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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마법이라면, 마법.
예측 불가한 운명의 시작.
모든 건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
천생이라 했다. 하늘이 지어 준 운명……은 개뿔.
“…….”
죽는데 무슨 운명이야? 서울 한복판에서 사람 찾는 것도 어려운데, 이름도, 출신지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라고?
사랑이 그렇게 쉽게 빠지는 거였나?
해라는 이제 밤이 무서웠다. 그 꿈을 꿀수록 자꾸만 홀리고,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빌어먹을 꿈이 해라의 인생에 파고들어 잔인하게 망치기 시작했다. 3개월 후 펼쳐질 죽음은 쾌락과 맞바꾼 거나 다름없었다. 천생을 만나 진정 사랑을 하게 되면, 막아질 액운.
“아우, 아직도 소름 돋네.”
며칠 후, 해라의 집. 무당의 말을 듣고 한창 날카로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천생이니, 운명이니 뭐니 하며 해라를 들었다 놨다 한 덕에 도저히 작품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당이 뭐래, 완전 용하지? 진짜 헉한다니까. 나도 건너건너 들었는데, 진짜 대단하대. 족집게래.”
안부 차 놀러 온 친구 연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해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직은 모르겠는데, 용하긴 하더라. 나한테 액운이 꼈단다.”
해라가 분함에 이를 으득 갈았다. 자신이 죽는다는 걸 연정에게 말해 줄 순 없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니까.
액운? 해라의 말에 연정이 놀란 듯 되물었다.
“액운? 대박! 대박! 자세히 말해 봐.”
“……재수 없는 강민준 그 새끼 액운이 나한테 꼈대.”
“강민준? 그 미친놈?”
“어.”
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필 껴도 전 남친 액운이 나한테 끼냐. 이건 진짜 미친 거지? 하늘의 심보가 고약했다. 해라가 두 눈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진정시켰다.
“……미칠 것 같아. 짜증 나. 그 자식 요즘 뭐 한대?”
어디 가서 처참하게 망한 소식이라도 들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몰라? 나도 연락 끊어서. 아, 맞다.”
이런 액운만 없었어도 바람피우고 떠난 전 남친 소식을 영영 듣지 않았겠지. 뒤이어 연정이 말했다. 고요한 방 안에 흘린 그녀의 말은 해라의 감정을 무너뜨렸다.
“결혼한다던데?”
빌어먹을 신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
민준과 헤어지고 난 후 해라의 삶은 철저히 망가졌다. 치덕치덕한 미련 때문이 아닌, 꿈 때문이었다.
해라는 꿈을 꾸지 않기 위해 새벽을 지새웠다. 글도 쓰고 딱 좋았다.
책상엔 빈 커피 용기들이 수두룩했고, 썼다 지웠다 한 글들의 흔적이 넘쳤다.
해라는 퀭한 눈으로 모니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나올 신작 준비에 한창이었다.
운 좋게 어릴 때부터 성공을 거뒀다.
3년 전 우연히 쓴 글로 인해 작가로 데뷔한 그녀는, 조금 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소설 집필에만 열을 올렸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새벽에 자지 않는 걸 기회라고 여기자. 더 올라갈 수 있는 기회.
“좋네, 뭐.”
적적한 새벽에 잠 안 오면 글 쓰고, 좋았다. 좋다고 생각해야 했다.
‘강민준, 걔. 결혼한다던데?’
“……짜증 나.”
무엇보다도 강민준보다는 더 좋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헤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이가 으득 갈리고,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결혼 상대도 그 계집애인가 보지? 나한테는 이딴 액운이나 줘 놓고. 해라가 화를 참지 못하고, 키보드를 쾅 내리쳤다.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생각이나 하자 싶어 두 눈을 감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려 했을 뿐인데, 결국 잠에 빠졌다.
“……으음.”
불편한 잠자리에 미간을 좁히고 몸을 뒤척였다. 그때, 훅 하고 낯선 향이 퍼졌다. 곧 검은 세상이었던 공간이 퍼진 향과 함께 사라졌다. 마치 꿈처럼. 그렇다, 또다시 꿈속에 빠진 거였다. 설마 또 꿈이야? 자각함과 동시에,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이러고 자고 있습니까? 멀쩡한 사람 유혹해 놓고.]
