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뜨겁다가 미지근하다가 점점 더 차가워지는 차를 음미하던 정한은, 아정의 기습적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군 복무 중에 정기 휴가를 받고 있던 참이라 정한의 대답과 태도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군복을 입고 있어 더 그랬다. 아정이 지켜본 정한은 신입생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후배였다. 올곧고 정이 많고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면 후회 없이 밀어붙이는 타입이었다. 동기들이 모두 입대를 미루고 있던 와중에도, 정한은 가장 먼저 입대를 지원했었다.
올바른 후배를 지켜보는 선배의 심정은 언제나 흐뭇했다. 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들도 이제 슬슬 진로를 정해야지.”
“전 벌써 정했어요, 선배님.”
“어떻게?”
“부모님이 식당 차려 주신대요. 저도 요리하는 게 재미있고. 배운 게 아깝긴 하지만 서울대 졸업장을 딴 것만으로도 부모님은 좋아하실 거예요.”
“전 미연이한테 들러붙어서 주방 보조라도 하려구요.”
본가 외가 통틀어 의사 집안인 미연에게, 우민이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부친이 중견 기업 오너로 만만찮은 금수저를 자랑하는데도, 신입생 시절부터 짝사랑해 온 미연을 향한 순정을 아직 접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글 쓰는 직업은 배곯긴 딱이지.”
후배들의 꿈이 기대에 어긋나자 조금 당황한 아정이 마지막 희망으로 정한을 슬쩍 쳐다본 순간,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앳된 얼굴의 여고생이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정한의 시선이 여자아이의 하얀 얼굴에 닿았다. 등을 몽땅 덮은 흑발의 긴 머리칼과 지나치게 대조되는 순백의 얼굴색이었다. 교복에 덧입은 파란색 코트 아래로 맨다리가 추워 보였다. 베이지색 어그부츠가 아니었다면 몇 발자국만 걸어도 금세 얼 것 같았다.
“왔어? 초연아, 인사해. 엄마 대학교 후배들이야. 강연회 때문에 고생들을 해서 엄마가 집으로 초대했어. 내 딸이야. 이름은 김초연.”
초연이라고 소개된 여자아이는 아정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손님들을 한 번 스윽 둘러본 후 그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그토록 싸늘하고 냉랭한 분위기가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미연과 우민은 얼마쯤 얼이 빠져 있었다. 아정이 후배들에게 민망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뉴스에서 인터뷰한 뒤로 저래. 충격을 좀 받았던 모양이야. 신경들 쓰지 마.”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정작 가장 신경 쓰는 건 아정 본인인 듯했다. 정한은 애써 태연한 척 차를 마시는 아정을 보며, 뉴스에서의 인터뷰가 딸과 상의하에 나온 결과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수많은 루머에 죄 없이 시달렸던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겠지만, 그게 사춘기 딸에게 미칠 파장 정도는 고려했어야 했을 텐데. 아정 본인에겐 당당하고 싶었던 일이, 딸에겐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어딜 가니?”
그때 초연의 방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초연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두꺼운 바지와 함께 푹신해 보이는 노란색 점퍼를 입었고, 머리를 한 갈래로 묶어 올린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하얀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냥.”
초연은 역시나 무심하게 모두를 지나치곤 어그부츠를 신고 집을 나갔다. 정한의 시선이 닫혀 버린 현관문에서 창문으로 옮겨졌다.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이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곧 어두워질 텐데.
“저녁 먹어야지? 장칼국수랑 파전을 좀 부쳐 볼까 하는데, 어때들?”
“좋죠. 저도 도울게요, 선배님! 요리하는 거 많이 보고 배워야 하거든요.”
“그래. 오늘 저녁엔 막걸리를 마셔 보자.”
아정과 미연, 우민이 뜻을 모았는지 동시에 우르르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 남은 정한은 모자를 쓰고 머플러를 두른 채 몸을 일으켰다. 밀가루 반죽에 달걀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설왕설래하고 있는 세 사람을 두고,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시간상으론 이미 사위가 어두워야 하는데, 아직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 때문인지 온통 환하다. 마치 한밤중의 달무리로 인해 주변이 환해지는 것처럼.
고개를 돌린 정한은 저만치 앞에서 멀어지고 있는 노란색 점퍼를 발견했다. 어둠과 밝음, 눈과 노을로 일순 주변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초연의 뒤를, 정한은 홀린 듯 밟기 시작했다.
