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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술사 1권(7화)
Chapter 4 왕의 권능(1)
“…….”
“헉……헉헉.”
정적.
이욱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놈은 쓰러져 있었다. 엄청난 피를 흘린 채. 영락없이 죽은 사체의 모습이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이욱의 가쁜 숨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승리의 미소.
그리고 살아남음을 확인하는 미소였다.
“하. 살았다.”
이욱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온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어디 정상인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뇌도 진탕이었고, 내장 기관들은 모두 곤죽이 되어 있었다. 구역질이 계속 밀려오고 움직이기도 힘겹다.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 사실이 이욱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전투를 끝낸 이욱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젠장.”
이욱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어디 빠져나가는 통로가 없었다. 다시 완전히 막혀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이욱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여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가 아니었단 말인가.
모든 굴들이 이곳으로 연결됨을 알고, 이쪽이라 확신하고 한 달 동안의 노력 끝에 여기로 왔다. 그런데 여기가 아니라면?
이욱은 잠시 현기증이 오는 듯했다.
도대체 어디로 빠져나가야 되는가.
자신의 직감이 틀렸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이욱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공간에는 누구의 물건일지 모를 각종 병기와 책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몬스터가 아닌, 어떤 물건들이 쌓여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이 굴에서 본 물건들은 기껏해야 골렘의 암석과 몬스터들의 시체, 그리고 모래뿐이었다.
이욱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놈이 저것들을 지키려 한 건가?”
저놈이 머문 이유가 물건들을 지키기 위함일까. 그렇게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기에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공격해 오는 점부터. 무언가를 지키려는 행위로 보였다.
이욱은 천천히 물건들로 다가갔다.
얼마나 오래 있었던 물건들일까.
검과 창들은 모두 녹슬어 있었다. 하지만 뿌연 먼지를 잘 치워 보니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무언가 사정이 있는 물건들이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반짝.
그때 이욱의 시야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오색찬란의 빛깔을 머금고 있는 펜던트. 당연히 시선을 끌었다. 다른 물건들은 다 빛바랬는데, 오로지 펜던트만 빛을 내고 있다.
시선이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스윽.
“……?”
신비한 빛의 펜던트를 들어 올리는 순간. 이욱은 불현듯 뒷골이 서늘해졌다.
위험하다!
펜던트가 위험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등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직감이었다.
야수의 직감! 이욱은 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몸을 틀었을 땐 이미 늦었다.
푸우욱!
“커, 허억!”
이욱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뜨거움! 뜨겁다, 뜨겁다 못해 타들어 갈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허, 헉.”
놈이 죽지 않고, 비적비적 일어나 다리로 이욱의 몸을 꿰뚫었다. 이욱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복부가 관통된 이상.
살아남지 못하리라. 허무하다. 허탈하다. 그러나 이욱은 죽지 않았다. 몸이 관통되었다고 해서, 바로 즉사할 허접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노오옴!”
놈을 노려보면서.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이욱은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렸다.
죽인다! 죽인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너만큼은 죽이고 죽는다!
이욱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엄청난 살기가 이욱의 몸에서 뿜어졌다.
그때,
이욱의 손아귀에 있던 펜던트가 부르르 진동했다. 엄청난 살기에 반응하고 있었다. 살기에 즐거워하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죽……인……다!”
살기가 절정에 치달은 순간!
파아아앗!
이욱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펜던트가 강한 섬광을 뿜어냈다. 오색찬란한 빛과 함께. 세상이 순간 밝아졌다.
콰콰콰쾅!
거대한 압력이 굴 안에 가득했다.
왕의 권능 중,
제1의 권능.
지옥의 눈, 지옥안(地獄眼)이 열렸다.
“으아아아아아!”
이욱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 눈동자에서, 하얀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레이저가 쏘아지는 듯이, 섬광이 쏘아 올려졌다. 이욱은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쿠쿵! 쿵!
