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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8화)
4장 죽음의 숲에서 피크닉(2)
“하하하, 이거 가만히 있었으면 마왕님이 해 주시는 엄청난 요리를 맛볼 수도 있었는데 아쉽군요. 하하하!”
놀리는 게 분명한 그의 말에도,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런데 따스한 손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하, 뭘 그리 부끄러워하십니까. 마왕님이신데 요리 같은 거야 안 해 보셨겠지요. 익숙하지 않은 걸 잘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거기다 마왕님이 요리까지 잘하면 요리사들이나 우리 같은 범인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부드러운 그의 말투에 엘레나는 조금은 부끄러움이 가시는 것 같았다.
카지한은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는 냄비에 있던, ‘소스가 되기 전’의 수프를 그릇에 조금 덜어서 수저와 함께 그녀에게 내밀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릇을 받아 든 엘레나는 수프를 한입 떠먹고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마…… 맛있어요! 굉장해요, 카지한!”
가슴이 두근거리고 등에는 식은땀마저 흐르게 만들던 불안감이 그녀의 칭찬에 그제야 눈 녹듯 사라졌다.
사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긴 했지만, 어떻게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어린 소녀라 할지라도 그녀는 엘런과는 다르다. 그녀는 마왕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명예의 무게를 알고, 또한 소중히 여기는 자.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설사 어린 소녀라 할지라도 위험하다.
아니, 오히려 소녀라는 점이 더 위험하다.
아직 모든 것을 살필 만큼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의 원칙을 위에 두고 있는 자라면 자신의 마음과 타협을 할 정도의 여유를 가지기 힘들기에, 그것을 손상시켰다고 생각된다면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죽이고 그 대가를 치르게 함이 옳은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런 믿음 혹은 신념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만든다. 그 마음속으로 어떤 상처를 입든, 그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상처가 더해지고 또한 오래되면, 마음은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여린 마음에 그 마음이 감당치 못할 신념은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법이고, 그 상처를 극복하거나 혹은 익숙해지기 위해 대부분의 존재들은 부정적인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니까. 도대체 그런 자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예? 뭐라고요?”
그렇기에 그녀 스스로 주변을 볼 여유가 생길 때까지,
그 신념을 감당하고, 더 나아가 조절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상처를 입지 않도록, 그 신념이 공격당하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카지한? 뭐라고 했어요?”
바로 그것이, 내 목숨의 보존이란 이유보다 더, 그녀를 대하는 내 행동을 조심스럽게 만드는 이유다.
물론, 목숨 보전이란 이유 또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지만.
“카지한!”
“아, 죄송합니다. 혼자 생각 좀 하느라고. 뭐라고 하셨지요?”
“조금 전에 하지만이라고 안 했어요?”
“아,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아, 그럼 소스를 완성하기 전에 저도 한 그릇 먹어야겠군요.”
분위기를 바꾸려 황급히 냄비에서 한 그릇을 더 덜어 내, 먹는 데 집중했다. 내가 식사를 시작하자 엘레나도 더 이상 그 하지만이란 말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수프를 마저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뜨겁군.’
처음 떠먹은 그 첫 스푼에 이미 내 입안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원래 계획은 도시락 준비를 끝마치고, 스켈레톤들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리거나, 방 정리도 좀 하다가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엘런의 부탁, 혹은 혼자 가 버리겠다는 귀여운 협박 덕분에, 우리는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출발 준비를 끝마쳐야 했다.
“와아! 소풍이다! 소풍!”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엘런이 신이 난 듯 정원을 지나 성벽 문을 향해 뛰어갔다. 정상적인 경로로 이 성에 들어온 게 아니기 때문에, 성밖 풍경을 본 것은 나로서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본 백색마궁의 모습은 과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어느 한군데 빠짐없이 백색으로만 이루어진 순백의 성. 보통 왕궁들이 위엄과 웅장한 느낌이 나는 고딕풍의 건축양식을 채택하고 마치 하늘에 닿을 듯 뾰족한 성탑을 쌓아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것에 반해, 이 마궁은 전체적인 선이 부드러웠고 안정된 느낌이 들어 왠지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처음 성안 구조를 파악하면서 의아해했던 점이, 밖에서 바라보자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거기다 백색의 성과는 대조적으로, 주변의 공터와 정원을 사이에 둔 채 높게 치솟아 있는 검은 성벽.