초연이 걸으며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자신의 군홧발로 뒤덮었다. 두 배쯤 되는 발자국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이미 만들어진 발자국과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발자국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무렵, 초연이 걸음을 멈췄다.
「녹소리길」
정한은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팻말을 주시했다. 덧붙여진 해설에는 여름에 무성한 이곳의 녹음이 소리를 낸다는 뜻이란다. 지금은 온통 휜 눈으로 뒤덮여 길이 어딘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데, 여름이 만들어 내는 이곳의 풍경은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왜 따라오는 거죠? 기분 나쁘게?”
상상을 하지 못한 건, 또 있었다. 별안간 초연이 홱 돌아본 것이다. 자신이 뒤따라 붙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도 놀라웠지만, 저 말갛고 하얀 얼굴이 저토록 냉랭하게 굳을 수도 있다는 게 더욱 당혹스러웠다.
정한은 어떤 대답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까 초연이 아정에게 했던 대답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음…… 그냥.”
성의 없고 무례한 그의 대답에 초연은 더욱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 얼핏 눈에 띄는 가슴 언저리의 이름표. 일병. 윤정한.
방문자 세 명 중 유독 눈에 띄는 외관이긴 했다.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졌을 법한 어깨, 군복을 입은 걸로 봐선 분명 군인인데 이목구비와 피부가 그다지 무너지지 않은 걸 보면 저 외관은 분명 타고난 게 틀림없다. 누가 봐도 학교에 실습 나온 훈훈한 교생 스타일로 여고생들의 가슴앓이를 대폭 책임질 만한 비주얼이랄까.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의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초연은 팻말에 세워 둔 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팻말이 세워진 입구부터 쌓인 눈을 치워 가기 시작했다.
열여덟 여고생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힘과 요령에 정한의 표정이 사뭇 당황스럽게 변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요? 눈 치우잖아요.”
“눈을 왜 네가 치우냐고.”
“눈을 치워서 길을 내는 중이에요. 이쪽으로 지나가는 겨울 등산객들이 많은데, 잘 지나다니라고.”
힘든지 대답 중간에 거칠게 숨을 고른 초연이 잠시 허리를 폈다. 제 손으로 만든 길과 옆으로 치운 눈덩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동선이 컸던 탓에 묶은 머리칼 몇 올이 삐져나와 하얀 얼굴에 검은 선을 긋는다. 베이지색 어그부츠가 다 젖어 색이 변했다.
그런 초연을, 정한이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추위에 언 것 같은 입술이 파래 보였다. 다가가 머플러를 둘러 주려다 멈칫했다. 친절을 부리기에 마땅한 상황인지 아닌지에 대한 파악이 먼저 필요했다. 그것도 여고생을 상대로.
결론은 짧은 대답으로 친절을 대신하기로 했다.
“착하네.”
“할 일이 없어서 하는 거예요.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집에서 내내 엄마랑 마주쳐야 하니까.”
“하하하.”
초연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잔웃음이 고였다. 잘게 웃다가 곧이어 웃음소리를 내자 초연이 휙 고개를 외틀고 돌아봤다. 눈빛에 든 반발감이 선명하게 읽혔다.
“우스워요?”
“미안. 그래도 우는 것보단 낫지 않나?”
“놀리는 거네. 그러는 거네.”
엄마의 학교 후배라면 엄마와 자신의 사연을 모조리 알고 있을 터다. 하긴,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뉴스에서 대놓고 미혼모였다고 밝혔으니, 그가 모녀의 사연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바람 따위는 가지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도 충격에 며칠 동안 밥도 거른 채 좀비처럼 다녔으니까.
하지만 저 윤정한 일병에겐 어디까지나 남의 일일 뿐, 제발 나와 함께 울어 달라 사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 마음은 지금 지옥 속에 처박혀 있고, 앞으로도 얼마가 될지 모를 시간을 진창 속에서 보내야 하니, 당신도 나와 함께 울어 달라고 매달릴 수 없는 일이다.
“뭐 상관없어요. 마음껏 웃으세요. 어차피 앞으론 그쪽하고 볼 일도 없을 텐데.”
“글쎄. 자주 놀러 오게 될 것 같은데?”
