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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술사 1권(8화)
Chapter 4 왕의 권능(2)
얼마나 걸었는지를 모른다.
이미 이욱이 달을 본 횟수만 해도 손가락으로 다 셀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굴 안에서 저장했던 식량들도 다 떨어졌다.
콰직!
이욱은 바닥을 기어가는 전갈을 잡아 그대로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콰지직! 파직!
입안에서 전갈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껍데기를 부수고, 머리를 부수며, 독을 그대로 씹어 삼켰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아침에 먹은 음식들이 불쑥 솟아오를 정도의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욱을 신경 쓰지 않았다.
살기 위해 하지 못할 일이 무엇 있으랴!
전갈을 씹어 삼키니 자연히 수분도 보충됐다. 녹색의 체액을 함께 삼키게 되니까.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지 며칠. 이욱은 문득 느낄 수 있었다.
“중력이 약해.”
중력이 약하다는 점. 모래 폭풍에 휩쓸리기 전에 비해 몸이 지나치게 가벼워졌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굴 안에서, 몬스터들을 피해 빠른 속도로 도망친다거나 상당한 높이까지 점프한다던가.
정말 생각할수록 힘든 일이 아닌가?
물론 생존을 위한 투쟁의 결과로 신체가 단련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실했다. 중력은 확실히 약해졌다.
전의 중력이 10이라면, 여기는 7 정도.
이욱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여긴 중동이 아니다. 어디 미스터리 프로그램에나 나오는 그런 장소였다. 처음 보는 괴물들이 날뛰며, 사막 아래에 커다란 공간이 있고.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할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터벅터벅.
발이 푹 빠지는 모래 위를 걷기를 얼마.
이욱의 표정이 별안간 딱딱해졌다. 그리고 급히 몸을 낮추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언덕 위, 한 무리의 그림자들이 빠른 속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
사람인가?
인영들은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는데 모양이 사람과 유사했다. 굴속에서 몬스터들만 조우한 이욱으로서는 반가울 수밖에. 아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곧 이곳에 마을이 있다는 소리!
그럼 최소한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단 소리가 아닌가! 전갈을 먹지 않아도 됐고, 체액을 마시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이욱의 기쁨은 이내 사라졌다. 대신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점점 가까워져 오면서 이욱은 알 수 있었다.
약 2m가 넘어가는 큰 신장.
더불어 양옆으로 떡 벌어진 어깨.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우락부락한 근육.
그리고 멧돼지의 형상을 닮은 얼굴.
이욱의 몸이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몸이 말해 주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 전율했다.
흉악한 생김새의 몬스터들.
돼지 얼굴의 형상을 띤 이놈들은 사막인들이 입는 듯한 전통 복장까지 둘렀다. 피부색은 옅은 갈색에서 짙은 검은색까지 아주 진한 색의 몬스터였다.
바로 오크들이었다.
일반 오크와는 다른 종족이었다.
사막에만 서식하는, 오히려 ‘이종족’으로까지 분류하자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능적인.
사막오크들이었다.
물론 이욱은 몰랐다. 저들을 오크라 부르는지도, 몬스터라는 사실도.
그에게 있어선 생존에 방해되는 모든 놈들은 부숴야만 했다. 저 오크들도 자신의 생존에 방해될 놈들이라는 짐작쯤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싸우게 될 것!’
어차피 싸우게 되리라. 저 몬스터들은 자신을 발견하면 곧바로 공격해 오리라.
‘그러면. 먼저 친다.’
선즉제인(先則制人).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 그 말을 이욱은 믿고 따르기로 했다.
스윽!
이욱의 몸이 한껏 웅크려들었다. 그리고 숨을 죽였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철저하게 기척을 숨겼다.
“취익― 취이익.”
오크의 수는 일곱 마리. 다들 손에 번쩍번쩍 빛나는 글레이브와 도끼를 쥐고 있었다. 딱 봐도 섬뜩한 예기가 흘렀다. 이욱은 긴장이 폭발 직전에 놓였다.
오크들이 가까워질수록 이욱의 몸은 낮춰졌고, 눈은 매섭게 변했다.
‘선두!’
이욱은 선두에 있는 오크부터 제거할 생각이었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 순서로 처리할지, 또 어떤 부분을 공격할지. 어떻게 공격해야 효과적일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치밀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욱은 무조건 부수고 보는 저돌적인 야수가 아니었다. 치밀한 계산과 동시에 전투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지능적인 야수였다.
‘지금이다!’
이욱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쾅!
단단한 다리가 땅을 박찼다. 이욱은 용수철처럼 튕겨 나갔다.
푸악!
이욱의 손톱은 선두에 있던 오크의 가슴팍을 베어 냈다. 가슴 가죽이 갈라졌다. 허공에 붉고 선명한 피가 튀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바탕 전투가 벌여졌다.
