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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그 집은 겨울과 함께 찾아왔다. 1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적당한 그 거리에, 작년 겨울의 시작과 함께 집의 뼈대가 완성되고 외관이 입혀졌다. 그러다 보름 동안의 폭설로 무한정 공사가 미뤄졌고, 올해 겨울 다시 진행되고 있었다.
겨울치곤 유난히 따뜻한 날이 계속된 탓에 이번엔 아무래도 집이 완성되려나 보다. 황토벽과 삼각뿔 모양의 지붕, 조그만 정원이 이틀 간격으로 제 모양을 갖춰 갔다. 늦은 오후가 되면 떠들썩하던 공사 현장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고, 혼자 남은 집주인은 임시로 마련해 둔 텐트로 들어갔다.
초연은 텐트의 지퍼가 잠기는 것까지 몰래 지켜보다가 창문을 닫았다. 찬바람과 함께 바깥의 소음이 동시에 사라졌다. 전기 포트가 끓어오르다 삐리리리 소리를 냈다. 전원을 끄고 찻잔에 물을 부었다.
잔을 들고 돌아서서 싱크대 모서리에 허리를 기댔다. 뜨거운 찻물을 홀짝거리다가 다시 창문을 쳐다봤다.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시뻘건 텐트의 불빛이 일렁거리는 듯했다.
“대체 왜 온 거지, 이 동네에?”
한동안 유리창을 야속하게 쏘아보던 그녀의 시선이 잠시 후 거둬졌다. 불편한 기색을 잔뜩 드러낸 얼굴로 찻잔을 훌훌 돌리다가 차를 머금었다.
집주인이 될 남자가 누군지 모르지 않았다.
작년 겨울, 처음 공사 현장이 마련됐을 때부터 초연은 그가 집주인이 될 거라고 예감했다. 공사장에 드나드는 사람은 집주인이 아니면 인부일 텐데,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가 공사판에서 흙을 섞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때부터 시작된 애매한 불편함이, 이번 겨울에 집이 얼추 완성돼 가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변모해 갔다. 왜 하필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걸까. 친근하게 다가가 알은척을 하기엔 속이 부대낄 정도로 낯설고, 시종일관 냉랭하게 외면하자니 그것 또한 어색하다.
무엇보다, 늘 도망치고 싶은 기억의 한 부분에 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머릿속이 오랜만에 전쟁으로 들끓고 있던 와중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더구나 이런 외딴 산골 동네에선 흔치 않은 소리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초연은 경계의 날을 잔뜩 세우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손톱만 한 렌즈에 눈동자를 바짝 갖다 댄 순간, 우려했던 상황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두꺼운 패딩을 입은 이웃집 주인이 빈 페트병을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집에 없는 척을 하자니 환히 켜진 거실과 주방의 불빛이 떡하니 노려보는 듯했다. 초연은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안전 고리에 탁 걸려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문틈 새로, 얼굴 반쪽만 빠끔 내다보았다.
“나 모르겠어?”
양심에 찔릴 정도로 환하게 웃던 그가 초연의 아래위를 훑으며 입을 뗐다.
왜 모르겠어요, 그렇게 화려한 얼굴을. 모른 척하고 싶을 뿐이지.
“아까도 창문으로 다 보고 있던데, 나 알아본 거 아니었어?”
쉬이익, 사나운 소리를 내며 불어닥치는 바람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밀려들었다. 변함없이 올곧고 다정한 눈빛과 마주하니 그때처럼 묘한 반발감이 일었다.
“어쩌라구요?”
퉁명스럽게 나간 대답에 그가 다시 웃으며 빈 페트병을 스윽 내밀었다.
“물 좀 얻을 수 있을까? 라면을 끓여야 하는데 물이 떨어졌어.”
가장 싫어하는 계절에, 그가 다시 나타났다.
잊는 것에 성공한 줄 알았던 무거운 추억과 기억이 날카로운 창살처럼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1. 녹소리길, 풀잎 하나
“집이 아주 넓지? 너희들 며칠씩 묵어도 돼.”
