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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술사 1권(12화)
Chapter 6 배워라, 익혀라!(2)


이욱은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온몸이 피곤했다. 저번에 다친 상처. 그 상처만 봤을 땐 정말 죽는구나 싶었다. 자신이 아무리 살고자 원해도, 사람의 목숨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어쩌면, 살리안을 죽이고 난 후. 정신을 잃을 때, 이미 죽음을 예감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욱은 살아 있다. 비록 아직 운신하기에도 힘들긴 했지만, 분명 살았다.
“놀라워…….”
굉장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평생 남을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가고 있었다.
단지 한 번의 손길로 인해.
붕대를 감기 전에, 자신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르라 한 노인은 단 한 번의 손길로 이 많은 상처를 치유했다.
푸른 빛이 서려 있는 손길.
그걸 봤던 이욱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푸른 기운이 안개처럼 서려 있다니! 더 놀라운 건 그 기운이 닿은 부분은 무섭게 아물어 간다는 사실이다.
물론 심각한 상처야 어쩔 수 없지만. 저런 사실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은가? 감탄을 터뜨렸던 이욱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언어부터…….”
이욱을 답답하게 한 건 언어였다.
사람들의 곁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어 괜찮았지만, 이젠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답답할 지경이었다. 자신도 약간이나마 아랍어를 할 줄 알았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4년 동안 중동에 있었는데 기본적인 회화조차 못하겠는가? 그러나 여기 언어가 아랍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건 곧…….
“확실히 중동이 아니군.”
중동이 아니라는 얘기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여기 와서 확신할 수 있었다. 방언일까 생각도 해 봤지만, 전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언어였다.
“흠.”
이욱은 턱을 괴고 조용히 생각했다.
모래 폭풍에 휩쓸리고 난 후, 자신의 삶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젠 사람을 만나 잠시 안정을 찾았다지만. 투쟁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욱이 한국에서 느낀 교훈이었다.
삶에 대한 투쟁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12년을 수능만 보고 내달리고, 또 직장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그리고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고.
이 모든 과정이 살아남고자 하는 게 아닌가.
그건 여기서도 계속되리라.
그럼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배우고 익혀야 했다.
한국에서처럼, 죽을 때까지 배우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익혀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강해져야 한다.”
배우고, 익히고.
그리고 강해져야만 했다. 수많은 괴물들이 득실거린다. 인간 같은 괴물들도 있다. 알 수 없는 기운을 뿌리는 인간들도 있다.
여긴…….
21세기의 한국이 아니다.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처절한 현장이었다.
이욱은 냉철했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당장 미쳐 버릴지도 모른 이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굴속에서 처절했던 생존 게임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이미 이욱의 정신과 신체는 변하고 있으니까.

* * *

제법 큰 방 안. 탁자 하나를 앞에 두고, 이스마엘과 하자르가 마주 본 채 앉아 있었다.
“이스마엘 님, 이건 우리 모래부족의 미래가 걸린 안건입니다.”
“나도 잘 아네. 그래서 더욱 그러는 것일세.”
하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설득해도, 도저히 제 말을 듣지 않는다. 앞뒤 꽉 막힌 노인네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이스마엘은 죽어도 이욱을 모래술사 후계자로 인정하려 했다.
도대체 어디서 온 놈이란 말인가?
이름도 사막의 이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대륙의 형식을 따른 이름도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이방인이란 말인가.
하자르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도대체 듣도 보도 못한 이방인을 후계자로 인정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가 권능의 선택, 인정을 받았으니까.”
“그 증거는?”
“신기가 그의 목에 걸려 있지 않은가?”
“허!”
하자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지 않은가. 신기를 갖고 있다고 해서, 신기를 착용하고 있다고 해서 권능의 인정을 받았다는 소리는 대관절 어떤 생각으로 하는 말이란 말인가.
“권능을 사용한 모습을 직접 보기라도 했습니까?”
“…….”
“제가 보기엔 그자…… 흠흠. 이욱이란 사람은 권능을 사용하지도, 아니 권능이 펜던트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입니다.”
이스마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사실 자신도 보지 못했다. 이욱이 권능을 사용하는 장면을. 그저, 신기를 보고 그렇게 짐작했을 뿐이다. 그의 잠재적인 힘을 보고서.
그것만으로 권능의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후계자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어폐가 많았다. 더욱이 이방인에게 말이다.
허나…….
이스마엘은 정말 믿었다.
이욱이 후계자임을.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느낌이 그랬다. 엄청난 정신력. 그리고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야수를 느꼈기 때문일까? 물론 주술의 ‘주’ 자도 모르는 사람은 확실했다. 그러나 가르치면, 정말 독하게 가르치면 훌륭하게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이스마엘은 끝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욱은 후계자가 맞소.”
“이스마엘 님!”
쾅!
하자르는 끝내 고집을 부리는 이스마엘이 답답했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도대체 어찌할 수 없다.
아직도 자기가 원로장인 줄 알고 있는 걸까? 그러나 아니었다. 현재 모래부족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아무리 선배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하자르의 머릿속에 반짝 떠오르는 묘안!
하자르의 입꼬리가 살짝 말아 올라갔다.
“좋습니다. 허나, 저희는 이욱이란 사람이 권능의 인정을 받아, 후계자라는 사실을 아직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갑자기 자신의 의견을 한발 양보하다니. 하자르는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었다. 그래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하자르의 입이 열렸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합니다. 모래부족 주술사들 중에, 가장 강한…… 아, 물론 원로는 제외합니다. 어쨌든 가장 강한 주술사와 여러 대결을 펼치고 승리하는 자가, 그 신기를 얻고 권능의 인정을 받기로 말이죠.”

