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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 근무기 1권(14화)
7장 성녀 회고(回顧)(2)


그녀는 그때를 회상해 보았다.
당시 엘리얼은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 힘을 크게 자각하지는 못했었기에, 때때로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신성력의 영향에 아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엘리얼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엘리얼, 네 힘은 신께서 주신 힘이란다. 나와 함께 신전으로 가자.’
‘하지만 사제님, 저는 두렵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저를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신전은 고귀한 분들만이 계시는 곳인데 저 같은 고아가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신관들 중에서조차 신성력은 아주 희귀한 것이었고, 비참한 고아원의 현실에 그녀는 엘리얼을 우선 신전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얼은 자신의 남다른 힘과 바깥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거기다 이나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신전에서 신성력을 지닌 신관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되고, 어떤 대우를 받는지도.
그녀는 어린 나이에 신성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터로 가 병사들을 치료해야만 했다. 신전에서 그들의 위치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쓰기 좋은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엘리얼을 계속 그곳에 두었다가는 그의 삶은 비참해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엘리얼이 신성력을 지녔다는 것을 숨기고, 그 자신의 제자로서 두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 엘리얼. 나도 예전에는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단다.”
“어째서 신성력이 사라지신 건지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혹시나 자신이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불안해하며 말을 이어 가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 어쩌면 한 남자를 사랑했기, 아니,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나스 님, 에나리스 님의 경전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엘리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이나스는 왠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바로 그래서 그런 거란다. 에나리스 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라고 하셨지. 하지만 나는, 그분만을 사랑하고 싶었단다. 신관으로서가 아니라, 한 여인으로서…….”
그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얼에게 자신의 옛 기억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14년, 아니, 15년 전쯤의 일이란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14살도 채 안 되었을 때였다. 이웃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신성력을 지닌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전쟁터로 나서야 했고, 어린 그녀 또한 전장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전장의 그 숨 막히는 공기와 만연한 죽음의 형상.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병사들의 심신은, 죽음의 공포를 원동력 삼아 겨우 그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신을 부수어 가던 그 전장의 공기와 죽기 싫다는 그 공포가 어느새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고통의 신음과 비명이 끊이지 않고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자가 그녀의 앞에서 시체가 되고, 그녀는 그 시체를 옆에 둔 채 또다시 다른 이를 치료해야만 하는 현실.
그러한 분위기는 어린 그녀가 견디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이었고, 그녀 또한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전장의 공기에 그 마음을 먹혀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한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과 비교해 보아도 그다지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소년. 하지만 나중에 다른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벌써 몇 번이나 치열한 전투를 겪었다고 했다.
거기다 그러한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매번 미미한 상처만을 입은 채 살아 돌아왔으며, 지휘관이 그의 이름을 알 정도로 일반 병사치고는 많은 공훈을 세웠다고 했다.
처음 치료소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 그녀가 느낀 감정은 이질감이었다. 자신과 똑같아 보이는데도,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죽이고 죽는 이 상황에 아무런 회의감도 죄책감도, 그리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감조차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 후로도 전투가 이어질 때마다 몇 번이나 치료소에서 그의 모습을 보았고 그중 몇 번은 자신이 직접 치료를 하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를 그다지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인식할 여력이 못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다친 그를 치료하다 우연히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마치 텅 빈 듯한 눈동자, 생명을 다한 시체의 눈조차 그렇지는 않았다.
공포, 미련, 체념. 그들의 눈에는, 그들이 느꼈을 마지막 감정의 흔적은 남아 있다. 하지만 앞에 앉아 있는 그의 눈동자는 말 그대로 텅 빈 듯, 아무런 감정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무해 보이기만 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너무 두려워 고개를 숙였는데, 놀랍게도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신관복, 어떤 신을 모시는 분이신가요?”
나이에 맞지 않게 놀랍게도 정중한 말투였지만,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목소리에도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왠지 두려웠지만, 그녀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랑과 자비의 신, 에나리스 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나이가 어리시군요.”
“…….”
그는 애써 치료에 집중하려 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마치 혼자 중얼거리듯 물어 왔다.
“다친 자를 돕는 것이 자비이지만, 결국 당신들이 하는 일은 병사들을 다시 전장 속으로 내몰고, 더욱 많은 생명을 죽이도록 부추기는 일. 그대의 신은, 어째서 이 전쟁을 말려 주지 않는 거지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무미건조하지 않은, 쓸쓸함을 넘어서 옅은 분노마저 느껴지는 목소리. 그녀는 놀라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텅 비어 있던 그의 눈동자가 작은 빛을 띤 채 흔들리고 있었다.
“저쪽 진영에도 신을 모시는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도 모두 신의 이름을 외치며 검을 움직이지요. 그렇다면 이 전쟁은 신의 뜻입니까? 자신의 뜻을 위해서 당신처럼 어린 소녀를 전쟁터로 가라고 내모는 게 신의 뜻입니까?”
“그, 그건…….”
뭐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답할 말이 없었다. 그녀 또한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그 물음을 마지막으로 치료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에게 뭐라고 말하지 못했고, 치료가 끝나자 그는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자신의 위치로 걸어갔다.