아정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돌아봤다. 정한과 미연, 우민은 아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의 내부를 둘러봤다. 대학 선배 아정이 산골 마을에 집을 지었다는 얘길 다른 선후배들로부터 듣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여느 시골집일 거라 여겼다.
황토벽돌로 지어 올린 외관은 멀리서 봐도 세련미가 넘쳤으며, 아치형으로 낸 창문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내부 여기저기에 재료로 사용된 편백나무의 향이 은근히 기분 좋았으며, 거실 한가운데에 설치된 화목난로가 더없이 온화하다.
정한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시선으로 좇다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천장의 서까래를 올려다봤다. 아정의 성정처럼 고풍스럽고 여유로워 보였다.
“앉아. 차 마시자고 데리고 온 거니까 차를 줘야지?”
아정이 코트를 벗자마자 소매를 걷어 올리자, 미연이 우물쭈물 일어났다.
“제가 할게요, 선배님.”
“앉아 있으라니까.”
아정이 모교에서 강연회를 마친 후, 강연회를 함께 준비해 준 세 명의 학과 후배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참이었다. S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한 직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던 아정이 다시 동창들에게 모습을 보인 건 10년 전부터였다.
그녀의 처녀작인 소설 <찾아서 바꾸기>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 작품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대학 동문 측에서 그녀를 찾아 나선 것이다. 수소문 끝에 산골 마을에 칩거하면서 살고 있는 아정과 연락이 닿아 그때부터 그녀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말로만 전해 듣던 아정의 존재를 실제로 마주한 날을, 정한은 잊을 수 없었다. 학과 신입생들의 오리엔테이션 행사에 나타나 글을 쓴다는 것과 글을 느낀다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글을 느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힘차게 목소리를 높였던 그때를.
“이런 데서 글 쓰시면 하루에 스무 장도 더 쓰실 수 있겠어요.”
정한은 여전히 천장의 서까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렇게 생각해? 뭐, 너희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난 못 해. 딸내미 때문에.”
아정이 개의치 않고 딸을 언급하는 바람에, 세 사람이 일시에 서로 눈치를 봤다. 그녀가 동창들 사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아정이 딸과 함께 살고 있는데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는. 아정의 딸 나이를 계산해 봤을 때, 아정이 졸업 직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 시점에 낳았을 거라는.
그래서 아정이 이혼을 했거나 사별을 했을 거라는 소문이 몇 년 동안 무성했다고 한다. 그런 소문에 관계없이 아정은 작년에 또 한 번의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그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다졌다. 하지만 나이 불혹이 된 미모의 여류 작가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수상 사실 말고도 그 주변의 것들로 범위가 넓어졌고 더욱 깊어졌다.
결국 한 달 전에, 아정이 뉴스 프로그램에 나와 인터뷰를 하면서 무성했던 소문의 진상이 밝혀졌다. 대학 졸업 직후 아정은 미혼모로 혼자 딸을 낳은 뒤 이곳으로 도망치듯 떠나왔다는 것이다.
뉴스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치부를 밝힌 이후로 아정은 더욱 큰 소문에 시달렸다. 아이의 아빠가 대기업 회장이라는 둥, 나이 많은 남자 배우라는 둥, 엄청난 금액의 양육비를 지원받고 있다는 둥의 흉흉한 소문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선배님. 저희 정말 며칠 묵어도 돼요?”
대화의 흐름이 엉뚱한 곳으로 튈까, 눈치 빠른 미연이 서둘러 주제를 바꾸었다. 아정이 흘깃 뒤돌아보며 웃었다.
“그럼.”
네 개의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온 아정이 후배들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2층에 손님방이 두 개 있어. 하나는 미연이가 쓰고 나머지 방에서 정한이랑 우민이가 지내면 되겠다.”
“따님한테 민폐가 되지 않을까요?”
“걔도 오늘부터 방학이야. 지금쯤 올 때가 됐는데.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거든.”
정한은 슬쩍 현관문 쪽을 보다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떤 무늬도 없이 그저 희기만 한 찻잔과 연한 초록색 찻물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눈길을 끌었다. 혀끝에 머물던 씁쓸한 느낌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달짝지근한 맛으로 변했다.
“정한이는 내년에 제대라고 했지? 곧장 복학할 거야?”
