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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7화)
3장 스켈레톤은 말을 못한다?(3)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안 그래도 이 주변 숲의 지리를 모르기에 지도나 조언을 부탁하려던 참이었으니까.
“기쁜 마음으로 두 분을 모시지요.”
“그럼 내일 잘 부탁해요, 카지한.”
기분 탓일까, 그녀의 모습이 한결 부드럽고 편안해진 것 같은 느낌은.
어쨌든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도시락이라도 싸야겠군. 간만에 외출일 게 분명하고, 그렇다면 피크닉 분위기를 내는 것도 좋을 테니까.
기쁜 마음으로 문을 닫고 때이른 저녁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문득 엘런과 스켈레톤들이 생각났다.
“근데 엘런은 스켈레톤들이랑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 이제 슬슬 지겨워질 때도 되어 가는…….”
“하하하! 더 빨리! 더 빨리!”
나는 엘런의 구호에 맞춰, 결코 뼈다귀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복도를 청소 혹은 질주하고 있는 스켈레톤 무리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4장 죽음의 숲에서 피크닉(1)
해가 떠오른 지 얼마 안 되는 새벽녘,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엘레나는 지난밤의 잔영이 짙게 남아 있는 백색마궁의 복도를 걸어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 마족들은 특별히 생존을 위해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만 긴 세월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마족들은 유희를 위해 음식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이고 그것은 얼마 전까지의 엘런과 엘레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왕성의 재정이 제로가 됨과 동시에, 부엌을 책임지던 요리장과 그 조수들은 마왕성을 떠났고, 그 뒤로 엘레나와 엘런은 어설픈 요리 실력으로 재료를 망칠 바에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물론,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는 몇 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했지만 말이다.
카지한이 온 뒤로는 카지한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 먹고 있는 듯싶긴 했지만, 월급 줄 능력도 없으면서 식사 시간에 요리까지 요구하는 게 미안했고, 또 떠돌이였던 남자가 만드는 요리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엘레나와 엘런이었기에, 식사 시간에 동석을 한 적은 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제안으로 오늘 같이 숲으로 나서기로 한 이상 식사 정도는 여자인 자신이 준비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렇게 일찍부터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였지만, 역시나 처음 자신이 요리를 만들었을 때의 기억 때문인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다.
처음 주방장이 마지막 인사와 함께 아침을 차려 주었을 때까지도 그녀는 지금까지의 다른 수많은 불상사들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아버지가 안식에 들고, 재산이 마계로 환원된 그 뒤로는 성의 일꾼들이 하나 둘씩 마계로 돌아가 버리는 일상이 이어져 왔었기에, 단지 또 한 사람이 이 성을 나가는구나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어차피 마왕성에 쌓여 있는 식재료들 자체는 굉장한 상등품이었고, 향신료나 양념들도 최고급품, 거기다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자신은 여자이니 설마 못 먹을 걸 만들겠나 하는 안일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기괴해져만 가던 요리. 아니, 과연 그것을 요리라고 해야 하는지, 그냥 마도사가 만들다 실패한 약품이라 하는 게 더 나은 건지 모를 정체불명의 그것은, 엘런이 떠먹은 첫 스푼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성 근처 숲에 버려졌다.
애써 마지막에 엘런이 실수로 집어넣은 양념들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는 있었지만, 사실 엘런이 실수를 하기 전부터 상태는 심각해져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직도 그녀의 기억 속에는 자신의 요리를 먹고 엘런이 괴로움에 몸서리치는 모습이 남아 있었다.
“하아…… 그래도 이번에는 두 번째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지만, 절로 나오는 한숨은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 한번 해 보는 거야.”
그녀는 비장한 다짐과 함께 부엌문을 열었다.
“하암.”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품이 끊이지 않는다.
사실 어젯밤, 나는 엘런이 보여 준 그 불가사의한 언데드와의 친화력에 대해 생각을 하느라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끝까지 만족스러운 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그럴듯한 몇 가지의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일단 마왕의 혈족이기 때문에 어둠의 권속들을 다스릴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가설과 술법 중 언데드들에게 내 사념이 들어갔거나 혹은 가축들의 뼈로 만들어졌기에 그것들 특유의 온순함과 주인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들이 남아 있었는데, 엘런의 그 순진무구한 모습이 그것을 건드린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뭐 사실 확인을 할 방법도 없는 가설들 따위야 상관없지만, 이거 쓸데없는 짓은 아닌지 모르겠네.”
졸린 두 눈을 비벼 대며 이 이른 새벽녘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오늘 숲에 가서 먹을 도시락 준비였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뒤 한동안 혼자 살았고, 혼자 떠돌아다닌 시절도 많았기에 요리를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용병 부대에서도 음식을 만들어 봤다는 이유로 작전지대에서의 야영 때 식사당번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계약 불이행으로 평판이 나빠져 용병단에서 쫓겨났을 때는 그 당시 만난 새로운 스승님의 집에서 얹혀살며 그분을 보필했는데, 그분이 얼마나 미식가이셨던지 그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끼니때마다 용병인생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고급 요리를 올려야 했다.
집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 고급 요리재료들을 다 구하셨던 건지, 그렇게 핀잔이란 핀잔은 들을 대로 들으면서 그분에게 만드는 법을 배워 가며 겨우겨우 식탁에 요리들을 올렸지만, 어쩌다 시간이 없어 맛없는 요리를 올리거나 요리의 간이라도 안 맞았을 때는 불호령과 함께 몇 번이나 스승님의 따가운 눈총과 지도를 받으며 다시 만들어야 했다.
단 몇 달 만에 어느 왕국의 궁중요리나 어딘지도 모를 나라의 전통 요리까지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음을 보면 대충 알 만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원래 그분에게서 배웠던 것은 제왕학과 역사학이었는데 그것들보단 요리를 배우러 간 것 같았다. 뭐 결국 요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가질 정도가 되었지만 말이다.