뜨겁다가 미지근하다가 점점 더 차가워지는 차를 음미하던 정한은, 아정의 기습적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군 복무 중에 정기 휴가를 받고 있던 참이라 정한의 대답과 태도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군복을 입고 있어 더 그랬다. 아정이 지켜본 정한은 신입생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후배였다. 올곧고 정이 많고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면 후회 없이 밀어붙이는 타입이었다. 동기들이 모두 입대를 미루고 있던 와중에도, 정한은 가장 먼저 입대를 지원했었다.
올바른 후배를 지켜보는 선배의 심정은 언제나 흐뭇했다. 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들도 이제 슬슬 진로를 정해야지.”
“전 벌써 정했어요, 선배님.”
“어떻게?”
“부모님이 식당 차려 주신대요. 저도 요리하는 게 재미있고. 배운 게 아깝긴 하지만 서울대 졸업장을 딴 것만으로도 부모님은 좋아하실 거예요.”
“전 미연이한테 들러붙어서 주방 보조라도 하려구요.”
본가 외가 통틀어 의사 집안인 미연에게, 우민이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부친이 중견 기업 오너로 만만찮은 금수저를 자랑하는데도, 신입생 시절부터 짝사랑해 온 미연을 향한 순정을 아직 접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글 쓰는 직업은 배곯긴 딱이지.”
후배들의 꿈이 기대에 어긋나자 조금 당황한 아정이 마지막 희망으로 정한을 슬쩍 쳐다본 순간,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앳된 얼굴의 여고생이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정한의 시선이 여자아이의 하얀 얼굴에 닿았다. 등을 몽땅 덮은 흑발의 긴 머리칼과 지나치게 대조되는 순백의 얼굴색이었다. 교복에 덧입은 파란색 코트 아래로 맨다리가 추워 보였다. 베이지색 어그부츠가 아니었다면 몇 발자국만 걸어도 금세 얼 것 같았다.
“왔어? 초연아, 인사해. 엄마 대학교 후배들이야. 강연회 때문에 고생들을 해서 엄마가 집으로 초대했어. 내 딸이야. 이름은 김초연.”
초연이라고 소개된 여자아이는 아정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손님들을 한 번 스윽 둘러본 후 그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그토록 싸늘하고 냉랭한 분위기가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미연과 우민은 얼마쯤 얼이 빠져 있었다. 아정이 후배들에게 민망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뉴스에서 인터뷰한 뒤로 저래. 충격을 좀 받았던 모양이야. 신경들 쓰지 마.”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정작 가장 신경 쓰는 건 아정 본인인 듯했다. 정한은 애써 태연한 척 차를 마시는 아정을 보며, 뉴스에서의 인터뷰가 딸과 상의하에 나온 결과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수많은 루머에 죄 없이 시달렸던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겠지만, 그게 사춘기 딸에게 미칠 파장 정도는 고려했어야 했을 텐데. 아정 본인에겐 당당하고 싶었던 일이, 딸에겐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어딜 가니?”
그때 초연의 방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초연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두꺼운 바지와 함께 푹신해 보이는 노란색 점퍼를 입었고, 머리를 한 갈래로 묶어 올린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하얀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냥.”
초연은 역시나 무심하게 모두를 지나치곤 어그부츠를 신고 집을 나갔다. 정한의 시선이 닫혀 버린 현관문에서 창문으로 옮겨졌다.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이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곧 어두워질 텐데.
“저녁 먹어야지? 장칼국수랑 파전을 좀 부쳐 볼까 하는데, 어때들?”
“좋죠. 저도 도울게요, 선배님! 요리하는 거 많이 보고 배워야 하거든요.”
“그래. 오늘 저녁엔 막걸리를 마셔 보자.”
아정과 미연, 우민이 뜻을 모았는지 동시에 우르르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 남은 정한은 모자를 쓰고 머플러를 두른 채 몸을 일으켰다. 밀가루 반죽에 달걀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설왕설래하고 있는 세 사람을 두고,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시간상으론 이미 사위가 어두워야 하는데, 아직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 때문인지 온통 환하다. 마치 한밤중의 달무리로 인해 주변이 환해지는 것처럼.