차분하고 낮은 음성이 훅 귓가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전과 달리, 해라는 꿈이란 사실을 일찍 자각했다. 보통 꿈이란 걸 자각했을 땐 바로 꿈에서 깼는데, 이번엔 달랐다. 남자는 그녀를 순간적인 힘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악, 해라가 비명을 질렀다.
이거 꿈이잖아. 근데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생생하냐고!
[자. 벌려요.]
그녀를 책상에 앉힌 남자는 끈적이는 목소리로 명령하며 해라의 목덜미를 훑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해라를 향해 그는 픽, 웃고는 거칠게 입술을 덮치기 시작했다.
……벌리라는 게 이 뜻이었어? 강렬하게 파고드는 남자의 혀는 생생했다. 남자는 능숙하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훑고 빨았다.
손길은 다정했다. 그러나 온기는 뜨거웠다.
[하아…….]
꿈이다, 이건 꿈이다. 그러나 본능은 현실이었다. 해라의 입 안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남자는 더 자극적으로 해라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보드라운 살결을 어루만지다 가슴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해라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미칠 듯한 자극이었다. 해라의 다리가 절로 벌어졌다. 남자가 말했다.
[불편한 거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책상은 딱딱했다. 그가 다정히 그녀에게 물었다.
[침대로 갈까요?]
다정함이 그녀를 완전히 젖어들게 만들었다. 침대로 가기엔 너무 멀었고, 지금의 온도는 너무 뜨거웠다. 해라는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얼른 꿈속에서 깨어나자.
[여기서…… 해요.]
그러나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귀엽긴.]
그는 알겠다는 듯 해라의 목을 감싸고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짙은 한숨과 함께 해라를 들어 올렸다. 이리저리 목을 돌리며 해라는 자연스레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침대로 간 두 사람은 서로의 끈적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해라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더 자세히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확실한 건, 어디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얼굴은 절대 아니란 거였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현실로 존재하긴 해? 점점 의문이 들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지금 나 말고 다른 생각 하지 마.]
또 나왔다. 흥분에 빠지면 반말하는 저 잘난 목소리. 그는 거칠게 해라의 옷을 벗겼다. 해라는 침대에 누워,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완벽한 남자였다.
그래서 꿈인 걸까. 꿈은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가 제 단단한 팔로 해라를 가두고 막 다시 입을 맞추려던 찰나였다. 지이잉, 어디에선가 진동이 울렸다. 꿈은 그렇게 멈췄다.
[……이봐요? 저기요?]
저돌적으로 다가오던 남자는 행동을 멈췄다. 그 순간 또다시 어둠이 닥쳤다.
“……허억!”
꿈에서 깼다. 해라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머리를 헝클이며 악!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잠에 들지 않으려고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거늘, 또 그 꿈을 꿔 버렸다.
“흐으…….”
꿈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해라가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난 진짜 욕구불만 미친년이야.”
그때, 꿈에서 울렸던 진동이 또 한 번 지이잉, 울렸다. 책상을 더듬거리며 진동 울린 핸드폰을 들자, 어느새 아침이었다.
“…….”
벌써 아침이구나, 아주 깊게도 잤네. 퀭한 눈으로 해라가 핸드폰 화면을 켰다.
「해라야.」
“……뭐야.”
그러자 아까 진동의 주인이 보낸 문자가 막 켜졌다. 다름 아닌, 강민준이었다.
「오늘 시간 있어? 미안해.」
그 문자를 보고 처음엔 멍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린 해라는 그대로 퍼질러 누웠다.
“아아악!!”
모든 게 역겨웠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꿈은 황홀했다.
늦은 점심, 씻고 나온 해라는 머리를 대충 마르고 목과 팔 부근에 향수를 칙칙 뿌렸다. 모처럼의 외출, 화장을 하며 해라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뭐 하자는 놈이지?”
조금 전 온 민준의 문자가 심하게도 거슬렸다.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뻔뻔하게 전 애인을 부르는 낯짝은 또 얼마나 두꺼울까. 민준은 해라의 도전정신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머리채라도 잡고 와야 속이 풀리지, 암.”
글도 안 풀리고, 전날 또 꿈 꾼 덕에 해라는 더더욱 예민해 있었다. 보자는 민준의 말에 일말의 미련은 없지만, 일단 봐야 했다. 그래야 너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다고 말이나 해 보지.
