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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10화)
5장 침략! 만드라고라(2)


“가시죠.”
어차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에는 충분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카지한?”
“예, 물론입니다.”
그래, 겨우 이 정도에 다시금 고개를 쳐들게 해선 안 된다. 내 행복을 위해서, 그 기억과 ‘어둠’은 아직은 저 깊은 곳에서 눈을 뜨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뒤로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계속 걷기만 했다. 엘런은 처음의 그 들뜬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시종일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고, 엘레나는 나와 우리 뒤를 따라오는 망자들을 번갈아 보면서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래, 나는 아까부터 지금까지 ‘보호’를 받고 있다. 지금 내 상황은, 부축하러 왔다가 내 왼편에 그대로 자리를 잡은 엘레나 덕분에 나를 중심으로 엘런과 엘레나가 양쪽에서 바짝 붙어 있는 난감한 광경이었다. 물론 아마 여기가 악령의 숲 데네시레카가 아니고 우리의 신분이 특별하지 않았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무난한 광경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이들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과 열여섯 정도의 소녀에게 보호를 받는 서른둘의 아저씨라니.
아무리 이곳이 내게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닐지라도, 아무리 이들이 겉보기와는 다른 엄청난 신분을 가졌다고는 해도…….
과연 내가 용병 부대에서도 잡학왕이라 불리던 카지한 렐 제르네오가 맞는 것인지 회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
“저, 엘레나 님?”
“왜 그래요, 카지한? 아직도 힘들어요? 그럼 제가 힘을 개방해서 망자들을 쫓아 버릴까요?”
“그러면 나도 도와줄게, 누나.”
이들의 이 친절을 거부할 수가 없다는 것.
“아뇨, 그냥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싶어서요.”
“아,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사실은 이쯤 되면 꽃향기가 나야 하는데…….”
꽃향기라, 생기나 아름다움과는 담을 쌓은 듯한 이 데네시레카에도 꽃이 피는 곳이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맡을 수 있을 만큼 대량으로!
의외의 사실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정말 길을 잃은 게 아닌가 싶은 걱정도 들었지만, 굳이 그 걱정을 밖으로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곳은 어떤 곳이지요?”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위해 만드셨던 정원인데, 데네시레카 중심에는 넓은 공간이 있어요. 그곳에는 암청빛 꽃들이 가득 피어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사파이어들이 깔려 있는 것처럼 아름답지요. 하지만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던 광경은 해가 질 때와 뜰 때, 태양빛에 꽃들이 붉게 물드는 그 짧은 찰나였어요.”
그곳에 대해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은, 행복한 옛 추억에 젖은 평범한 소녀처럼 순진무구해 보였고 또 아름다워 보였다.
“제가 어릴 땐 아직 엘런이 태어나지 않았기에 아버지, 어머니, 저 이렇게 셋이서 그곳에서 자주 놀았어요. 나중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주로 엘런과 둘이서 왔고요. 아버지는 혼자서 잠시 들르시곤 했어요.”
“추억이 깃든 장소군요.”
“네, 사실 아버지는 저와 엘런 둘이서만 이곳에 오는 걸 싫어하셨어요. 위험하다고 생각하셔서 가고 싶을 땐 자신과 함께 가자고 하셨거든요.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집무에 바쁘셨고, 굳이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슬프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는 엘런에게 어머니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보여 주고 싶었고요.”
엘런은 말이 없었다. 엘런에게는 어머니란 어떤 존재일까. 막연한 그리움이나 동경일까. 아니면…….
“영광인 줄 아세요. 그곳에 가족이 아닌 타인을 데려가는 건 처음이니까. 아! 저기예요. 저기로 나가면 보일 거예요.”
도착지가 가까워지자 우리는 약간 속도를 내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엘런과 엘레나의 가족의 추억이 깃든 그 정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
우리는 아무런 말도, 어떤 행동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분명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꽃밭이라고 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다만, 그 꽃밭의 풍경에는 엘레나의 말처럼 암청빛의 꽃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마치 핏물 같은 암적색의 꽃들이 가득하다는 것과 실제로 그것들이 꽃이라고 이름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어떤 것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어, 어떻게……!”
