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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9화)
4장 죽음의 숲에서 피크닉(3)
“응! 갈 거야, 누나. 카지한, 가자.”
“네, 네.”
그렇게 우리는 엘레나를 선두로 두고 그 뒤에서 간격을 유지한 채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앞에 있는 뿌리나 넝쿨들은 그 크기와 종류를 막론하고 여지없이 길을 비켰고, 나와 엘런은 그 길을 따라서 비교적 쉽게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갑자기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야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배려하겠다고 한 것이고, 나중에는 그녀가 길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거기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셋 중에서 제일 강한 게 그녀일 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척 보기에도 위험한 숲 속에서(설사 그 소녀가 마왕일지라도) 소녀를 앞세우는 것은 뭔가 근원적 어딘가부터 죄책감이랄까, 하여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아니, 그것도 그것이지만, 조금 전 그녀의 표정을 본 뒤부터 느껴지는 왠지 모를 이 불안감도 문제였다.
거기다 어느새 필요 이상으로 벌어져 있는 이 간격.
처음에야 내가 아까 너무 오래 멈춰 서 있었나, 발걸음이 느렸나 싶어서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쪽에서 어떻게 걷든 간에 전혀 줄어들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간격을 보아 어째서인지는 모르나 언제부터인가 그녀 스스로 이쪽 발걸음에 맞춰 의도적으로 이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엘레나 님?”
“네? 왜 그러죠?”
“굳이 그렇게 멀리서 혼자 걸으실 필요는 없으니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저 혼자 먼저 걷는 게 식물들이 더 빨리 비켜서고, 그래야 카지한하고 엘런이 걷기가 쉽잖아요.”
그런 이유나 효율성 같은 것은 둘째 치고, 멀찌감치 앞에서 걸어가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혼자서 그렇게 가시니 죄송스럽기도 하고, 또 이왕에 나온 피크닉인데 좀 그렇잖습니까.”
“그래, 누나. 우리랑 손잡고 가자.”
엘런마저 그렇게 말하자 엘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서 가는 것을 멈췄다.
“누나, 손!”
“후훗. 그래.”
누나에게 가까이 가서는 자신의 손을 내미는 엘런의 모습에 나나 그녀나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편안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그제야 나는 꺼림칙한 마음과 불안감을 씻어 버릴 수 있었다. 이왕이면 아까 내가 본 몇몇 모습도 착각이었다고 넘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 엘레나 님?”
카지한은 알까. 그 부름에 그녀가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음을.
“네? 왜 그러죠?”
그는 알까. 그 대답에 얼마나 많은 불안이 감춰져 있음을.
“굳이 그렇게 멀리서 혼자 걸으실 필요는 없으니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는 알까. 그녀가 그 권유에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는 것을.
그녀에게 이 저주는 끔찍함, 아니, 혐오스러움 그 자체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을 옮길 때마다 느껴지는 식물의 비명이, 공포에 질린 떨림이 너무도 싫었고, 또 이 능력을 보고 자신을 멀리하고 마치 더러운 어떤 것을 보듯 하던 다른 이들의 태도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었다.
사실 이 저주는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레니아. 땅의 정령왕의 가장 아름다운 딸인 꽃의 여왕 로자레나의 장녀였지만, 푸른 지혜의 마왕을 사랑해 정령계를 뛰쳐나와 마계에 속하게 된 꽃의 정령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행동은 허락받지 못하는 일이었고, 땅의 정령왕은 자신과 정령계를 배신한 그녀의 행동에 분노해 그녀에게 저주를 내렸다.
땅의 은혜를 받은 식물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시들어 죽어 버리는 저주. 그리고 그것은 땅의 정기와 식물의 생기를 받는 꽃의 정령인 그녀에게는 죽음의 선고나 다름없었다.
엘레나의 아버지인 푸른 지혜의 마왕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저주를 풀어 보려 했지만, 정령왕의 저주는 마왕의 힘으로도 쉽게 풀어 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다른 방법들을 동원하며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켜 보려 했지만 결국 엘런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생명은 저버렸다.