“취이익!”
슈욱!
“헙!”
글레이브 세 개가 이욱을 노렸다. 맹렬한 파공음을 내며 쇄도해 들어오는 글레이브의 끝!
이욱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순간 허리를 숙여 글레이브를 피해 냈으나, 한 개는 어깨에 박혔다.
“크윽!”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욱은 참아 냈다. 그리고 양팔을 크게 휘둘렀다. 이욱이 노리는 건 오크의 다리!
푸아악! 푸악!
“취에엑!”
무릎 밑이 매끈하게 잘려 나갔다. 그만큼 이욱의 손에 묶인 손톱은 너무나 날카로워 모든 것들을 베어 낼 수 있었다.
쨍! 째앵!
일합, 두합, 세합.
이욱은 오크와 계속 부딪쳤다. 벌써 해치운 오크는 두 마리! 물론 완전히 죽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마리는 가슴을 거의 베어 내고, 다른 한 마리는 무릎 밑을 잘라 냈다.
전투 능력은 상실! 곧 죽음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남은 다섯 마리의 오크는 동료의 죽음에 분노했다. 엄청난 괴력으로 이욱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오크들은 지능적이었다. 이미 여러 번 손발을 맞춘 듯, 협동하며 반격해 오는 게 아닌가?
“큭!”
손목을 끊어질 듯한 고통이 찌르르 전해져 왔다. 이욱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기세 좋게 뛰어들던 이욱은 오크들의 치밀한 대응에 점점 밀렸다.
쾅!
주르륵!
순간 격돌로 인해 이욱은 뒤로 밀려났다. 힘이 빠진 이욱은 중심을 잃어 흔들렸고, 오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쨍!
파악!
“컥!”
오크가 글레이브의 막대기 부분으로 이욱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순간 머리에 전해지는 아찔한 충격에 이욱은 단발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귀가 맹맹하다.
하늘이 빙빙 돈다.
털썩!
이욱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늦은 밤.
시리도록 차가운 달이 하늘의 정기를 삼키는 밤. 푸른 달빛 아래. 풍채 좋은 노인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굉장했다.
주위에 있는 오크들을 모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할 정도였으니까.
당연 이스마엘은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사막의 수호부족 중 하나, 모래부족의 전대 원로장이었던 인물이다. 강력한 주술을 부리는 사막의 명실상부 최고의 술사.
그런 노인의 곁으로 다가서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스마엘 님. 도대체 오크부족에는 왜 온 겁니까?”
“…….”
이스마엘은 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아름다운 달과, 달빛에 비치는 모래를 안주삼아.
주위에는 사막오크들이 쫙 깔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주위에 오크들이 있다는 사실에 오줌이라도 질릴 법했지만, 이스마엘은 담담했다. 이스마엘이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사막오크 부족의 본거지였다.
몬스터들의 본거지.
그 안에서 여유자적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막오크는 몬스터라는 기준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특이한 종족이었긴 했지만. 어쨌든 인간을 식량으로 삼는 오크들.
그 사이에서 여유롭게 술을 마시다니.
남자는 질린 표정이었다. 뛰어난 주술사인 자신도 이 안에 있기 두려웠다. 언제 오크들의 밥이 될지 몰라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묵묵히 술만 마시는 이스마엘에게 다시 말했다.
“이스마엘 님. 도대체 왜 오크부족에 오신 것입니까? 어떤 연유입니까?”
“꿀꺽, 꿀꺽……. 캬아! 술맛 좋군.”
“…….”
남자는 침중한 시선으로 이스마엘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이스마엘은 말이 없어졌다. 어쩌면 점점 더 암울해지는 모래부족의 미래가 이렇게 변하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오크들이 빚은 술. 나쁘지 않군.”
“이제 대답해 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남자의 질문에 이스마엘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이 오크들이었다. 부족 경비도, 이스마엘 일행에 대한 감시도. 온통 오크들이었다. 그들을 둘러보며 이스마엘이 말했다.
“400년 전만 해도, 아니, 그래도 300년 전만 해도 사막의 수호부족은 다섯 곳이었지.”
“예? 사막의 수후부족은 네 곳이 아닙니까?”
그 말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알기로는, 사막의 수호부족은 네 곳이었다.
오아시스 부족.
모래부족.
전갈부족.
여우부족.
이 네 부족이 사막의 수호부족들이었다. 이스마엘은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지. 검과 활의 오아시스. 주술의 모래부족. 독과 암살의 전갈. 정보와 중립의 길을 걷는 여우. 그리고 300년 전만 해도, 전사들의 부족, 사막오크들도 수호부족으로 일컬었다네.”