엘레나의 목소리는 갑작스런 상황에 대한 경악감과 상실감, 그리고 분노로 낮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엘레나뿐만이 아니었다. 엘런조차 망연자실한 채 눈앞의 상황이 그저 악몽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내 평생을 살면서 절대 볼 것이라 생각지도 못한 이 광경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나 상실감이 아닌 희열에 가까웠다.
“어, 어머니!”
“누나!”
갑자기 엘레나가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고, 엘런이 그런 엘레나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나는 상대적으로 조금 늦게 그들을 따라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핏빛 꽃밭에는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전까지처럼 식물들이 그녀를 피해 움직여서 생겨나는 길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닿았던 곳마다, 그리고 그녀가 밟고 지나는 곳곳마다 잎들은 산산이 흩어져 떨어지고, 그 줄기와 잎들은 급속도로 노랗게 시들어 가더니, 결국은 아주 오래전에 져 버렸던 것처럼 검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과연, 아까의 그 느낌은 이것 때문이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은 끊겼다. 엘레나가 멈춰 섰기 때문이다. 그녀는 꽃밭 중심에 해당하는 듯한 곳에 몸을 굽히고 앉아서는 어떤 것을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안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어머니.”
그것은 암청색 꽃이었다. 책에서조차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고하고, 그리고 왠지 슬퍼 보이는 듯한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지금까지의 검게 시들어 버린 다른 꽃들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손 안에서 오히려 보호를 받는 듯 위태롭게 피어 있었다.
“……카지한, 엘런, 모두 멀리 벗어나세요. 여기 있는 이것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어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그녀는 그렇게 담담하게 우리에게 말했다.
확고한 목소리. 그것이 반론 따윈 허락지 않는 주인으로서, 마왕으로서의 명령, 아니, 통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엘런도 그녀의 그런 모습에 아무런 군말 없이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나 또한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놀라움과 의문,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담겨져 있었다.
“카, 카지한, 왜 그래……?”
엘런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내 팔을 잡아당겼지만, 나 또한 요지부동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내 대답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금 되물었지만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한껏 차가워지고 한껏 힘이 실린 목소리로 다시 내게 말했다.
“카지한, 다시 한 번 말하겠어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에요. 한 번 더 아까의 말을 한다면, 당신도 이것들과 함께 태워 버리겠어요. 자, 이곳에서 멀리 벗어나세요.”
그녀의 그 말이 진심임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다정한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내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녀는 아직 자신의 신념과 타협할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신념, 스스로가 믿는 ‘올바름’을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마음조차 상처 입히기를 주저하지 않을 만큼, 그리고 그것이 올바르다 여길 만큼 그녀는 너무나 곧았다.
단지 분노에 사로잡힌 것이라면 오히려 쉽다. 분노에 의한 판단이라고 알려 주면 되니까. 하지만 굳건한 믿음, 신념 아래의 행동은 그 어떤 말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쉽게 바꿀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명령을 따를 수는 없었다.
“엘레나 님!”
“당장 가세요!”
“엘레나 님, 이 꽃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따위 것들, 알 필요도 없어요!”
“엘레나 님! 이것들은 모두 만드라고라입니다!”
당장이라도 손에서 시뻘건 불꽃을 뿜어낼 것 같던 그녀가, 만드라고라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만드라고라. 생명이 살기 힘든 사지(死地)에서만 자라며 그 뿌리는 검붉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는 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반식 반동의 희귀 생물.
각종 최고급 마법 약품과 물품들에 사용되는 최고급 재료로서 그 희귀성과 효능으로 이름 높으며, 마계에서조차 극소수만이 인공 재배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마왕성 재건에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이미 일어난 일 아닙니까. 이제 와 이것들을 모두 태워 봤자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꽃이 다행히 한 송이 남아 있으니 천천히 다시 복구하면 될 것입니다.”