마계에 속하고부터는 정령이라는 이유로 핍박받았고, 정령들에게는 배신자로 불리며 괴로운 삶을 살았던 그녀는 그렇게 쓸쓸히 안식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였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던 엘레나에게도 땅의 저주가 내려진 것은.
그녀의 아버지는 오열했었다. 아내를 빼앗은 걸로도 모자라 딸에게까지 그 저주를 내린 정령왕의 잔인함에 치를 떨며, 아마도 평화 협정만 없었더라면 정령계로 그 군마와 검날을 옮겼을 것이리라.
다행히 그녀는 마족의 힘이 더 강하기에 그 저주는 그녀에게 어떠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지만, 어렸던 그녀에게 키우던 화초가 갑자기 시들어 버린다든지 자신이 밟았던 잔디가 노랗게 말라 버리는 것 같은 일들은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마계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정령과 마족의 혼혈이라며 좋지 않았던 그녀와 엘런에 대한 시선이 더욱 따가워졌음은 물론이었다. 친절히 대해 주던 자들도 저주를 받은 뒤로부터는 마치 괴물을 보듯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고, 점점 그녀의 어머니를 닮아 가는 그녀를 보며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조롱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어렸던 엘런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 그리고 마족들이 엘런의 시중을 드는 걸 거부하는 바람에, 엘런의 시중을 들게 된 스켈레톤들이 엘런을 많이 귀여워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저기, 내일 엘런과 셋이서 숲에 찻잎 구하러 갈래요?”
사실은 알고 싶었다. 가족이 아닌 이에게서 처음으로 받아 보는 따스함에, 한번 그 따스함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기적인 욕심이지만 사실을 알고 나서도 변하지 않기를, 이런 시험 따위는 쉽게 통과하기를 바랐다.
방어 주문을 걸어도 될 것을 굳이 마왕의 축복을 내린 것도, 어쩌면 그 이기적인 바람을 이뤄 달라는 투정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랬으면서, 막상 그 시험의 대답을 듣기가 무서워 그녀는 앞서 걷는 것을 택했다. 그의 표정이, 그의 태도가 다른 이들처럼 변할까 두려워 보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이 어리석고 이기적인 시험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냥 그 친절에 만족하고 그것을 지켜 나가야 했었다고 후회했다.
“굳이 그렇게 멀리서 혼자 걸으실 필요는 없으니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그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가 보여 준 친절에 조금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저 혼자 먼저 걷는 게 식물들이 더 빨리 비켜서고, 그래야 카지한하고 엘런이 걷기가 쉽잖아요.”
말을 하고도 그녀는 아차 싶었다. 그냥 그의 말대로 할 걸 하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데…….
“그래도 혼자서 그렇게 가시니 죄송스럽기도 하고, 또 이왕에 나온 피크닉인데 좀 그렇잖습니까.”
그는 자신의 투정을 받아 주었다. 그녀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짧지 않은 그녀의 인생 동안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타인이 그녀를 받아 준 것이다.
“누나, 손!”
“후훗. 그래.”
5장 침략! 만드라고라(1)
“저기 엘레나 님, 근데 생각해 둔 자리라도 있으신가요?”
아무리 가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음습한 풍경들뿐이다. 거기다 아까는 멀리서 살짝 본 거라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흰색 물체 하나가 허공에 떠다니기까지 했다.
숲이 깊어질수록 울창해진다는 상식으로 보아 더 이상 들어간다고 해도 식사를 하거나 피크닉을 즐길 만한 곳이 있을 리가 없어 보였다.
“후훗, 카지한도 참. 설마 이런 데서 식사를 하겠어요? 조금만 가면 아주 멋진 곳이 나올 거예요. 엘런도 생각나지? 아버지랑 같이 몇 번 왔었잖아.”
“응. 아주 예쁜 꽃들이 가득해!”
과연, 역시 생각해 둔 곳이 있었기에 그렇게 태연했던 거구나. 근데 엘레나의 태도가 평소보다 더 밝아진 것 같은데, 이것도 기분 탓이려나.