평소에 잘 안 입던 원피스까지 예쁘게 차려입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해라는 옆집에 요란스러운 소리에 퍽 미간을 좁혔다. 이사라도 오는 모양이다. 뭐 어차피 이 아파트는 각자의 생활을 매우 존중하니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구두를 끌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해라는 민준의 문자를 곱씹었다.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지? 설마 결혼식? 그런 거면, 바로 네일 받은 손톱으로 머리를 찢을 생각이었다.
해라가 으르렁거림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녀는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민준의 문자에도 처음엔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
자신의 집 근처 카페 앞에서 보자고 합의한 후, 해라는 곧 카페에 도착했다.
어떤 말을 할까. 내심 궁금했다. 막 카페에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빌어먹을.”
해라가 창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쓰레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창가 너머 카페의 안, 민준과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미친놈. 감정이 격해져 해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데도 모진 말을 쏟아 낼 수 없었다. 미련 따위 없지만 지난 300일, 그 이상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 괴로워서였다.
창가를 바라보던 그때였다. 민준이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민준이 비아냥거릴 것 같았다. 해라는 카페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다 툭,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순식간에 휘청거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잡았다. 겨우 균형을 잡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남자가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저…….”
해라가 사과를 하려던 참이었다. 민준이 해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행여나 민준이 저를 쳐다보며 비웃을까 싶어 해라는 가려던 남자의 어깨를 잡고 와락 안아 버렸다.
“뭐야.”
그 순간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민준이 해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보지 않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비웃는 것보다 눈이 마주쳐 당황할까 봐, 그게 더 짜증 나고 싫었다.
“뭐 하는 겁니까? 당신 누구…….”
“제발.”
“……뭐요?”
낮은 음성이 울렸다. 해라는 말했다.
“잠시만 이러고 있어 줘요. 잠시만.”
해라는 보란 듯 낯선 남자를 끌어안고, 제 남자인 마냥 자연스레 토닥였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는 해라에게 무어라 성을 내더니, 이내 포기한 듯 두 팔을 축 내렸다. 민준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남자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이라면, 마법.
예측 불가한 운명의 시작.
모든 건 꿈으로부터 시작된다.
***
천생이라 했다. 하늘이 지어 준 운명……은 개뿔.
“…….”
죽는데 무슨 운명이야? 서울 한복판에서 사람 찾는 것도 어려운데, 이름도, 출신지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라고?
사랑이 그렇게 쉽게 빠지는 거였나?
해라는 이제 밤이 무서웠다. 그 꿈을 꿀수록 자꾸만 홀리고,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빌어먹을 꿈이 해라의 인생에 파고들어 잔인하게 망치기 시작했다. 3개월 후 펼쳐질 죽음은 쾌락과 맞바꾼 거나 다름없었다. 천생을 만나 진정 사랑을 하게 되면, 막아질 액운.
“아우, 아직도 소름 돋네.”
며칠 후, 해라의 집. 무당의 말을 듣고 한창 날카로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천생이니, 운명이니 뭐니 하며 해라를 들었다 놨다 한 덕에 도저히 작품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당이 뭐래, 완전 용하지? 진짜 헉한다니까. 나도 건너건너 들었는데, 진짜 대단하대. 족집게래.”
안부 차 놀러 온 친구 연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해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직은 모르겠는데, 용하긴 하더라. 나한테 액운이 꼈단다.”
해라가 분함에 이를 으득 갈았다. 자신이 죽는다는 걸 연정에게 말해 줄 순 없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니까.
액운? 해라의 말에 연정이 놀란 듯 되물었다.
“액운? 대박! 대박! 자세히 말해 봐.”
“……재수 없는 강민준 그 새끼 액운이 나한테 꼈대.”
“강민준? 그 미친놈?”
“어.”
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필 껴도 전 남친 액운이 나한테 끼냐. 이건 진짜 미친 거지? 하늘의 심보가 고약했다. 해라가 두 눈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진정시켰다.
“……미칠 것 같아. 짜증 나. 그 자식 요즘 뭐 한대?”
어디 가서 처참하게 망한 소식이라도 들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몰라? 나도 연락 끊어서. 아, 맞다.”