“…….”
그녀는 내 간곡한 부탁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수백, 아니, 수천 송이에 달하는 만드라고라 밭을 바라보며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나는 푸른 지혜의 마왕. 성의 재건을 위해서 이것들은 꼭 필요하고, 나는 무엇보다 마왕성 재건을 우선시해야겠죠. 나와 엘런, 그리고 당신을 위해.”
말을 하는 그녀의 몸에서는 어느새 검은색 마기가 옅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 이 죄는 누구에게 물어야 하지요? 감히 마왕의 소중한 장소를 망쳐 버린 이것들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건가요. 네? 카지한?”
“누, 누나!”
아마도 갈 곳 없어진 분노 그 자체겠지. 그리고 지금이라면 그 분노가 내게 쏟아진다 해도, 하나도 이상치 않을 상황이겠지.
한순간의 말실수가 죽음을 부르는, 숨 막힐 듯한 상황.
얼마 전 그녀의 집무실에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죄를 물어야 할 자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 또한 그때보다 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만드라고라가 이 정도의 수가 모여 있는 경우는 원래는 거의 불가능하지요. 인공 재배를 한다고 해도 이 정도의 양을 하기는 쉽지 않고요. 하지만 한 가지 경우에서는 가능합니다.”
“그게…… 뭐지요?”
마른침이 목을 넘어갔지만,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것은 거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퀸 만드라고라. 희귀한 만드라고라들 중에서도 그 희귀성이 가장 높고, 수천의 씨앗을 품고 있는 그것들은 때가 오면 그 씨앗들을 퍼트릴 만한 곳을 찾아 움직이고, 그 터에 수천의 씨앗을 뿌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는 수천의 만드라고라들이 클 만큼 그 양분이 충분치 않기에 대부분의 씨앗들은 먼저 피어난 몇 개의 영양분으로 대체되고, 또 그중 성장이 더딘 것도 다른 것에게 영양분을 빨려 제대로 성장치 못하지요. 물론, 그 어미 격인 퀸 만드라고라도 태어난 자식들의 양분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카지한의 말은 여기에 그 퀸 만드라고라가 침입해서 감히 그 더러운 씨를 뿌렸다는 건가요?”
그녀의 마기가 한껏 짙어지고 살기 또한 짙어졌다. 그런 그녀의 기운에 숨이 막힐 듯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아차 하는 순간 벼랑 아래로 떨어질 그런 위태로운 줄타기를, 나는 하고 있었다.
“예. 그리고 아마도 추측하건대 아버님께서 만드신 꽃들과 이 대지는 만드라고라들에게 필요한 양분을 충분히, 아니, 넘쳐 나도록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로 잡아먹지 않더라도 성장하는 데 필요한 양분을 얻을 수 있었던 만드라고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고, 또 보다 빠르게 성체가 될 수 있었겠지요. 물론 보통은 자식의 양분이 된다는 모체도 이곳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카지한의 말은, 그 모체에게 죄를 물으라는 말이군요.”
“예. 감히 마왕의 영토를 침범한 자, 죄를 묻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마지막 대답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으며 신하의 예를 올렸다. 그것은 이제는 더 이상의 이견이 없음을 표하는 것. 그리고 나의 모든 행동들은 그녀와 엘런을 위함이며 나는 여전히 그녀의 신하라는 것을 보이는 것.
주인의 의견에 반하고도 목숨을 지키기 위한, 또 나아가 자신 의견을 수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한참은 바라보더니 그녀에게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훗, 카지한, 이제 보니 주인을 다루는 데 상당히 능숙하군요.”
“오직 엘레나 님과 엘런 님을 위할 뿐입니다.”
그리고 한참을 그녀의 앞에 신하의 예를 취한 채 그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나 엘런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상태였기에 그녀의 표정도 더 이상 살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숨이 막힐 듯한 침묵 뒤.
“후우…….”
그녀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숨 막히는 마기와 살기도 걷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