성의 순백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다른 색을 허락지 않는 순암의 성벽이었는데, 벽 외곽에 빼곡하게 조각되어 있는 가고일 석상들과 야수, 드래곤의 형상은 그것들이 단순한 벽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이라 칭하는 게 옳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백색의 성과 흑색의 성벽.
가장 극과 극이라 알려진 두 색이 각기 의미하는 것들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그 두 색이 만들어 내는 분명한 대립과 그 대립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조화에 어찌 감탄하지 않겠고, 어찌 압도되지 않겠는가.
툭툭.
그렇게 한참 성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는데 무엇인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내 어깨를 건드린 것은 우리를 마중 나온 스켈레톤들 중 하나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엘레나가 자신의 마력으로 성벽의 문을 열었고, 그 후로도 조용히, 멍하니 서 있던 나를 기다리며 엘런과 함께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성을 잘 지키도록 해라. 청소도 해 놓고.”
다급한 마음에 배웅 나온 스켈레톤들에게 대충 당부를 하고는, 조금 빨리 걸음을 옮겼다.
미안한 마음에 그녀와 엘런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어 줄 뿐이었고, 엘런은 출발한다는 사실이 기쁜지 벌써 앞쪽에 서서 걷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숲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엘런이야 평소에도 외출복과 같은 움직이기 편한 옷을 주로 입기에 평소와 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오늘의 엘레나는 늘상 입던 평소의 드레스 복장이 아닌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약간 생소하다고 해야 할지 평소의 차분함과 우아함, 그리고 뭔가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진중함 대신 여타의 다른 소녀들과 같은 활발함이 더 많이 느껴져 아무래도 색다른 기분이었다.
거기다 커다란 도시락 바구니를 한 손으로 든 모습이라니.
“저, 엘레나 님? 도시락 통은 제가 들어도 되는데…….”
“아뇨. 이 정도는 제가 들고 갈게요.”
아침의 일 때문인지 스스로 도시락 바구니를 들기로 자처한 그녀는, 꽤 큰 바구니라 걱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손으로 가볍게 든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근데 카지한,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먼저 신나게 앞에서 걷고 있던 엘런이 문득 궁금해졌는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음, 뭐 가까운 숲으로 가도록 하죠.”
이 가벼운 대답이 불러올 대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야, 그럼 우리 데네시레카로 가는 거야?”
그 순간 뭔가 아주 커다란 망치 혹은 건장한 청년의 주먹이 뒤통수를 내려치는 느낌이었다. 사령의 숲 데네시레카라니! 급히 옆에 있는 엘레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도 엘런과 마찬가지로 순진무구하게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데네시레카가 어디인가! 그 끔찍하고 흘러넘치는 사령력에 나무와 대지는 저주를 받았고, 과거 데네시레카에 들어선 혹은 버려진 자들의 육신이 영원히 숲을 배회하여, 작은 벌레부터 시작해서 몬스터들에 이르기까지 들어가기 꺼려하는 곳이 아니던가. 나는 혹시 내가 아는 데네시레카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었는가 싶었다.
“저, 엘레나 님? 혹시 데네시레카라는 곳이, 몬스터들조차 살지 못한다는 그 사령의 숲을 말하는 게 맞나요?”
“네.”
혹시나 했지만 너무나 쉽게 나온 긍정의 답. 아니 그것도 모자라…….
“괜찮아요. 그 숲은 우리 영지이고, 숲의 저주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해요.”