“그때부터 그분을 좋아하게 되신 건가요?”
“글쎄, 그 이후로 더 신경이 쓰이고 눈길이 가기는 했지만, 아직 사랑이라고 할 순 없었을 거야.”
“그러면 언제……?”
그녀는 마치 보채는 아이를 달래듯 엘리얼을 쓰다듬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얼마 후에, 그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재판을 받을 일이 생겼단다.”

전투의 치열함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을 때였다. 전쟁의 승패는 결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하나둘 수도의 높은 이들의 입에서 휴전의 가능성이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할 때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벌써 한참 동안이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녀 또한 모처럼의 휴식을 취하며 밤하늘의 만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왠지 쓸쓸하게만 보이는 만월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에 한 줌의 불안을 심어 주고 있었다.
“뭐지, 이 떨림은…….”
떨리는 손을 맞잡고는 그녀는 조용히 신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조금은 안심이 된 듯 떨리던 두 손은 멈추었지만, 여전히 불안은 마치 얼룩처럼 그녀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어떤 모습이 보였다. 허무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 소년이 한 여인의 손에 이끌려 위안부 막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도 거리, 거기다 막사 쪽에는 횃불이 설치된 데 비해 그녀가 앉아 있는 곳에는 불빛 따위는 없었기에, 그들은 그녀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니, 설사 보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이나스는 숨을 죽인 채 그저 가만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도 그녀는 그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흑……!”
그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한참 동안이나, 또 한참 동안이나 처량한 달빛 아래에서 눈물 흘리던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이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조차 모른 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여전히 어둑어둑한 이른 아침, 간밤에 일어난 어떤 일 때문인지 군영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어떤 미친놈이 여자를 죽였다는군.”
누군가에게서 들려온 그 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젯밤의 풍경을 떠올렸다. 설마라는 생각도 이성 저 한편에서 떠올랐지만, 이미 그녀의 발걸음을 빨라져 있었다. 저 멀리, 병사들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홀린 듯 사람들을 힘겹게 뚫고 들어가자 어제의 그 소년이 두 기사에서 제압당한 채 지휘관 앞에 서 있었다.
“카지한, 보통 때라면 즉결처분이나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기에 묻는다. 자네가 여자를 죽였나?”
고압적인 지휘관의 물음에도 소년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지휘관을 한참 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지휘관은 자신을 마주하는 그 눈동자가 기분 나쁜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도나다.”
“뭐? 뭐라고 했나?”
“그녀의 이름은 도나다.”
순간, 정적이 주변을 감쌌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그러한 정적 속에서 소년의 입술이 다시금 천천히 달그락거리며 움직인다.
“그녀의 이름은 도나다. 신에게조차 외면당하고, 운명의 흐름 속에 방황하던 여인의 이름이다. 살 이유 따윈 찾지 못하고 스스로 죽을 용기조차 없었던 여인의 이름이다. 처음 만나 하룻밤을 지낸 이에게, 자신보다 더 어린 소년에게 자신의 짐을 떠넘기고 떠난 어리석고 불쌍한 여인의 이름이다.”
마치 혼이라도 나간 듯, 아니,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말을 내뱉는 그의 그 모습에, 지휘관은 자신도 모르게 상체가 조금 그에게서 물러서려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지휘관만이 아니었다. 그를 제압하고 있던 기사들도,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도 어느새 그에게서 한 발짝 더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주 짧았지만 이나스의 눈에는 보였다. 공허함이 감싸고 있었지만 그 속에 자리하고 있는 슬픔과 고통, 증오의 감정을……. 지금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의 내면이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의 눈으로, 그리고 그녀의 가슴으로 흘러 들어왔다.
“욱……. 우욱……!”
순간, 속에서 헛구역질이 나왔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의 심장을 휘젓고, 무겁게 가슴을 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서둘러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 도저히 더 이상은 그곳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은 그를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손발에서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초점조차 점점 흐려져 가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우욱, 우욱……!”
그녀는 결국 한구석에 엎드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무언가가 계속 가슴을 치며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커다랗고 시커먼 무엇인가가 가슴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
“이나스 님?”
이나스는 엘리얼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이야기를 멈춘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휘관의 물음에, 그분은 뭐라고 답하셨나요?”
“미안하구나, 엘리얼. 그래, 그분은 그녀의 이름을 말했지. 도나라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그녀의 이름을.”
“그분이, 죽인…… 건가요?”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는 엘리얼의 머리를 그녀는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그래,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원한 것이란다. 그분도 슬퍼하셨지…….”
“저, 저는 잘…….”
아직 그가 이해하기에는 무리였나 보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엘리얼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은 굳이 이해할 필요 없단다. 어쨌든, 나는 그 이후부터 신성력을 쓰지 못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얼마 후 전쟁은 끝났지. 자, 이제 그만하도록 하자. 네 숙소를 안내해 줄 테니 따라오거라.”
서둘러 이야기를 끝낸 이나스는 엘리얼을 데려다 주면서 조용히 생각했다. 어쩌면 그때의 자신은 그의 슬픔과 고통에 끌렸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사랑보다는 동정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이후 홀로 그녀의 무덤을 만들고, 아무도 몰래 그 무덤가에서 눈물짓던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자신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