프롤로그
그 집은 겨울과 함께 찾아왔다. 10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적당한 그 거리에, 작년 겨울의 시작과 함께 집의 뼈대가 완성되고 외관이 입혀졌다. 그러다 보름 동안의 폭설로 무한정 공사가 미뤄졌고, 올해 겨울 다시 진행되고 있었다.
겨울치곤 유난히 따뜻한 날이 계속된 탓에 이번엔 아무래도 집이 완성되려나 보다. 황토벽과 삼각뿔 모양의 지붕, 조그만 정원이 이틀 간격으로 제 모양을 갖춰 갔다. 늦은 오후가 되면 떠들썩하던 공사 현장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고, 혼자 남은 집주인은 임시로 마련해 둔 텐트로 들어갔다.
초연은 텐트의 지퍼가 잠기는 것까지 몰래 지켜보다가 창문을 닫았다. 찬바람과 함께 바깥의 소음이 동시에 사라졌다. 전기 포트가 끓어오르다 삐리리리 소리를 냈다. 전원을 끄고 찻잔에 물을 부었다.
잔을 들고 돌아서서 싱크대 모서리에 허리를 기댔다. 뜨거운 찻물을 홀짝거리다가 다시 창문을 쳐다봤다.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시뻘건 텐트의 불빛이 일렁거리는 듯했다.
“대체 왜 온 거지, 이 동네에?”
한동안 유리창을 야속하게 쏘아보던 그녀의 시선이 잠시 후 거둬졌다. 불편한 기색을 잔뜩 드러낸 얼굴로 찻잔을 훌훌 돌리다가 차를 머금었다.
집주인이 될 남자가 누군지 모르지 않았다.
작년 겨울, 처음 공사 현장이 마련됐을 때부터 초연은 그가 집주인이 될 거라고 예감했다. 공사장에 드나드는 사람은 집주인이 아니면 인부일 텐데,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가 공사판에서 흙을 섞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때부터 시작된 애매한 불편함이, 이번 겨울에 집이 얼추 완성돼 가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변모해 갔다. 왜 하필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걸까. 친근하게 다가가 알은척을 하기엔 속이 부대낄 정도로 낯설고, 시종일관 냉랭하게 외면하자니 그것 또한 어색하다.
무엇보다, 늘 도망치고 싶은 기억의 한 부분에 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머릿속이 오랜만에 전쟁으로 들끓고 있던 와중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더구나 이런 외딴 산골 동네에선 흔치 않은 소리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초연은 경계의 날을 잔뜩 세우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손톱만 한 렌즈에 눈동자를 바짝 갖다 댄 순간, 우려했던 상황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두꺼운 패딩을 입은 이웃집 주인이 빈 페트병을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집에 없는 척을 하자니 환히 켜진 거실과 주방의 불빛이 떡하니 노려보는 듯했다. 초연은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안전 고리에 탁 걸려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문틈 새로, 얼굴 반쪽만 빠끔 내다보았다.
“나 모르겠어?”
양심에 찔릴 정도로 환하게 웃던 그가 초연의 아래위를 훑으며 입을 뗐다.
왜 모르겠어요, 그렇게 화려한 얼굴을. 모른 척하고 싶을 뿐이지.
“아까도 창문으로 다 보고 있던데, 나 알아본 거 아니었어?”
쉬이익, 사나운 소리를 내며 불어닥치는 바람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밀려들었다. 변함없이 올곧고 다정한 눈빛과 마주하니 그때처럼 묘한 반발감이 일었다.
“어쩌라구요?”
퉁명스럽게 나간 대답에 그가 다시 웃으며 빈 페트병을 스윽 내밀었다.
“물 좀 얻을 수 있을까? 라면을 끓여야 하는데 물이 떨어졌어.”
가장 싫어하는 계절에, 그가 다시 나타났다.
잊는 것에 성공한 줄 알았던 무거운 추억과 기억이 날카로운 창살처럼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1. 녹소리길, 풀잎 하나
“집이 아주 넓지? 너희들 며칠씩 묵어도 돼.”
아정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돌아봤다. 정한과 미연, 우민은 아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의 내부를 둘러봤다. 대학 선배 아정이 산골 마을에 집을 지었다는 얘길 다른 선후배들로부터 듣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여느 시골집일 거라 여겼다.