태연한 그녀의 반응에 언젠가 이런 일이 또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중요하지 않으니 일단 묻어 두고, 물론 나도 마왕인 그녀와 엘런에게는 숲의 저주나 숲의 사령들 정도로는 해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들과 함께 있는 이상 나에게도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령의 숲에 차로 마실 만한 식물이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소기의 목적은 일찌감치 물 건너간 상태에서, 우리는 정말 얼마 안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령의 숲 데네시레카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런이 가장 가까운 숲이라고 할 만할 정도로 사령의 숲은 성과 아주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을 나올 때야 성 자체의 모습에 압도되어 주변을 신경 안 써서 몰랐지만, 뒤를 돌아보니 여기서 성의 검은색 벽이 보일 정도로 백색마궁과 사령의 숲은 가까운 거리였다.
“이거, 이 정도 거리에 사령의 숲이 있었다는 것도 놀랐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숲의 입구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벌써 숲의 중심이었다.
족히 몇 백 년은 되었을 법한 나무들이 심술궂게 늘어서서는 자신들의 나뭇가지와 잎들을 높이 치켜올려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여타의 다른 숲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녹색 잎이나 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맑은 햇빛은 찾아볼 길 없었고, 그 대신 칙칙한 진녹색의 잎사귀들과 거무튀튀한 나뭇가지들.
한 발짝만 들어가도 방향이나 시간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만 같은 어둠, 그리고 알 길 없는 음습함만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그 흔한 잡초 대신, 땅에서 쏟아 나온 굵직한 나무뿌리들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고, 어떤 나무뿌리는 사람 키보다 높은 높이로 마치 벽처럼 길을 아예 막고 있었다.
그나마 보이는 뿌리들 틈새에서도 시들어 버린 풀들이 썩어 기분 나쁜 악취를 내며 방문자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었다.
역시 악명 높은 데네시레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피크닉을 즐길 만한 곳으로는 결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와아, 우리 빨리 들어가자.”
엘런은 개의치 않고, 여전히 들떠서는 우리를 재촉하고 있었다.
엘런의 놀겠다는 의지는 이 정도 악조건으로는 꺾이지 않는 것일까. 혹시라도 엘레나가 엘런을 제지할까 고개를 돌렸지만…….
“카지한, 고개를 좀 숙여 주실래요?”
그녀의 갑작스런 부탁에 아무 생각 없이 허리를 낮췄는데.
쪽.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더니 뭔가 작고 부드러운 게 내 이마에 닿았다. 그것이 그녀의 입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닿았던 입술을 살며시 떼고는 약간 홍조가 도는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마왕의 축복이라는 거예요. 이제 제게 통하지 않는 저주는 당신에게도 통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약간이지만 당신의 마력도 증가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는 예의 그 큰 바구니를 들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래, 설사 주술의 의식이라 해도 저 나이의 소녀에게 입술을 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겠지. 나는 걸어가는 누나와 가만히 있는 나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엘런의 손을 잡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근데, 너무나 신비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 앞쪽을 가로막는 나무뿌리들과 넝쿨들이 옆으로 비키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에, 엘런 님.”
“왜?”
너무 놀라 손을 잡고 있던 엘런을 부르긴 했지만, 엘런이라고 해서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줄 리 없었다. 아니, 줄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저거? 누나는 옛날부터 식물들하고 친했거든. 그래서 누나가 다가서면 식물들은 알아서 길을 비켜 줘.”
“친하……다고요?”
엘런에게는 저것이 단순히 길을 비켜 주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식물들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식물들이 그녀의 발걸음, 그녀의 시선이라도 닿을까 마치 천적을 피하는 동물처럼 힘겹게 그 몸을 움직이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지한, 엘런? 안 오고 뭐 해요?”
앞에서 길을 만들다, 우리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였는지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느새 홍조도 가라앉아 평소와 마찬가지로 태연해 보이는 엘레나의 모습이었지만, 착각이었을까.
아주 잠깐, 돌아서는 그녀의 표정에서 쓸쓸함이 엿보인 느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