이런 액운만 없었어도 바람피우고 떠난 전 남친 소식을 영영 듣지 않았겠지. 뒤이어 연정이 말했다. 고요한 방 안에 흘린 그녀의 말은 해라의 감정을 무너뜨렸다.
“결혼한다던데?”
빌어먹을 신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
민준과 헤어지고 난 후 해라의 삶은 철저히 망가졌다. 치덕치덕한 미련 때문이 아닌, 꿈 때문이었다.
해라는 꿈을 꾸지 않기 위해 새벽을 지새웠다. 글도 쓰고 딱 좋았다.
책상엔 빈 커피 용기들이 수두룩했고, 썼다 지웠다 한 글들의 흔적이 넘쳤다.
해라는 퀭한 눈으로 모니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나올 신작 준비에 한창이었다.
운 좋게 어릴 때부터 성공을 거뒀다.
3년 전 우연히 쓴 글로 인해 작가로 데뷔한 그녀는, 조금 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소설 집필에만 열을 올렸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새벽에 자지 않는 걸 기회라고 여기자. 더 올라갈 수 있는 기회.
“좋네, 뭐.”
적적한 새벽에 잠 안 오면 글 쓰고, 좋았다. 좋다고 생각해야 했다.
‘강민준, 걔. 결혼한다던데?’
“……짜증 나.”
무엇보다도 강민준보다는 더 좋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헤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이가 으득 갈리고,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결혼 상대도 그 계집애인가 보지? 나한테는 이딴 액운이나 줘 놓고. 해라가 화를 참지 못하고, 키보드를 쾅 내리쳤다.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생각이나 하자 싶어 두 눈을 감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려 했을 뿐인데, 결국 잠에 빠졌다.
“……으음.”
불편한 잠자리에 미간을 좁히고 몸을 뒤척였다. 그때, 훅 하고 낯선 향이 퍼졌다. 곧 검은 세상이었던 공간이 퍼진 향과 함께 사라졌다. 마치 꿈처럼. 그렇다, 또다시 꿈속에 빠진 거였다. 설마 또 꿈이야? 자각함과 동시에,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이러고 자고 있습니까? 멀쩡한 사람 유혹해 놓고.]
차분하고 낮은 음성이 훅 귓가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전과 달리, 해라는 꿈이란 사실을 일찍 자각했다. 보통 꿈이란 걸 자각했을 땐 바로 꿈에서 깼는데, 이번엔 달랐다. 남자는 그녀를 순간적인 힘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악, 해라가 비명을 질렀다.
이거 꿈이잖아. 근데 오늘은 또 왜 이렇게 생생하냐고!
[자. 벌려요.]
그녀를 책상에 앉힌 남자는 끈적이는 목소리로 명령하며 해라의 목덜미를 훑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해라를 향해 그는 픽, 웃고는 거칠게 입술을 덮치기 시작했다.
……벌리라는 게 이 뜻이었어? 강렬하게 파고드는 남자의 혀는 생생했다. 남자는 능숙하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훑고 빨았다.
손길은 다정했다. 그러나 온기는 뜨거웠다.
[하아…….]
꿈이다, 이건 꿈이다. 그러나 본능은 현실이었다. 해라의 입 안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남자는 더 자극적으로 해라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고 보드라운 살결을 어루만지다 가슴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해라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미칠 듯한 자극이었다. 해라의 다리가 절로 벌어졌다. 남자가 말했다.
[불편한 거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책상은 딱딱했다. 그가 다정히 그녀에게 물었다.
[침대로 갈까요?]
다정함이 그녀를 완전히 젖어들게 만들었다. 침대로 가기엔 너무 멀었고, 지금의 온도는 너무 뜨거웠다. 해라는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얼른 꿈속에서 깨어나자.
[여기서…… 해요.]
그러나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귀엽긴.]
그는 알겠다는 듯 해라의 목을 감싸고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짙은 한숨과 함께 해라를 들어 올렸다. 이리저리 목을 돌리며 해라는 자연스레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침대로 간 두 사람은 서로의 끈적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해라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더 자세히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확실한 건, 어디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얼굴은 절대 아니란 거였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현실로 존재하긴 해? 점점 의문이 들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지금 나 말고 다른 생각 하지 마.]
또 나왔다. 흥분에 빠지면 반말하는 저 잘난 목소리. 그는 거칠게 해라의 옷을 벗겼다. 해라는 침대에 누워,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완벽한 남자였다.