요리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고 맛 또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 정도라면, 보통의 상황에서 걱정할 이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역시나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요리를 먹는 사람. 먹을 사람이 없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옛날 흑마법을 배울 때 들어서, 생존을 위해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는 마족이라도, 대부분은 그 맛을 즐기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다고 알고 있지만, 이 성으로 온 지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엘레나와 엘런이 음식을 먹거나 원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만약 혹시라도 그들이 음식을 즐기지 않는 마족이라면, 그냥 한 끼 굶어도 상관없는 나 자신을 위해 졸음을 이겨 가며 일찍 일어나 이러고 있는 보람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가끔 마족들 중에 음식을 먹는 것을 천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고 하니 만약 이게 엘레나와 엘런의 경우라면 사태는 정말 심각해진다.
“뭐, 설마 만들어서 가져갔는데 안 먹기야 하겠어?”
요리 준비는 거의 끝난 상태. 아침 일찍 일어나 지금까지 준비를 한 그 노력과 예쁘게 깎여진 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식재료들이 아까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그냥 요리를 시작하기로 했다. 만약의 경우엔 그냥 내가 좀 많이 먹으면 되지 않겠는가.
“평소에 자기가 먹으려고 이렇게 거창한 음식은 잘 안 하게 되니까 그렇게 돼도 별 상관이야 없겠지.”
그런데,
“좋아! 한번 해 보는 거야.”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부엌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엘레나와 카지한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 뜻밖의 풍경에 카지한과 엘레나 둘 모두 얼어붙은 듯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는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엘레나 님? 여기는 어쩐 일이신지요?”
“아……. 저, 그게…….”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린 카지한이 그녀에게 물었지만, 엘레나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주방 가득히 퍼져 있는 맛있는 냄새와 잘 정돈되어 있는 음식 재료들. 분명 그가 자신보다 훨씬 더 요리에 익숙해져 있는 게 분명했다.
“아…… 아니, 오늘 도시락 준비를…….”
생각보다 대단한 것 같아 보이는 카지한의 요리 실력에, 엘레나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 왔던 생각과 각오, 그리고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그녀는 빨개진 볼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카지한으로서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 없었다.
그녀가 단지 수하에 대한 친절로 잠깐 자신의 자존심을 꺾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도 식사를 하는 데 거부감이 없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부엌에 또 다른 할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왜 저러고 있는 것인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저, 엘레나 님?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 따로 있으신지요?”
도리도리.
진의를 알아보기 위해, 우회적으로 넌지시 던져 본 카지한의 물음에, 엘레나는 그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카지한은 질문의 방향을 약간 바꾸기로 했다.
“음, 그럼 양은 어느 정도 준비하는 게 좋을까요?”
“그…… 그냥 카지한이 알아서 해 주세요. 세 명이서 먹을 만큼만 있으면 돼요.”
그녀의 대답에 카지한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지금 왜 저러는지는 모르나, 일단 그녀나 엘런은 식사에 대한 거부감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카지한은 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하던 작은 칼을 내려놓고 옆에 있던 조금 더 큰 칼을 집어 들었다.
탁탁탁!
각종 야채를 능숙한 솜씨로 썰어 내는 카지한의 모습을 보며 엘레나는 감탄과 함께 찾아오는 부끄러움에 더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여자라는 자신이 가졌던 마지막 보루가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 같았다.
“요…… 요리 잘하시네요, 카지한?”
“음? 아, 과찬이십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남다르니까요.”
썰어 놓은 야채들을, 이미 끓고 있던 냄비에 쏟아 넣으며 카지한은 답했다. 물론, 지금의 이 마왕성에서의 생활도 결코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일단 좀 이르지만 맛있는 아침을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도…… 도시락 싸려고 하던 거 아니었어요? 거기다 그건 도시락으로는 못 가져가는 수프인 것 같은데 괜히 나 때문에 수고를 할 필요는…….”
“아뇨, 이건 소스를 만들려는 겁니다. 마지막에 몇 가지 양념을 더 넣고 한 20분 정도 끓이면 되는 건데 그 전에는 수프로 먹어도 되거든요. 아, 거기 소금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아, 네!”
자기도 모르게 부탁을 하긴 했지만 혹여나 기분 나빠할까 걱정한 카지한의 염려와는 다르게, 엘레나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비치긴 했지만 불쾌한 기색 없이 조심스럽게 양념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는 양념통 하나를 건넸다.
“예, 감사합……. 엘레나 님?”
아무 생각 없이 양념을 받아 뚜껑을 열려고 했던 카지한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엘레나를 불렀다.
“저, 이건 설탕인데요?”
“시, 실수했네요!”
이제는 아주 홍당무가 되어 버린 그녀는 양념통에서 허겁지겁 백색 가루가 들어 있는 통 하나를 꺼냈다. 그러나.
“그건 밀가루…….”
그녀는 재빨리 다른 손으로 뭔가 집어 들었다.
“그건 멸치가루…….”
그녀는 들고 있던 통들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흰색 가루들이 들어 있는 양념통들은 잔뜩 남아 있었다.
“그건…….”
그렇게 한참 만에 양념통 안에 모든 흰색 가루들을 다 꺼낸 다음에야 카지한의 손에 소금통이 들릴 수가 있었고, 엘레나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빨개질 데가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소금과 몇 가지의 재료들을 더 넣은 카지한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레나를 향해 말했다.
“엘레나 님, 혹시 여기 혼자 도시락 싸러 오신 건가요?”
끄덕.
“솔직히 말해서, 요리 안 해 보셨지요?”
“하…… 한 번…….”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고, 카지한은 그제야 상황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