“그거 기대되는…….”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내 눈앞 저기에, 오랜 예전에 돌아가셨던 내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채 서 있었다.
―카지한.
기억 속의 따스하고 자상한 목소리가 아닌, 쉬어 버린 그 처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카지한.
“다크…… 애로우.”
작은 속삭임에, 손끝에 생긴 검은빛의 화살이 내 어머니, 아니, 그 모습을 흉내 내고 있는 무엇인가를 향해 날아갔고, 검은 화살이 그 형상을 꿰뚫고 지나가자, 더 이상 그곳엔 아무것도 서 있지 않았다.
“망자들의 장난이에요. 사람의 마음을 읽고는 그 사람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변하지요.”
내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인지, 엘레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데네시레카의 악령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하니까요.”
“우리의 눈에는 그저 하얀 구체로만 보였지만, 카지한에게는 아는 누군가로 보였겠지요. 장난에 넘어가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종종 장난에 넘어간 사람들은 그들의 동료가 되니까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악령의 장난 같은 것은 이미 질릴 정도로 알고 있다. 이미 저런 류의 것은 몇 번이나 체험했고 또한 이겨 내 왔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내 어머니께서는 누군가를 원망하여 망자가 되실 분이 아니다.
하지만 설사 그것이 가짜임을 안다고 할지라도, 어머니의 모습을 향해 공격을 하는 것은 역시 그리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가시죠.”
그 이후부터 망자들은 더 이상 다른 이의 모습을 흉내 내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몰려드는 망자들은 그 뒤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외로우리라.
차에 대해 배웠던 스승님께 들었다. 떠나지 못하는 망자들은 죽는 순간부터 점점 그 자아와 기억을 잃어 간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 기억까지, 마지막 자아까지 사라진 그들에게 남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뿐.
그것을 채우기 위해 동료를 늘려 가지만, 그 고독은 너무나 깊어 결코 채워지지 않기에 영원히 그것을 반복한다고.
구원을 원하지만, 그것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에 계속해서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고.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실 때, 스승님께서는 굉장히 쓸쓸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잠시 옛 생각에 젖어 있는 사이, 새하얀 구체들은 그 수가 늘어 어느새 우리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카지한, 걱정하지 마세요. 이들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해요.”
이들이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살아 있는 자의 기운을 빼앗는 이들의 절망도, 지금의 나나 엘런과 엘레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내 마음의 ‘어둠’이 이들의 ‘절망’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
그들이 절망이, 그들의 고통이 스며들어 와 한때 익숙했던 그 느낌으로 내 안의 어둠을 깨운다는 것.
숲에 들어설 때부터 간신히 억누르던 그것이 천천히 고개를 들려 하고 있었다.
스승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 어떤 위대한 마법이나 주술도 외부의 적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막을 수 없다.’
“저, 카지한? 괜찮아요?”
“카지한, 어디 아파?”
내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가 보다. 엘런과 엘레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다.
특히 엘런은 뭐가 그리 슬픈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이 그 아름다운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엘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하, 두 분이 이렇게 걱정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름대로 활기를 내려고 한 말이었지만 이 정도로는 그들을 안심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나 보다. 엘런의 손을 잡고 있던 엘레나가 내 옆으로 와서 나를 부축하려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키 차이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아니, 괜찮습니다, 엘레나 님. 그냥, 기분이 좀 안 좋을 뿐이니까요.”
그녀의 친절을 정중히 사양하며 약간 움츠렸던 어깨를 다시 폈다. 이따위 것들 때문에 다시 일어서게 할 거였다면 처음부터 눌러 놓지도 않았으리라. 그렇게 한 번 크게 심호흡한 후에 망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아까보다 더 많은 마나로.
“다크 애로우.”
순식간에 생성된 여섯 개의 검은 화살들. 검은 화살들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쇄도해 가서 하얀 구체들을 꿰뚫었고, 망자들은 희뿌연 안개처럼 변해 잠시 그 형체를 잃고 흩어졌다가 다시금 천천히 그 모습을 회복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