고개를 돌린 정한은 저만치 앞에서 멀어지고 있는 노란색 점퍼를 발견했다. 어둠과 밝음, 눈과 노을로 일순 주변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초연의 뒤를, 정한은 홀린 듯 밟기 시작했다.
초연이 걸으며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자신의 군홧발로 뒤덮었다. 두 배쯤 되는 발자국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이미 만들어진 발자국과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발자국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무렵, 초연이 걸음을 멈췄다.
「녹소리길」
정한은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팻말을 주시했다. 덧붙여진 해설에는 여름에 무성한 이곳의 녹음이 소리를 낸다는 뜻이란다. 지금은 온통 휜 눈으로 뒤덮여 길이 어딘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데, 여름이 만들어 내는 이곳의 풍경은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왜 따라오는 거죠? 기분 나쁘게?”
상상을 하지 못한 건, 또 있었다. 별안간 초연이 홱 돌아본 것이다. 자신이 뒤따라 붙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도 놀라웠지만, 저 말갛고 하얀 얼굴이 저토록 냉랭하게 굳을 수도 있다는 게 더욱 당혹스러웠다.
정한은 어떤 대답을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까 초연이 아정에게 했던 대답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음…… 그냥.”
성의 없고 무례한 그의 대답에 초연은 더욱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 얼핏 눈에 띄는 가슴 언저리의 이름표. 일병. 윤정한.
방문자 세 명 중 유독 눈에 띄는 외관이긴 했다.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졌을 법한 어깨, 군복을 입은 걸로 봐선 분명 군인인데 이목구비와 피부가 그다지 무너지지 않은 걸 보면 저 외관은 분명 타고난 게 틀림없다. 누가 봐도 학교에 실습 나온 훈훈한 교생 스타일로 여고생들의 가슴앓이를 대폭 책임질 만한 비주얼이랄까.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의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초연은 팻말에 세워 둔 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팻말이 세워진 입구부터 쌓인 눈을 치워 가기 시작했다.
열여덟 여고생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힘과 요령에 정한의 표정이 사뭇 당황스럽게 변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요? 눈 치우잖아요.”
“눈을 왜 네가 치우냐고.”
“눈을 치워서 길을 내는 중이에요. 이쪽으로 지나가는 겨울 등산객들이 많은데, 잘 지나다니라고.”
힘든지 대답 중간에 거칠게 숨을 고른 초연이 잠시 허리를 폈다. 제 손으로 만든 길과 옆으로 치운 눈덩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동선이 컸던 탓에 묶은 머리칼 몇 올이 삐져나와 하얀 얼굴에 검은 선을 긋는다. 베이지색 어그부츠가 다 젖어 색이 변했다.
그런 초연을, 정한이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추위에 언 것 같은 입술이 파래 보였다. 다가가 머플러를 둘러 주려다 멈칫했다. 친절을 부리기에 마땅한 상황인지 아닌지에 대한 파악이 먼저 필요했다. 그것도 여고생을 상대로.
결론은 짧은 대답으로 친절을 대신하기로 했다.
“착하네.”
“할 일이 없어서 하는 거예요.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집에서 내내 엄마랑 마주쳐야 하니까.”
“하하하.”
초연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잔웃음이 고였다. 잘게 웃다가 곧이어 웃음소리를 내자 초연이 휙 고개를 외틀고 돌아봤다. 눈빛에 든 반발감이 선명하게 읽혔다.
“우스워요?”
“미안. 그래도 우는 것보단 낫지 않나?”
“놀리는 거네. 그러는 거네.”
엄마의 학교 후배라면 엄마와 자신의 사연을 모조리 알고 있을 터다. 하긴,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뉴스에서 대놓고 미혼모였다고 밝혔으니, 그가 모녀의 사연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바람 따위는 가지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도 충격에 며칠 동안 밥도 거른 채 좀비처럼 다녔으니까.
하지만 저 윤정한 일병에겐 어디까지나 남의 일일 뿐, 제발 나와 함께 울어 달라 사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 마음은 지금 지옥 속에 처박혀 있고, 앞으로도 얼마가 될지 모를 시간을 진창 속에서 보내야 하니, 당신도 나와 함께 울어 달라고 매달릴 수 없는 일이다.
“뭐 상관없어요. 마음껏 웃으세요. 어차피 앞으론 그쪽하고 볼 일도 없을 텐데.”
“글쎄. 자주 놀러 오게 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