적중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조차 몇 부분은 그녀의 말대로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그리고 이 마왕성이 처한 상황은 절대 보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엘레나 님, 엘레나 님께서 간과한 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뭔가요, 카지한?”
“첫째,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숙박도 해결되었고, 식사도 해결되었잖습니까. 제가 이렇게 보여도 보기보다 많이 먹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부리는 대가치고는 너무 싸요.”
나름대로 농담이라고 건넨 말인데 반응이 너무 딱딱하군. 내 농담에 그녀가 웃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지길 바랐건만.
“그리고 둘째. 분명 제가 파멸이란 칭호를 받은 분과 관계가 있기는 있지만, 그 관계에 대한 범위가 너무 광대하군요. 이건 마지막 세 번째를 말씀드린 뒤에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좋아요. 그럼 세 번째를 말해 보세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 고개를 돌리고는 한 발짝 더 그녀의 책상에 다가섰다.
그리고 고개를 최대한 그녀를 향해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누가 이 성에 잠입해서 얻어 갈 이익이 존재하나요?”
“…….”
침묵, 그녀는 어색한 듯 애써 눈길을 돌려 대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다소 억지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을 해치웠다는 명예……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도 그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인지 부끄러운 듯 말을 흐리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엘레나였다.
보통 마왕의 힘은 마력의 양만 해도 웬만한 전설 속 대마도사나 드래곤 급에다 마족 특유의 마치 숨을 쉬는 듯 자연스러운 마법의 운영 능력, 거기다 설사 죽는다 해도 마계에서 몇 번이나 다시 부활하고, 마계 특별법에 의해 용사와의 정식 대결에 의한 패배가 아닌 죽음이라면 자격 재심사 따위는 건너뛰고 다시 자신의 영지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마왕을, 단신으로 잠입해서 암살로써 처리한다?
결코 답이라야 답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흠흠! 그럼 카지한, 두 번째 이유의 추가 설명을 해 주시겠어요?”
어색한 그녀의 헛기침과 약간 붉어진 그녀의 두 볼이 이미 아까의 분위기나 의심 따위는 사라졌음을 가르쳐 주고 있었지만, 이왕이면 의심의 뿌리를 뽑아 두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라면 아무리 황당무계한 일일지라도 이실직고하는 게 가장 좋은 방편임을 나는 체험에 의해 알고 있었다.
“제가 이곳에 ‘배달’되어 왔던 그날의 일입니다.”
그렇게 내 설명이 진행됨에 따라 그녀의 표정은 황당함에 물들어 갔고, 마침내 내 말이 끝났을 때는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단계까지 간 엘레나는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제가 여기 오게 된 경위고, 파멸의 칭호를 가진 분과의 관계 전부입니다.”
“하하……. 솔직히 좀…… 음, 재밌네요. 거짓말 같지도 않고……. 하아, 괜히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아무래도 믿는 쪽으로 기울었나 보다. 그녀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창피한 것인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렇게 사과했다.
“아닙니다. 마왕으로서 당연히 가지실 수 있는 의심이었지요. 거기다 홀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셔야 되니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음, 차 한잔 마실래요? 아, 맞다! 차도 다 떨어졌지…….”
그녀는 텅 빈 채 꽤나 오랫동안 채워지지 않고 방치되고 있는 자신의 차 세트를 바라보고는, 이번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그럼 가장 먼저 차부터 채워 넣어야겠군요. 차를 마시는 것은 레이디의 취미 생활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지요, 아마?”
“카지한, 그렇게 신경 안 써 줘도 괜찮아요. 당신 월급도 제대로 지급해 드리지 못하는 처지에, 그런 투정을 부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녀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그렇게 말했다.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답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왕, 어둠을 대표하는 자들 중 하나인 그녀가 지금의 이런 처지를 직접 입에 담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 않은 것인지 말끝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려 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는 있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아버지가 죽고 어린 동생과 함께 재산도, 가신도 없는 마왕성의 왕으로서 그 의무만을 짊어져야 하는 막막한 현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지금의 저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리라.
기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뿌리치며,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을, 그 여리고 작은 손으로 쥐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억 속으로 묻어 버린 내 과거의 조각이 생각날 것만 같았다.
생각해 내고 싶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의 웃음이 보고 싶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고 있지만, 눈물을 숨기는 듯한 저런 모습 따위는 보기 싫었다.
“좋은 차를 사는 것은 힘들겠지만, 성 주변의 숲을 뒤지다 보면 차로 마실 수 있는 식물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옛 기억을 덜어 내듯, 일부러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내리고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차를 야생에서도 구할 수 있나요?”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저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놀라움 뒤편에 숨어서 반짝이고 있는 기쁨이란 감정 덕분에, 이제 굳이 더 이상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웃고 있다는 걸 잊은 채 나는 웃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예전에 모셨던 한 스승님께서 차로 마실 수 있는 야생식물들을 알려 주셨거든요.”
나는 그녀에게 차 스승님과 지내던 시절들과 재밌는 차 종류들, 그리고 노숙을 하다가 좋은 찻잎을 구한 이야기 등을 해 줬고, 그때마다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녀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차를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좋았다.
이야기 도중 가끔씩 들려오는 그녀의 낮은 감탄사와 기대 가득한 눈빛은 좀처럼 이야기를 그만둘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 한참 후 기억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쏟아 낼 때까지 차에 대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대단하네요! 오래도록 차를 마셔 왔지만, 오늘에서야 처음 안 사실이 너무 많아요. 야생의 것도 차로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는걸요.”
“예. 스승님께서도 야생의 것은 온실 속의 화초와는 또 다른 멋이 있다고 하셨지요.”
긴 시간 동안의 즐거운 이야기들로 밝아져 있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렇군요. 하긴 단지 보살핌을 받기만 한 꽃은 쉽게 져 버리니까요.”
그래. 자기가 온실 속의 화초라고 생각된 건가.
“무엇이 좋고 나쁘다는 것은, 단지 개인의 주관일 뿐입니다. 화초에는 화초의 멋이, 야생초에는 야생초의 멋이, 다들 각자의 멋이 있는 법이지요. 제 스승님께서도 단지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 뿐 어느 쪽이 더 좋고, 어느 쪽이 더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하셨지요.”
“…….”
“또 설사 같은 종류의 식물을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사람이 키운다고 해도, 차 맛이 같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요. 모두 각기 다른 멋을 지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마워요.”
무엇이 고맙다는 것일까.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 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감사의 표시에 그저 조용히 허리를 숙여 답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그녀가 불러 세웠다. 뭔가 또 할 말이 있나 싶어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기, 내일 엘런과 셋이서 숲에 찻잎 구하러 갈래요?”
뜻밖의 제안에 뭐라 답하고 있지 못하자, 그녀가 덧붙였다.
“어떤 게 야생의 차인지 보고 싶어서 그래요. 엘런도 성안에만 있다 보니 심심해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