* * *

이욱의 방으로 이스마엘이 찾아왔다. 이스마엘의 표정은 약간 어두웠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하자르와의 대화 때문이리라.
“안녕하신가?”
끄덕.
이욱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인사했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심히 건방져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욱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으니까.
“후우. 어디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이스마엘은 난감했다. 말이 잘 통하는 것도 아니니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어렵고, 그렇다고 어찌 간략하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대결!
하자르의 제안은 대결이었다.
바로 모래부족 최고의 주술사와, 이스마엘이 그토록 후계자라 주장하는 이욱과의 대결. 그 대결을 통해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모래술사의 신기를 걸고서.
승자는 신기를 얻고, 권능의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차기 모래술사가 되리라.
허나, 패자는.
그대로 죽을 뿐이었다.
이욱은 모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태도 아직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
한참을 고민하는 이스마엘. 그런 이스마엘을 이욱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이스마엘은 보디랭귀지로 설명하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보디랭귀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수많은 오크들이 쓰러져 있고, 그 위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터번을 둘러쓰고, 손톱 끝에 핏방울이 맺혀 있는.
이욱이었다.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했다.
이욱은 약간의 생각을 하고,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 강해지지 않겠나?

그날 이후로, 이욱의 일상은 바뀌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다 치료되지도 않았건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해지기로 결심했다.
대결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펜던트가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줄은 몰랐다.
그저, 스스로가 강해지고 싶었다.
강하면.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으니까.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강해져야 하니까.
이욱은 강함을 갈망했다. 원했다.
언제부터였던가. 그가 이토록 강함을 갈망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오크들에게 잡혔을 때다.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완전한 참패였다.
그리고 굴욕을 당했다.
한낱 괴물들에게. 거기서 이욱은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죽음의 위기까지 겪지 않았던가. 최소, 자신이 약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치닫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이욱은 강함을 갈망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보통 남자들이란 원래 그러니까. 어쨌든 강해지기로 결심한 후, 이욱은 이스마엘에게서 여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스마엘을 만난 건 천운이었다. 이스마엘 덕택에 오크들에게서 빠져나오기까지 했다. 더욱이 이스마엘은 뛰어난 현자이자 주술사였다.
그에게 기본적인 언어를 배웠다.
덕택에 어느 정도 기본 의사소통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지게 되었다.
물론 아직 익숙한 게 아닌지라 그의 말은 몹시도 짧았다. 그것이 언뜻 딱딱한 분위기를 풍겨 줬다.
의사소통이 조금 가능해지자, 본격적으로 이욱에게 이스마엘은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다.
“주술…….”
이욱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주술!
앞으로 이욱이 배울, 초자연적인 힘을 부리는 주술이었다. 이욱의 머릿속이 붕 뜬 느낌이었다. 주술사라니! 뭔가 신기하지 않은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가? 새로운 힘! 그리고 거대한 힘!
그것을 배운다는 생각에 이욱은 심장이 밖으로 빠져나올 정도로 뛰었다.
언제나 인간은 새로운 것을 탐구해 오며 발전했다.
그건 이욱도 그랬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열망! 솔직히 정말 배우고 싶었다. 단순한 주먹질이 아닌, 발길질이 아닌 초자연적인 힘!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힘을 원했다.
이스마엘은 말했다.
“주겠다. 네가 원한다면. 주겠다.”
“…….”
“대신 노력해라. 아니, 노력을 뛰어넘어 고통스러워해라. 아파해라. 강함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