빛에 의해 모든 게 무너진다. 새하얀 섬광 속에 진득한 살기가 가득하다. 그리고 섬광이 세상을 뒤덮은 순간!
파팟!
“…….”
빛이 사라졌다. 세상을 밝게 비추던 섬광은 사라졌고, 이욱의 눈에서 쏘아지던 섬광도 사라졌다.
정적.
정적만이 맴돌았다. 동시에 그 누구도 버틸 수 없는 압력이 모든 것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엄청난 위압감!
숨이 턱턱 막히는.
그 누구도 버틸 수 없는. 그런 위압감이 이욱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강렬했던 야수가 아닌, 지도자의 절대적인 위엄과 위압감!
스으윽.
이욱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순간, 놈은 머리를 숙이고, 몸을 움츠렸다.
지옥안(地獄眼).
사막왕의 권능 중 그 첫 번째.
그 지옥안이 열렸다.
지옥안을 보는 모든 생명체들은 무조건 굴복한다. 지옥안의 주인에게 절대복종해야만 했다.
사막왕의 사라진 악마의 권능 중 하나가 지금 이 시각,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욱의 눈은 완전히 검었다. 칠흑의 어두움, 아니 어두운 게 아니라 그냥 검었다. 마치 먹물을 부은 듯.
그 검은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조종되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느낌이 아니라, 그것은 사실이었다.
절대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는 힘!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엄청난 위압감!
이욱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죽어라.”
쿵!
“키…… 키에엑.”
명령.
절대적인 명령. 무조건 따라야 하는 왕의 명령. 따라야만 했다.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했다. 명령에 반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찮은 몬스터인 놈에게도, 따라야 했다. 따라야만 하는 사막왕의 명령이었다.
“당장…… 죽어라.”
놈은 몸을 떨면서 굴복했다. 엄청난 위압감에 몸서리치며.
“키, 에에엑!”
푸욱!
자살.
놈은 지옥안에 굴복해 스스로 자살했다. 죽으라는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왕의 권능으로.
얼마나 지났을까. 무심한 표정으로 놈이 명령을 이행하는 장면을 본 이욱.
“아?”
문득, 이욱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동시에 주위를 억누르던 압박감도 모조리 사라졌다. 순간, 이욱의 표정이 사납게 구겨졌다.
“아, 아아악!”
마치 뇌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느낌!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뇌로 집중한다. 이욱은 순간 온몸에 힘이 풀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털썩.
이욱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파앗!
지옥안이 열린 순간.
사막의 어딘가, 그 지옥안을 느낀 이가 있었다.
“모래술사의 권능이다!”
풍채 좋은 수염을 기른 한 노인. 그 노인은 범접할 수 없는 힘을 내포하고 있는 두 눈빛으로 하늘을 쏘아보았다. 어디선가, 지옥의 눈이 열렸다.
“왕의 귀환.”
사막왕, 모래술사.
그의 힘이 깨어났다.
모래술사가 사용했던 그 권능이, 400년이 지난 이 시점. 다시 열렸다.
노인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멀지 않은 곳.
거기서 권능의 힘이 발휘되고 있었다.
이욱이 눈을 뜬 시각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흡.”
이욱은 찌뿌듯한 몸을 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이욱은 바로 앞에 놓인 놈의 시체를 보고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급히 자신의 아래를 내려 보았다.
“허?”
이욱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죽은 줄로만 알았던 놈이 다시 일어나 자신을 찌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히려 지금 자신은 멀쩡했고, 놈은 죽어 있었다.
“기분이 나쁘군.”
뭔지 모르겠으나 기분이 나빴다. 마치 기억의 일부분이 사라진 느낌. 뭔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
좋지 않았다. 아니, 정말로 싫었다.
이욱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몸도 멀쩡했다. 분명 내상도 심한데, 지금은 오히려 멀쩡했다.
흠칫!