황토벽돌로 지어 올린 외관은 멀리서 봐도 세련미가 넘쳤으며, 아치형으로 낸 창문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내부 여기저기에 재료로 사용된 편백나무의 향이 은근히 기분 좋았으며, 거실 한가운데에 설치된 화목난로가 더없이 온화하다.
정한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시선으로 좇다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천장의 서까래를 올려다봤다. 아정의 성정처럼 고풍스럽고 여유로워 보였다.
“앉아. 차 마시자고 데리고 온 거니까 차를 줘야지?”
아정이 코트를 벗자마자 소매를 걷어 올리자, 미연이 우물쭈물 일어났다.
“제가 할게요, 선배님.”
“앉아 있으라니까.”
아정이 모교에서 강연회를 마친 후, 강연회를 함께 준비해 준 세 명의 학과 후배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참이었다. S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한 직후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던 아정이 다시 동창들에게 모습을 보인 건 10년 전부터였다.
그녀의 처녀작인 소설 <찾아서 바꾸기>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 작품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대학 동문 측에서 그녀를 찾아 나선 것이다. 수소문 끝에 산골 마을에 칩거하면서 살고 있는 아정과 연락이 닿아 그때부터 그녀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말로만 전해 듣던 아정의 존재를 실제로 마주한 날을, 정한은 잊을 수 없었다. 학과 신입생들의 오리엔테이션 행사에 나타나 글을 쓴다는 것과 글을 느낀다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글을 느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힘차게 목소리를 높였던 그때를.
“이런 데서 글 쓰시면 하루에 스무 장도 더 쓰실 수 있겠어요.”
정한은 여전히 천장의 서까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렇게 생각해? 뭐, 너희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난 못 해. 딸내미 때문에.”
아정이 개의치 않고 딸을 언급하는 바람에, 세 사람이 일시에 서로 눈치를 봤다. 그녀가 동창들 사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아정이 딸과 함께 살고 있는데 남편은 보이지 않는다는. 아정의 딸 나이를 계산해 봤을 때, 아정이 졸업 직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 시점에 낳았을 거라는.
그래서 아정이 이혼을 했거나 사별을 했을 거라는 소문이 몇 년 동안 무성했다고 한다. 그런 소문에 관계없이 아정은 작년에 또 한 번의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그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다졌다. 하지만 나이 불혹이 된 미모의 여류 작가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수상 사실 말고도 그 주변의 것들로 범위가 넓어졌고 더욱 깊어졌다.
결국 한 달 전에, 아정이 뉴스 프로그램에 나와 인터뷰를 하면서 무성했던 소문의 진상이 밝혀졌다. 대학 졸업 직후 아정은 미혼모로 혼자 딸을 낳은 뒤 이곳으로 도망치듯 떠나왔다는 것이다.
뉴스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치부를 밝힌 이후로 아정은 더욱 큰 소문에 시달렸다. 아이의 아빠가 대기업 회장이라는 둥, 나이 많은 남자 배우라는 둥, 엄청난 금액의 양육비를 지원받고 있다는 둥의 흉흉한 소문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선배님. 저희 정말 며칠 묵어도 돼요?”
대화의 흐름이 엉뚱한 곳으로 튈까, 눈치 빠른 미연이 서둘러 주제를 바꾸었다. 아정이 흘깃 뒤돌아보며 웃었다.
“그럼.”
네 개의 찻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온 아정이 후배들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2층에 손님방이 두 개 있어. 하나는 미연이가 쓰고 나머지 방에서 정한이랑 우민이가 지내면 되겠다.”
“따님한테 민폐가 되지 않을까요?”
“걔도 오늘부터 방학이야. 지금쯤 올 때가 됐는데.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거든.”
정한은 슬쩍 현관문 쪽을 보다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어떤 무늬도 없이 그저 희기만 한 찻잔과 연한 초록색 찻물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눈길을 끌었다. 혀끝에 머물던 씁쓸한 느낌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달짝지근한 맛으로 변했다.
“정한이는 내년에 제대라고 했지? 곧장 복학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