“오크들을요?”
“그렇지.”
남자는 벙찐 표정이 되었다. 물론 사막오크가 대륙에 서식하는 오크하고 많이 다르긴 했다. 언어적인 면에서도 인간에 필적했고, 간혹 오크들 중에서 주술사가 제법 나올 정도로 지능적이기도 했다. 그들만의 제련기술이 내려오고 있어 대장장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을 잡아먹고, 인간들과 늘 적대적이라는 건 변함없다. 자신들이 모래부족의 사신으로 오지 않았으면, 당장 싸움이 벌어졌으리라.
그런 부족이 사막의 수호부족이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아니, 사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이스마엘의 말이다.
전대 원로장이자, 사막에서 가장 강력한 주술사!
그런 그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이스마엘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400년 전.”
“사막왕, 모래술사가 존재했을 때 아닙니까?”
“그렇지. 그때. 모래술사는 신의 자손, 그 자체였네. 스스로가 광폭한 지배자이길, 스스로가 모든 걸 씹어 삼키는 야수이길 바랐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모래술사라는 이름! 그 이름만 들어도 절로 존경심이 들 수밖에 없는 그 이름!
모래부족에서 배출한 천재, 광폭한 사막의 지배자!
처음으로 주술의 끝을 본 주술사! 자기 스스로가 모래였던 괴물. 그리고 대륙을 향해 포효하던 야수! 그가 지배했을 때의 사막이 최고의 전성기였다.
“잘 알고 있군. 그때, 오크부족에도 아주 희대의 천재가 있었지. 사막의 모든 오크들을 하나로 통합한, 오크 대족장.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고, 바실리스크보다 강했던 그는 모래술사의 절친한 친우였기도 했지. 어쨌든 대족장이 죽은 이후 오크부족은 쇠퇴해 왔네. 결국에는 다시 몬스터로 격하되는,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지.”
새삼 새롭게 안 역사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표정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문득 이스마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우리 모래부족도 오크부족의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예?”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막왕국 이스탄.
이스탄 왕국은 사막 4개의 수호부족이 지탱하고 있었다. 각 부족의 족장이 국왕 후보로서, 언제든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 아직 중앙집권이 된 국가는 아니었다.
모래술사가 모래부족의 족장으로서 사막의 지배자가 됐을 땐, 모래부족의 위세가 가장 강했다.
그러나 모래술사 사후.
후계자가 없던 모래부족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그때, 치고 나온 부족이 오아시스 부족이다. 모래술사 사후, 부족들의 권력 싸움에서 권력을 부여잡은 오아시스 부족은 400년이 지난 이 시점.
지금까지 권력을 이어 오고 있었다.
사막왕국 이스탄은.
오아시스 부족의 손에 쥐락펴락 당하고 있었다.
왕족들도 모두 그 근본이 오아시스 부족이다. 오아시스 부족장을 국왕으로서 등극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맘대로 휘두르는 게 명목상, 더 좋아 보였고 더 편했으니까.
권력을 가진 오아시스는 다른 모든 부족들을 억압했다. 특히 모래부족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심했다. 모래술사가 남긴 유언 때문에 그랬다.
‘나, 다시 돌아오는 날. 사막에 전설이 재림하리라.’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모래술사의 유언!
사막의 광폭한 지배자였던 모래술사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은 분명 큰일이었다. 그래서 오아시스 부족은 모래부족에 대한 압박을 무척 강하게 했다. 그때부터 모래부족은 흔들렸다. 무엇보다, 차기 모래술사가 아니라면 족장에 오르지 못한다는 법도 아래, 400년 동안 비워져 온 족장 자리는 치명적이었다.
국정에서 발언권도 약해졌다. 심지어 원로장이었던 이스마엘을 강제로 그 자리에서 해임까지 함으로 사실상 모래부족의 숨통도 오아시스의 손아귀에 쥐어지고야 말았다.
그렇기에 남자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스마엘이 왜 저리 슬픈 표정을 짓는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래부족은, 점점 쇠퇴해지고 있었다. 오크부족이 걸어갔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슬픈 표정을 짓는 남자. 그런 남자의 귓가에 이스마엘의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난 며칠 전 느꼈네.”
“무얼 말입니까?”
“왕의 권능…….”
“……?!”
이스마엘의 넋두리 같은 말에 남자는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왕의 권능!
사막왕 모래술사의 권능을 일컫는 것이리라.
곧 그 말은.
모래술사의 유언이…….
“400년이 지난 시점,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네.”
“…….”
남자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넋 나간 시선으로 이스마엘만을 바라보았다.
왕의 권능이 다시 나타났다.
이 한 가지 사실이 퍼진다면.
사막이 격동하리라.
사막이 두려움에 몸서리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