자신의 몸 상태를 살피던 이욱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목에 어느 순간 펜던트가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이욱의 머릿속이 잠시 복잡해졌다.
이건 목에 걸지 않았었다.
그저 손에 쥐기만 했다. 그런데 어째서……. 불길한 느낌이 물씬 풍겨져 온다. 신비한 빛깔의 펜던트. 펜던트의 모양도 바뀌어 있었다.
그저 보석 모양의 펜던트가, 지금은 마치.
“용.”
용의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불길함을 느낀 이욱은 당장 펜던트를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벗겨지지 않는다?”
벗겨지지 않았다. 펜던트는 마치 이욱의 몸과 연결이라도 된 양, 벗겨지지 않았다. 이욱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몸에 붙어 버린 펜던트. 기분이 여간 좋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한숨을 내쉰 이욱은 일단 몸을 진정시켰다.
무슨 연유로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는지 알 수 없으나. 일단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복부에 놈의 다리가 관통됐을 땐 정말 죽는 줄 알았으니까.
찌릿.
그때, 이욱의 머릿속에 짜릿한 전류가 흘러 들어왔다. 그 전류는 이욱의 뇌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큭!”
이욱은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온몸이 순간 새롭게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전류는 다시 뇌로 돌아와 그 정점을 찍었다.
팟!
“하! 하아. 하아…….”
정점을 찍는 순간. 이욱은 가쁜 호흡을 몰아쉬었다. 전류가 혈관을 타고 몸을 순환할 때, 단 한 번의 호흡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욱의 머릿속엔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떠올랐다.
“……?!”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율과 함께 이 굴을 빠져나갈 방법이 떠오르다니? 마치 본래 알고 있었던 것마냥 머릿속에 속속 방법이 나열되고 있었다.
도무지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괴현상.
이욱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생각에 잠겼다. 펜던트를 손에 쥔 후부터, 설명되지 않는 괴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상, 외상 모조리 사라지질 않나, 쓰러지기 전 기억이 지워지질 않나, 그리고 알지도 못했던 빠져나갈 방법을 떠오르다니?
한참 고민하던 이욱은 이내 그 방법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퍼뜩 떠올린 이 방법이 맞는다면, 이 펜던트가 가지고 있는 어떤 ‘힘’이 있다는 사실.
이욱은 천천히 움직였다.
각종 병기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한동안 작업을 계속했다.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했는지 몰랐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욱의 손이 움직여질 뿐.
그리고 이내.
쿠쿠쿠쿵!
천장이 열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천장은 커다란 굉음을 내며 태양을 맞이했다.
태양!
한 달 넘게 어둠 속에 익숙해진 이욱에게 있어서 태양은 고통스러웠다. 뜨거운 자외선에 살이 익어 가는 듯한 고통. 그리고 눈조차 쉽게 떠지지 않았다.
환경이란 요소가 이래서 무서운 거다.
4년 동안 사막이란 환경에서 지내 와 놓고도, 고작 한 달. 한 달 동안 어둠 속에서 지냈다고 사막이란 환경이 낯설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욱은 곧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본래 적응력은 그 누구보다 뛰어났던 이욱. 금세 사막의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어렵지도 않았다.
태양 아래 드러난 이욱의 모습은 야인이었다.
이미 바지는 무릎까지밖에 남지 않았고, 윗도리는 거의 완전히 헤진 상태였다. 한 달 동안 살아남기 위한 전투로 단련된 매끄러운 근육들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등에는 배낭을 메고 있었다.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든, 아주 조잡한 배낭. 그 배낭 속에 몬스터들로부터 얻은 식량과 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욱은 배낭을 단단히 동여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 긴장의 끈을 놓쳐선 안 됐다.
사막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을도, 도시도 찾지를 못했다. 사막이란 악랄한 자연환경. 언제 어느 순간 생명에 위협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이욱은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생존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생존 게임은, 끝나지 않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