그래서 꿈인 걸까. 꿈은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가 제 단단한 팔로 해라를 가두고 막 다시 입을 맞추려던 찰나였다. 지이잉, 어디에선가 진동이 울렸다. 꿈은 그렇게 멈췄다.
[……이봐요? 저기요?]
저돌적으로 다가오던 남자는 행동을 멈췄다. 그 순간 또다시 어둠이 닥쳤다.
“……허억!”
꿈에서 깼다. 해라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머리를 헝클이며 악!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잠에 들지 않으려고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거늘, 또 그 꿈을 꿔 버렸다.
“흐으…….”
꿈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해라가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난 진짜 욕구불만 미친년이야.”
그때, 꿈에서 울렸던 진동이 또 한 번 지이잉, 울렸다. 책상을 더듬거리며 진동 울린 핸드폰을 들자, 어느새 아침이었다.
“…….”
벌써 아침이구나, 아주 깊게도 잤네. 퀭한 눈으로 해라가 핸드폰 화면을 켰다.
「해라야.」
“……뭐야.”
그러자 아까 진동의 주인이 보낸 문자가 막 켜졌다. 다름 아닌, 강민준이었다.
「오늘 시간 있어? 미안해.」
그 문자를 보고 처음엔 멍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린 해라는 그대로 퍼질러 누웠다.
“아아악!!”
모든 게 역겨웠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꿈은 황홀했다.
늦은 점심, 씻고 나온 해라는 머리를 대충 마르고 목과 팔 부근에 향수를 칙칙 뿌렸다. 모처럼의 외출, 화장을 하며 해라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뭐 하자는 놈이지?”
조금 전 온 민준의 문자가 심하게도 거슬렸다.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며, 뻔뻔하게 전 애인을 부르는 낯짝은 또 얼마나 두꺼울까. 민준은 해라의 도전정신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머리채라도 잡고 와야 속이 풀리지, 암.”
글도 안 풀리고, 전날 또 꿈 꾼 덕에 해라는 더더욱 예민해 있었다. 보자는 민준의 말에 일말의 미련은 없지만, 일단 봐야 했다. 그래야 너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다고 말이나 해 보지.
평소에 잘 안 입던 원피스까지 예쁘게 차려입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해라는 옆집에 요란스러운 소리에 퍽 미간을 좁혔다. 이사라도 오는 모양이다. 뭐 어차피 이 아파트는 각자의 생활을 매우 존중하니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구두를 끌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해라는 민준의 문자를 곱씹었다.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지? 설마 결혼식? 그런 거면, 바로 네일 받은 손톱으로 머리를 찢을 생각이었다.
해라가 으르렁거림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녀는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그래서 민준의 문자에도 처음엔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
자신의 집 근처 카페 앞에서 보자고 합의한 후, 해라는 곧 카페에 도착했다.
어떤 말을 할까. 내심 궁금했다. 막 카페에 들어서려던 찰나였다.
“빌어먹을.”
해라가 창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쓰레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창가 너머 카페의 안, 민준과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미친놈. 감정이 격해져 해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런데도 모진 말을 쏟아 낼 수 없었다. 미련 따위 없지만 지난 300일, 그 이상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 괴로워서였다.
창가를 바라보던 그때였다. 민준이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민준이 비아냥거릴 것 같았다. 해라는 카페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다 툭,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순식간에 휘청거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잡았다. 겨우 균형을 잡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남자가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저…….”
해라가 사과를 하려던 참이었다. 민준이 해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행여나 민준이 저를 쳐다보며 비웃을까 싶어 해라는 가려던 남자의 어깨를 잡고 와락 안아 버렸다.
“뭐야.”
그 순간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민준이 해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보지 않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비웃는 것보다 눈이 마주쳐 당황할까 봐, 그게 더 짜증 나고 싫었다.
“뭐 하는 겁니까? 당신 누구…….”
“제발.”
“……뭐요?”
낮은 음성이 울렸다. 해라는 말했다.
“잠시만 이러고 있어 줘요. 잠시만.”
해라는 보란 듯 낯선 남자를 끌어안고, 제 남자인 마냥 자연스레 토닥였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는 해라에게 무어라 성을 내더니, 이내 포기한 듯 두 팔을 축 내렸다. 민준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남자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